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30일(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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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찐리뷰] 미국이 태워주지 않은 헬기…5년을 베트남 교도소서 지낸 한국 외교관

강선애 기자 작성 2023.02.10 12:47 수정 2023.02.10 12:59 조회 5,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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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SBS연예뉴스 | 강선애 기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9일 방송된 '1975 베트남 탈출기'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가수 별, 배우 송영규, 김기혁 아나운서가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최후의 사이공, 그 곳에 있던 사람들

때는 1975년 3월 서울. 한 신문사의 안병찬 기자는 사무실에서 전화 한 통을 받았어. 엄청 다급한 목소리로 "지금 즉시 사이공으로 떠나라"는 신문사 사장의 전화였어. 사이공, 어딘지 알아? 베트남 남부에 위치한 도시야. 현재 이름은 호찌민. 사이공은 호찌민의 옛 이름이야. 신문사 사장은 왜 안 기자한테 얼른 사이공으로 떠나라고 한 걸까? 사이공에 도착한 안 기자에게 이런 국제 전보가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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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을 소리나는대로 영어로 옮긴 국제 전보였어. 여기에는 '만약 불행히도 사이공이 함락 직전에 놓이면 사이공의 최후 표정을 컬러로 찍고 돌아오라'는 메시지가 담겼어.

사이공이 왜 함락 직전이냐? 베트남은 1954년에 분단됐고, 북쪽에는 공산당, 남쪽에는 친미정권이 들어섰어. 그러다가 전쟁이 난 거야. 우리 6.25처럼. 한국과 미국은 남베트남 편에 서서 북베트남을 상대로 싸웠어. 그 시간이 무려 10년이나 돼. 그러다 1973년에 평화협정이 체결됐고, 한국군과 미국군은 철수했어. 그런데 2년 후에, 북베트남의 기습 공격이 시작됐어. 북베트남 군은 무서운 속도로 남쪽으로 밀고 내려와. 이게 안 기자가 도착했을 때의 상황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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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색이 북베트남이 점령한 지역이야. 겨우 한 달 만에 남베트남 3/4이 함락됐어. 사이공이 함락되는 건 시간 문제야. 이런 위험한 곳에 안 기자가 취재를 위해 간 거야. 안 기자가 사이공에 도착한지 일주일째, 결국 일이 터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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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이 없는 지프차 하나를 몰고 다녔어요. 그걸 타고 가는데 갑자기 천둥벽력이 울리듯이 사이공 시내가 부르르릉하고 떨리면서, 월남군이 기관포를 쏘고 대공포 소리도 났어요. 나도 간이 콩알만 해졌죠. 이게 무슨 변고냐."
-안병찬, 당시 한국일보 기자

사이공 시내 한 복판에 있는 대통령궁이 폭격 당한 거야. 그때부터 거리에 인적이 뚝 끊겨. 그런데 사람들이 가득한 곳이 있어. 바로 여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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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많은 이 곳은 한국 대사관이야. 여기 모인 분들은 우리 교민들이야. 다들 피란 짐을 싸서 대사관으로 온 거야. 그런데 교민들은 베트남을 떠나기 망설였어. "이제 겨우 기반을 잡았는데, 지금 떠나면 다 물거품"이라며 걱정을 쏟아냈어. 베트남전에는 우리 군인들만 파병된 게 아니라, 한국의 노동자들과 기술사들도 돈을 벌러 갔어. 당시 베트남 파견 기술자 월급이, 우리나라 장관 월급이랑 맞먹을 정도였대. '베트남 드림'을 꿈꾸면서 떠나온 지 벌써 10년, 이제야 기반을 닦았는데 갑자기 모든 걸 버리고 떠나기가 쉽지 않겠지. 안가고 남겠다는 교민들을 설득하느라 한국 대사관 외교관들은 진땀을 뺐어. 그 중 한 명이 바로 이 사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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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화 당시 주남베트남 한국 대사관 무관 보좌관. 공군 소령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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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안희완 당시 주남베트남 한국 대사관 영사. 4살 딸과 2살 아들, 그리고 막 돌이 지난 쌍둥이까지 아이가 넷이나 돼. 사이공 상황이 이렇게 급박해지면서 얼마 전, 본인만 남고 가족들을 서울로 보냈어. 그런데 너무 바빠서 공항에 배웅도 못 나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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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일이 많으니까 정신이 없었죠. 왜냐하면 '교민들을 전부 다 철수시켜라' 하는 지시가 떨어졌기 때문에, 그 철수 준비로 굉장히 바빴죠."
-이달화, 당시 주남베트남 한국 대사관 무관 보좌관

