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연예뉴스 | 강선애 기자] 배우 문채원이 달라졌다. 청순하고 사랑스러운 여성 캐릭터로 '찬란한 유산', '공주의 남자',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 남자', '굿닥터' 등의 작품에서 매력을 뽐냈던 그녀가, 최근 다소 어둡고 무거운 작품들로 시청자를 만나고 있다. 2020년 tvN '악의 꽃'에서 연쇄살인마로 의심되는 남편의 실체를 파헤치는 형사 차지원 역으로 연기 변신을 시도했던 문채원이 최근 종영한 SBS '법쩐'을 통해서는 어머니 죽음의 복수를 위해 사건의 진실을 좇는 검사 출신 육군 소령 박준경 역으로 무게감 있는 연기를 선보였다.
'법쩐' 속 박준경은 무채색이었다. 과거 회상신을 제외하고는 웃는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었고, 말투는 딱딱했다. 차가운 얼굴로 오로지 복수만을 위해 모든 걸 내던지는 박준경을 소화하며, 문채원도 자신의 얼굴에서 색을 지웠다. 고운 한복을 입고 해사하게 웃던 '공주의 남자' 문채원의 모습을 기억하는 입장에서, 지금의 문채원의 어두운 변신은 색다르게 다가왔다.
문채원은 배우로서 변화를 겪고 있다. 나이에 비례해 경험이 쌓이면서, 생각도 취향도 바뀌어가고 있는 중이다. 보고 나서 스트레스 받지 않고 기분이 좋아지는 작품, 분위기는 어두울 수 있지만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의미 있는 작품이 좋아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의 문채원이 추구하는 건 '편안함'이다.
문채원은 자신이 생각하는 인생의 화양연화(花樣年華, 인생의 가장 찬란한 시기)는 심적으로 '편안한 시기'라며 "지금이 과거보다 더 편안하고, 앞으로 더 편안한 시기가 오면 좋겠다"고 말한다. 연기를 잘 하고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것도 그런 '편안함' 위에 쌓을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문채원은 오늘도, 편안함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 건조하지만 생명력 있게, 어려웠던 박준경
문채원은 '법쩐'의 박준경 캐릭터를 위해 내적, 외적으로 어떤 준비를 했을까.
"박준경의 외면은, 어디에 가서 누굴 만나던 항상 단정할 것 같은 사람이라 생각했어요. 그 모습을 끝까지 일관성 있게 표현하려 했죠. 내면적인 건, 박준경의 성향이 건조하기도 하고 모범생이고 재미는 없는 인물이에요. 그렇다고 누가 미워할 만한 사람은 아니고, 정의롭죠. 현실에서 만나기에는 드문 사람이라 생각했어요. 전 박준경처럼 일관성이 있는 사람이 멋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렇게까지 일관성 있기엔 현실에선 힘들잖아요? 제가 현실에서 마주했을 때 멋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처럼, 이 역할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그렇다고 너무 건조해지면 캐릭터가 생명력이 없어 보일 수도 있으니, 건조하면서도 생명력은 있어야 했어요. 작가님도 그걸 바라셨는데, 그게 표현하기가 참 어렵더라고요. 자꾸 연구하고 연습하고 그러면서, 감독님 작가님이랑 피드백을 교류하면서 촬영했어요."
꾸밈에 관심 없고 단정한 박준경 캐릭터를 표현하기 위해, 문채원은 메이크업을 최소화 했다. 예뻐 보이고 싶은 여배우가 메이크업을 덜어낸다는 건 부담스러운 부분이다.
"처음에는 조금 그러긴 했어요.(웃음) 데뷔 초에는 막 멋모르고 미용실에서 화장해 주는대로 촬영하고 그랬는데, 언젠가부터는 제가 화장을 많이 하고 나오는 역할은 안했어요. 근데 박준경은 너무 최소화해서, 처음에는 약간 당황스럽긴 했죠. 하지만 초반에 몇 번 찍고 금방 괜찮아졌어요. 감독님이 멋있게 만들어준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해주신 것도 있었고, 현장에서 모니터를 하면서 촬영할 수 있었으니까요."
평소 차분한 성격의 문채원은 어찌보면 박준경과 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문채원은 박준경과의 싱크로율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비슷한 면이 조금은 있는 거 같지만, 그렇다고 많이 닮지는 않았어요. 현실에서 박준경을 만난다면, 사람이 너무 딱딱하고 차가워서 친해지기 어려울 스타일이에요. 그런 사람이 또,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은 없잖아요? 저랑 비슷한 면도 있긴 한데, 아닌 것도 많고. 저도 활발할 때가 있긴 해요. 그 활달한 모습을 극소수만 알고 있어서 그렇지.(웃음)"
문채원은 박준경을 연기하는데 영화 '스포트라이트'를 참고했다. 그 작품 속 '멋진 어른들'의 모습을 박준경을 통해 표현하고 싶었다고 한다.
