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연예뉴스 | 강선애 기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25일 방송된 '낙동강변 살인사건-분홍보따리의 기적'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배우 김정태, 가수 이채연, 모델 이현이가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사라진 남편, 흉악범으로 뉴스에
때는 1991년 11월 8일 저녁, 부산 명지동의 한 가정집. 33세의 장동익 씨는 퇴근 후 집에 돌아왔어. 아빠를 보고 환하게 웃는 갓 돌이 지난 딸의 얼굴을 보니, 피곤이 녹는 듯 해. 아내가 정성껏 만든 저녁식사를 하려던 찰나, 갑자기 누군가 밖에서 현관문을 쾅쾅 두드리며 "장동익 씨 계십니까"라고 찾았어. 동익 씨는 누가 왔나 확인하러 밖으로 나갔어.
그런데, 금방 올 것 같던 남편이 시간이 한참 지나도 돌아오지 않아. 아내는 현관문을 열어 봤어. 근데 남편도, 남편을 찾아온 남자도, 아무도 없고 캄캄한 암흑 뿐이야. 휴대폰이 없던 시절. 남편한테 연락할 방법이 없어.
동익 씨 아내는 자는 아이를 업은 채 밤새 발만 동동 구르다가, 다음날 아침에 근처 사는 남편 친구네 집을 찾아 갔어. 그런데 남편 친구의 아내가 "동익 씨도? 우리 남편도 어제 집에 안 들어왔는데"라고 말했어. 어젯밤 늦게 수상한 남자들이 찾아왔는데, 수갑을 보여주더니 남편을 데려갔다는 거야. 알고보니 두 사람 다 경찰서로 잡혀간 거야.
동익 씨의 아내와 어머니는 곧장 경찰서로 달려갔어. 어떻게 됐는지 알아봤더니, 동익 씨가 친구랑 둘이서 경찰을 사칭했대. 낙동강변 인근에서 무면허로 운전 연습을 하는 사람들한테, 경찰이라면서 돈을 뜯었다는 거야. 동익 씨는 경찰이 오해한 거다, 별 일 아니니까 곧 풀려날 거다, 걱정 말고 집에 돌아가라고 가족들을 안심시켰어. 그 말을 믿고 가족들은 집으로 돌아갔어.
며칠 뒤, 동익 씨네 부모님 집에서 다같이 모여 TV를 보는데, 낙동강변에서 잔혹한 방법으로 부녀자를 강간하고 살해한 범인 두 명을 체포했다는 뉴스가 흘러 나와. 2년간 미제로 남아있던 끔찍한 사건의 범인이 붙잡혔대. 그런데 TV를 보다가 동익 씨 어머니가 까무러치며 놀라. 아들 동익 씨가 수갑을 찬 모습으로 TV에 나오고 있었던 거야. 경찰을 사칭해 잡혀간 거고, 그마저도 별 일 아니라고 했는데, 강간 살인범이라니.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진실을 알려면, 사건이 발생한 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해.
▲ 낙동강변 살인사건
때는 1990년 1월 4일, 이른 아침. 형사들이 낙동강 주변을 살피며 뭔가를 찾다가, 검은색 차량 한 대를 발견했어. 차에 사람은 없고, 차 문은 활짝 열린 채 강변도로에 방치된 상태였어.
차량 옆에 떨어진 흰색 여자 슬리퍼. 형사들은 이 슬리퍼의 주인을 찾았어. 차량 주변에 피 흘린 자국들이 있었고, 그 핏자국은 저 아래 낙동강 쪽으로 쭉 이어졌어. 형사들은 핏자국을 따라 조심스럽게 강 쪽으로 걸어 내려갔어. 차에서 30여미터쯤 걸어 갈대숲이 시작되는 지점에, 무언가가 발견됐어. 사람발이었어. 가까이 가서 갈대를 헤쳐보니, 한 여인이 피투성이가 된 채 죽어있어. 형사들이 찾던 하얀 슬리퍼의 주인이야.
이름 박현주(가명), 나이는 31세. 발견 당시 모습은 끔찍했어. 팔은 위로 올린 채, 상의는 위쪽으로 말려 올라가 있어. 그리고 얼굴은,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어. 부검 결과 사인은, 두개골 함몰 분쇄 골절. 무언가에 머리를 심하게 가격당했다는 거야.
이 사건엔 목격자가 있어. 차 안에 동승자가 있었던 거야. 바로 현주 씨와 회사 동료인 김영준(가명) 씨야. 근데 김 씨는 병원에 입원해 있어. 얼굴과 온몸에 전치 3주의 부상을 입었거든.
생존자 김 씨에 따르면, 김 씨는 현주 씨와 데이트 중이었어. 차를 세워두고 함께 노래를 듣고 있던 그때, 누군가 차에 다가와 "경찰입니다. 잠시 검문이 있겠습니다"라고 말했어. 경찰이라는 말에 김 씨는 의심없이 창문을 내렸는데, 그 괴한이 갑자기 권총으로 위협하더니 차문을 벌컥 열고 다짜고짜 때리기 시작했어. 그 남자들은 두 사람을 위협해 낙동강 쪽으로 차를 몰게 했어. 그리고 강변에 도착하자 김 씨의 양손을 테이프로 결박하고 강 쪽으로 끌고 갔다는 거야. 그 순간 손을 결박한 테이프가 풀렸고, 한창 괴한과 실랑이를 벌이다가 겨우 빠져나왔다는 거야. 김 씨는 그 후 경찰에 신고했는데, 범인들은 이미 현주 씨를 살해하고 도망간 뒤였어.