외교관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우리 교민들을 안전하게 탈출시키는 것. 지금 사이공에는 우리 교민 1천여명이 남아있어.

▲ 교민들을 무사히 탈출시켜라

한국 정부가 해군 함정 두 척을 보냈어. 겉으로는 남베트남에 구호물품을 전달한다는 명목을 띠고 있지만, 실제 임무는 따로 있어. 우리 교민들을 탈출시키기 위한 피란선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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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전쟁하러 가는 게 아니기 때문에 구호하는 명목으로 갔습니다. 그걸 우리가 어디 월남 간다고 이야기도 못 하고 극비로 출항을 했죠."
-박인석, 당시 LST 310호 함장

4월 22일, 우리 배가 사이공 뉴포트항에 도착했어. 근데 구호품을 다 내리기도 전에 한국 해군사령부에서 긴급 전문이 날아왔어.

'즉시 구호물자 하역을 중지하고 교포를 탑승시켜 귀국하라. 어떠한 경우에도 교전에 말려들거나 사이공강 상류에 고립되지 않도록 하라.' 즉시 사이공을 떠나라는 긴급 연락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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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해군 함정이 있는 곳은 여기, 메콩강 깊숙히 들어와서 정박해 있어. 주변이 전부 북베트남 수중에 들어가버렸어. 완전 적진 한 가운데야. 최악의 경우, 피격을 당하거나 교전에 휘말릴 수 있어. 그 사이, 우리 교민들은 떠날 준비가 됐을까? 아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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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교관의 표정이 모든 걸 다 말해주는 거 같지 않아? 짜증난 표정이 보이잖아. 여전히 교민들이 떠날지 말지 망설이고 있는 거야. 안 떠나려는 사람들은 대부분 사업하는 사람들이야. 며칠 있으면 돈이 나올텐데, 그걸 안 받고 떠나는게 너무 억울하잖아. 그런 사람들에게 지금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라 무조건 베트남에서 나가야 한다고 설득했어. 또 교민들 중에는 베트남 사람과 결혼해 아이를 낳은 사람들도 있었어. 이들은 안 가려는 게 아니라, 못 가는 상황이야. 그리고 기술자로 파병 왔다가 눌러 앉아서 불법체류자가 된 사람까지. 저마다 사연이 있어. 이 사람들을 전부 출국시키려면 한달도 더 걸릴 거 같아. 한국 대사가 시간을 조금만 더 달라고 함대 사령관에게 설득했어. 결국 해군 함정은 출항을 하루 미뤘어. 24시간 안에 교민들을 모두 함정에 태워야해.

그 사이, 사이공 항구는 점점 더 위험해져. 함정에서는 10분 간격으로 수류탄을 투척했어.

