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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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찐리뷰] 소 천마리 몰고 北에 갔던 현대 정주영 회장…우리가 알지 못했던 뒷이야기

강선애 기자 작성 2023.03.24 12:31 수정 2023.03.24 14:00 조회 3,7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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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SBS연예뉴스 | 강선애 기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23일 방송된 '1998 회장님의 빅이벤트: 이봐, 해봤어?'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그룹 러블리즈 멤버 케이, 펜타곤 멤버 키노, 개그맨 김진수가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이봐, 해봤어?' 불가능이 없는 회장님

때는 1998년 봄, 새벽 5시 청운동 저택 2층 끝 방에 불이 탁 켜져. 커튼 사이로 남자가 하나 보이고, 그는 스트레칭으로 하루를 시작해. 그리고 개운하게 씻고 신문을 쫙 펼쳐. 어느새 시간은 새벽 6시, 전화벨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지고 미국 뉴저지, 바레인, 북경… 정확히 3분 간격으로 세계 각지에서 보고 전화가 와. 전화를 받는 이 남자의 정체는, 대기업 회장님이야. 전세계에 사업체를 가지고 있어서 일명 '왕회장님'으로 불려.

그렇게 전화를 받은 회장님은 다시 자세를 고쳐잡고, 전화기를 뚫어져라 쳐다봐. 아직 기다리는 전화 한 통이 안 왔거든.

그 시각, 새벽 6시 충남 서산에서는 한 남자가 전화 보고를 하려고 안절부절 못하고 있어. 손에 든 업무일지를 읽고 또 읽는데 손이 벌벌 떨려. 남자는 심호흡을 크게 한 후, 드디어 수화기를 들었어.

"회장님,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서산입니다. 날씨 흐림, 온도 12도, 강수량 1.7mm, 쌀 재고량 1만 8천 6백 44가마, 금일 출고량 50가마, 한우 암소 1591마리, 수소 396마리…"

전화를 받은 회장님은 "잡초는 얼마나 자랐나", "암소가 새끼를 낳았다는데, 기력을 회복했나" 등 질문을 쏟아내. 서산 직원은 회장님의 질문에 식은땀을 흘리며 대답해. 회장님이 운영하는 회사, 무슨 회사길래 새벽부터 이런 보고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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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회사에서 저도 뭐… 농사를 관리한다는 일은 제가 해보지를 못했거든요. 해외 각 곳에 몇 십 군데에 지사도 가지고 있고, 한 2, 3백 군데 중요한 곳으로 따지면 10군데 넘는 현장도 있는데. 그런 곳들보다도 매일매일 보고받는 데가 서산 간척지였어요."
-김철순, 당시 총무부 이사

회장님의 사업체는 건설회사, 그것도 당시 재계 순위 1위 기업이였어. 포브스 선정, 세계 재계 순위 9위 까지 오르고,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회장님. 누군지 감이 와? 그래, 현대그룹의 故 정주영 회장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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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 회장 하면, 현대건설과 현대자동차가 생각 나지? 전세계에서 3번째로 자동차를 많이 파는 회사가 현대자동차야. 혹시 '포니' 알아? 국내 최초로 독자 개발한 자동차야. 지금이야 우리가 자동차 강국이지만, 70년대는 어땠겠어. 자동차 독자 개발을 선언하자 외국인들은 물론, 회사 내부 직원들도 콧방귀를 뀌었대. 그 말에 정회장은 이렇게 대답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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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봐, 해보기는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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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간 우여곡절을 겪다가, '포니'를 만들어냈어. 차 뿐만 아니라 배도 만들었어. 1970년대, 우리나라에 조선소를 지을 돈이나 장비는 없었어. 배를 만들 기술도 당연히 없지. 한국이 어떻게 조선소를 만드냐며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한테 정회장은 또 말했어. "이봐, 해봤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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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회장은 무작정 비행기를 타고 영국으로 갔어. 어렵게 잡은 미팅 자리에서 정회장은 한국의 오백원짜리 지폐를 꺼내 보여줬어. 오백원짜리 지폐 뒷면에,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이 그려져 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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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회장은 "우리는 수백년 전에 철갑선을 만든 나라입니다. 돈이 없어서 그렇지, 배를 만들 능력 있습니다"라고 자신있게 말했어. 놀랍게도, 영국 쪽에서 돈을 빌려주겠대. 대신 조건이 있었어. 아직 배를 한 번도 안 만들어 본 현대인데, 이런 현대에게 배를 산다는 사람을 찾아와 증명하라는 거야. 정회장은 '그리스의 선박왕' 리바노스를 만나러 갔고, '오케이'라는 대답을 받아냈어. 그 계약서를 들고 영국 정부에 내밀었고, 영국 정부는 결국 돈을 빌려줬어. 그 돈으로 울산에 조선소를 짓고 배를 만들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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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회장은 이런 사람이었어. 불가능할 것 같은 일이라도, 일단 시도해보고, 결국 성공해내는 사람. 이런 회장님이 왜 서산 농장에 진심인 걸까? 그걸 알려면, 1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해.