김 씨는 자신이 목격한 범인들에 대해 "한 명은 키가 저보다 좀 큽니다. 체격도 좋고요. 다른 한 명은 키가 좀 작았어요"라고 기억했어.
범행 현장 인근에서 발견된 여자 손수건이 하나 있었어. 거기에 남성의 체액과 혈흔이 묻어 있었어. 근데 아쉽게도 이땐 DNA 감식 기술이 도입되기 전이야. 그래서 혈액형만 확인이 가능해. 손수건에서 검출된 혈액형은 'AB형'이었어.
형사들은 인근 불량배나 전과자들을 대상으로 탐문에 나섰지만 용의자 특정이 쉽지 않아. 그렇게 시간은 2년이 흘렀는데, 어느날 부산 사하경찰서에 신고가 하나 들어와. 낙동강변 인근에서, 경찰 행세를 하는 사기꾼 두 명이 있다는 신고였어.
경찰 사칭이란 말에, 형사의 뇌리에 2년 전에 일어난 낙동강변 살인사건이 스쳐갔어. 범인이 2인조라는 거, 경찰을 사칭한다는 거, 그리고 한 명은 키가 작고 한 명은 키가 큰 편이라는 거. 형사의 직감이 발동했고, 그렇게 체포된 사람이 바로 장동익 씨와 친구 최인철 씨야. 두 사람은 공교롭게도 생존자 김 씨가 말한 범인들의 인상착의와 닮았어.
경찰은 김 씨를 불러 동익 씨와 인철 씨를 보게 했고, 두 사람을 본 김 씨는 이렇게 말했어.
"주범인 키 큰 최인철을 어제 형사과장실에서 처음 본 순간 목소리가 그때 그 목소리고 당시 덩치 큰 범인임이 분명하며 사건 후 2년이 지난 지금도 영업용 택시기사를 하면서 젊은이가 타면 그 얼굴을 찾으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또렷하게 기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키가 작은 장동익은 자신있게 그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말씨나 체격이 그 당시 범인이 틀림없습니다."
김 씨는 범인의 얼굴, 체격, 음성까지 분명 기억하고 있어서 두 사람이 범인이라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는 거야. 그리고 현장에 있던 결정적 증거, 손수건에서 나온 혈액형이 AB형이었잖아? 인철 씨의 혈액형도 AB형이었어. 곧바로, 경찰의 추궁이 시작됐어.
▲ 자백의 번복
"사무실로 데려와서 앉혀 놓고 '왜 죽였어' 하니까? 바로 쫙 얘기하는 거예요 자기 입에서. 자기는 공갈친(사칭경찰) 이걸로 잡혀온 게 아니고, 살인사건으로 잡혀 온 걸로 처음에 알았던 거야. 사건 이후, 이 여자를 죽이고부터 백발 귀신이 나타나서 목을 감는 꿈을 꾸고 그랬대요."
-사건 당시 담당 형사
동익 씨와 인철 씨가 자백을 했다는 거야. 현장검증을 했는데, 범행 장소와 방식도 정확하게 재연했대. 그리고 살인사건 한 달 전부터 비슷한 수법의 강도 사건들이 있었는데, 그 사건들의 범인도 동익 씨와 인철 씨라는 게 밝혀졌대. 결국 두 사람은 검찰로 송치됐어. 강도살인, 강도상해, 강도강간 등의 혐의로.
동익 씨의 아내는 남편이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는 게 믿기지 않고 너무 혼란스러워. 아내는 그 사건이 일어난 2년 전 그날, 1990년 1월 4일을 떠올려 봤어. 남편 동익 씨는 사건 전날인 1월 3일에도 직장에 출근했고, 퇴근 후 바로 집으로 돌아와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다가 아내와 같이 잠들었어. 그리고 4일 아침에, 회사에 멀쩡히 출근했어. 만약 동익 씨가 범인이라면, 모두가 잠들었던 새벽 2시경에 아내 몰래 집을 빠져나와 범행을 저질렀다는 거야.
생존자 김 씨는 사건 당일 새벽 4시 30분경 현장에서 도주했다고 했어. 그럼 피해 여성이 살해된 건, 그 이후야. 경찰 조사에 따르면, 두 사람은 여성을 각목으로 가격하고, 주먹만한 돌로 내리쳐 죽였대. 사건 현장에서 동익 씨 집까진 8km 정도 떨어져있어. 건장한 성인 남성이 쉬지 않고 뛰면, 40~50분 정도 걸리는 거리야. 그럼 동익 씨는 새벽 4시 30분 이후 여성을 살해하고 시신을 유기한 다음, 집으로 돌아와 오전 8시까지 회사에 출근한 셈이 돼. 이게 가능할까? 쉽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불가능한 것은 아니야.
