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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찐리뷰] 우장춘 박사는 '씨 없는 수박'을 만들지 않았다

강선애 기자 작성 2023.02.17 12:21 수정 2023.02.17 12:30 조회 4,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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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SBS연예뉴스 | 강선애 기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16일 방송된 '매국노가 낳은 애국자'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배우 최영준, 브라운아이드걸스 제아, 가수 라이머가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한국에 보내달라는 일본 과학자

때는 1950년 1월. 일본 나가사키현에 위치한 한 수용소야. 이 수용소가 어떤 곳이냐, 일본에서 형사처벌을 받은 외국인들, 불법 체류자와 밀입국자를 강제 송환시키는 곳이야. 말이 수용소지 감옥이랑 마찬가지야. 한 번들어가면 1, 2년은 기본적으로 있어야하는 곳이야. 근데 이 무시무시한 곳을 한 남자가 제 발로 찾아왔어. 바로 이 사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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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남자의 별명은 불독. 이름은 스나가 나가하루. 일본에서 굉장히 유명한 과학자야. 그런데 이 과학자가 수용소에 와서 다짜고짜 하는 말이, "한국으로 강제송환 해주시오" 였어. 한국으로 가야하는데 이 방법 밖에 없다는 거야. 당시 한국과 일본은 국교 단절 상태였어. 그러니 정상적인 방법으로 한일을 왕래하는 건 불가능해.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한국으로 강제 추방 해달라고?

수용소 측에서는 절대 안 된다고 했어. 해방 직후,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야. 아사자가 속출하고 도둑은 넘쳐나. 오히려 한국 사람들이 못 살겠다고 일본으로 밀항하는 판국이야. 게다가 이 사람은 일본의 유명 과학자야. 이런 인재를 한국으로 보낸다? 말이 안되지.

강제 송환을 거부하니 이 사람은 자신의 호적등본을 꺼내 보여줬어. 그러면서 자신은 한국 사람이라며, 한국으로 보내달라고 거듭 요구했어. 그의 호적등본을 본 수용소 관계자는 깜짝 놀랐어. 이 과학자가 진짜 한국 사람이었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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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적에는 스나가 나가하루라는 일본 이름이 아닌 한국 이름이 적혀있어. 바로 '우장춘'. 씨 없는 수박을 만든 것으로 유명한 그 농학박사 우장춘이야.

그런데, 그거 알아? 사실, 씨 없는 수박은 우장춘 박사가 만든 게 아니야. 우리가 우 박사에 대해 알고 있는 건 빙산의 일각이야. 삶 자체가 한 편의 드라마였던 비운의 천재 과학자, 우장춘의 이야기를 지금부터 시작할게.

▲ 매국노의 아들

1903년 11월 24일, 일본 히로시마현의 한 작은 도시. 한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장춘은 5살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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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장춘의 아버지는 친구와 저녁 약속이 있었어. 얼마전에 친구가 집 근처로 이사를 와서, 집들이 겸 회포를 푸는 자리였어. 아버지가 외출하고 얼마 후 저녁 8시 반쯤, 바깥 골목이 꽤 소란해. 장춘의 어머니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에 가서 무슨 일이 났냐고 물었어. 알고보니 좀 전에 살인사건이 나서 동네가 발칵 뒤집혔다는 거야. 장춘의 어머니가 집으로 발길을 돌리려던 순간, 갑자기 등골이 오싹함을 느꼈어. 장춘의 어머니는 급히 남편의 친구 집으로 달려갔어. 그런데 집 앞엔, 사람들이 벌떼처럼 모여있었고 그 안에 피투성이가 된 채 누군가 쓰러져 있었어. 바로, 장춘의 아버지였어. 친구를 만나러 간 남편이 잔혹하게 살해당한거야.

작은 도시에 일어난 살인사건. 범인은 금방 찾았어. 경찰서로 두 남자가 찾아와 자신들이 살인을 저질렀다고 자수했거든. 그 범인은 장춘의 아버지가 만나기로 했던 친구, 그리고 그의 하인이었어. 경찰은 범인에게 왜 같은 조선인 친구를 죽였냐고 물었어. 범인은 위풍당당하게 이렇게 대답했어.