▲ 바다를 육지로 만든 회장님

1982년 4월, 충남 서산. 바닷가에 크레인, 바지선, 덤프트럭, 온갖 장비들이 줄을 섰어. 엄청난 규모의 간척사업이 진행되고 있었어. 바다를 육지로 만들어 농업, 공업 용지로 조성하는 토목공사야. 정회장은 평소에 이 간척사업에 굉장히 관심이 많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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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토가, 수면 위로 부상되어 올릴 때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고. 먼 훗날 우리 후손들에게, 움직일 수 없는 그야말로 큰 재산을 후손에게 준다, 이렇게 생각하고…"
-정주영 회장

정회장은 나라가 잘 살려면, 더 넓은 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 이게 서산 천수만 지역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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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척지 공사는 이 A지구와 B지구를 메꾸는 작업이야. 공사는 상대적으로 메워야 할 면적이 작은 B지구부터 시작했어. 이걸 어떻게 메울까? 바닷물이 빠지는 썰물을 기다렸다가, 양쪽 끝부터 엄청난 양의 흙과 돌을 퍼부어. 그러면 양쪽 끝의 물길이 막히겠지. 그 다음 안을 메우는게 간척지 공사야. 하지만 시작부터 어려워. 아무리 큰 바위를 쏟아도 계속 휩쓸려 나가. 그 모습을 계속 지켜보던 정회장이, 한마디 해. "바위를 묶어서 한꺼번에 떨어뜨리면 어떻겠나"라고. 그러자 아래 직원은 "이 울퉁불퉁한 바위들을 어떻게 묶습니까"라며 당황해. 그러자 회장님은 다시 말해. "이봐, 해보기나 했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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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 회장의 평소 철학이, '나는 어떤 일을 시작하든 반드시 된다는 확신 90에, 되게 할 수 있다는 자신 10을 가지고 해왔다. 할 의지만 있으면 방법은 다 있다'는 거야. 현장 직원들은 큰 바위에 구멍을 내고 철사로 여러 개를 묶었어. 그랬더니 전보다 훨씬 크고 무거운 바위들이 완성됐고. 그걸 쏟아 부었어. 결과는? 대성공. 물길이 막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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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A지구 차례야. 그런데 A지구는 스케일부터 달라. B지구의 방조제가 총 1.2km였는데, A지구는 무려 6.4km야. 5배가 넘는 길이의 제방을 쌓아야 해. 직원들 모두 밤낮 없이 작업에 매달렸어. 그러길 6개월. 이제 사이 270m 정도만 남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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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현장 직원들은 이때부터 죽을 맛이었대. 가운데에 이르면 조수간만의 차에 의해서 드나드는 바닷물이 조류가 어마어마하게 빨라지거든. 급류의 속도가 무려 초속 8m, 초대형 태풍이 몰아치는 수준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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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커다란, 집채만한 돌덩이를 집어넣는다고 하더라도 그 돌덩어리들이 물에 의해서 전부 다 쓸려나가는, 이런 실패를 계속 반복했었습니다."
-김철순, 당시 총무부 이사

