2024년 6월 18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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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찐리뷰] "한필화는 내 동생" 뜻밖의 진실게임…그리고 40년 만의 만남

강선애 기자 작성 2023.06.09 11:55 수정 2023.06.09 13:19 조회 7,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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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SBS연예뉴스 | 강선애 기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8일 방송된 '우리는 만나야 한다'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그룹 엔하이픈 멤버 정원, 배우 조성하, 유이가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한필화는 내 동생이다

때는 1971년 2월 일본 삿포로. 설국으로 불리는 이 도시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어. 프레올림픽(Pre-Olympic)이 열릴 예정이거든. 프레올림픽은, 올림픽을 개최하기 1년 전에 시설이나 운영을 테스트하기 위한 비공식 대회야. 이 대회에 참가한 선수 중에, 가장 어린 선수가 있어. 이름은 김영희, 나이는 14살, 중학교 2학년 이야. 출전 종목은, 스피드스케이팅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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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이 김영희 선수의 일거수일투족에 모두들 관심이 엄청나. 영희가 이모를 만날 수 있을지가 초미의 관심사야. 엄마의 여동생인 이모를 올림픽에서 만난다? 이게 어떤 상황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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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희의 이모도 스피드스케이팅 선수야. 이름은 한필화. 참가선수 중에 가장 나이가 많아. 근데 필화 씨는 엄청난 스포츠 스타야. 1964년 인스부르크 동계올림픽 은메달리스트야. 이 은메달에는 엄청난 의미가 있어. 스피드스케이팅 역사상, 아시아인이 탄 첫번째 메달이었거든. 그런데 영희는, 왜 일본에서 이모를 처음 만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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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필화 선수의 가슴에 달린 국기 보이지? 사실 한필화는, 북한 선수였어. 북한은 동계올림픽에서 지금까지 은메달 하나, 동메달 하나, 총 2개의 메달을 땄다고 해. 그 중 하나뿐인 은메달의 주인공이 바로 한필화 선수야. 북한에서는 이런 한필화 선수를 '인민체육영웅' 이라 불렀어. 김영희 선수는 그런 이모와 같은 종목에서 맞붙게 된 거야. 조카 대 이모, 최연소자 대 최연장자, 남한 대 북한. 그야말로 세기의 대결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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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운명적인 승부의 배경을 알기 위해서는, 김영희 선수의 어머니 이야기부터 해야겠지. 어머니의 이름은 한계화야. 계화와 필화. 이름이 비슷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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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화 씨의 고향은 함경남도 함흥이야. 함흥은 '빙활(氷滑)대회'로 유명해. 바로 스케이팅 대회야. 계화 씨도 함흥에 있을 때 스케이팅 선수였고, 함경남도 대표까지 할 정도로 잘 탔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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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터졌고, 그 해 12월에 18살이었던 계화 씨는 UN군 배를 타고 피란을 내려왔어. 그게 바로, 흥남철수야. 그 후 3.8선이 생기고, 그렇게 계화 씨는 가족들과 생이별을 했어.

시간이 지날수록 그리움이 커져만 갔어. 그러던 1964년 어느날, 계화 씨가 신문을 보다가 갑자기 두 손을 덜덜 떨었어. 북한의 한필화가 아시아 최초로 스피드스케이팅 메달리스트가 됐다는 기사를 본 거야. 계화 씨의 동생 이름도 필화였어. 그래서 '혹시, 내 동생 필화가 아닐까?' 생각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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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이 대회에 임원으로 참가한 지인이 "한필화 선수 스케이팅 타는 자세가, 너랑 똑같다"는 말까지 해줬어. 동생한테 스케이팅을 가르친 사람이 바로 계화 씨였거든. 이 말을 들은 계화 씨는 꼭 꿈을 꾸는 거 같더래. 그 후 계화 씨는 자기 딸도 스케이트 선수로 키웠어. 그게 바로 김영희 선수야. 계화 씨는 딸 영희와 동생 필화가 만날 수도 있다는 기대감에 부풀었어.

다시 일본 삿포로. 모두가 김영희와 한필화, 두 선수의 만남을 기대하고 있어. 심지어 숙소도 같은 곳, 같은 층이었고, 연습도 같은 빙상장에서 했어. 하지만 이렇게 가까이에 두고도, 두 사람은 못 만났어. 인사는 커녕, 눈길조차 나누지 못했어. 북한 관계자들이 항상 둘러싸고 있었거든. 반갑게 인사를 나눌 수도 없었어.

