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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찐리뷰] 43년만에 찾은 아들, 71년만에 벗은 누명…故김복연 할머니의 한 서린 인생

강선애 기자 작성 2022.08.26 13:15 수정 2022.08.26 16:49 조회 5,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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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SBS연예뉴스 | 강선애 기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25일 방송된 '꼬꼬무- 두 번의 기적: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배우 오나라, 온주완, 볼빨간 사춘기의 안지영이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43년만에 찾은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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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1946년생, 올해 나이 76살의 전철수입니다. 제가 이름이 3개였는데요. 전학철, 맹철수, 전철수. 3개 입니다."

여기, 본명만 3개였던 분이 있어. 왜 이름이 3개나 될 까. 이 이름엔 가슴 아픈 사연이 숨어있어.

때는 1993년 6월. 이 분이 '맹철수'란 이름으로 살던 시절이야. 당시 나이는 48살. 경남 거제도에 사는 평범한 가장이었어. 어느날 회사에 출근 후 커피 한잔의 여유를 즐기며 신문을 펼쳤어. 그런데 철수 씨의 시선이 신문 한 가운데에 꽂혔어. 그리고 눈을 뗄 수 없었어. 철수 씨가 본 건 이 기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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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연 할머니 한맺힌 역정'

김복연 할머니는 서울에 사는 분인데, 한국전쟁 때 5살 난 아들을 잃어버리셨대. 철수 씨가 왜 놀랐냐면, 자신이 그 잃어버린 아들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야. 철수 씨도 전쟁 당시 부모를 잃어버렸거든. 그때 나이가 바로 5살이었어. 워낙 어렸을 때라 부모님 얼굴이나 이름은 전혀 기억이 안나. 근데 이 김복연 할머니의 사진을 보는 순간, 묘한 기분에 휩싸인 거야. 피가 당긴다고 하지? 철수 씨는 강렬한 직감을 가지고, 바로 할머니를 찾아 갔어.

만약 43년 전에 헤어진 가족을 만난다면, 알아볼 수 있을까? 당시 두 분의 모습을 보여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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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닮았지. 누가 봐도 어머니와 아들이야. 두 사람은 가족만이 알 수 있는 신체 특징도 맞췄어. 할머니의 잃어버린 아들은 오른쪽 허벅지에 용머리 모양의 반점이 있었대. 철수 씨는 천천히 바지를 걷어 올렸고, 희미하게 남아있는 용머리 반점을 확인했어. 두 사람은 모자 지간이 맞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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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수 씨가 5살 때 헤어진 어머니를 43년만에 다시 만난 거야. 그런데 눈물도 안 나오고 덤덤했대. 너무 현실감이 없어서. 철수 씨는 오랫동안 마음 속에 간직했던 질문은 어머니한테 던졌어.

"왜 그동안 날 안 찾았어요? 혹시 날 버린 건가요?"

그런데 어머니의 대답은,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거였어. 이걸 보면 깜짝 놀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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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그동안 감옥에 있었던 거야. 그것도 무기수로. 수십년 만에 찾은 어머니가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범죄자라는 거야. 그런데 어머니의 사연을 들어보니,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어머니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건 보통 일이 아니야. 그래서 철수 씨는 거금을 들여 캠코더를 샀고, 어머니의 증언을 영상으로 기록하기로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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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이 가도 내가 당한 그 일만은 잊을 수가 없어."
"난 죽여만 달라고 했어"
-김복연 할머니의 증언 영상 中-

도대체 이 김복연 할머니에겐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지금부터 이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려줄게.