뭘 하든 소용 없는 작업에 손실은 커지고 직원들도 점점 지쳐가. 며칠 후, 정주영 회장은 울산 조선소로 전화를 걸었어. 그리고 얼마 전 스웨덴에서 사 온 폐선박에 대해 물었어. 정회장의 생각은, A지구 남은 구간에 폐선박을 가라앉혀서 거센 물살을 막아보자는 거야. 직원들은 깜짝 놀랐어. 이론적으로 정립도 안 되고 검증도 안 된 새로운 공법이거든. 직원들은 "배로는 무리다. 천수만 물살에 다 부서져 버릴 거다"라며 반대했어. 그러자 회장님은 또 그랬어. "해봤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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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의 불호령에, 곧장 울산에 있던 폐선박이 서산을 향해 출발해. 디데이는 1984년 2월 25일, 사상 초유의 도전이야. 드디어 저 멀리서 낡을대로 낡은 폐선박이 다가와. 선박 안 탱크에 물을 가득 채우고, 배 안으로 무거운 바위를 쏟아 부었어. 잠시 후, 배가 멈췄어. 그리고 13일동안 흙과 바위를 계속 쏟아넣은 끝에, 마침내 방조제가 완성됐어. 이 아이디어, 일명 '정주영 공법'이라 불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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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개월로 잡고 시작한 공사는 단 9개월만에 끝났어. 이렇게 공사가 성공하면서, 대한민국 영토가 4700만평이나 늘었어. 여의도 면적의 33배가 생긴 거야. 방조제로 막은 구역은, 염분을 뺀 뒤 농지로 만들었어. 그날부터 회장님의 관심사는 온통 서산 농장에 쏠리게 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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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장님이 농장에 진심이었던 이유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회장님이 "소도 한 50두 사서 키워보자"고 지시해. 그 때부터야. 서산 하늘에, 헬기 소리가 자주 들린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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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헬기를 대기했는데, '서산 한 번 가자' 하시는 겁니다. 고민스러운 일이 있다면, '거기 가서 보면 해답이 떠오른다', '영감이 떠오른다', 하셨어요."
-박찬호, 당시 서산농장 담당

서산에 오면 회장님은 가장 먼저 축사부터 둘러봤대. 송아지를 만져도 보고 풀도 먹이는데, 표정이 너무 해맑아. 하지만 그 때까지야. 전용 지프차에 올라타면, 그 때부턴 분위기가 확 달라져. 지난번에 지시한 거 어떻게 됐느냐, 보완은 해 놨냐, 그런 질문들을 하며, 농장 구석구석을 매의 눈으로 살펴. 그러다 제대로 안 해놓은 걸 발견하면, 불호령이 떨어져.

그렇게 농장을 한바퀴 돌면, 직원들과 회식을 하는 거야. 회장님은 항상 막걸리 딱 두 잔만 마셨대. 그리고 기분이 좋아지면, 늘 이런 이야기를 해.

"이봐, 내가 원래는 아버지 따라서 농사꾼으로 살 팔자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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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정회장이 농장에 각별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어. 어린 시절 아버지에 대한 기억 때문이야. 정회장은 1915년, 가난한 농부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어. 매일 새벽 4시만 되면, 아버지가 주영이를 깨워 논에 데려갔어. 아버지는 어린 정회장을 데리고 다니며 농사짓는 노하우를 하나하나 알려주셨어. 그러면서 "주영아, 넌 부지런히 농사 지어서 어린 동생들 뒷바라지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어. 어린 주영이는 초등학교 까지만 졸업하고, 내내 농사를 지었어. 그땐 그게 지긋지긋하고 너무너무 싫었대. 결국 주영이는 아버지가 소를 팔아서 숨겨놓은 70원을 훔쳐서 가출했어.

그리고 쌀가게에 취직했어. 월급이 쌀 한가마니였거든. 밥은 배불리 먹을 수 있으니까. 그럼 일은 잘 맞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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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자전거 탈 줄 아나?' 그랬더니 탈출 안다고 그러더래요. 그래서 자전거에 쌀 한가마니하고 팥, 콩 실어서 끌고 가더래요 아침에. 근데 저녁때까지 안 들어오는 거라. 그래서 큰일났구나, 사고났구나, 했는데 온몸이 흙투성이가 돼서 들어오더래요. 자기는 자전거를 보기만 했지 만져보는게 처음이라고, 가다가 수 십번 넘어지고 배달하고 온 거야."
-당시 쌀가게 사장 손자.