"그 자는, 왕비를 살해한 극악무도한 자요. 조선의 신하로서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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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를 살해한 자에게 한 복수. 1895년 일본의 군인과 경찰, 자객들이 경복궁에 쳐들어가 명성왕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을 말하는 거였어. 여기엔 조선인 군인 몇 명도 가담했어. 그 중에서 주도적이었던 인물이 바로, 장춘의 아버지 우범선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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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범선은 당시 조선 훈련대 대대장이었는데, 휘하 장병들과 함께 궁으로 쳐들어 간 거야. 그리고 이들은 명성왕후 시신을 불에 태우는 과정에도 가담했어. 고종은 을미사변 가담자에게 체포령을 내렸고, 우범선은 일본으로 망명을 간 거야. 일본으로 넘어가 굉장히 조심하며 살았는데, 사건 8년만에 친구에게 암살 당한 거지.

영문도 모른 채 하루아침에 아버지를 잃은 어린 장춘은 조선 사람들에게는 역적의 아들, 매국노의 아들이라는 주홍글씨가 새겨졌어. 얼마 후 장춘은 집을 떠나야만 했어. 만삭이었던 엄마가 동생을 낳은 거야. 행상으로 어렵게 생활하고 있는데, 남편 없이 혼자 아이 둘을 키울 수가 없어서 장춘을 잠시 다른 곳에 맡기기로 한 거야. 도쿄의 한 사찰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이었어. 어린 장춘은 그렇게 엄마와 헤어질 수 밖에 없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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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후 장춘이 9살이 되던 해, 어머니가 드디어 데리러 왔어. 그런데 엄마는 장춘을 보고 깜짝 놀랐어. 제대로 먹지 못해서, 앙상하게 말라있던 거야. 집에 온 장춘은 마냥 좋았어. 여전히 가난하고 배고팠지만 어머니와 동생과 한 집에서 살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학교에도 다니기 시작했어.

그런데 학교에서는 '센진노코(조선 놈의 자식)이라고 놀림을 당하기 일쑤였어. 일본 이름은 나가하루였지만 성은 우 씨였거든. 참다 못한 장춘은 주먹다짐도 했어. 하지만 여럿이 덤비는데 혼자 어떻게 이겨. 흙투성이가 되어 집으로 돌아오는데 어머니와 마주쳤어. 어머니는 길가에 핀 민들레 꽃을 가리키며 아들에게 용기를 북돋는 말을 해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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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는 사람의 발에 아무리 짓밟혀도 꽃을 피운단다. 우리 아들도 낙심하지 말고 저 민들레처럼 꽃을 피워봐."

▲ 아버지의 나라가 궁금해지다

시간이 흘러 장춘은 중학교에 진학했어. 고생하는 어머니를 위해 정말 열심히 공부했대. 특히 수학은 항상 1등이야. 그래서 장춘은 이공계 대학에 가고 싶었어. 하지만 돈이 없어. 그런데 장춘에게 장학금을 주겠다는 곳이 나타났어.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을 통치하던 기관, 조선총독부였어. 조선총독부는 장학금을 지원하는 대신, 자신들이 가라는 학과에 진학할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어. 당시 조선총독부의 관비 유학생 제도는, 사실 친일파를 육성하기 위해 만든 제도였어. 조선인이 너무 똑똑해지면 안된다고 생각해 고등교육을 못 받게 했대. 장춘은 우 씨 성을 갖고 있어서 놀림은 좀 받았지만, 그동안 사회적으로 차별을 받은 적은 없었거든. 그런데 난생 처음으로 조선인이라서 사회적 차별을 받게 된 거야. 하지만 조선총독부의 이 제도가 없으면, 공부는 꿈도 못 꿔. 아이러니하게도, 아버지의 나라, 조선이 식민지가 된 상황이 장춘에겐 기회가 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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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춘은 결국 장학금을 받았어. 공부를 하고 싶었으니까. 그리고 조선총독부가 가라는 대로, 도쿄제국대학 농학 실과에 입학해. 정식 대학 과정은 아니고, 농업 기술자를 양성하는 전문학교에 진학한 거야.