▲ 재앙을 불러온 양복, 억울한 누명

1950년 6월 서울 종로구. 당시 32살이었던 복연 씨는 판잣집 단칸방에서 아들 학철이와 둘이 살고 있었어. 맹철수 씨의 진짜 이름은 '전학철'이야. 학철이는 5살 때 한글을 쓸 정도로 똘똘한 아이였어. 학철이 아버지는 경찰이었는데, 학철이가 생긴 이후 자기는 본처가 있다고 고백하며 두 사람을 떠나 연락도 끊어 버렸대. 그때부터 복연 씨는 더 억척스럽게 살았어. 낮에는 가판에서 물건을 팔고, 저녁엔 남의 빨랫감을 받아 세탁했어. 이런 모자한테 불행이 시작된 건 양 씨라는 이웃 남자가 찾아온 이후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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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씨는 복연 씨에게 양복을 건네며 빨아달라고 부탁했어. 그런데 사실 양 씨의 진짜 용건은 따로 있었어. 양 씨는 자신이 관리하는 유흥업소 여성들이 잠 잘 방을 내어주면 매달 쌀로 사례를 하겠다고 했어. 복연 씨의 집은 단칸방이었는데, 양 씨는 합판을 가져와 뚝딱뚝딱 벽을 만들더니 방을 둘로 나눴어. 그 때 양 씨가 데려온 여성들은 김영애와 김정자. 그렇게 복연 씨 모자는 이들과 동거를 시작했어.

그런데 양 씨는 약속한 쌀을 주지도 않았고, 맡겼던 양복 빨래도 찾아가지 않았어. 그리고 며칠 후, 한국전쟁이 터졌어. 38선을 넘은 인민군들이 맹렬한 기세로 내려왔는데, 당시 서울 사람들은 피난을 떠날 생각을 안 했어.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라디오 방송에 나와 이런 연설을 했기 때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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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여러분, 지금 유엔군이 오고 있습니다. 굳게 참고 기다리면 적을 물리칠 것입니다. 안심하십시오."

이런 연설을 하니 사람들은 안심하고 그냥 집에 있었지. 근데 이 연설을 했을 때, 이승만 대통령은 서울을 떠나 대전에 있었어. 전쟁 이틀 만에 서울을 빠져나간 거야. 대통령은 인민군의 남하를 막는다며 한강 다리를 끊어버리도록 명령했어. 그렇게 한강 다리가 끊기고, 서울 사람들은 고립됐어.

그 시각, 복연 씨는 온 집안의 불을 끄고 숨을 죽이고 있었어. 밖에선 포성 소리가 들렸어. 그러다 새벽녘에 깜박 잠이 들었는데, 갑자기 집에 누군가 침입한 소리가 들렸어. 처음에는 강도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까 우리 군복을 입은 국군이야. 인민군의 공격을 받고 도망치다가 아무 집이나 보이는 곳에 뛰어들어온 거야.

"아주머니, 저 좀 살려주세요."

군복을 입고 있다가 들키면 바로 죽음이야. 복연 씨는 집에 있는 유일한 성인 남성 옷인 양 씨가 맡긴 양복을 군인에게 건넸어. 또 3일동안 한 끼도 먹지 못한 군인에게 꽁보리밥 한 그릇을 내와 먹게 했어. 허겁지겁 밥을 먹은 군인은 옷을 갈아입고, 동이 트기 전에 복연 씨 집을 떠났어. 깜깜한 곳에서 봐서, 복연 씨는 군인의 얼굴도 제대로 못 봤고 이름도 몰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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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복연 씨는 종로 대로변을 나갔다가 깜짝 놀랐어. 전쟁이 터진지 3일만에 서울이 함락돼, 서울 곳곳이 인공기와 김일성의 얼굴로 도배가 됐어. 복연 씨는 마음 한 켠이 불안했어. 학철이 아버지의 직업이 경찰이었기 때문이야. 남편과 왕래를 안 한지 오래 됐으니 별문제 없겠거니 생각했어. 그런데…

"김복연 어디 있어! 반동분자 당장 나와!"

집에 인민군이 들이닥치더니 복연 씨와 아들 학철이를 끌고 갔어. 알고보니, 그 한집에 살던 여자들이 '학철이 아버지가 경찰관이고, 국군 옷을 입혀서 도망시켰다'며 복연 씨를 반동분자라고 밀고한 거야.

인민군은 남편의 행방을 물으며 복연 씨에게 주먹을 휘둘렀어. 심지어 다섯살 학철이까지 때렸어. 고춧가루 물을 붓고 온갖 고문을 했어. 하지만 자신들이 원하는 답이 나오지 않자 일단 두 사람을 풀어줬어. 죽다 살아난 복연 씨는 학철이를 데리고 피난을 가기로 결심했어.