이 때의 소년 정주영도, 안해봤다고 두려워하지 않고 그냥 해보는 거야. 자전거 타는 것조차. 그리고 새벽 4시마다 깨우던 아버지 덕분에 아침잠이 없어. 일을 시키지 않아도 잘 해내고, 가게 앞도 다 깨끗이 쓸고. 궂을 일을 마다하지 않고 하던 소년 정주영. 그래서 사장님은 월급을 쌀 두가마로 올려줬어. 주영이는 쌀을 들고 고향으로 찾아가. "주영아, 네가 서울 가더니 성공했구나" 정주영은 아버지께 용서를 받은 거야. 그런데 아들의 성공을 보기도 전에, 아버지는 돌아가셨어.

정회장은 아버지가 시골에서 농사 지으면서 살자고 말하던 걸 끝내 뿌리친 것에 대해 회한이 많았대. 그래서 일이 잘되면 늘 아버지 생각부터 났대. 그리고 다짐했어. 언젠가는 아버지를 위한 농장을 만들고, 나도 농사꾼으로 살아야겠다고. 그가 서산 농장 일에 진심일 수 밖에 없던 이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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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 농장은 그 옛날 손톱이 닳아 없어질 정도로 한뼘 한뼘 농토를 만들어 가며 고생하셨던 내 아버님 인생에 꼭 바치고 싶었던 이 아들의 뒤늦은 선물이다. 농장을 돌아보노라면 아버님께서 이 농장을 못 보시고 일찍 타계하신 것이 애석하고 애석하다. 서산 농장은 내게 농장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곳은 내가 마음으로 혼으로 아버님을 만나는 나 혼자만의 성지 같은 곳이다."
-정주영 자서전 中

▲ 회장님은 다 계획이 있구나

그런데 정회장의 남다른 애정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들이 있어. 바로 직원들. 도로 깔고 아파트 짓던 건설회사 직원들이 수시로 축사를 짓는 거야.

"그러니까 자꾸 축사를 지어야 하는 거죠. 송아지가 태어나면, 송아지 분만실도 만들어야 되고. 아마 송아지 분만실을 만드는 데는 우리 밖에 없을 겁니다."
-김철순, 당시 총무부 이사

처음에 샀던 소 50마리는 몇 년 만에 3500마리로 늘어났어. 결국, 김 이사가 어렵게 소를 팔자고 이야기를 꺼내. 그랬더니 정회장은 절대 안된대. 인건비부터 사료까지 적자투성이인데도. 그러던 어느날, 정회장은 소를 북한으로 보내자고 말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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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일을 해야 합니까' 라고 물어보니까 북한으로 소를.. '일단 다른 사람한테 얘기하지 말고 극비로 준비해야겠다' 하시는데, 깜짝 놀랐죠. 어떻게 그런 일을…"

-김철순, 당시 총무부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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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위기가 생각보다 고조되어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모여 있고요. 화합과 교류 그리고 통일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통일의 염원을 짊어진 소가 지나는 모습은 일대 장관입니다."
"푸근한 소떼가 떠날 준비를 마쳤습니다."
"이번에 북으로 가는 이 소떼가 분단에 한을 풀겠다는 그런 의미 있는 행렬이라고 보입니다"
-당시 뉴스 내용들

남북 관계의 역사를 바꾼 빅 이벤트, 정주영 회장의 소떼 방북이야. 1998년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며 햇볕정책이 시작돼. 이 때 대대적인 대북 정책이 발표됐어. 민간기업의 대북 투자 규모 제한을 폐지하고 기업인의 방북을 허용한다, 경제적 지원으로 굳게 닫힌 북한의 마음을 열겠다는 거야. 정주영 회장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북사업에 진출해. 그리고 그 시작으로 소떼를 보내기로 한 거야.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야. 소를 어떻게 북으로 전달하겠냐는 질문에 정회장은 이렇게 대답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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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판문점을 통과해서 가겠습니다. 나와 소들이 육로로 북한에 갈 겁니다."