"(당시) 조선에서 일본으로 유학을 가는 거의 모든 학생들은 청강생 신분으로만 받아졌습니다. 졸업할 때 졸업장이 나오지 않습니다. 우장춘의 경우에도 전문학교의 농학과로 진학을 했지만 그 신분은 정규생이 아니라 청강생 신분이었습니다."
-김근배 교수, 한국 근현대사 과학기술사 전공

여기서 하루 종일 농장에서 비료 옮기고 삽질하고 말 그대로 농업 실무만 배우는 거야. 힘들고 고된 일만 배우니 중간에 그만두는 학생이 속출해. 그런데 장춘은 생각보다 잘 버텼어.

그러던 어느날, 조선의 한 도지사가 조선총독부 관비 유학생들을 위해 강연을 하러 왔어. 신입생 장춘도 참석했어. 가서 연설을 듣는데,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 일본에서 태어나 자란 장춘은 한국말을 할 줄 몰랐거든. 그런데 강연을 듣던 학생들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그 도지사가 "여러분들은 천황폐하의 막중한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공부에 매진해 천황폐하께 충성을 다하시오"라고 친일 발언을 했거든. 그 말에 분노한 한 학생이 단상에 올라가 도지사의 멱살을 잡았고 강연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어. 그 학생은 와세다 대학의 조선인 유학생 김철수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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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습을 본 장춘은 큰 충격을 받았어. 상황이 종료된 후 장춘은 김철수에게 다가가 이게 무슨 일이냐 물었어. 그랬더니 철수는 장춘에게 호통을 쳤어. 장춘이 일본 말로 물어보니까, 한국인이면서 조선말도 모르는 놈이 무슨 자격으로 여길 왔냐는 거야. 장춘은 아버지가 조선인이라며 이름은 우범선이라 말했어. 김철수는 그 이름을 듣고 더 기가 막혔어. 명성왕후 시해 가담자라는 걸 알고 있었거든.

"당신 아버지는 역적이고 매국노요. 아버지가 매국한 것에 속죄하고 싶소? 그럼 성을 바꾸지 말고, 조선을 위해, 조선의 독립을 위해 사시오."

아버지의 죄를 아들인 네가 속죄하며 살라고 한 거야. 그 후, 장춘은 김철수를 몇 번 더 찾아갔대. 아마도 아버지와 아버지의 나라에 대해 알고 싶었던 게 아닐까.

▲ 조선인이라 받는 차별들

6개월 후, 장춘은 일본 농림성의 국립농사 시험장에 취업했어. 지금으로 치면 9급 공무원 정도가 된 거야. 봉급은 많지 않았지만, 어머니와 동생과 안정적으로 살 수 있게 됐어. 그리고 어느날, 이웃집 아주머니의 소개로 와타나베 코하루라는 초등학교 선생님을 만났어. 얼마 뒤 두 사람은 결혼을 결심해. 그런데 여자 쪽 부모의 반대에 부딪쳤어. 어떻게 조선인과 결혼을 하냐면서, 당장 헤어지래. 이렇게 장춘은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또 한 번 차별을 겪게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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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춘을 사랑했던 와타나베는 친정과 의절하고 장춘과 결혼했어. 그렇게 결혼에 골인한 둘은 한동안 행복했어. 그런데 또 문제가 생겨. 장춘의 아내가 임신을 한 거야. 장춘의 성이 우 씨잖아. 아이한텐 아내의 성을 주고 싶었던 거야. 자신처럼 차별 받으면서 살면 안되니까. 그런데 아내는 친정과 의절해서, 아이에게 성을 주고 싶어도 줄 수 없어. 그때 장춘의 지인이 나서서 도움을 줬어. 자신의 집안에서 장춘의 아내를 양녀로 받아 줄 테니, 그 성을 아내가 받아서 아이한테 물려주라는 거야. 장춘도 데릴 사위로 이름을 올리고, 아내와 같이 '스나가' 라는 성을 받았어. 장춘은 이 '스나가'라는 성을 사용했을까?