복연씨 모자는 7월 10일경에 서울을 떠나 석달간 경기도 양주에서 피난 생활을 했어. 그리고 10월 초에 다시 서울로 돌아왔어. 9월에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며 국군이 다시 서울에 입성했으니, 이제 집에 돌아가도 되겠구나 생각한 거지. 꼬박 이틀을 걸어 복연 씨 모자는 서울 집에 도착했어.

근데 집에는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었어. 양 씨와 여자들이었어. 복연 씨는 바로 이들을 집에서 쫓아냈어. 그런데 며칠 후, 이번엔 경찰들이 복연 씨의 집에 들이 닥쳤어. 그리고 구속영장을 들이밀며, 복연 씨를 체포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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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자 김복연은 북한 괴리군의 정보원으로 일하다 동거하고 있던 김영애, 김정자 등이 '이 대통령 만세, 영원히 돌아오시라' 삐라를 뿌리기로 하자 이를 밀고하여 애국여성인 김정자 등을 피살케 한 자임."
"범정의 정도: 극악질"
–구속영장 내용 中

모두 거짓 내용이었어. 심지어 복연 씨가 이들을 밀고했다는 날짜는 7월 30일인데, 이 때는 복연 씨가 양주에 있을 때야. 이번에도 신고자는 양 씨와 여자들이었어. 증거는 이들의 주장 뿐인데, 아무도 복연 씨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어. 석달 전에는 인민군들이 반동분자로 몰더니, 이번엔 우리 경찰이 나라 팔아 먹은 빨갱이라고 몰아갔어. 잡혀간 복연 씨는 모진 고문을 당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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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갖다가, '거물'이라고. 빨간 글씨로 가마니에 써 가지고 내 위에다 뒤집어 씌워놓고. 맛을 봐야 알겠느냐고. 전깃줄인지 뭘 갖고 와서는 귀에다 대고, 젖꼭지에 대고 돌렸어. 미치도록. 그렇게 발가벗겨 놓고서는 뭔 방망이 같은 걸 가지고 와서. 자궁 안이 무슨 창고야? 상자야? 거기다가 뭐를 감춰. 지령 받아서 거기다 감춰 가지고 나왔다고. 그 모진 고문. 그렇게 잔인할 수가 없어. 그렇게 고통을 줄 수가 없어…"
-김복연 할머니의 증언 영상 中-

폭행에 물고문, 전기고문, 성고문까지. 누명을 쓴 복연 씨는 잔혹한 고문을 당했어. 이를 지켜 본 어린 아들 학철이가 "우리 엄마 죽어!" 악을 쓰면서 경찰에 달려 들었어. 경찰은 학철이의 멱살을 잡고 들어올려 바깥으로 내쫓았어. 그게 복연 씨가 본 아들의 마지막 모습이야.

▲ 도망자가 된 어머니, 찾지 못한 아들

복연 씨는 바로 재판에 넘겨져 속전속결로 무기징역형을 받았어. 당시 이런 판결이 가능했던 이유는, 국가에 반역하는 일에 동조하거나 가담했다며 '부역자'가 된 사람들을 처벌하려고 따로 '비상사태 하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 조치령'이란 법을 만들었기 때문이야. 이 법은 이해할 수 없는 특징들이 있어. 재판은 단심으로 진행돼 한번 판결이 나면 끝이야. 또 형량은 10년 이상, 무기징역, 사형, 딱 이 세가지로만 했어. 그리고 가장 무서운 건, 물증이 없어도 된다는 거야. 누군가 증언만 해도 '부역자'로 몰릴 수 있다는 거지.

이런 법으로 억울한 사람들이 많아지자, 국민들의 원성이 커지고 국회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나왔어. 그러자 무기징역은 15년형으로 감형됐어. 복연 씨도 감형을 받고 대구 교도소로 옮겨졌어.

복연 씨의 운명이 롤러코스터를 타는 동안, 아들 학철이는 어떻게 됐을까? 학철이는 종로경찰서 밖으로 내동댕이 쳐진 이후, 이전 기억들을 거의 잃어 버렸어. 기억에 남아있는 첫 장면은, 어떤 아저씨의 허리를 꼭 잡고 자전거 뒷자리에 탄 기억이래. 당시 자전거가 멈춘 곳은 전쟁고아 임시 수용소로 쓰인 종로국민학교. 학철이는 여기서 기다리면 엄마가 찾으러 올 거라 생각했어.