그런데, 얼마 후. 새로운 특종이 터져. 정말 아무도 예상치 못한 놀라운 소식이 새로 들어와. 이런 기사가 나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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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필화는 내 동생, 이번엔 새로운 오빠 나타나"

계화 씨 말고, 한필화가 자기 동생이라고 주장하는 남자가 나타난 거야. 이 남자의 이름은 한필성이야. 필성과 필화, 여기도 이름이 비슷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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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전파상을 하는 필성 씨의 고향은 평안남도 진남포야. 6남매 중 장남이었던 필성 씨한테도 절대 잊을 수 없는 날짜가 있어. 1950년 12월 5일 새벽, 그날 멀리 평양 쪽에서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렸어. 연합군이 중공군에 밀려 평양까지 내려온 거야. 필성 씨의 어머니는 미숫가루 한 포대를 쥐어 주면서 "필성아 도망가라, 넌 장남이니까 꼭 살아야 한다"고 도망 보냈어. 그렇게 필성 씨는 가족을 두고 남쪽으로 가는 피란선을 탔어. 한 사흘 정도만 지나면 다시 집으로 돌아올 줄 알았는데, 야속하게 20년의 세월이 훌쩍 넘었어.

그러던 1971년, 필성 씨도 한필화라는 이름 석자가 나온 신문 기사에서 본 거야. 막냇동생하고 이름이 같은 한필화라는 이름에 필성 씨도 '혹시 내 동생 필화인가?' 생각했어. 알고보니 필성 씨도 고향에서 스케이트 선수였어. 오빠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8살 막냇동생 필화가 생각난 거야. 그런데 필성 씨는 금방 절망하게 돼. 한필화의 언니라는 사람이 먼저 나타난 거야. 계화 씨와 자매라고 기사가 먼저 났고, 그 뉴스를 본 필성 씨는 자신이 착각했구나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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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얼마 후, 같이 피란을 내려온 고향 친구가 신문을 들고 찾아와 "이거 자네 동생 필화 맞지?"라고 물었어. 필성 씨는 신문에 나온 한필화 선수의 사진을 자세히 봐. 그런데 화질이 너무 안좋아서 긴가민가 해. 필성 씨는 바로 신문사로 달려가 한필화 선수의 다른 사진을 보게 해달라 부탁했고, 신문사는 일본에서 찍어 보낸 선명한 한필화 선수의 사진을 보여줬어. 그 순간, 필성 씨가 몸을 떨며 "제 동생이 틀림 없어요"라고 말했어. 한필화 선수가 고향에 두고 온 어머니와 꼭 닮은 모습이었던 거야.

▲ 누구의 동생인가

한필성가 한계화 씨, 둘 다 한필화가 자기 동생이라고 확신하고 있어. 이 소식이 전해지자 전국이 난리가 났어. 당시 이 사건에 사람들의 관심이 얼마나 많았냐면, 이런 일도 있었어.

"한필화 선수의 진짜 혈육이 필성 씨냐 계화 씨냐를 두고, 서울 종로3가 대성전자상가에 근무하는 이 모 씨와 황 모 씨가 서로 내기를 걸었는데, 이 씨는 필성 씨에게, 황 씨는 계화 씨에게 걸어 10만원 씩을 예금통장에 입금하고, 이기는 사람이 통장을 모두 차지하기로 합의했다."

70년대 당시 짜장면 한 그릇이 70원이야. 근로자 평균 월급이 4만 2천원이고. 그런데 10만원이면, 두 달치 월급이 넘는 금액을, 내기에 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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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쪽의 주장과 한필화 선수의 이야기를 종합해 진짜 혈육을 찾아야해. 먼저 '고향'을 보면, 계화 씨의 고향은 함흥, 필성 씨는 진남포야. 한필화 선수는 자신의 고향을 진남포라 말했지만, "6.25전쟁 때 아버지가, 평양이랑 진남포 쪽으로 피란을 가셨어요. 전쟁이 끝나고 눌러 사셨던 것 같아요"라고 덧붙였어. 고향만으로는 확실히 알 수가 없어.