"베트콩들은 수중으로 침투해서 배에 폭탄을 붙여 버려요. (수중에 수류탄을 투척하면) 잠수하는 잠수부들 고막이 터져 버려요. 이 폭발 소리나면 게릴라들이 수중으로 못 들어와요. 그렇게 해서 자체 방어를 거의 완벽하게 했죠."
-박인석, 당시 LST 310호 함장

다음날 아침, 대사관 직원들의 설득에 드디어 교민들이 움직이기 시작해. 우리 교민과, 베트남인 가족들, 거기다 남베트남 피란민까지. 1360여명이 해군 함정 두 척에 올랐어. 이게 바로 당시 피란민을 태운 배의 모습이야. 갑판 위가 난민들의 천막촌이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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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타고 가는 교민들이 배 위에서 손을 흔들며 '사이공~ 사이공~' 불렀던 소리가, 지금도 귀에 들려요. 떠나가면서 사이공을 그렇게 구슬프게 불러요. 울음 소리 같이 들리죠."

-안병찬, 당시 사이공 취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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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교민들이 함락 직전의 사이공을 떠났어. 그런데 이게 안 기자가 찍으려 했던 '사이공 최후의 순간'은 아니었어. 무시무시한 최후의 순간은 이제부터야.

▲ 미국 대사관에 모여든 사람들

교민들을 무사히 탈출시키고 나서, 한국 대사관 직원들은 한숨을 돌렸어. 하지만, 사이공이 함락되면 한국 대사관도 안전하지 않아. 남은 사람은 외교관 15명, 그리고 안병찬 기자. 그런데 탈출 준비를 못했어. 이미 뱃길은 막혔고 비행기 표도 못 구해. 이들에겐 믿는 구석이 있었어. 바로 미국이야. 미국은 한국전쟁에 참전했고, 한국은 미국의 요청으로 베트남전쟁에 32만명을 파병했어. 이런 돈독한 관계 속에, 미국 대사관은 위급한 상황이 되면 한국 외교관들의 철수를 도와주기로 약속이 돼 있었어.

4월 28일 오전 9시. 미국 대사관에서 연락이 왔어. 갑자기 비행기를 준비할 테니 두시간 내로 철수 준비를 하라는 연락이었어. 한국 대사관이 사이공에 문을 연 게 19년이야. 그 시간동안 쌓인 중요한 외교 문서가 얼마나 많았겠어. 철수 준비로 바쁜 외교관들은 마지막 국기 하강식을 했어. 1956년 개관 후 19년만에 문을 닫는 순간, 안병찬 기자가 한국 대사관의 국기 하강식을 사진으로 남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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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관들은 각자 짐을 꾸려 대사관저로 모였어. 이제 미국이 보내준 버스를 타고 공항으로 가기만 하면 되는데, 이상하게 미국이 보내준다는 버스가 안 와. 미국 대사관에서 다시 전화가 왔어. "준비한 비행기가 취소됐다. 내일 다시 연락 드리겠다"는 전화였어. 두시간 만에 준비하래서 서둘러 준비했고, 이제 사이공을 떠날 거라 생각했는데. 외교관들은 황당하고 불안해.

그날 밤, 갑자기 폭발음이 들려. 공항이야. 외교관들이 비행기를 타러 가려 했던, 사이공의 탄손누트 공항 쪽에서 밤새 폭발음이 들려. 공항에 폭탄이 떨어지기 시작하니까, 일반 외국 비행기들이 안 들어와. 결국 공항은 폐쇄됐어. 사이공은 완전히 봉쇄된 거야. 안 영사와 이 보좌관, 안 기자는 공포에 휩싸였어.

미국 정부는 북베트남에 점령되면 '피의 보복'이 벌어질 거라 예측했어. 그들의 보복 대상은, 북베트남과 싸운 사람들. 즉, 미국과 미국에 협조한 사람들이야. 한국인들도 그 보복 대상이야. 어서 여기서 탈출해야해.

미국 대사관 쪽에서 한국 대사관에 미리 알려준 게 있었어. 라디오를 꼭 가지고 다니라는 것. 그리고 주파수를 FM에 맞추고, 라디오에서 일기예보가 나온 후 '그 노래'가 나오면 즉시 약속 지점으로 오라는 약속이었어. 미국이 보내는 노래 암호는 바로 빙 크로스비의 '화이트 크리스마스'였어. 의미는 '긴급 철수 작전 개시'. 이 노래를 듣는 순간 여권 하나만 들고 나와라, 그리고 미리 약속한 '어셈블리 포인트' 집결 지점으로 가면 헬기가 있을 것이다. 그걸 타고 사이공을 탈출하라는 뜻이야.