이 소식을 들은 판문점도 깜짝 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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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문점이라는 데서는 항상 긴장을 안 하고, 편안하게 일을 할 수가 없어요. 바로 그 앞에는 북한 병사가 노려보고 있고. 이런 분위기인데. 나뿐만이 아니라 주변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 때문에 긴장이 됐죠."
-김연철, 당시 판문점 전방사무소 소장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곳에서 사람이 소떼와 같이 걸어간다? 고민할 게 한 두가지가 아니야. 혹시 중간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나, 김소장은 걱정이 앞서. 북한에서도 황당하긴 마찬가지야. 북한 측은 '판문점을 통과한다는 건 말도 안된다. 북경까지 오면, 그리로 비행기를 보내겠다'고 말했지만, 정회장은 꿈쩍도 안해. 며칠 후, 결국 북한은 조건을 받아들이겠다며, 판문점으로 건너오는 것을 허락했어. 당시 직접 북측과 협상한 분의 이야기를 들어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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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과 실무 협의를 다 하고 최종적으로 김정일 위원장한테 보고를 하지 않았겠어요? 소를 가지고 온답니다, '야, 현대가 소를 가지고 와? 황소처럼 밀고 들어오는 구나. 판문점으로 오시라 그래라'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들었어요. 보고를 드렸는데, 회장님께서 별 표정 없으시고, 다 짐작하고 있었다는 그런 얘기 같습니다. 육로로 평양에 가기 위해서 생각한 방법이 아닌가 짐작합니다."
-우시언, 당시 종합기획실 팀장

정회장은 소를 배로 데려가기 어려우니, 육로를 뚫을 수 있겠다, 생각한 거야. 이제 출발까진 한달 정도 남았어. 1차로 500마리, 2차로 500마리, 총 1000마리를 북한에 보내기로 했어. 농장 담당자 박찬호 차장은 곧장 서산 농장으로 내려가서, 제일 건강한 소만 고르기 시작해. 반은 숫소, 반은 암소, 또 암소 중 반은 임신한 소로 선별했어.

"선별한 소를 전염병이 있는지 질병이 있는지를 검사하고. 어떤 예방주사를 미리 맞혀야 하고. 소들이 가서 어느 정도 새끼를 낳고 북한에다 쭉 퍼뜨려서 노역용으로 쓸 수 있을 거다…"
-박찬호, 당시 서산농장 담당

그런데, 문제가 있어. 소는 준비됐는데, 보낼 차가 마땅치가 않아. 하지만 우리 회장님, 자동차 공장을 가지고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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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자동차 사장한테) '회장님께서 소를 가져가시는데 트럭이 필요합니다' 라고 말했더니, '소가 뭐야' 그래요. 육로를 통해 가게 됐습니다, 트럭을 준비해 주십쇼. 며칠 동안 다른 건 생산 안하고 트럭만 생산했다고 그래요."

-우시언, 당시 종합기회실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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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케일이 어마어마 하지? 5톤 트럭을 개조했더니 한 대에 소 10마리도 거뜬해. 바깥으로 소가 나가지 못하도록, 트럭을 개조해 철제로 둘렀어.

이제 준비가 끝났다 싶었는데, 또다른 문제가 나와. 바로 구제역. 우제류 가축에 발생하는 급성전염병으로, 오염지역 출입 및 출입 차량을 통해서 전파될 수 있어. 북한은 구제역 위험이 있어서, 북으로 간 차는 다시 남한으로 돌아올 수 없는 거야. 그래서 회장님은 통 큰 결정을 내려. "그럼 트럭도 전부 주고 오자"라고.

▲ 소와 함께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다

디데이는, 1998년 6월 16일이야. 하루 전날인 6월 15일, 서산 농장의 상황은 어떨까?

"굉장히 급박했어요. 제가 그때 걸어다니질 못하고 뛰어다녔습니다. 1분 1초를 아껴 가면서 일을 해야하기 때문에."

-김철순, 당시 총무부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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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소를 태울 트럭이 쫙 늘어섰어. 소들은, 넓은 서산 평야를 뛰어 다녔어. 행복한 소를 만들기 위해 방목해 키웠거든. 멀리 가야하니, 운동도 미리 시킨 거야. 준비가 대단하지. 그리고 소들도 예쁘게 단장했어. 한마리 한마리 워낭을 달아줬어. 그 워낭을 달아주면서. "건강해야 한다. 네가 통일의 씨앗을 뿌리게 될 거야"라고 말해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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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선두로 보낼 소들을 미리 정해놨는데, 이름을 '은서'로 지었어. 그렇게 소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트럭에 푹신한 볏짚을 깔았어. 안전하게 편안하게 가라고. 이제 소들이 트럭에 오를 시간이야. 갑자기 차에 오르라고 하니 얼마나 낯설겠어. 도망가려 하고. 소를 트럭에 태우는데 무려 4시간이 걸렸대.