"제가 미국 영화 '스포트라이트'를 엄청 좋아하는데, 그 영화 속에 나오는 어른들이 너무 멋있어요. '아, 저런 어른이 나도 되고 싶은데'라 생각하는데, 그게 현실에선 힘들죠. 그 영화 속 캐릭터들의 공통된 성격이 있어요. 다들 책임감을 갖고 자기 일을 묵묵히 하는데, 그게 옆에서 보기에 멋있는 거죠. 제가 멋있다고 생각한 그 캐릭터들처럼, 박준경도 그렇게 나오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걸 참고해 흉내내보고 싶었어요."
▲ 원래 이선균 팬, 함께 연기해 좋아
건조하지만 생명력을 보여줘야 하는 박준경은 분명 연기하기 쉽지 않은 캐릭터였다. 그 도전을 끝낸 문채원은 만족감도, 아쉬움도 동시에 느낀다.
"연기하는 거에 있어선, 아쉬움은 항상 남아요. '이 신에선 이렇게 할걸, 그럼 더 효과적이었을텐데' 하는 마음이 생기죠. 현장에서 모니터를 한다고 해도, 막상 TV로 나중에 보면 아쉬움이 남더라고요. 아쉬움은 있지만, 이런 작품을 좋은 분들과 같이 한 것, 이 배에 같이 탄 것에 대해서는 만족감이 있어요. 아쉬움에 너무 포커스를 두면 다음을 힘내서 못하니까, 아쉬움보단 만족감 쪽에 더 의미를 두려고 해요."
문채원은 '법쩐' 제작발표회 당시, 평소 이선균의 팬이었다고 고백하며 그와 같이 연기한 것에 기쁜 마음을 전했다. 배우로서 존경하고 좋아하던 선배와 맞춘 연기호흡은 어땠을까.
"너무 좋았어요. 제가 선균선배님에 대해, 혼자 시청자로서나 관객으로 좋아했던 그런 것들을 눈 앞에서 같이 하니까 좋을 수 밖에 없었죠. 선균선배는 사람냄새가 많이 나는 배우라고 생각해요. 어떤 역할을 해도 이것저것 다양하게 잘 어울리고, 현장에서 같이 할 때 편안하고 좋았어요. 좋아하는 마음이 있으니까 시너지가 돼서 더 편안할 수 있었던 거 같기도 해요. 선배님을 만나기 전에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하던 거랑 실제랑 별 차이가 없었어요. 어떤 대사를 해도, 다 말이 되게끔 하시는 게 신기하기도 했고요. 저도 연기하는 사람이지만, 좋아하는 배우가 있을 수 있잖아요? 이렇게 좋아하는 배우분들과 만나 연기하는 경험도 재밌는 거 같아요."
극 중 이선균이 연기한 은용과 문채원이 연기한 박준경은 친남매는 아니지만 가족 이상의 관계로 같이 진실을 좇고 복수를 이행하는 파트너였다. 남녀 캐릭터이다 보니, 남매 같은 사이에서 연인으로 발전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이 작품은 두 사람 사이의 멜로를 과감하게 쳐냈다.
"둘의 멜로 없는 관계성이 생각보다 어렵진 않았어요. 작가님과 사전미팅 할 때, 은용과 박준경의 관계에 대해 궁금해서 물어본 적이 있어요. 제가 보기에도 과거에는 좋아했다거나, 그런 게 있을 것 같았거든요. 작가님은 그런 관계 아니라고, 그런 감정선은 없으면 좋겠고 확실히 말해주셨어요. 오로지 사람으로 서로 의지하고 진짜 가족처럼 곁을 서로 내어준 관계이지, 남자 여자 관계 아니라고요. 그 관계를 확실하게 해줘서 더 좋았어요. 그게 애매했다면, 오히려 더 표현하기 어려웠을 거 같아요."
'법쩐'은 방영 내내 10%가 넘는 두자릿수 시청률을 기록하며 시청자의 사랑을 받았다. 문채원은 이 작품이 사랑 받은 이유를 이렇게 생각했다.
"이렇게 복수하고, 한방을 날리고, 정의를 실현시키는 이야기를 좋아해주신 거 같아요. 또 우리가 멜로는 없지만, 이 안에서도 사랑 이야기가 중요했다고 생각해요. 저도 몰랐는데 찍다보니, 결국 이것도 사랑 이야기이지 않나 싶었어요. 옆에 좋은 사람 하나 있는게 얼마나 큰지, '법쩐'도 그런 이야기를 그리고 있거든요. 이런 이야기를 법과 쩐, 정의란 소재를 가져와서 얘기하는게, 조금은 새로움도 있고 편안하게 볼 수 있지 않았나 싶어요."