동익 씨 어머니도 혼이 나갈 지경이야. 하루가 멀다 하고 구치소와 검찰청을 찾아갔어. 그런데 계속 면회를 안 시켜줘. 면회 허락이 떨어진 건 동익 씨가 체포되고 한 달 뒤였어. 가족들은 구치소로 달려갔어. 오랜만에 동익 씨를 본 가족들은 깜짝 놀랐어. 동익 씨가 너무 야위어 있었어. 동익 씨는 가족들한테 말했어. 자신은 여자를 죽인 적도, 강간한 적도, 강도를 저지른 적도 없다고. 본인이 자백하고 현장검증까지 했으면서, 가족 앞에서는 범인이 아니라고 억울해 하는 거야.
이 모든 비극은, 집에 형사들이 찾아온 바로 그 날 시작됐어.
▲ 고문으로 인한 거짓 자백, 그리고 무기징역
형사들이 집에 찾아온 1991년 11월 8일 저녁. 잠깐 얘기 좀 하자는 형사들의 말에 동익 씨는 경찰차에 탔는데, 뒷좌석에 친구 인철 씨가 있더래. 무슨 일인지 몰라 인철 씨한테 말을 걸었더니, 다짜고자 형사가 머리를 때려. 그렇게 영문도 모른 채 경찰서에 끌려왔는데,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갔어.
유치장에 갇힌 채 나흘이 지났어. 형사가 나오라고 해서 갔더니, 눈에 테이프를 붙이고 어딘가로 끌고 가. 잠시 후 낯선 방에 도착했는데, 형사들이 동익 씨한테 낙동강에서 여자를 죽이고 강도짓을 하지 않았냐고 추궁해. 동익 씨는 범행을 강하게 부인했어. 그러자 형사들이 손목에 갑자기 수갑을 탁 채워. 그리고 거꾸로 매달아 놓는 일명 '통닭구이 자세' 고문이 시작됐어. 잠시만 매달려 있어도 엄청 고통스러워.
근데 이게 끝이 아니야. 수건으로 얼굴을 덮더니 물고문이 시작됐어. 형사들은 동익 씨를 고문하며 "자백하려면 손가락만 까딱까딱 해라"고 말했어. 그래도 동익 씨는 이 끔찍한 고문을 이틀이나 참으며 계속 범행을 부인했어.
경찰은 친구 인철 씨를 불러왔어. 동익 씨와 인철 씨는 경찰서에 끌려온 지 5일만에 만났어. 형사가 인철 씨에게 "낙동강변에서 장동익이랑 여자 때려 죽였지?"라고 물었어. 그러자 인철 씨는 "네"라고 대답했어. 동익 씨는 순간 귀를 의심했어. 인철 씨도 고문을 당해왔던 거야. 동익 씨보다 오랜 기간동안. 심지어 겨자 푼 물을 코에 들이 붓기도 했대.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우니까 결국 거짓 자백을 한 거야. 그렇게 두 사람은 경찰 조사를 끝내고 검찰에 송치됐어.
검찰은 경찰과 다를 거라는 생각으로, 두 사람은 경찰 고문 때문에 허위로 자백했다며 범행을 전면 부인했어. 하지만 검찰은 혐의 그대로 재판에 넘겼어. 경찰 조사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판단한 거야. 목격자 진술, 증거, 자백까지 했는데, 이제 와서 왜 진술을 번복하냐면서.
이제 할 수 있는 건, 재판에서 고문당한 사실을 입증하는 거 뿐이야. 두 사람은 자신들이 고문당한 걸 아는 증인을 찾았어. 다행히 함께 유치장에 있었던 사람들이 나서 증언을 해줬어.
"장동익은 한번 나가면 보통 자정이 되어야 돌아왔으며 새벽에 들어오는 것도 보았습니다"
"통증 때문에 잠을 못 이루는 것 같았으며 다른 피의자들도 보았습니다"
"발목은 까져서 피멍이 들어 있었으며 얼굴은 수건을 덮은 채 물을 붓는다고 했습니다"
- 고문 입증 증언들
하지만 1심 재판 결과, 두 사람에게 무기징역이 선고됐어. 고문을 받았다는 게 인정되지 않은 거야. 고문 당한 걸 증언해준 증인들의 말을 보면 '~라고 했습니다'라며 직접 본 게 아니라 들은 내용을 말하고 있다는 거야. 게다가 그 증인도 결국 유치장에 있던 범죄자 신분이니, 증언에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한 거지.
동익 씨 어머니는 1심 결과를 듣고 눈물을 펑펑 쏟았어. 그래도 가족들은 동익 씨가 죄가 없다고 굳게 믿었고, '항소심'을 준비했어. 가족들은 부산에서 이름 꽤나 날리던 인권변호사를 한 명 추천 받았어. 바로 문재인 전 대통령이야.
당시 문재인 변호사의 전략은 두가지였어. 첫째 '고문 받았다는 증거를 더 보강한다', 둘째 '동익 씨의 안 좋은 시력을 무죄 입증에 적극 활용한다'는 것이야.