장춘은 농사 시험장에서 열심히 일했어. 능력있고 성실한 연구원이었어. 그런데 장춘은 여기서도 차별을 겪어. 당시 가장 인기 있는 부서가 벼, 밀, 보리 등을 연구하는 곡물 부서였는데, 장춘이 아무리 성과를 내도 계속 꽃을 다루는 비인기 부서에만 배정됐어. 전문학교 출신에, 조선인이라는 이유때문에. 하지만 장춘은 좌절하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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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페튜니아라는 꽃으로, 장춘이 연구하던 꽃이야. 당시에 이 꽃은 관상용으로 미국과 유럽에서 인기였어. 홑꽃보다는 겹꽃 페튜니아가 더 화려하고 상품 가치가 높았어. 근데 겹꽃 페튜니아를 만드는게 굉장히 어려워. 아무리 교잡을 해도, 자꾸 홑꽃이 섞여서 나왔대. 세계 여러 회사들이 완벽한 겹꽃 종자를 만들려 도전했는데 다 실패했어. 그걸 성공해낸 게 우장춘이야. 세계 최초로 완벽한 곁꽃 페튜니아 종자를 개발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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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 시험장의 책임자는 이 사실을 한 종묘회사에 알렸고, 그 회사는 곁꽃 페튜니아 종자로 돈방석에 앉게 돼. 미국과 유럽으로 불티나게 팔렸거든. 그 종자 가격은, 당시 금값의 무려 10배였대. 그럼 이 종자를 개발한 우장춘도 돈을 벌었을까? 아니. 종자의 소유권을 전부 그 회사가 가져가서 장춘이 얻은 건 밥이랑 커피 밖에 없었대.

장춘의 관심사는 돈이 아니었어. 이 성과를 논문으로 만들어 박사 학위를 따는 거였어. 박사 학위만 있으면 더 이상 차별받지 않을 거라 생각했거든. 논문은 다 썼고, 이제 도쿄제국대학에 제출만 하면 돼. 제출 하루 전, 장춘은 설레는 마음에 잠을 이루지 못했어. 그런데 어디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 큰일났다고, 지금 농장에 불이 났다는 외침이었어. 거대한 불길이 본관 건물을 뒤덮었어. 그 농장에는 장춘의 연구, 결과, 실적이 다 있어. 특히 논문까지.

장춘은 무작정 불길이 치솟는 건물로 뛰어 들었어. 직원들이 그를 가로 막았어. 장춘은 자신을 붙잡는 직원들 틈에서 발버둥 치며 눈물을 흘렸어. 수년간의 노력들이 한순간에 잿더미가 된 거야.

▲ '진화론'의 오류를 지적한 '종의 합성' 이론

장춘은 포기하지 않았어. 어머니가 해준 민들레 꽃 이야기를 떠올리며, 다른 연구에 매진하기 시작했어. 이번엔 유채 연구였어. 유채가 그 당시에는 호롱불 기름으로 사용됐어. 병충해에 강하면서 수확량 많은 새로운 유채 종자를 개발하기 위해, 다시 장춘은 연구실에서 살기 시작했어.

6년이 흘러 1936년 5월 4일, 장춘의 나이 38세에 드디어 박사학위를 받았어. 그런데, 장춘의 이 박사학위 논문은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어. 당시 진리처럼 여겨지던 한 이론의 오류를 지적했거든. 바로 찰스 다윈의 '진화론'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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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다윈은 진화의 원동력을 자연도태라고 설명했어. 자연환경에 보다 적합한 개체가 살아남아 계속 자손을 남기면서 새로운 종이 탄생한다는 거야. 그런데 장춘은 그 진화론에 부족한 점이 있다고 생각했어. 서로 다른 종이 자연상태에서 교잡해 새로운 종이 탄생할 수 있다는 거야. 이걸 처음으로 증명한 사람이 우장춘이이야. 증거는? 바로 그가 연구하던 유채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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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춘은 연구 끝에, 유채가 배추와 양배추의 교잡종이라는 걸 발견했어. 누군가 인위적으로 교잡한 게 아니라 자연 상태에서 교잡해 탄생한 게 유채라는 걸, 장춘이 발견한거야. 그리고 또 하나, 배추와 흑겨자가 교잡해 나온 게 갓, 갓김치의 그 갓이라는 걸 발견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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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우장춘의 이론을 '종의 합성' 이론이라 해. 다윈의 진화론은 장춘의 이 논문 때문에 수정, 보완 됐어. 그리고 장춘이 교잡종을 설명한 삼각형 모양, 이걸 'Triangle of U' 즉, '우의 삼각형'이라 불러. 이 개념은 지금까지도 육종학의 초석이 됐어.