1998년 6월 15일 밤 11시. 소들을 태운 트럭이 드디어 출발했어. 판문점까지 거리는 260km. 서산 외각에 있는 좀 넓은 도로에 차량 50대를 1열로 주차해서 밤을 보내고, 새벽 5시쯤 다시 출발했어. 어느덧 서서히 날이 밝아오기 시작해. 청운동 정회장의 자택 앞에는 취재진으로 북새통이야. 간밤에 돼지꿈을 꿨다는 정회장. 집을 나온 정회장은 회사부터 들려 이발을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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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부터 계속해서, 이제 방북 날짜가 내일모레인데도 '야 내일 가냐?' 아시면서도 그러는 거예요. 표정이 초등학교 3, 4학년 소풍 갈 때에 지을법한 상기된 표정을 하시면서. 그때도 건강이 좋지 않으셨는데도, 그렇게 들떠있으신 걸 느꼈어요."

-박찬호, 당시 서산농장 담당

꼬꼬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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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량은 판문점을 향해 출발했어. 현장엔 호송차와 경찰차까지 동원됐어. 취재 열기도 어마어마해. 판문점 가는 길까지 모든 장면이 생중계 됐어. 주변에선 "누렁아! 나랑 같이 가자. 나도 네가 부럽다. 누렁아, 네가 꼭 통일 시키고 와라"는 외침들이 들려와. 실향민들이야. 트럭이 가는 내내, 실향민들이 배웅했어.

정주영 회장은 차를 세우고 잠시 내렸어. 그리고, 선두로 보내기로 한 소 '은서'도 잠시 트럭에서 내려. 정회장은 은서에게 꽃목걸이를 걸어주고 밝게 웃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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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통천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청운의 꿈을 안고 아버님 소를 판 돈 70원을 가지고 집을 나섰습니다. 그리고 긴 세월동안 저는 묵묵히 일하고, 참을성 있는 소를, 성실과 부지런함의 상징으로 삼고 인생을 걸어왔습니다. 이제 그 한마리 소가 천마리 소가 되어 그 빚을 갚으려, 꿈에 그리던 고향 산천을 찾아갑니다"

-당시 정주영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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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 회장은 다시 판문점으로 출발했어. 판문점은 군사분계선을 경계로 남과 북이 갈리지. 판문점에 들어선 정회장은, 중립국 감독위원회 사무소에 도착했어. 군사분계선이 건물을 가로지르는데, 들어가는 문은 남한이지만, 나오는 문은 북한인 곳이야.

정회장은 걸음을 떼기 시작해. 한 걸음, 또 한 걸음.. 절대로 넘을 수 없을 것만 같던, 금지된 그 선을, 드디어 넘었어.

꼬꼬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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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향 쪽을 가니까, 반갑습니다."

그럼 소떼 차량은 어떻게 이동했을까? 소떼 트럭은, 철사슬과 말뚝으로 막혀 있던 길이 활짝 열렸고, 군사분계선을 넘어 갔어. 차례차례 북으로 소떼 트럭이 넘어갔어. 운전사들은 북한 기사들에게 차 운전법을 알려주고, 걸어서 다시 남쪽 지역으로 돌아왔어.

꼬꼬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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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모르겠는데. 제가 긴장하고 간 탓인지 그런지 모르겠는데. 생각하기로는 그래요. 사실상 소를 가지고 안전하게, 멀리까지 갈 수 있었다면 더 좋았을텐데…"
-당시 트럭 운전기사

마지막 바통은, 대한적십자사가 물려 받았어. 북으로 가는 모든 지원물자는 적십자사 이름으로 기증이 돼.

"기증된 물품은 적십자 마크가 붙어요. 우리 전문가들이 전부 동행을 했었고 거기까지. 그리고 중간중간에 소들의 건강체크를 계속 했죠. 쓰러진 소는 없었나, 체크해서 들어갔기 때문에 병은 없는지… 심하면 결례죠."
-박병대, 당시 대한 적십자사 인도 단장

그렇게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소떼 방북 이벤트는 마무리됐어. 그럼 북한에 간 회장님은 뭘 했을까? 공연도 보고, 금강산 관광도 하고. 그리고 고향집에 가서 친척들도 만났대. 그야말로 금의환향이야. 그러던 어느날, 회장님이 북한에서 사라졌어. 그것도 밤에.