"(어머니의) 손가락 중에 제일 아픈 손가락. (형은) 걸어 다녀도 앞이 안 보이는 거를 그냥 감각으로 가는 거죠. 그냥 느낌으로 아는 거예요. 지리를 머릿속에 기억을 해놔요."
-장성익, 동익 씨 넷째 동생
동익 씨는 시력이 너무 안 좋아서 초등학교 5학년 때 중퇴를 할 정도였어. 어머니는 아들의 눈을 고치겠다고 안 해본 게 없어. 자신의 눈이라도 넣어주려고 큰 병원에 갔는데 이식이 불가능하단 말을 들었어. 시력 교정도 아예 불가능하대. 눈에 문제가 있는게 아니라, 시신경 자체가 위축된 불치병이라서. 이 이야기를 들은 문재인 변호사는 동익 씨의 시력을 정확히 검사해 봤어. 그랬더니 오른쪽 눈이 0.04, 왼쪽이 0.02 가 나왔어. 0.02 이하면 1급 시각장애 판정을 받을 정도야. 심지어 시야도 좁게 보여. 그런 동익 씨가 깜깜한 밤에, 사람을 납치하고 폭행해서 죽였다? 문 변호사는 무죄 입증에 자신있었어.
동익 씨와 인철 씨 가족들도 2심에 대한 기대가 컸어. 하지만 재판 결과는 이번에도 '무기징역'이 나왔어. 동익 씨의 시력이 나쁜 거 알겠는데, 그건 현재 시력이 그렇다는 거고 사건이 일어난 2년 전에는 좋았을 수도 있다는 거야. 그런 판단의 근거는 동익 씨의 직장동료가 한 증언이었어.
동익 씨는 신발공장에서 일했어. 신발의 바느질 상태나 풀칠 상태를 검사하는 '검사과' 소속이었는데, 그 곳에서 일하려면 "어느 정도의 시력은 있어야 한다"는 직장동료의 증언이 있었어. 이에 재판부는 신발공장 검사과에서 일했다면, 시력이 좋다고 판단한 거야.
그럼 2년 전에는 정말 시력이 좋았을까? 동익 씨가 신발 검사과에서 일한 건 맞아. 그런데 실수가 잦아서 쫓겨날 위기였대. 시력이 진짜 안 좋았으니까. 그럼 왜 이런 직장동료의 증언이 나왔을까? 사실 증인은, 총무과 직원이었어. 평소에 동익 씨가 일하는 걸 본 적도 없는 사람이야.
재판부는 두 사람이 고문받은 사실도 여전히 인정하지 않았어. 인철 씨가 고문 도중에 어금니가 부러지고, 팔에 박은 철심이 휘어졌다고 주장했는데, 재판부의 판단은 '고문으로는 그런 부상을 입을 수 없다'였어. 고문 후유증이 아니라고 판단한 거야.
동익 씨와 인철 씨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대법원에 상고했지만, 결과는 바뀌지 않았어. 그렇게 두 사람의 무기징역 형량이 확정됐어.
▲ 어머니의 분홍 보따리
아들의 무기징역 확정 후, 동익 씨 어머니는 매 끼니마다 밥 한 공기를 더 퍼서 아랫목에 두기 시작했어. 나쁜 생각하지 말고, 빨리 나와서 함께 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어머니의 염원이 담긴 밥 한 공기였어.
"어머님 생각은, '밥 굶지 마라. 든든하게 먹어라. 살아 있어라' 그런 거예요. 형이 안에서 다른 생각 하지 않을까 싶어서… (가족들이) 바깥 생활을 견디는 것만큼 (교도소) 안에서도 견디면 좋은데, 다른 생각 하지 않을까. 기도 아닌 기도도 하고 그런 식이죠."
-장성익, 동익 씨 넷째 동생
재판은 끝났지만 어머니는 포기하지 않았어. 재심이란 게 있잖아. 여기저기 언론사도 찾아가고, 청와대에 탄원서도 넣었어. 하지만 그 누구도 관심이 없었어. 그래도 어머니는 용기를 잃지 않고, "이거 한 번만 봐달라"며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봐달라 사정했어. 어머니가 내민 건 분홍 보따리였어. 그 안에는 아들 동익 씨의 수사 자료가 가득 들어 있었어.
"(어머니는) '근거를 남겨놔야 한다', '사건이 끝나면 저 변호사는 다른 일을 맡을 거고, 저 변호사가 그 사건 기록을 가지고 있을 거라는 보장도 없다', '기록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 네 학교가 중요한 게 아니다', '서류 챙겨라'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그 때 부산 서면에 복사하는 데가 많았어요. 양이 많을 땐 4~8시간, 짧으면 2~3시간씩. 복사본 뜨는게, 학교 수업보다 중요했죠 나한테는."