이 종의 합성은, 학문적인 것 그 이상의 가치가 있었어. 그동안 제국주의 국가들이 찰스 다윈의 진화론을 악용해서 자신들의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고 있었거든.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적자생존이라며. 그런데 서로 다른 종이 만나 새로운 종이 탄생한다는 종의 합성 이론은, 모든 생명 하나하나가 다 가치있다는 걸 의미하잖아. 그의 이론은, 철학적인 성취까지도 해낸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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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춘은 이 논문으로 농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그 소식은 한국에도 전해졌어. 조선인 천재 과학자의 탄생, 세계에서 인정을 받은 거야. 일제강점기에 진짜 어마어마한 사건이야.

장춘은 승진을 기대했어. 농학 박사 학위를 받은 대부분이 당시 고위직으로 진급했거든. 그런데 해가 넘어가도록 소식이 없어. 박사 학위를 따도, 16년째 하위직 신세야. 그 이유는 조선인이라서. 게다가 장춘은 이런 이유로 더 배척당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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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우장춘이 쓴 '배추 속 식물에 관한 게놈 분석'이란 논문이야. 그런데 표지에 '나가하루 우'라고 적혀있어. 스나가 라는 일본 성을 얻었는데도 장춘은 계속 아버지의 성 우 씨를 고집한 거야. 세계를 뒤흔든 그 '종의 합성' 논문에도 한국 성을 쓴 거지. 자신에게 충격을 줬던 김철수의 영향이 컸던 걸까. '우' 라는 성이 장춘에게는 어떤 의미였을까?

▲ 한국으로 온 천재 과학자

하지만 장춘은 결국 농림성을 떠났어. 대신, 민간 종묘회사로 이직했어. 초대 연구 농장장 자리와 사택 제공, 최고로 좋은 대우를 받았어. 그렇게 장춘은 민간 회사에서 새로운 농업 기술을 발전시켜 나갔어.

이직한 지 9년째 되던, 1945년 8월 15일. 대한민국은 일본으로부터 해방을 맞았어. 해방 이후 한국은 엄청난 빈곤과 식량난에 허덕여. 굶어 죽는 사람이 곳곳에서 속출해. 이런 상황에선 좋은 종자를 심어 농산물 생산량을 늘려야 하는데, 그게 불가능했어. 일본이 철수하며 종자산업과 관련된 모든 시스템과 자료를 다 가지고 가 버렸고, 농업 기술자들도 일본으로 떠났어. 한국에 남은 건 하나도 없었어. 스스로 할 수 있는 방법은 밀수 밖에 없는데, 돈이 없으니 그것도 못해. 이 난제를 해결할 사람은 우장춘 박사 뿐이야.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자는 의견이 나왔어. 그가 온다면, 구세주나 다름 없어. 종자 생산 및 농업 기술자 양성까지 기대할 수 있어. 하지만 우장춘이 한국에 과연 오겠냐며 회의적인 의견들이 나왔어. 일본에서 그렇게 대우가 좋은데, 고생길이 뻔한 한국에 뭐 하러 오겠냐는 거야. 또, "친일파의 자식과 어떻게 일하냐"며 반감을 드러내는 사람들도 있었어.

일본에 있던 우장춘 박사는 한국에 와달라는 연락을 받았어. 가족들은 반대했어. 한국 상황이 안 좋은 건 둘째 치고, 한국말도 못하고 연고도 없는데 가서 어떻게 생활할 거냐고 걱정했어. 게다가 당시 장춘의 자녀가 모두 6명인데, 막내 아들은 고작 7살이었어. 장춘은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

장춘은 오랜 시간 고민한 끝에 한국에 가기로 결심했어. 근데 생각지도 못한 난관에 부딪쳐. 출국 허가가 안 나오는 거야. 당시 한국과 일본은 국교 단절 상태라, 개인이 자유롭게 오갈 수 없고 국가의 허락이 필요해. 일본이 이런 국가적 재원 우 박사를 쉽게 내줄 리가 없잖아. 그래서 장춘은 1950년 1월, 바로 그 수용소를 제 발로 찾아간 거였어. 한국에 가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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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우장춘 박사가 한국에 오던 날. 우 박사의 짐에는 뭐가 들어 있었을까? 씨앗들이었어. 한국 정부는 한국행을 결정해 준 우 박사에 사례금으로 100만원을 보내어. 그건 당시 공무원의 1년치 연봉이었어. 일본에 남을 가족들한테 주라고 보냈는데, 우 박사는 그 돈을 우량 종자를 사는데 다 쓴 거야.