이 암호를 못 들으면 끝이야. 탈출 기회는 없어. 다음날인 4월 29일, 다들 라디오에 귀를 기울여. "한국 외교관들은 어셈블리 포인트3로 오라"는 전화가 오고, 곧바로 라디오에서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흘러 나왔어. 최후의 탈출 순간이 온 거야.

외교관들과 안 기자는 우르르 뛰어나가 차에 올라탔어. 그리고 전속력으로 어셈블리 포인트3로 갔어. 한국 대사관에서 가까운 미국인 아파트였어. 옥상에 작은 헬기 착륙장이 있어. 차를 세우고 건물로 뛰어갔어. 그런데 총을 든 경비병들이 앞을 막았어. 미국 대사관의 연락을 받고 온 한국 외교관이라 말해도 "그런 지시는 못 받았다"며 들여보내 주지를 않아. 작전 계획이랑 상황이 달랐던 거야. 여기서 헬기를 못 타면 끝장인데. 그 당시 옥상에서 벌어진 상황을 촬영한 사진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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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우리 외교관들은 이유도 모른 채 탈출 기회를 놓쳤어. 그럼 이제 남은 방법은? 외교관들은 미국 대사관으로 가기로 했어.

외교관 일행은 미국 대사관으로 차를 몰았어. 근데 입이 다물어지지 않아. 미국 대사관 앞이, 완전 아비규환이야. 수 만명의 사람들이 대사관 앞을 둘러싸고 안으로 들어가려고 아우성이야. 다들 철문에 매달려 들여 보내달라 애원해. 생지옥이야. 근데 왜 이렇게까지 미국 대사관에 들어가려고 난리일까? 최후의 헬기 탈출 작전이 여기서 이뤄질 거거든. '피의 보복'이 두려운 사람들에게는 미국 대사관이 마지막 탈출구인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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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외교관들과 안 기자는 신분 확인을 거쳐 다행히 미국 대사관 안으로 들어갔어. 그럼 미국 대사관 내부는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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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관들이 있는 곳은 '레크레이션 센터'라 불리던 휴식 공간이야. 미군들은 사람들을 전부 여기로 몰아 넣었어. 피란민들을 태울 헬기는, 본관 마당에 내릴 거야. 대기자들은 이 레크레이션 센터에서 기다리다가, 순서대로 작은 철문을 통과해 본관으로 가면 돼. 이렇게 헬기를 기다리는 사람은, 무려 3천명. 미국 대사관에 모인 이 어마어마한 인파 속에 한국 외교관 15명, 안 기자, 그리고 140여명의 한국인들이 있어. 피란선에 타지 않고 남아있던 한국 교민들이야. 이 3천명이 전부, 헬기가 날아올 하늘만 바라보고 있어.

▲ 마지막 헬기가 떠났다

미국 대사관에 들어온지 4시간 째. 뙤약볕 아래서 기다리던 사람들은 불안해져. 바로 그때, 멀리서 헬기 프로펠러 소리가 들려. 기다리던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해. 드디어 도착한 첫번째 헬기. 본관으로 향하는 철문 앞에 미군들이 나타났어. 곧 탑승을 시작한대. 가장 먼저 헬기에 탈 사람들은, 미국인들과 그들의 가족들. 우선권을 가진 사람들이 철문을 통과해 헬기에 탑승해. 잠시 후, 바람을 일으키며 첫번째 헬기가 이륙했어. 헬기에 탄 사람들은 창 밖으로 손을 흔들어. 그걸 아래서 보는 사람들은 얼마나 부러웠을까. 멀어져 가는 헬기를 한없이 바라만 봐. 그렇게 첫번째 헬기가 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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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또 감감무소식이야. 헬리콥터에는 50명 밖에 못 타는데, 그게 항공모함까지 갔다 오려면 적어도 1시간이 걸려. 헬기에 탄 사람들을 바다 위에 떠 있는 항공모함에 내려놓고, 연료를 채운 후 다시 미국 대사관으로 돌아오는 거야. 그걸 초조하게 기다리는 거지.