-장성익, 동익 씨 넷째 동생
이런 수사자료를 모은다는 건, 어려운 일이야. 어머니는 변호사들한테 부탁하고 또 부탁해서, 자료를 한 장 한 장 다 복사해서 남겨뒀어. 가족들이 전부 동익 씨를 위한 구명활동에 나섰어. 이런 와중에 어머니는 왕복 7~8시간 걸리는 아들이 있는 진주교도소를 1~2주에 한번씩 꼬박꼬박 가셨어. 교도소 면회시간은 고작 10분 정도야. 그런데도 아들을 보려고, 그 먼 길을 가신 거야. 그리고 어머니는 동익 씨만 보러 가신 게 아니야. 다른 교도소에 있는, 친구 인철 씨의 면회도 가셨어. 따지고 보면 인철 씨의 허위자백 때문에 누명을 쓴 건데, 어머니는 인철 씨한테 서운한 기색 한 번 보이지 않으셨어. 늘 힘내라고 다독이면서, 친아들처럼 대해주셨어.
겉으론 강인해 보이는 어머니였지만, 속은 썩어 문드러진 상태였어. 밖에서는 희망을 잃지 않고 아들의 구명을 위해 발 벗고 뛰었지만, 집에 돌아온 어머니는 아랫목에 가만히 누워 일어나지 않으셨대.
시간은 흐르고, 교도소 생활에 점차 적응해 가. 동익 씨가 체포됐을 때 두 살이었던 귀여운 딸은 어느새 열 살이 됐어. 그 무렵 딸은 아빠가 교도소에 간 지 모르고, 먼 타지에서 일하고 있는 줄 알았어.
"아버지께. 아버지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저는 할아버지, 할머니, 학교 선생님 말씀도 잘 듣고 있습니다. 어디 아픈 데도 없으니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아빠, 일기는 매일 빠지지 않고 계속 쓰고 있어요. 생일은 4월 29일이에요. 그런데 막냇삼촌께서 강아지 인형 대신 햄스터를 사주셨어요. 밥 잘 먹고 공부도 잘 할게요. 아빠, 몸 건강하시고 안녕히 계셔요. 아빠! 힘내세요. 우리 아빠 사장님, 우리 아빠 좀 잘 봐주세요."
-당시 딸이 동익 씨한테 보낸 편지
딸은 무럭무럭 자랐고, 어느덧 동익 씨가 감옥에 들어온 지 10년이 지났어. 2003년 8월, 교도관이 동익 씨를 갑자기 불러내 축하한다고 전했어. 동익 씨가 모범수로 감형을 받은 거야. 무기징역이 아니라, 징역 20년이야. 앞으로 10년만 더 살면 출소할 수 있어. 억울한 옥살이를 하고 있으니 이 소식이 반갑지만은 않았을 동익 씨. 그래도 이 소식을 가족들, 특히 어머니가 아신다면 좋아하실 거야. 동익 씨는 이 소식을 바로 알리지 않았어. 곧 있으면, '가족 합동 접견'이 있거든. 2급 이상 모범수를 기준으로, 유리로 막혀있는 접견실이 아닌, 야외에서 가족들이랑 얼굴을 맞대고 접견할 수 있는 특별 면회야. 동익 씨는 그날 가족들에게 감형 받았다는 소식을 알리려고, 그날만을 설레며 기다렸어. 그런데, 어머니가 합동접견에 못 오신다는 연락을 받았어.
"본인 아픈 것도 내색을 안 한 거죠. 우리도 그것을 몰랐고. 참 미안하고 죄송하고.."
-장성익, 동익 씨 넷째 동생
사실 어머니는 암투병 중이셨어. 그동안 고통스러운 항암치료를 견디고 또 견디셨대. 아들의 억울함을 풀어줄 때까지, 어떻게든 버티려 하셨는데… 결국, 돌아가시고 말았어.
"눈 하나 감지 못하고 그대로 바짝 뜨고, 이를 악물고 눈을 바짝 뜨고 돌아가시더라고.."
-동익 씨 사촌누나
얼마나 억울하셨으면, 눈도 못 감으셨을까. 가장 가슴 아픈 건, 어머니가 동익 씨의 감형 소식을 못 들으시고 돌아가신 거야. 그리고 동익 씨도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걸, 장례식이 끝난 뒤에 알게 됐어. 동익 씨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 21년만의 출소, 재심을 위한 움직임
다시 10년이 흘러 2013년 4월 26일 밤, 진주교도소 앞. 동익 씨가 교도소 밖으로 나왔어. 21년 6개월여 만에 출소하는 날이야. 33살에 교도소에 들어간 청년이 55살, 중년이 돼서 밖으로 나왔어. 동익 씨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어.
"밤 열두 시에 내보내 주거든요. 나와서 배가 고프더라고요. 라면이라도 한 그릇씩 먹자 그래서 먹는데, 내가 밖에 있을 때 라면 한 그릇에 300원 받았는데, 무슨 라면 한 그릇에 3000원이나 받아. 무슨 칼 안 든 강도냐 했죠. 기분이 좋겠지만 마음의 짐은 더 무겁죠. (교도소) 안에 있을 때는 내 한 몸 건강 유지하며 살면 된다 생각하지만 밖에 나오면 풀어야 할 숙제가 많으니까 힘들더라고요."