두번째, 두 사람이 기억하는 한필화 선수의 나이를 보면, 계화 씨는 현재 동생의 나이가 27살이라 했어. 필성 씨는 31살이라 했고. 4살이나 차이나. 그럼 한필화 선수의 실제 나이는? 대회 참가서류에 27살이라고 적혀 있었어. 계화 씨의 주장이 맞지. 근데, 필성 씨의 생각은 달랐어. 한필화 선수는 1년 전에 참가 나이 제한이 있는 동계 유니버시아드 대회에 출전했었어. 그래서 대회 출전 자격을 얻으려고 일부러 나이를 줄였을 거라는 거야.

다음으로 이름 '돌림자'를 보면, 계화 씨는 '화' 자 돌림, 필성 씨는 '필' 자 돌림이야. 한필화 선수가 기억하는 집안의 돌림자는 '필' 자 돌림이라 했어. 그런데 마지막 '형제관계'를 보면, 계화 씨는 필화 선수가 6남매 중 다섯 째, 필성 씨는 6남매 중 막내라 주장했어. 그럼 한필화 선수의 답은? 4자매 중 막내였대. 모두를 혼란에 빠뜨린 대답이었어. 이 말대로라면, 둘 다 아닌 거잖아.

이 말을 전해 들은 필성 씨는 망설였어. 그 사이 계화 씨는 일본으로 떠났어. 직접 만나 확인하겠다는 거야. 전대미문의 동생 쟁탈전이 벌어진 거야. 일본 현지에서도 이 사건에 관심이 컸어. 이제 모두, 한필화의 입만 바라보고 있어. 마침내 한필화 선수가 나서 기자회견을 자청했어. 현장에는 한국, 일본 기자가 많이 모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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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그… 한필성 씨가 제 오빠 같은 생각이 듭니다. 기자 선생님들이 협력을 해서, 오빠를 좀 만날 수 있도록 해주시라요."
-한필화

알고보니, 한필화 선수는 여태까지 오빠가 전쟁 통에 죽은 줄 알았었대. 이 소식을 들은 필성 씨는 기쁘고 흥분됐겠지만, 반대로 계화 씨는 너무 아쉬웠겠지. 하지만 이내 곧,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대. 가족을 보고 싶은 마음을 누구보다 이해하니까. 계화 씨는 "부모 형제를 오랫동안 떨어져 그리워해보지 않은 사람은 이런 심정을 이해 못 할 것"이라며 울먹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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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나지 못한 남매

그날 밤 필성 씨는 이상한 꿈을 꿔. 전깃줄 두 가닥을 잡고 있는데, 갑자기 팡 터져서 손끝에서 불이 타오르는 꿈이었어. 이 꿈은, 길몽일까 흉몽일까.

일본 신문사가 주선해서, 필성 씨는 한필화 선수와 전화통화를 하게 됐어. 무려 헤어진 지 21년만이었어. 신문에서 작은 사진 하나 보는 거랑, 실제로 전화 통화를 한다는 건 차원이 달라. 필성 씨가 고향을 떠나던 그 때 동생 필화는 8살이었어. 동네를 누비며 비둘기를 쫓아다니고, 주인 몰래 사과를 따먹기도 하는, 소문난 개구쟁이였대. 오빠를 무척이나 따랐던 막내 필화와 21년 만의 통화. 어떤 이야기가 오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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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동안 오빠가 죽은 줄 알았는데, 오빠가 살았다니까 저는 말할 수 없이 기쁩니다. 오빠, 얼마나 고생 많았어요. 오빠 내가 사진을 보니까 오빠가 고생을 해서 많이 늙으셨더군요. 내 말 좀 들으라우. 죽은 줄 알았던 오빠가 살았다는 걸 알고 나서 나는 오빠가 올 줄 알았어요. 오빠, 어머니 아버지가 오빠를 꼭 보고 싶다고 나한테 얘기하라고 했어요."
-한필화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두 사람은 목소리만 듣고도 단번에 서로가 남매인 걸 바로 알았대. 21년 만에 불러보는, 21년 만에 들어보는 '오빠'라는 소리. 그 한 맺힌 절규는 모두를 울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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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남한)에 와서 '오빠'라는 말은 제가 들어볼 수가 없어요. 여기에 여동생이 없으니까. (통화할 때) 오빠라고 그럴 때마다 가슴이 덜컥하는 거예요. 그 때는 '정말 내 동생인가보다' 느껴지더라고요."
-한필성, 1999년 인터뷰 중