며칠 뒤 귀국 환영행사가 열려.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해 각계각층 인사가 모였어. 이 곳에서 우 박사는 이런 말을 해.

"저는 지금까지 어머니의 나라인 일본을 위해서 일본인에게 뒤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노력해 왔습니다.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나라인 한국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저는 이 나라에 뼈를 묻을 것을 여러분에게 약속합니다."

1950년 귀국 환영회 때, 그 곳에서 직접 우장춘 박사의 이야기를 들은 분이 계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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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못생겼어요. 아주 스마트하지 않아요. 덥수룩하고 멋도 없어. 그런데 얘기하시는 게, 인간이야. 인간미가 물씬해. 그 한마디야. '내가 올 자리에 왔다' 그 말이야. 첫 마디가. 나는 아무 것도 바라는 게 없다. 여기서 일 열심히 하는데, 여러분하고 같이 일하겠다. 그때 그 한마디가… 눈물 나게 고마워, 지금도. 일본에서 편안하게 살 수 있어요. 그 양반 실력으로. 다 뿌리치고 온 분이야. 아버지의 나라 온다는 거야. 얼마나 고마워요."
-현영주(97세). 중앙원예기술원 동료.

▲ 우장춘의 대단한 업적, 단 '씨 없는 수박'은 아니다

귀국 환영회가 끝난 우 박사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농촌투어'였어. 농촌의 실상을 먼저 확인해야 하니까. 우 박사의 마음은 급해졌어. 생각보다 농촌 상황이 너무 심각한 거야. 그런데 입국 두 달 만에 엄청난 일이 벌어져. 6.25 한국 전쟁이 발발한 거야. 불행 중 다행인 건, 우 박사가 있던 부산까지는 아직 괜찮았는데, 여기저기서 피란민이 몰려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어.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전시 상황이야. 다시 일본으로 돌아간다 해도 누구도 손가락질 할 수 없어. 실제로 당시 사회지도층의 일부는 일본으로 피란을 가기도 했대. 그럼 우 박사는? 일본행을 거부하고 끝까지 여기 남아 자기가 할 일을 하겠다고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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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연구 환경은 너무 열악했어. 사람도 물자도 부족해. 돈이 없으니, 농사시험장의 논까지 팔아가며 연구를 계속 했대. 논이 없으면 연구를 못하는데, 그걸 조금씩 팔아가며 연구를 계속 한 거야. 그런 최악의 환경에서도 우 박사는 엄청난 품종들을 만들어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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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배추. 속이 꽉 차고 잎이 두꺼운, 지금 우리가 흔히 보는 배추야. 이런 배추를 '결구배추'라고 불러. 우리나라에서 이 배추가 자랄 수 있는 건, 다 우장춘 박사 덕분이야. 195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 배추는 이런 모습이 아니었어. 이 사진을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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얇고 부실한 배추. 이게 그 당시 배추야. 이걸로 김치를 담글 수 있을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빈약한 배추지. 우 박사가 개발한 이 배추는 반도체 등과 함께 우리의 생활을 바꾼, 과학기술 70선에 뽑혔어. 그만큼 대단한 업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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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귤. 우 박사가 제주도의 따뜻한 기후에 맞게 대량생산 할 수 있도록 개량했어. 무와 감자도. 전부 병충해에 강하고 일정한 크기로 자랄 수 있도록 우 박사가 개량한 거야. 우 박사는 전국 각지를 돌며 토질, 기후, 강수량 등을 조사해 데이터를 만들었어. 그리고 어떤 품종을 어떻게 개량해야 많은 국민들이 잘 먹을 수 있을지를 연구했어. 같이 일한 연구원들 사이에선, 신과 같은 존재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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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종을 해보고 공부를 해보면, 그 분이 천재였다는 걸 알 수 있었어요."
-이정동(87세), 중앙원예기술원 동료

"우 박사가 진짜로 큰 일을 하신 것은, 농학의 진수를 가르쳐주시고 가셨다 그거야."
-현영주(97세). 중앙원예기술원 동료.