"고향방문 그 다음날, 통천으로 다시 가서 거기서 주무신다고. 다른 사람들은 금강산 숙소에 남아있었고, 회장님만 거기로 가신 거죠. 고향에 대한 애틋한 감정의 표현입니다."
-우시언, 당시 종합기획실 팀장

어릴 때 아버지와 같이 자던 그 고향으로 간 거야. 그날 밤, 정주영 회장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하룻밤이지만, 다시 그 어린 소년으로 돌아간 느낌이었을 거야.

▲ 금강산 관광도 가능했지만…

북에서의 일정은 총 7박 8일. 정회장은 다시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으로 돌아왔어. 회장님의 모습은 어땠을까? 갈 때보다 더 밝아. 왜냐, 엄청난 선물을 들고 왔거든. 이 합의서를 봐.

꼬꼬무

"6월 22일부로 합의한 금강산지구 관광개발사업과 관련하여 금강산개발 추진 위원회를 내오고 희망하는 대내외의 모든 개인 또는 단체들이 여기에 참가하도록 한다. 본 위원회 의원장직은 정주영 회장이 맡으며 본 위원회 밑에 연락협의회를 두고 수시로 협의하면서 본 사업을 운영 추진하기로 한다. -1998년 6월 22일"

금강산 관광의 물꼬가 터진 거야. 그런데, 이런 성과가 1주일 만에 가능했을까? 사실은, 9년 전인 1989년, 일본 나리타 공항을 통해 정주영 회장은 기업인 최초로 이미 북한을 방문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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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제가 평양을 방문하게 되면, 금강산 개발 문제, 그리고 경제 교류 문제, 이것을 서로 진지하게 의논해 볼 생각입니다."
-1989년 당시 정주영 회장

이미 이 때부터 대북사업의 뜻이 있었던 거야. 하지만, 논의만 하고 성사는 되지 않았어. 정회장은 그 때부터 계속 때를 기다렸어. 그리고 다시 문을 두드릴 땐, 판문점을 넘어 육로로 가겠다고 마음 먹었대. 판문점을 열어야 금강산도 열릴 거라 생각 한 거야.

4개월이 지나 10월 27일, 2차 방북이 이뤄졌어. 원래 소 500마리 보내기로 했는데, 거기에 1마리를 더 붙여 501마리를 보냈어. 왜? 총 1000마리를 보내는데, 그렇게 딱 떨어지면 마침표 같으니까 한마리를 더 보내자는 거야. 끝이 아니라 시작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셨대.

정회장의 방북 소식은 북한에서도 방송됐어. 돌아온 회장님은 이번에도 큰 선물을 받아 왔어. 정주영 회장과 김정일 위원장이 만난 거야.

꼬꼬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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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30일 밤에 9시쯤 됐나? 갑자기 그쪽 관계자들이 부산히 움직이더니, '위원장이 오신답니다' 해요. '연세가 높으신 정주영 회장이 계신데, 내가 찾아봬야 되겠다' 해서 왔다는 겁니다. 그때 북쪽 관계자들 얘기는, 그런 일이 없었다는 거예요. 그때 면담을 하시고, 한 30, 40분 정도 만났을 겁니다."
-우시언, 당시 종합기획실 팀장

당시 김정일 위원장은 외부인사를 직접 만나는 일이 거의 없었대. 이날을 기점으로, 계획 중이었던 사업들이 일사천리로 진행됐어. 정주영 회장이 돌아온 지 한달도 안돼서, 금강산으로 유람선이 떠났어. 그 모습을 현장에서 지켜 본 사람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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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큰 배가 만을 이렇게 끼고 도는데, 그 뾰족한 뱃머리가 하얗게 보이더라고요. 그때의 그 감동은, 말할 수가 없죠. 지금도 소름이 돋는데. 그때 배가 들어와서, 관광객들이 부두에 내려서, 부두에 내리자마자 펑펑 우시는 분도 계셨고. 지게에 아버지를 짊어지고 오신 분도 있었어요. 또 어떤 분은 제사상을 차려 가져오셔서, 꼭대기에 자리를 펴고 (돌아가신 실향민) 부모님께. 통일을 염원하면서 절을 하시는 분도 계셨습니다."