▲ 자극보단 편안함이 좋다
'악의 꽃'에서 형사, '법쩐'에서 검찰, 군인 역을 소화했다. 과거 로맨스물 여주인공으로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였던 것과는 다른, 거친 변신이다.
"'이런 것도 해봐야지' 하며 도전하는 것도 있는데, 저한테는 동기부여가 돼요.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조금 더 다양하게 해보려 해요. 그런데 그게 재밌어요. 어떤 걸 하나만 한다면 지겹기도 하고, 에너지를 써서 없어지기도 하잖아요? 그래서 배우라면 변화가 조금씩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게 저한테도 너무 좋은 경험이죠. 일에 있어서 재미를 느낄 수도 있는 거니까요."
문채원은 연기를 하는 입장에서, 또 보는 입장에서, 스트레스 받지 않고 기분이 좋아질 수 있는 작품이 좋아졌다고 말했다. 과거엔 자극적인 소재의 작품도 좋아했는데, 지금은 그런 작품은 비선호하게 됐다는 설명이다.
"예전에는 스릴러나, 굉장히 드라마틱하거나, 파괴적인 소재의 작품도 좋아했어요. 그런데 취향이 변하긴 하더라고요. 최근에는 제가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스트레스를 받기 보단, 기분이 좋아지고 싶어요. 보고 나서 기분이 안 좋아지는 건 잘 안 찾아보게 되고, 또 그런 류가 아닌 작품을 연기하고 싶다는 마음이 더 생겨요. 과정이나 캐릭터는 어두울 수 있지만 하고자 하는 얘기는 그게 아닌 것도 좋고요. 과정부터 결과까지가 너무 자극적이기만 하면, 이젠 선호하지 않는 거 같아요."
그럼 문채원은 왜 자극적인 작품을 꺼리게 된 걸까.
"클수록 꼭 경험하지 않아도, 자꾸 보이고 들리는 것들이 있더라고요. 살면서 만나는 것들이 이미 자극이 되니까, 작품까지 그런 걸 보면 너무 자극적이란 생각이 들어 그렇게 된 거 같아요."
보면 행복한 작품을 선호한다고 해도, 꼭 그런 작품에만 출연하고 싶은 건 아니다. 한가지만 고수하면 지루해질 수 있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적절한 균형이 중요하다는 문채원이다.
"행복한 작품 위주로 보고 싶다고 그런 것만 보면, 또 지겨워질 수 있잖아요. 가끔 드라마틱하거나 슬픈 영화를 보고 싶을 때가 있듯, 그 정도의 변화는 필요하다고 봐요. 밝고 기분 좋은 걸 하고, 약간 다운되거나 건조한 감정이 있는 걸 하고. 그렇게 왔다갔다 해야, 하는 저도 안 지칠 거 같아요. '악의꽃'이란 드라마를 하면서 그 이어지지 않는 남녀관계를 연기하는게 너무 힘들었어요. 물론 '악의꽃'도 그때 하고 싶어서 했던 작품이에요. 그걸 끝내고 나니, 이젠 다른 게 해보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다음 작품으로 좀 밝고 약간 코미디 요소가 있는 영화를 찍었어요. 그걸로 분위기를 좀 풀었기 때문에, 다시 '법쩐'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들 수 있었던 거 같아요."
자극적이지 않고 스트레스 적은 작품을 고르는 태도에서 엿볼 수 있듯, 문채원은 '편안함'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긴다. 과거보다 지금이, 지금보다 미래에 더 편안한 시기가 됐으면 한다는 바람이다.
"인생의 화양연화가 화려한 시기를 말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남들이 좋은 시기라고 해도 내 마음이 그렇지 않다면, 100% 그렇다고 할 수 없잖아요. 제가 생각하는 화양연화는 편안한 시기라고 생각해요. 그 기준으로 보면, 전에는 그렇게 제 마음이 편안했던 적은 없었던 거 같아요. 그래도 지금이 과거보다 더 편안하긴 해요. 앞으로 더 편안한 시기가 오면 좋겠고요. 연기하는게 재밌고 뭔가 도전하는 것에 호기심도 많긴 한데, 너무 그러기만 하면 힘들잖아요? 그 안에서 편안해야 더 도전도 할 수 있는 거 아닐까요. 안 그러면 도전을 하면서도 사람이 휘청댈 테니까요. 제 일을 잘하기 위해서도 편안함은 필요할 거 같아요."
[사진제공=아이오케이컴퍼니]
강선애 기자 sakang@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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