그런데 우 박사의 카리스마가 통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어. 바로 농민들이야. 아무리 우량 품종을 개발하면 뭐해. 농민들이 이걸로 농사를 지어야 하는데. 농민들은 관심도 없는데다가, 육종학이라는 새로운 농업 기술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어. 그 분들의 생각을 바꾼다는 게 굉장히 어려운 문제야. 이 분들도 농사 지으며 가족들 생계를 책임져야 하니까. 오랜 시간 쌓인 관성을 무시할 수 없지.

고민 끝에 우 박사가 아이디어를 냈어. 바로 이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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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 없는 수박. 원래 씨 없는 수박은, 기하라 히토시라는 일본 사람이 만든 거야. 근데 그것도, 우 박사의 종의 합성 이론을 토대로 만든 거야. 우 박사는 이 씨 없는 수박이 육종학의 필요성과 우수성을 알릴 수 있는 좋은 예라 생각한 거야. 효과는 아주 좋았어.

"놀라는 정도가 아니고, 씨 없는 수박은 맛도 너무 환상적입니다. 완전히 별천지에 온 기분, 딴 세상에 온 기분이었죠. 그래서 사람들이 그 씨 없는 수박을 견학하러 많이 왔죠."
-이정동(87세), 중앙원예기술원 동료

씨 없는 수박을 본 사람들은 육종학의 우수성을 직접 체감하게 됐어. 대신, 우리나라에서는 씨 없는 수박을 우장춘 박사가 개발했다는 오해가 생겼어.

▲ 죽는 순간 까지도, 오로지 연구 생각만

그렇게 채소 개량 연구에 매진하던 1953년 7월. 드디어 한국전쟁 휴전 협정이 체결됐어. 그리고 며칠 뒤 일본에서 전보가 와. '모친 중태. 귀국 요망'이라는, 어머니께서 몹시 위독하다는 연락이었어. 우 박사는 급히 일본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어. 그런데 갈 수가 없어. 한국 정부가 출국 허가를 안 내줬거든. 우 박사가 이승만 대통령한테 직접 부탁을 해도 허가는 안 났어.

우 박사의 출국을 불허한 이유 첫째는, 일본에 갔다가 한국에 돌아오지 않을까봐. 둘째는, 한일 관계가 좋지 않아서. 특히 이 무렵이 외교적 갈등이 극심할 때였어. 결국 8월 18일, 우 박사는 모친 사망 전보를 통보 받게 돼. 당시 일본에 있던 우 박사의 가족은 어땠을까? '꼬꼬무'가 어렵게 우 박사의 자녀분들을 일본에서 직접 만났어.

꼬꼬무

"그건 정말 고통스러웠을 거예요. 할아버지가 암살되어서 돌아가신 후에 아버지는 절에 맡겨졌어요. 절에 맡겨져셔 영양실조에 걸렸습니다. 영양실조에 걸린 아버지를 다시 데리고 와서 할머니가 영양 가득한 것들을 잔뜩 먹이셨어요. 동생에게도 보여주지 않고 몰래 먹이셨어요. 정말로 소중하게 아버지를 키웠다고 생각해요."
-스나가 요우코, 우장춘 박사의 셋째 딸

"정말로 할머니로서는 소중한 아들이고, 아버지로서는 둘도 없는 소중한 어머니였으니까. 그런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다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이었을 거예요."
-스나가 모토하루, 우장춘 박사의 다섯째 아들

한일 관계 때문에 어머니 임종을 지키지 못하다니 얼마나 비극적이야. 당시 이 모습을 안타까워하던 우 박사의 제자들이, 연구소 강당에 빈소를 마련해줬어. 어머니 넋을 기릴 수 있게. 이 소식은 언론을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됐고, 전국 각지에서 조의금이 들어왔어. 이렇게 모인 조의금, 우 박사는 어떻게 썼을까?