-장동익, 살인사건으로 21년 복역
20년 넘게 사회와 격리된 채 살았으니 적응이 쉽지 않겠지. 특히 동익 씨가 가장 대하기 어려워 한 사람은 딸이야. 너무 보고 싶던 딸과 21년만에 드디어 같이 살게 됐는데, 말 한 번 섞기가 힘들더래.
"어린 시절에 과자 하나 사준 게 없어요. 공부할 때 노트, 학용품 하나 사준 게 없어요. 아무 추억이라는 게 없어요. 돌 지나고 그 때 보듬고 있었던 게 다니까. 그것만 생각하는 거지. 아빠 없이 살았다는 것만 생각하지. 그러다 보니 미안한게 많죠."
-장동익, 살인사건으로 21년 복역
딸이 "사람들이 아빠에 대해 물어보면 뭐라고 말해?"라고 물었어. 동익 씨는 "사업하다가 잘못돼서 그래 된 거라 하자"고 둘러댔어. 딸과 대화를 마치고 방에 들어온 동익 씨는 가슴 한 구석이 너무 아팠대.
그때, 동익 씨 셋째 동생 봉익 씨가 분홍 보따리를 들고 와 형에게 보여줬어. 어머니께서 생전에 열심히 모은 수사 자료들이야. 그걸 본 동익 씨는 마음을 굳혔어. 재심을 받아 자신의 억울함을 풀고 가족들 앞에, 그리고 딸 앞에 당당한 아빠가 되자고 결심한 거야.
이후 동익 씨가 가장 먼저 찾아간 사람은 인철 씨야. 인철 씨도 감형 받고 출소한 상태였어.
"동익이가 저를 찾으려고 집안 매제가 하는 그 가게에 왔더라고요. 이렇게 만났으니까, 우리 일을 하자, 누명을 벗어야 될 거 아니냐, 본격적으로 싸워보자.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거죠."
-최인철, 살인사건으로 21년 복역
두 사람은 오랜만에 의기투합 했어. 분홍 보따리를 들고, 변호사 사무실, 법률구조공단, 인권위원회 등 여기저기 재심을 위해 찾아 다녔어. 하지만 그 때마다 돌아온 답은 "대법까지 확정된 사건을 뒤집긴 어려울 거 같습니다"였어. 두 사람을 믿어줄 사람을 만나는 게 쉽지 않았어.
그렇게 또 3년이 흘러 2016년 2월 서울역 앞. 분홍보따리를 손에 꼭 쥔, 동익 씨와 인철 씨가 누군가를 만나러 서울에 왔어. 이들이 만나려 한 사람은 문상현 기자였어.
문 기자는 신문사에서 일하는 1년차 새내기 기자야. 두 사람을 만나 메모도 하고 얘기를 열심히 듣던 문 기자는, 중간중간 갸우뚱 거리기도 하고 가끔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봐. 그때 문 기자는 "그 분홍보따리요. 제가 한 번 빌려가도 될까요?"라고 물었어. 여태까지 아무도 관심 갖지 않던 보따리에, 문 기자가 관심을 보인 거야.
"가슴이 뛰기는 했었죠. 그렇다고 해서, 이걸로 '특종이다' 이런 생각은 안했어요. 모르는 거잖아요. 그런데 오랜 시간 만나서 대화할 수 있었던 건, 그 분들이 가져온 분홍 보따리 때문이었어요. 경찰, 검찰, 재판에 나왔던 공판 자료, 판결문, 심지어 그 안에 들춰보니 사진까지 다 있었어요."
-문상현, 당시 새내기 기자
문 기자는 이 자료들을 밤새 검토했어. 그리고 뭔가 기자로서 촉을 느꼈어. 고민 끝에 문 기자는 '재심'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 재심 전문 박준영 변호사에 연락을 했어. 당시 박 변호사는 다른 재심 사건들을 한창 진행 중이였는데, 문 기자의 연락으로 만남이 성사된 거야.
근데 박준영 변호사가 너무 바빠서, 제대로 대화조차 나누지 못 했어. 그래서 문 기자는 분홍 보따리만 겨우 건네주고 돌아왔어. 그리고 다음날, 문 기자의 휴대폰이 울려. 박 변호사였어.
"자료들 봤는데.. 이 분들 범인 아니에요. 같이 한 번 만나죠?"
-박준영, 재심 전문 변호사
▲ 속속 드러나는 거짓 증거들
박 변호사는 기록 일부와 판결문만 살펴봤는데, 이 사건은 무조건 해야겠다고 생각했대. 분홍 보따리 속 기본조차 갖추지 못했던 수사 자료를 보고, 깜짝 놀랐다는 거야. 이상한 게 한 두 가지가 아니었대.
먼저, 살인 사건의 목격자이자 동승자였던 김영준 씨의 진술 조서에는 '1990년 1월 북부경찰서'라고 적혀있어. 살인사건이 막 터졌을 당시에 진술조서인데, '90년 1월'까지만 쓰여있고, 며칟날 작성된 건지 적혀있지 않아.