어느새 날이 저물고, 갑자기 세찬 빗줄기까지 퍼부어. 스콜이야. 야외에 있던 사람들은 꼼짝없이 앉아 비를 맞아. 혹시나 자리를 이탈했다가 내 순서가 밀릴 수도 있으니. 여전히 한국의 외교관들은 헬기 탑승장으로 가는 그 작은 철문을 아직 넘지 못했어. 줄은 줄지 않고, 사람들은 계속 담을 넘어 들어오고 있어. 어느덧 밤 10시, 미국 대사관에 들어온지 12시간이 지났어. 점점 조바심이 나지. 한국 외교관들 순서가 오지 않아.

바로 그때, 안면이 있는 미국 대사관 직원이 앞을 지나갔어. 통사정을 했더니, 미국 대사관 직원이 앞 줄에 끼워줬어. 이제 철문 바로 앞까지 왔어.

시간은 밤 12시. 4월 30일로 넘어가고 있어. 멀리서 다시 프로펠러 소리가 들려. 이제 우리도 가자며, 안 영사와 이 보좌관, 안 기자가 철문을 통과하려고 준비했어.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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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만 더 헬리콥터가 오면 우리가 들어갈 차례인데, 미국 사람 하나가 나오더니 확성기로 미국인을 찾아요. 그렇게 미국이 한 명이 나오면, 50명씩 막 따라붙어요. 월남 여자 가족 해서. 가족이 전부 다 해서 50명씩 들어가거든. 그 때는 정말 미국 시민이 아니라는게… 그 때 생각을 하면, 앞이 캄캄하고 그 담을 쳐다보니까 담은 무진장 높고. 그 때 모든 사람들이 굉장히 실망했죠."
-이달화, 당시 주남베트남 한국 대사관 무관 보좌관

거기에 뒤늦게 도착한 미국인들까지 앞에 선 한국인들을 제치고 철문을 통과해. 그렇게, 미국인들이 탄 헬기가 또 가버렸어. 이 철문 밖엔 이제 한국인들과 베트남인만 남았어. 근데 갑자기 경비를 서던 미군들이 하나 둘씩 사라져.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이제 곧 우리 차례인데, 미군들이 슬금슬금 철문 안으로 들어가. 그러더니 문을 철컥 닫고, '스탑(STOP)'이라 말했어.

그 순간, 비명과 함께 줄 서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철문으로 달려갔어. 쇠창살을 두드리며 울부짖어. 우리 외교관들과 안 기자도 공황상태에 빠졌어. 긴급 철수 작전이 중단된 이유는, 다소 황당하게도 미군의 휴식시간 때문이였어. 미군 조종사들의 복무 규정이래. 12시간 운행하면 반드시 쉬어야만 한대.

한참 후 미군이 다시 나타났어. 미군들이 다 데려다 줄 테니 진정하라고 사람들을 안심시켰어. 근데 사람들이 아까처럼 다시 얌전히 줄을 섰을까? 다들 지옥을 한 번 경험했잖아. 질서 없이, 앞으로 가려고 난리야. 아비규환이야. 안 기자도 사람들을 뚫고 앞으로 나갔어. 벽을 타고 앞으로 가서 제일 앞 철문을 잡았어. 이 보좌관도, 묘수가 떠올랐어. 재빨리 군복으로 갈아입고 미군에게 같은 군인 신분인 걸 어필한 거야. 이 보좌관이 한국 공군 소령인 걸 알아보고, 미군이 경례를 해. 그리고 잠시 후, 기적처럼 다시 철문이 열렸어. 안 기자가 철문을 통과했고, 이 보좌관도 헬기 착륙장으로 들어섰어. 그럼 안 영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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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론 뚫고 들어갈 수 있겠는데, 대사관 직원이 10명 가까운 사람이 있고 교민들이 수백 명이 있는데, 외교관이 단독으로 나 살겠다고 혼자 뛰어들어갈 순 없단 말이에요."
-안희완, 당시 주남베트남 한국 대사관 영사