그렇게 한달쯤 지난 어느 날, 아이들은 여의도에 있는 비행장에서 미군 수송기를 타고 어딘가로 보내졌어. 제주도의 고아원이야. 1950년 중공군이 전쟁에 참여하며 연합군과 국군이 다시 밀리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남쪽으로 피난길에 올랐고, 아이들도 제주도로 보내졌어. 이게 학철이의 제주도 고아원 시절 모습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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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과정에서 황당한 일이 벌어졌어. 학철이의 이름이 '맹철수'로 바뀐 거야. 이유는 모르겠지만, 전쟁통에 착오가 있었을 걸로 여겨지고 있어. 그때부터 학철이는 맹철수로 불렸어. 철수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지만 "여기서 말 잘 듣고 있으면 엄마가 찾으러 올 거다"란 말만 믿고 엄마를 기다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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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복연씨는 대구 교도소에서 고문 후유증으로 하혈을 하며 반송장이 된 상태였어. 교도소에서 형집행정지를 시키고 복연 씨를 병원으로 보냈어. 응급수술을 받고 눈을 뜬 복연 씨는 아들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 하나로 병원에서 탈출을 결심했어. 수술 부위에 실밥도 안 뽑은 상태인데, 복연 씨는 몸을 일으켰어. 그리고 화장실에 가는 척 하면서 그대로 도망쳤어.

복연 씨는 다행히 탈출에 성공했어. 형집행정지 중이긴 하지만 이건 사실상 탈옥이야. 잡히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하지만 복연 씨는 학철이를 찾아야한다는 생각 뿐이었어. 학철이가 제주도에 있다는 걸 몰랐던 복연 씨는 종로, 동대문 일대를 뒤지고 다녔어. 탈옥수 신분이라 하루하루가 불안했던 복연 씨는 경찰만 보면 숨었어. 그러다 복연 씨는 안전을 위해 가정을 꾸리기로 결심했어. 때마침 복연 씨를 딱하게 여긴 지인이 박 씨라는 남자를 소개시켜 줬어. 박 씨는 복연씨가 누명 벗는 걸 도와주겠다고 했어. 복연 씨는 박 씨와 가정을 꾸리면서도 학철이 찾는 걸 포기하지 않았어.

아들을 찾겠단 일념으로 서울 거리를 헤맨 지 10년. 그 사이에 학철이의 동생도 3명이나 생겼어. 복연 씨는 삼남매에게 늘 학철이에 대해 이야기했대.

"그때 맨날 학철이라고, 너희 오빠 있다고 엄마가 말했어요. 9.28 서울 수복 후 피난 갔따가 오면서 엄마는 경찰서로 끌려 들어가고, 거기서 손을 놓치고 잃어버렸다고."
-김복연 할머니 막내딸-

그러던 어느 날, 결국 일이 터졌어. 복연 씨가 집에서 막내딸 젖을 먹이고 있는데 양복 입은 남자들이 찾아 왔어. 그들은 복연 씨에게 '잔형 집행 지휘서'를 내밀었어. 10년만에 복연 씨를 찾아내 남은 형기를 채우라며 데리러 온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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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연 씨는 울며불며 봐달라고 사정했지만 소용이 없었어. 그렇게 복연 씨는 다시 교도소에 끌려갔어. 당시 8살이었던 첫째, 4살이었던 둘째는 2년 동안 쓰레기통을 뒤지며 길거리 생활을 했대. 젖먹이 막내딸은 교도소 안에서 같이 자라다가 2년 후 언니 오빠와 함께 고아원으로 보내졌어. 그럼 그때 아빠 박 씨는 뭘하고 있었냐고? 남편은 복연 씨가 끌려가자 마자, 집을 나가버렸어.