그리고, 두 사람이 처음 체포된 혐의는 '경찰 사칭' 혐의야. 그 혐의 관련 범행 일람표인데, 자세히 보면 피해자, 피해차량이 '일체불상, 번호불상'으로 명시돼 있어. 단 1건을 제외하고는, 피해 차량을 모른다는 거야. 피해자가 없는, 사건이 조작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거야.
재심을 위해선 명확한 증거들이 더 필요해. 박준영 변호사는 SBS '그것이 알고 싶다' 팀과 함께 이 사건의 단서를 하나하나 찾기 시작해. 최인철 씨를 범인이라 지목한 결정적 증거 손수건. 거기서 검출된 혈액형은 인철 씨와 같은 AB형이었어. 근데 '국과수 감정 의뢰회보'를 보면 이야기가 또 달라져.
"A형과 B형, A형과 AB형, B형과 AB형이 혼합된 경우에도 AB형으로 반응할 수 있음."
A형 혈흔과 B형 혈흔이 섞여도 AB형이 나올 수 있다는 거야. 그런데 경찰들은 이 중요한 정보를 누락시키고, 자신들 마음대로 취사선택 해서 인철 씨를 범인으로 지목한 거야.
더 황당한 건, 처음에 두 사람이 피해자를 '각목'과 '주먹만한 돌'로 해쳤다고 경찰이 발표했잖아? 그런데 애초에 이건 범행도구가 될 수 없어.
"(각목으로) 두 군데 2회를 때렸다는데 각목으로 맞으면 두피와 흉기 사이에서 두피가 찢어져요. 쉽게 찢어지는 부위예요. 그런데 오른쪽 이마에는 개방성 손상 외에는 다른 것에 찢어진 상처가 없다는 거…"
"두 손으로 (커다란 돌을) 겨우 들어서 내려찍을 정도. 그 정도의 무게와 면적이 있어 줘야 함몰과 아울러서 분쇄골절이 같이 동반될 수 있어요."
-이호, 법의학과 교수(2016년 10월 1일 '그것이 알고싶다' 1047회 중)
애초에 각목은 사용하지 않았고, 주먹만한 돌로는 분쇄골절이 불가능하다는 법의학적 분석이야. 범행도구를 전부 조작한 거야. 그것도 아주 허술하게.
그리고 마지막 한가지. 인철 씨와 동익 씨는 진술 당시, 사망한 피해자를 들어서 옮겼다고 진술했어. 근데 피해자 박씨의 등에 난 상처를 보면, 쓸린 상처들이 가득해. 시신을 끌고 갔다는 이야기지. 이건 범인이 두 명이 아니라, 한 명일 수도 있다는 거야.
▲ 30년만에 얻어낸 '무죄' 판결
박준영 변호사는 2017년 5월, 재심 신청을 했어. 근데 2년이 넘게 감감무소식이야. 검찰과거사위원회(검찰의 과거 인권침해 및 검찰권 남용 의혹이 제기된 사건을 선정한 뒤 진상 규명을 하는 위원회)에서 이 낙동강변 살인사건을 조사하고 있었던 거야. 정말 고문이 있었는지, 수사 과정에 문제가 없었는지, 강도 높은 조사를 했는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던 거지. 검찰 과거사위에서 이 사건을 조사한 건, 박준영 변호사의 신청 때문이었어.
"내가 이걸 괜히 신청했구나. 내가 여기를 들어오지 않았어야 되는데. 저는 좀 빨리, 그리고 확실하게 해결하려고, 기존 조사 내용을 잘 살펴서 확인해달라는 의미로 청구를 했는데. 오히려 더 엄격하고, 중립적이고, 그러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답답하기도 하고 힘들기도 했어요."
-박준영, 재심 전문 변호사
박 변호사는 재심 때 도움이 될까 싶어 과거사위에 신청한 건데, 생각보다 조사 기간이 너무 길어졌던 거야. 그런 기다림에 속이 타들어가는 건 동익 씨와 인철 씨지. 그리고 오랜 기다림 끝에, 검찰은 이런 발표를 해.
"이 사건은 고문으로 인해 범인이 조작된 사건으로 보입니다."
검찰이 수사를 통해 당시 경찰의 고문행위를 인정한 거야. 놀랍게도, 두 사람이 검거되기 두 달 전에 같은 경찰서에서, 물고문을 받고 허위자백을 했다가 재판 도중에 풀려난 사람이 있었대. 그 피해자의 진술이, 동익 씨와 인철 씨가 당한 것과 일치했어.
"사하경찰서 안인데 별채 별관이었습니다. 강도짓을 했다고 손목에 수갑을 채운 상태에서 다리 뒤쪽으로 쇠파이프를 끼워 가지고 거꾸로 매달았습니다. 물고문을 했는데 물을 안 마시려고 푸푸하다가 끝이 나지 않으니까 물을 마셔버렸습니다. 고문할 때 '자백하거나 할말 있으면 손만 까딱거려라' 했습니다."
-검찰 과거사위원회 피해자 홍OO씨의 면담 진술
그 다음해에 드디어 재심개시결정이 내려졌어. 재심 신청 3년만이야. 이제야 유무죄 여부를 가릴 수 있게 된 거야. 아직 무죄 판결이 난 것도 아닌데, 이날 동익 씨와 인철 씨는 그동안의 서러움을 쏟아내듯 펑펑 우셨대.