안 영사는 교민들과 함께 뒷줄에 서 있었어. 그래도 다행히 대기자 전원이 헬기 탑승장으로 들어왔어. 이 때가 새벽 1시 45분, 미국 대사관에 들어온 지 15시간만이야. 이제 안전지대에 들어왔구나, 안심했어.

새벽 3시, 그토록 기다리던 헬기가 도착했어. 이 보좌관이 헬기에 탔고, 뒤이어 날아온 헬기에 안 기자도 무사히 탑승했어. 그런데 안 영사는, 아직 헬기를 타지 못했어. 하지만 바로 다음 헬기를 탈 수 있는 위치야. 이제, 거의 다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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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4시 30분, 안 영사가 탈 헬기가 미 대사관 옥상에 착륙했어. 안 영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어. 그런데 갑자기, 미군이 일렬로 늘어서더니 기다리던 사람들한테 총구를 겨눠. 그리고 뒷걸음질 하면서 대사관 건물로 들어가. 미군의 철수 작전이 끝난 거야. 피란민을 위한 헬기는 방금 떠난 게 마지막이었던 거야. 지금 온 헬기는, 미국 대사관원들을 위한 마지막 헬기야.

"안돼! 우리도 데려가!" 사람들이 멀어지는 미군들을 향해 뛰어가. 절망에 빠져 뒤엉켜 울부짖어. 바로 그 순간, 갑자기 눈물이 흐르고 앞이 안보여. 사람들이 다가오지 못하게 미군이 최루탄을 발사한 거야. 그렇게 사람들이 다가오는 걸 막고 옥상으로 올라가 헬기를 타고 떠났어.

안 영사는 제정신이 아니야. 최루탄과 절망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고함 치는 사람들 사이에 우두커니 서있어. 그런데 그 때, 어디선가 미국 대사관이 곧 폭파될 거라는 소리가 나왔어. 살기 위해 들어온 이 곳을, 살려고 빠져나가야 하는 상황인 거야. 안 영사는 입구를 향해 뛰었어. 근데 문이 굳게 닫혀 있어. 안 영사는 죽을 힘을 다해 담을 기어 올랐어. 철조망에 찔려 피가 흐르는데, 간신히 그 높은 담을 뛰어 넘었어. 다행히도 폭발은 없었어. 끝내 우리 외교관 9명과 교민 130명은 사이공에 남겨졌어.

▲ 끌려간 교도소, 기약 없는 수감 생활

사이공 최후의 날이 서서히 밝아와. 곧 북베트남의 탱크가 밀려올 거야. 이제 어디로 가야 무사할까? 그때 누군가 프랑스 대사관으로 가서 도와달라고 하자고 했어. 외교관들은 교민들을 이끌고 프랑스 대사관으로 갔어. 벨을 누르고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안 열어줘. 이번엔 일본 대사관으로 갔어. 벨을 누르니 문이 열렸어. 근데 못 들여보내준대. 몇시간 후면 사이공은 북베트남 수중에 떨어질 테니, 사이공의 새 주인한테 잘 보여야 해. 베트남전에 참전해서 북베트남과 직접 싸운 한국은, 부담스러운 존재지. 일본 대사관 직원은 측은한 눈빛으로 몸조심 하라면서 "북베트남과 북한은 형제 사이다. 한국 외교관들을 북한으로 끌고 갈 거라 한다"고 말했어.