21년만의 전화 상봉은 고작 35분 만에 끝났어. 막상 통화를 하니, 더욱 보고 싶은 마음이 깊어져. 북한으로 가는 건 불가능해도, 일본은 갈 수 있잖아. 하지만 이땐 1971년이야. 불과 3년 전에 김신조와 북한 특수부대 31명이 청와대 습격을 위해 침투한 '1.21 무장공비 침투사건'이 일어났어. 그해 11월에도, 울진 삼척에 무장공비가 출현했어. "북한 괴뢰군은 물러가라"며 반공의 기운이 전국을 뒤덮었던 때야. 조심스럽고 냉랭한 남북관계, 이런 상황에서 필성 씨는 동생을 만나러 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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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일본 삿포로. 그래도 오빠는 동생을 만나러 일본으로 향했어. 각국 정부에서도, 남매의 상봉을 막지 않았어. 비행기에 오르기 전에 필성 씨는 "전날 밤 꿈이 길몽인 줄은 몰랐습니다"라고 말했대. 불꽃이 튀던 그 꿈을 길몽이라 생각했어. 곧 꿈에도 잊지 못하던 동생을 만날 수 있어. 그야말로 만감이 교차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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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피란을 가기 전 필성 씨의 모습이야. 당시 나이 겨우 16살. 필성 씨는 고향과 가족을 떠나서 홀로 피란선에 올랐어. 미숫가루 담긴 주머니 하나 들고 부산에 도착한 필성 씨는 피란민 수용소를 거쳐, 중앙부두 노동자로, 미군부대 잡역부, 국제시장 점원으로 일했어. 생계를 위해 힘겹게 살아온 필성 씨. 혼자 그렇게 살려니, 얼마나 힘들고 외로웠겠어. 그런데 이제 곧 동생을 만나게 돼. 얼마나 큰 기쁨이었을까.

필성 씨는 만날 장소와 시간을 북한 선수단에게 알렸어. 동생이 묵고 있는 호텔에서 불과 5분 거리야. 드디어 만나기로 한 1971년 3월 21일 오전 9시. 필성 씨는 10분 먼저 약속 장소에 도착해. 현장은 취재 열기로 뜨거워. 마침내 9시가 됐어. 고개를 돌려 출입구 쪽을 보는데, 동생이 안 나타나. 10분이 지나고 20분이 지나고, 1시간이 지났는데도 안 와. 바로 그 때, 문이 벌컥 열려. 동생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어.

"북한 선수단이 공항으로 떠났답니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렸어. 동생 필화 씨는 왜 약속 장소에 오지 않았을까? 사실 필화 씨는, 자기가 머물던 호텔에서 오빠를 기다렸어. 서로가 서로를 다른 장소에서 기다린 거야. 양 쪽이 "동생을 만나려면 오빠가 이쪽으로 와야지", "무슨 소리, 동생이 와야지"라며 서로 약속 장소를 통보만 한 거야. 북한 쪽에선 인민의 체육 영웅이 혹시라도 강제 망명을 당할까봐, 남한에서는 필성 씨가 납북이라도 될 까봐, 그런 걱정 속에서 남매의 의사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서로 각자가 정한 장소로 오라고 통보만 하고 기다린 거야. 이렇게 남북이 정치적 입장만 내세우다가 남매의 재회는 불발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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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으로 돌아온 필성 씨는 눈물을 펑펑 쏟았어. 슬픔과 분노가 터져나왔어. 비행기에 오르던 필화 씨도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어. 그래서 옆에 있던 수행원이 급하게 필화 씨를 비행기 안으로 밀어 넣었대. 21년의 세월을 넘어, 5분 거리까지 왔는데, 결국 그 분단의 벽을 넘지 못했어.

"서둘러서 갔는데, 북한에서는 만나게 해주지 않았어요. 만나지 못하니까 분하더라고요. 정말로 그랬어요. 그래서 사실 돌아올 때는 눈물도 흘리고 그랬어요."
-한필성, 1999년 인터뷰 중