-백천호, 당시 금강산 관광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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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향민들에겐 평생의 한이자 꿈이 이뤄진 거야. 2003년엔 금강산 육로 관광까지 가능했어. 금강산 관광이 가능했던 10년동안, 금강산에 갔던 사람들은 195만명이야. 200만 가까운 사람이 정주영 회장 덕에 북녘땅을 밟아본 거지. 그리고 또 하나, 개성공단. 개성에 공단을 만들어서 남북이 함께 제품을 생산하기로 한 거야. 우리는 자본과 기술, 북한에서는 노동력을 제공했어. 2004년 12월, 개성에서 만든 시제품이 국내에 반입됐어. 첫번째 그 시제품, 일명 '통일 냄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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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남북 사이가 계속 좋기만 했을까. 1차 방북 석달 후, 북에서 온 통지문에는 "지난 8월까지 15마리의 소가 죽었고, 8마리의 소가 폐사 직전에 처해있음. 남조선에서 소들이 폐사되도록, 소들에게 소화될 수 없는 불순물질들을 먹이는 추악한 범죄를 저질렀음"이라 적혀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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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에 호의를 가지고 소를 보내주었는데, 소에게 밧줄을 먹여서 올려보냈다고…세상이 깜깜하더라고요 그 때."
-김철순, 당시 총무부 이사

소가 갑자기 줄줄이 폐사해서 부검을 해봤더니, 상식적이지 않게, 비닐과 밧줄이 나왔대. 정부는 물론, 국민들이 난리가 났어. 급히 조사단을 북으로 파견해서 죽은 소들을 조사하고, 우리나라에 남은 소들을 조사했어. 결과는? 비닐과 밧줄이 우리나라에서 들어간 게 맞아. 이게 어떻게 된 걸까?

소들을 방목해서 키웠잖아. 그 때 방목한 간척지가 예전엔 김 양식장이었대. 김 양식 때 쓰던 비닐과 밧줄이 땅 속에 남아있다가, 소들이 그걸 먹은 거야. 그런데, 우리나라에 있는 소들은 문제가 없잖아? 원인은 바로, 장시간 수송으로 인한 '수송열'이였어. 소가 장거리 이동 후 스트레스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호흡기질환이야. 차를 타보지 않은 소들이 장시간 이동한대다가, 낯선 북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죽은 거야. 오해를 풀면서 2차 방북이 이뤄졌지만, 남북관계가 언제든 틀어질 수 있다는 긴장감이 감돌았어.

금강산 관광은 어떻게 됐을까? 2008년 7월 11일에 일어난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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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새벽 5시쯤, 금강산 해수욕장 근처에서 혼자 산책을 하던 관광객 53살 박 씨가 북한군의 총격을 받고 숨졌습니다… 북측이 비무장 민간인인지 충분히 식별할 수 있었는데도 총격 시각을 조작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당시 뉴스 내용 中

출입금지 지역에 들어가서 벌어진 일인데, 북한군의 대응을 두고 문제가 커졌어. 결국 이 사건을 계기로 금강산 관광이 중단됐어. 그리고 개성공단도 마찬가지지야. 2016년 이후로, 북한의 핵실험, 미사일 발사로 가동이 멈췄어.

이렇게 멋진 이벤트를 했는데, 육로로 금강산을 관광하던 그 시절도, 통일냄비를 만들던 공장도, 지금은 너무 먼 얘기가 된 거야. 소떼 방북은 우리에게 뭘 남긴 거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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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정주영 회장이 타계했을 때, 북한 조문단이 장례식장을 찾아왔어. 전례 없던 최초의 일이야. 정치 상황과는 별개로 이런 일이 가능했던 때도 있었어. '통일해야 한다'라는 까마득한 얘기가 아니라, 한 번쯤은 우리의 특수한 역사에 대해 되돌아보는 계기가 됐으면 해. 서로가 열고자 하는 마음을 보여주다 보면 어느 순간, 소가 다시 왔다갔다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정주영 회장이 자주 한 말, "이봐 해 봤어?"처럼. 사람은 하고자 하는 뜻만 있으면 무슨 일이든지 이룰 수 있다고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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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강선애 기자 sakang@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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