이제 갈 곳이 없어. 당시에 외교관들이 느꼈던 심경을 적은 글이 있어.

"죽어야겠지. 놈들에게 끌려가서 고초를 당하느니 죽는 것이 낫지. 인적이 없는 조용한 곳을 찾아야지. 면도날로 동맥을 끊고 가만 누워있으면 되는 건가. 의사에게 가서 약을 달라고 애원해볼까?"
-김창근, 당시 주남베트남 한국 대사관 서기관 수기 中

4월 30일, 낮 12시. 북베트남군의 탱크가 사이공에 입성했어. 이제까지 '월남'으로 부르던 남베트남은 지구상에서 사라졌어. 사이공은 이제 북베트남에 점령됐어. 남겨진 사람들에겐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다행히도 걱정했던 '피의 보복'은 일어나지 않았어. 하지만 허가 없이 출국을 할 수 없어. 공산화 된 남부 베트남에서 갈 데가 없으니, 외교관과 교민들은 한국 대사관저로 와서 집단으로 기거하게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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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국 허가가 나기만을 기다리던 어느 날, 한밤중에 권총을 든 군인들이 갑자기 대사관에 들이 닥쳤어. 그리고 안 영사를 어디론가 데려갔어. 치화 형무소였어. 그 곳에 안 영사 포함한 외교관 3명이 수감됐어. 사실 외교관에게는 주재국에서 체포나 구금을 당하지 않을 특권이 있는데, 여기선 통하지 않아. 세 사람은 햇볕도 들어오지 않는 독방에서 지냈어. 그야말로 포로야. 안 영사는 정신적 고통에 손으로 철창살만 잡아도 몸에 두드러기가 날 정도로, 극도로 쇠약해졌어.

수감 3개월 후, 드디어 독방의 문이 열렸어. 간수를 따라가 보니, 책상과 의자가 놓인 방이야. 안 영사가 의자에 앉았더니 누군가 들어오는데, 얼굴을 보니 한국인이야. 평양에서 온 북한 공작원이었어. 가장 두려워하던 그 순간이 온 거야.

북에서 온 공작원은 협박과 회유를 반복하는 심문을 했어. 북한으로 망명을 하래. "베트남과 북조선은 사회주의 혁명을 같이 한 형제국이다. 넌 우리 수중에 있다. 선택을 잘 해라. 감옥에서 평생 썩을 거냐"며 몰아붙이는 공작원의 말에 안 흔들릴 수 있을까. 먼 타국의 감옥에서 벌써 몇 개월. 언제 풀려날지 기약도 없어. 더구나, 심신이 많이 약해진 상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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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어려운 상황이죠. 누구를 부를 수도 없고, 혼자 대처해야만 되는 거죠. 제가 북한 요원한테 조사를 몇 번 받고 그런 상태에서 내 마음을 굳게, 다짐을 굳건하게 하기 위해서 상당한 노력을 했는데. 패티김의 '서울의 찬가' 노래가 있잖아요. '서울에서 살으렵니다' 하는 그 노래. 가족한테 편지할 때, 패티김의 '서울의 찬가' 노래 가사를 보내달라고. '서울의 찬가' 가사를 써서 속으로 부르면서. 내 마음을 굳게 하기 위해서죠."
-안희완, 당시 주남베트남 한국 대사관 영사

안 영사는 48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그때를 생각하면 감정이 북받쳐. 패티김의 '서울의 찬가'에 담긴 "아름다운 서울에서, 서울에서 살으렵니다" 이 가사를 수없이 되내였대.