▲ 희망과 절망의 반복

이 일은, 대한민국의 역사를 바꾸는 작은 불씨를 일으켜. 수많은 이산가족들한테 고향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일깨웠거든. 얼마 후에 한반도 전체를 뒤흔든 놀라운 일이 벌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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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은 제가, 지난 5월 초. 박 대통령 각하의 뜻을 받들어 평양에 갔다 왔습니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중앙정보부는 국가안전보장과 관련된 정보를 수집 및 수사 활동을 감독하는 특수 기관이야. 당시엔 너도나도 반공을 외칠 때인데, 간첩 잡으러 다니는 중정부장이 평양에 다녀왔다는 거야. 이후락 부장은 북한 김일성과 직접 만나 "남북이 함께, 평화 통일을 이루기 위해 노력합시다"라며 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이 평화통일에 합의했어. 바로, '7.4남북공동성명'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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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성 씨는 다시 동생을, 북의 가족들을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어. 한달 후, 필성 씨는 양복을 쫙 빼 입고 아침 일찍 거리로 나갔어. 이 거리엔 필성 씨만 나온 게 아니야. 너도나도 나와서 태극기를 막 흔들어. 제1차 남북적십자본회담이 평양에서 개최되거든. 그때만 해도, 휴전선을 넘어 북으로 간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야. 북으로 가는 차량들을 보며 필성 씨는 누구보다 간절한 마음으로 '부디 회담이 잘 성사되길, 가족들을 만날 수 있길' 희망했어. 대한민국 역사상 통일이 가장 가깝게 느껴졌던 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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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평화의 분위기는 오래 가지 못했어. 정확히 1년 만에 북한이 일방적으로 대화 종료를 선언해. 희망의 불씨가 다시 꺼졌어.

다시 10년이 흘러 1983년. 필성 씨의 나이도 어느새 오십이 넘었어. 그런데 어느날, 필성 씨가 TV 앞을 떠나지 못해. 눈에선 눈물이 흘러 내려. 1983년, 여의도. 특별 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가 방송된 거야. 6.25 전쟁 등으로 남한 내에서 헤어진 이산가족을 찾는 생방송 프로그램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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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세 시간만 방송할 계획이었는데, 전국의 이산가족들이 너도나도 방송국 앞으로 몰렸어. 결국엔 138일, 무려 453시간 45분동안 방송이 됐어. 전국에서 10만 건이 넘는 이산가족 사연이 접수됐어. 전국민이 TV만 틀면 울던 시절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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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가족이 만나는 걸 보고, 북에 가족을 두고 내려온 분들은 얼마나 더 마음이 아팠을까. 필성 씨도 마찬가지였어. 어느새 머리는 희끗해지고, 얼굴엔 주름이 생겼어. 헤어질 당시 어머니보다도 지금 필성 씨 나이가 더 들었어.

그러던 어느날, 필성 씨는 우연히 기사 하나를 보게 돼.

"지난 71년 삿포로 동계 프레올림픽 대회 때, 북한 스케이트 선수로 출전. 한국에 사는 오빠와 상봉을 하는 듯 했으나, 남북의 두터운 벽에 막혀 눈물을 삼키고 돌아서야 했던 한필화 씨가 오는 3월 9일부터 열리는 삿포로 동계아시안 게임에 북한측 임원으로 방일할 것으로 알려져 화제를 모으고 있다"

1990년 삿포로 동계아시안게임에 동생 필화가, 이번엔 임원으로 참가한다는 거야. 무조건 가야지 필성 씨도. 19년 만에 다시 기회가 온 거야. 필성 씨 눈이 다시 반짝여. 이번에는 동생을 만날 수 있을까.

▲ 드디어 만난 남매

1990년 3월 2일. 북한 선수단이 삿포로에 도착해. 필화 씨도 남편이랑 같이 왔어. 이번엔 오빠를 만나겠냐고 기자들이 물어. 필화 씨는 말했어. "혈육의 정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이번에야말로 꼭 오빠를 만날 것입니다"라고.

국내외 언론도 남매의 만남에 주목해. 한 방송사의 주선으로, 두 사람의 전화통화가 다시 성사됐어. 19년만에 이뤄진 두번째 통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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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한필화입니다"
"나 석선(아명)이야"
"진짜 오빠 맞아요? 아버지는 세상 떠났지만 어머니가 정정히 계십니다. 어머니가 오빠를 꼭 만나고 오라고 했어요. 어머니가 세상 떠날 때 오빠 다시 못 오죠? 어머니께 선물을 드리고 싶으면, 어머니 죽은 다음에 입을 수의 있잖아요. 그걸 준비해 주세요. 어머니가 오빠의 수의를 입고 관에라도 들어가게끔…"
"그런 소리 하지마. 나 지금 보고 싶어 죽겠는데."
"이번에는 누구의 간섭 없이 우리끼리 만나죠."
"그러자. 우리 꼭 만나자."