꼬꼬무

우 박사는 가족에게 이 돈을 보내지 않고, 연구소 근처 땅을 파기 시작했어. 우물을 만든 거야. 당시 가뭄이 극심한 데다가, 연구소가 물 부족 상태였거든. 우 박사는 이 우물이 완공된 후에, '자유천'이라 이름 붙여. 자애로운 어머니의 젖과 같은 샘이라는 뜻으로. 그렇게 어머니를 기리는 마음을, 사람들과 함께 나눈 거야.

꼬꼬무
꼬꼬무

우 박사는 모든 생활이 연구소 중심이었어. 낡은 고무신 하나를 신고, 낮이며 밤이며 오로지 연구에만 매달렸대. 실제로 한참 연구에 몰두할 땐 대통령이 불러도 안 갔대. 그렇게 한국에 온지 5년만에, 그는 배추, 무 등 주요 채소 종자를 대량 생산하는데 성공했어. 일본으로부터 종자독립을 이룬 거야.

1959년 6월, 서울의 한 병원이야. 우장춘 박사가 병상에 누워있어. 위와 십이지장 궤양 때문에 수술을 받았어. 평소 지병이 있었는데, 나아질만 하면 일하고, 또 일하는 통에, 갑자기 더 안 좋아진 거야. 제자들은 이 소식을 듣고 급히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왔어. 그런데 우 박사는 병문안 온 제자들을 보고도 그랬대. "벼는 어떻게 되어가나. 가져왔나"라고. 당시 1년에 두 번 수확할 수 있는 벼를 한참 개발중이었거든. 우 박사는 병상에 누워서도 그 벼를 찾은 거야. 결국 다른 제자가, 부산에서 연구 중이던 그 벼를 가지고 올라왔어. 우 박사는 그걸 보고 몹시 기뻐했대.

우 박사가 입원한지 두 달이 지난 어느 아침, 농림부로부터 연락이 왔어. 정부에서 문화포장을 수여하기로 했다는 거야. 나라의 권위와 명성을 널리 떨친 사람에게 주는 포장이야. 건국이래 두번째 문화 포장이었어. 첫번째는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 선생님이야.

그날 오후, 우 박사는 병상에 누워 떨리는 손으로 상장을 받았어. 당시 우 박사는 눈물을 흘리면서 이런 말을 했대.

꼬꼬무
꼬꼬무

"고맙습니다. 나의 조국이 드디어 나를 인정해주었군요. 기쁩니다."

그로부터 3일 뒤 1959년 8월 10일, 우 박사는 세상을 떠났어. 못 다 이룬 벼 연구를 끝까지 해달라는 마지막 바람을 남기고, 한국에 온 지 9년 5개월만인 61세에 돌아가셨어.

꼬꼬무

수많은 사람들의 애도 속, 우 박사는 수원의 산기슭에 잠들었어. 아버지의 나라에 뼈를 묻겠다는 그 약속을 지킨 거야.

꼬꼬무

"진짜 어버이 같은 분 아닙니까? 우리 입장에서 볼 때 하늘 같은 분 아닙니까? 그런 분이 돌아가셨다는데 그 슬픔이야… 말단 직원이나 윗분들이나 할 것 없이 마음은 똑같았죠. 그런 분을 잃었다는 그 자체 만으로도 슬픔에 잠길 수 밖에 없었죠. 저도 이제 단풍이 져도 너무 짙게 져 있거든요. 이 단풍이 언제 떨어질지… 그 날짜만 대기하고 있는데, 그런데 내 인생이 그래도, 꽃길을 걸었다고 생각해요. 내가 인생을 살아오면서 여태까지 꽃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은, 박사님을 만났기 때문에. 내 생애 잊지 못할 고맙고 대단한 은인이라 생각하고 있어요."
-이정동(87세), 중앙원예기술원 동료

아버지의 나라, 어머니의 나라. 한평생 그 경계선 위에서 경계인의 삶을 살아왔지만 그 한계를 스스로의 능력으로 깬 우장춘 박사. 그가 세상을 떠난 지 64년이 지났어. 그리고 지금 우리의 식탁 풍경은 엄청나게 달라졌지. 만약 그 때 우 박사가 한국에 오지 않았다면, 지금 같은 김치는 먹을 수 없었을 거야. 김치를 먹을 때, 잘 익은 귤을 먹을 때. 문득문득 한번쯤 우장춘 박사를 떠올려줘.

꼬꼬무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강선애 기자 sakang@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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