▲ 5년만의 석방, 뒤늦게 알려진 진실

안 영사를 비롯해 세명의 외교관들이 교도소에 있는걸 한국에선 알고 있었을까? 당시 신문 보도 내용을 보여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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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대사관 교민들은 모두 탈출했다. 월남에 있던 우리 교민들은 26일과 29일의 철수 작전으로 모두 철수를 완료한 것으로 안다. 다만 사이공에는 2차 대전부터 살고 있는 월남 국적 교민들이 일부 남아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우리는 이번 월남 사태를 남의 일로만 생각지 말고 국민의 단합과 총화가 없으면 우리에게도 어떤 일이 발생할 지 모른다는 교훈을 받았다."
-1975년 5월 6일자 신문 내용 中

철수 작전이 성공해 모두 탈출했다는 내용이야. 남은 교민들은 옛날부터 살던 베트남 국적 교민들이라고 쓰여있어. 우리 외교관들이 억류돼 있단 이야기가 없어. 이 사실을 정부가 모르진 않았어. 사이공 함락 직후에, 한국 대사가 직접 보고까지 했어. 정부가 언론 보도를 못하게 막은 거야. 석방 교섭에 차질을 줄 수 있단 게 이유였어. 근데 이게 우리 정부에겐, 뼈아픈 실책이 아니었을까. 자유진영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파병해서 우리 군인 5천명이 목숨을 잃었어. 근데 베트남은 공산화 됐고, 우리 외교관들은 미국의 헬기에 타지 못하고 감옥에 갇혔으니.

사이공 함락 1년후, 1976년. 베트남은 남북이 통일되고, 사회주의 공화국이 됐어. 사이공은 호찌민이 됐고. 한국 교민들과 나머지 외교관들에게도 드디어 출국 허가가 떨어졌어. 그런데 3명의 외교관들은 여전히 감옥에 있어. 우리 정부도 외교관들을 석방시키려 노력했어. 제3국을 통해 베트남 정부를 설득하고, 북한과도 협상에 나섰어. 하지만 쉽지 않았어.

게다가 1979년에는 또다른 변수가 등장했어. 안 영사가 감방에 있는데 창문 너머로 사람들이 수근거리는 소리가 들려.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당했다는 소식이야. 결국 해를 넘긴 1980년 4월 12일. 드디어 외교관 3명이 석방됐어. 수감된 지 5년만의 일이야.

그날 헬기를 놓친 후 사이공을 떠나는데, 무려 5년이 걸린 거야. 안 영사에게 돌아온 한국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너무 낯설었대. 그동안 너무 많이 발전했고, 아이들도 몰라볼 만큼 훌쩍 자랐어.

꼬꼬무

"서울에 오니까 이제 초등학교도 다니고 유치원도 다니고 그래요. 5년동안 아버지 노력을 못 했잖아요. 큰 애들은 라오스에서 유치원 다니고 그래서 아빠와 정이 들었지만, 쌍둥이는 한 살 때 헤어졌단 말이에요. 처음에는 '아버지다' 그러니까 서먹서먹 했겠죠."
-안희완, 당시 주남베트남 한국 대사관 영사

간발의 차이로 타지 못한 헬기. 그 엇갈림이 초래한 고통의 시간. 이 이야기는 30년이 지난 2008년, 외교문서가 공개되면서 세상에 알려졌어. 안 영사는 50년이 다 돼가는 지금도 당시의 악몽을 가끔 꾼대.

꼬꼬무

사이공 함락 직후, 반공 캠페인이 온 나라를 휩쓸었어. "월남 패망에서 교훈을 얻자", "방심하면 우리도 월남꼴 난다" 면서. 그리고 17년 후인 1992년, 한국과 베트남은 수교했어. 한국 기업들도 많이 진출했고, K팝, 한류, 박항서 감독님까지 이젠 우리랑 돈독한 사이가 됐지.

안 영사에게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간다면, 교민들을 지키기 위해 그 곳에 남을 것인지 물었어. 그는 이렇게 대답했어.

꼬꼬무

"내가 공무원인 이상, 그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에요. 영사는 교민의 철수 임무를 완수해야 하는데, 그걸 하지 않았다면, 난 공무원도 아니고 죄인이죠.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죠.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에요."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강선애 기자 sakang@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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