필성 씨는 매일 밤잠을 설쳐. 전화통화를 하고 나서도 만남이 불발된 경험이 있으니. 불안한 마음이 가시질 않는 거지. 게다가 그 때쯤 비무장지대 지하 145m 아래서 북한의 남침용 땅굴이 발견됐어. 남북관계가 경직될수록 만나는 건 어려워져. 사소한 일로도 남북 창구가 닫히는데, 이번에도 상봉이 무산될까봐 필성 씨 마음은 불안하고 초조해. 필성 씨는 동생을 만나게 해달라고 상봉 허가를 정부에 요청했어. 다행히 허가가 났어. 북한 쪽도 허가가 났어. 심지어 이번엔 남북 모두 "정치적 개입을 하지 않겠다"고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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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필화 한필성 남매의 상봉은, 혈육이 만나는 것에 대해서 당국의 개입 없이 당사자 의지로 자유롭게 만나게 해주자. 오히려 이 사건이 상징적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죠."
-정의길 기자, 1990년 당시 취재

그래도 필성 씨는 불안해. 19년 전, 눈 앞에 두고도 돌아서야 했잖아. 필성 씨는 아내와 함께 마음을 졸이며 일본행 비행기에 올랐어. 3월 8일 저녁 8시 삿포로에 도착했어. 시간이 늦어 일단 호텔로 가려 하는데, 갑자기 뜻밖의 소식이 들려. 필화가 오빠를 만나려고 공항에 도착했다는 거야. 그때부터 가슴이 쿵쾅대. 필성 씨는 떨리는 마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입국장을 나섰어. 입국장을 나서자, 카메라 플래시가 막 터졌어. 남매의 상봉을 취재하러 대규모 인파가 몰렸어. 당황한 필성 씨가 어쩔 줄 몰라하던 그 때, 신기하게도 "오빠! 오빠!"하는 목소리 하나만 아주 또렷이 들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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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왜 이제 왔어요."

"아버지와 어머니는 오빠를 못 보고는 눈을 못 감는다고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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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만의 만남에 남매는 단 한순 간도 서로에게 눈을 떼지 못했어. 분단의 장벽에 가로막혔던 지난날. 자그마한 희망에 울고 웃던 세월 속 애써 참을 수 밖에 없었던 그리움. 남매는 다시 만났고, 그동안의 회한을 쏟아내듯 한참을 서로 끌어 안았어. 남매는 똑같이 나이를 먹었어. 그래도 이 순간만큼은 16살 오빠와 8살 동생으로 돌아간 거 같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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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성 씨는 동생과 일주일을 함께 보내. 낮이면 경기장을 찾아 동생을 응원하고, 밤에는 숙소에서 밀린 이야기 꽃을 피웠어. 1분 1초가 아쉬웠을 오누이. 그리고 가족들에게 보낼 선물도 전했어. 금반지, 손목시계, 화장품, 보약 등 한아름 준비했어. 그리고 어머니를 위해 필성 씨가 특별히 준비한 게 있어. 바로 어머니의 수의였어.

전화통화 할 땐 동생의 수의 얘기에 화를 냈지만, 주위 사람들이 '수의를 준비하면 장수하신다'고 말했어. 필성 씨는 어머니가 오래 건강하길 바라면서 수의를 준비한 거야. 그리고 동생도 오빠를 위해 깜짝 선물을 준비했어. 북쪽의 어머니와 통화를 주선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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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어머니! 엄마! 내가 평양에 갈 테니까 몸 건강히 계세요."
"나는 잘 먹고 하나 굽은 거 없이 산다. 그저 난 너 하나 걸려서 그렇지. 허물고 통일이 되어서 그거 하나 지금 바라고 있는데. 꼭 돌아와야 한다. 난 그저 여기서 아무 걱정 없다. 내 걱정 하나도 하지 마라."

미숫가루 손에 쥐어 주며 떠나 보낸 어머니. 40년만에 처음 듣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눈물이 터져 나왔어. 짧은 전화 통화였지만, 모자는 꼭 다시 만나기를 약속했어.

떨어진 세월에 비해 일주일은 너무 짧아. 시간이 어찌나 빨리 가는지, 이별할 시간은 점점 다가와. 헤어지기 전날, 한필성-한필화 남매는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눴고,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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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치토세 공항. 이별 전 남매는 마지막으로 사진을 촬영했어. 남매는 애써 덤덤한 척 손을 흔들었고, 언제 만날 수 있을지 기약 없이, 이별했어. 필성 씨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어.