그럼 재심 재판 결과는 어떻게 나왔을까? 2021년 2월 4일, 부산고등법원은 재심에서 '무죄'를 판결했어. 사건이 일어난지 무려 30년만인, 2021년. 드디어 무죄를 선고 받았어.
"그 기나긴 세월을 참고 올 때 오늘 같은 날을 학수고대 하며 기다렸었고. 가슴이 벅차고 울컥거리고 그렇습니다."
-장동익, 재심 무죄 판결받은 날
"비록 고문 때문에 시인했지만 친구(장동익)도 저 때문에 많이 피해를 봤습니다. 친구를 위해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최인철, 재심 무죄 판결받은 날
동익 씨는 무죄 판결을 받은 날, 하늘에서 부모님도 보고 계셨을 거라 생각해.
"그날따라 비가 부슬부슬 오더라고요. 아, 우리 어머니 아버지도 하늘에서 내려다 보고 있구나. 이건 어머니 아버지의 눈물이다 생각하며, 울컥했었죠. 그때 제가 어머니 아버지가 영천 호국원에 계시거든요. 호국원에 무죄 판결문을 가지고 갔었죠."
-장동익, 재심 무죄 판결
동익 씨는 무죄 판결을 받고 곧바로 어머니를 만나러 갔어. 어머니의 유언을 지켰다고 얘기하려고.
"엄마 아버지, 저 때문에 마음고생 많이 하시다가 돌아가시는 것도 보지 못하고… 오늘 같은 날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겠어. '장동익 무죄, 아무 죄 없이 무죄' 엄마 기록이 있었기에 진실이 밝혀졌으니까, 아무 걱정 안 하셔도 돼. 엄마 아버지 저희 걱정하지 마시고, 이제 편안히 계십시오."
-장동익, 부모님 모신 곳 앞에서
▲ 사과 한 번 없는 가해자들
그럼, 당시 수사 담당자들은 어떤 책임을 졌을까. 두 사람을 고문했던 경찰들, 사건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았던 담당 검사한테, 동익 씨와 인철 씨는 사과를 받았을까?
"걔들 전과 하나 없는 앱니다. 그런 애들을 두드려 패고 짜서 고문을 한다? 만든다? 그때 당시 또 옛날에 박종철 군 사망사건 이후인가 그렇게 알고 있고 해서 고문 같은 거 할 수 있는 시대도 아니었어요 실제로."
-당시 사건 담당 형사
한 담당 형사는 고문은 없었다고 부인했어. 또 다른 형사를 찾아가 동익 씨와 인철 씨가 진범이었느냐 묻자, 갑자기 테이프를 찢더니 입에 붙이고 침묵했어.
이번에는 당시 사건 담당 검사를 찾아갔어. 동익 씨와 인철 씨가 인사를 건네자 검사는 모르쇠로 일관하더니 "당신들하고 할 얘기 없어! 나가! 장난 하나 지금. 안 나가? 나가!"라고 오히려 윽박질렀어.
당시 경찰이고 검찰이고, 모두 다 부인했어. 지금까지 사과 한 번 한 적이 없대. 모른다고 잡아 때거나, 오히려 화를 냈어. 이들은 공소시효가 지나 처벌도 안 받았어.
누명을 벗은 동익 씨와 인철 씨는 억울한 옥살이에 대한 형사보상금을 신청하고,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도 청구했어. 다행히 이건 전액 보상 받았어. 근데 이 분들이 대단한 게, 이 보상금으로 장학재단 설립을 준비하고 있어. 재단 사업에는 박준영 변호사도 함께 참여하고 있어.
동익 씨와 인철 씨는 30년 전 같이 사진을 찍었던 해운대 해수욕장을 찾았어. 동익 씨는 인철 씨가 운전하는 차에 타는 걸 가장 편하게 생각해. 인철 씨는 눈이 잘 안 보이는 동익 씨를 손잡고 챙기며 걸어. 두 사람은 여전히 좋은 친구야.
해운대 앞바다를 바라보며, 동익 씨는 돌아가신 부모님을 떠올렸어.
"30년 전인데 그 때 생각이 안 날 수가 없네요. 엄마 환갑 때, 엄마 아버지 부산에 이사 와서 해운대에 안 가봤는데, 해운대 한 번 가보자 해서, 친구들과 왔던 생각이 나네요."
-장동익, 재심 무죄 판결
"(동익이) 어머니 아버지, 사진 찍으려는데 어머니가 도망 다닌 거. 그게 제일 기억에 남습니다."
-최인철, 재심 무죄 판결
웃으며 당시를 추억하는 두 사람. 이제 두 사람은 밝은 미래를 꿈 꿔.
"내가 지난 날 잘못했다, 그런 소리 하지 말고. 다 잊어버리고. 밝은 것만 생각하자."
"앞으로 잘 살자!"
"그래 궂은 일은 잊어버리고."
-장동익, 최인철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강선애 기자 sakang@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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