▲ 짧은 만남, 그 이후…

동생을 만난 후, 필성 씨는 가슴 속에 더 큰 구멍이 뚫린 거 같았대. 통일이 된다면 어머니 얼굴을 볼 수 있을텐데, 그런 마음으로 시간을 보냈어.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필성 씨는 어머니의 얼굴을 보게 됐어. TV를 통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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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보고파서 꿈에서도 다 봤지. (아들이) 좀 올 수는 없나요? 내가 가지는 못해요. 아들이 와야지 난 갈 수가 없다고요."
-최원화, 남매의 어머니

남북통일축구대회가 평양에서 열렸는데, 취재팀이 동생 필화네 집을 찾아간 거야. 영상으로나마 어머니의 모습을 본 필성 씨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꼭 만나야 한다'는 목표가 생겼어. 이후 백방으로 노력한 필성 씨. 하지만 분단의 장벽은 높았어. 혼자만의 힘으로는 넘을 수가 없었어.

어느덧 시간이 흘러, 1998년 4월 20일. 그렇게 보고싶던 어머니가 필성 씨 앞에 나타났어. 하얀 소복을 입은 어머니는 돌아선 채로 말이 없어. 아무리 어머니를 불러도 대답이 없어. 눈을 떠보니, 꿈이야. 꿈이 아무래도 이상해서, 이 날짜를 기억해 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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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서 이상하게 어머니가 하얀 옷을 입고 말도 안하고 돌아서서 있는 거 볼 때. 이거 이상하다, 우리 어머니가 이상하다 했더니. 내가 꿈꾸던 바로 전날에 돌아가셨어요 어머니가. 그래서 나는 어머니가 이렇게 돌아가셨는데, 얼마나 남쪽에 있는 아들을 보고 싶어 하셨겠나. 그래서 나는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속으로만 끙끙 앓고…"
-한필성, 1999년 인터뷰 중

끝내 만나지 못한 어머니. 어머니는 돌아가신 다음 날, 아들의 꿈 속에 찾아 오셨어. 정말 아들이 보고 싶어서, 떠나는 길에 잠깐 들리신 게 아닐까. 그렇게 필성 씨는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어.

필성 씨는 평생 고향을 그리워하다가, 2013년 80세의 일기로 돌아가셨어. 그리고 한필화 씨는 아직 평양에 살고 있다고 해. 몇 년 전 필화 씨를 인터뷰했던 영상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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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으로 분단됐지만 혈육은 혈육이고, 혈육은 떨어져 살 수 없기 때문에. 꼭 통일돼서 같이 살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때 남긴 인상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때 심정을 그대로 말하면 통일이 돼서 같이 오빠와 만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젠 통일이 돼도 오빠를 못 만나고 조카들 밖에 없겠구나…"
-2015년 일본 언론사 인터뷰에 응한 필화 씨.

그 후로도 남북 사이에는 많은 일이 있었어. 군사적 충돌로 가슴을 쓸어 내리다가도, 훈풍이 불 땐 희망에 부풀기도 했어. 이 비극의 줄다리기에 가장 마음 졸이는 사람들은 우리 곁의 이산가족이야. 이산가족 문제는, 정치와 이념의 문제가 아니잖아. 서로 체제가 달라도, 가족에 대한 그리움은 같지 않을까.

이제 이산가족 1세대는 3만 명도 채 남지 않았다고 해. 게다가 남아 계신 분들은 80~90대 고령이야. 이산가족 상봉의 시계는 2018년 8월 이후로 멈춰버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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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18살에 나와서 지금 91세야. 요새는 그런 생각이 많이 들어. 생전에는 못 가겠구나… 어머니는 이제 제 마음에는 100세가 넘으셨겠지만, 아직 살아계실 거로 생각해요. 그게 부모 자식간의 정 같아요. 백살이 넘었는데 어떻게 살아있겠어요. 그래도, 내가 이북에 가기만 하면, 어머니가 손잡아 주겠구나 하는 생각이 뭉클뭉클 떠오르지."

-김병삼, 이산가족 1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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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반세기가 지나지 않았어요? 자꾸 희미해지죠. 거리가 멀어져… 내가 초등학교 4학년까지 다니던 그 고향길. 학교 가는 길을 한 번만 걷고 싶어요."

-김진섭, 이산가족 1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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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강선애 기자 sakang@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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