▲ 두 번의 기적

삼남매가 가끔 교도소로 면회를 오면 복연 씨가 늘 하는 말이 있었대. "엄마 진짜 나쁜 짓 안 했어. 이 다음에 공부 많이 하면 엄마 누명을 좀 풀어줄래"라고. 죄수복을 입고 아이들을 마주해야 하는 복연 씨의 심정은 어땠을까.

복연씨가 다시 세상에 나온 건 1973년, 감옥에서 10년을 보낸 후야. 근데 출소 후에도 옥살이는 계속 됐어. 한번 빨갱이는 영원한 빨갱이라는 주홍글씨가 새겨져 뭘 하던 감시를 받으며 살아간 거야.

그렇게 또 10년이 지난 1983년, 복연 씨가 아주 큰 용기를 냈어. 바로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방송에 출연하기로 한 거야. 1983년 6월 30일 첫 방송을 시작해 무려 138일동안 생방송으로 진행된 이산가족 찾기 방송. 당시 1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잃어버린 가족을 찾겠다고 방송에 나왔고, 전국이 눈물바다였어. 그 때 복연 씨도 피켓을 들고 카메라 앞에 섰어. 복연 씨의 번호는 1534번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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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4번 아드님 되시는 전학철 씨를 찾습니다. 아드님 소식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서울 종로구 낙원동이 고향이십니다."
-당시 방송 내용 中

하지만 학철이에게선 아무 연락이 오지 않았어. 그런데 '꼬꼬무'가 취재를 하면서 알게 된, 기가 막힌 사실이 하나 있어. 영화 같은 일이야. 알고보니 그 당시, 학철이도 이산가족 찾기 방송에 나와 엄마를 찾고 있었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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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022번, 맹철수 씨는 부모 형제를 찾습니다. 본인 오른쪽 무릎 위에 용머리 형 반점이 있습니다."

복연 씨와 아들 학철이는 같은 자리에 있었던 거야. 근데 그때는 몰랐어. 전학철을 찾는 엄마, 부모를 찾는 맹철수. 이름이 달랐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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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학철 씨의 나이가 30대 후반. 제주도 고아원에서 살다가 17살에 서울로 올라와서 공사판도 가고 조선소도 가며 그렇게 살았어. 가정도 꾸리고 귀한 자식도 생겼어. 그럴수록 엄마가 생각나고 그리웠대. 그래서 이산가족 찾기 방송에 나간 거야.

그렇게 다시 또 10년이 흘렀어. 1993년, 75세의 할머니가 된 복연 씨는 또 한번 방송 출연을 결심했어. 이번엔 자신이 양복과 밥을 내줬던, 당시 군인을 찾기 위해 나섰어. 43년 전 그 군인만 찾으면, 누명을 벗을 수 있다고 생각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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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인민군에게 쫓기던 국군 한 사람이 들창을 넘어 들어와서 좀 살려달라고 하기에. 양 씨라는 사람의 세탁물을 내가 맡아서 빨아 놨는데 그 세탁물을 그 군인을 입혀서 보냈죠. 그랬더니 그 후에 옷 임자가 찾아와서 말하기를 '인민군한테 옷 줘서 보내놓고 무슨 국군을 줬다고 거짓말 하냐'고 뒤집어 씌워서..."
-당시 김복연 할머니가 출연한 방송 中

찾는 사람 이름도 얼굴도 몰라. 그리고 그 방송이 유명한 프로그램도 아니고, 김복연 할머니의 사연은 딱 2분간 방송됐어. 과연 이 방송이 효과가 있을까?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어. 방송이 나간 바로 다음날, 방송국으로 자신이 그 군인 같다는 전화가 걸려 온거야. 전남 장성에 사는 김현호 씨였어.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복연 할머니의 방송을 봤는데, 그 짧은 사연을 듣고 '이건 내 얘기다'라는 생각에 심장이 미친듯이 뛰었대. 43년 전에는 23살의 국군 일병이었던 김현호 씨는 그날 할머니의 도움 덕에 무사히 부대에 복귀할 수 있었다며 고마워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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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기적이 또 다른 기적을 만들었어. 김복연 할머니와 김현호 씨의 사연이 신문에 실렸고, 그 기사를 거제도에 살던 맹철수, 아니 학철 씨가 본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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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애타게 찾고 있던 아들이 기적적으로 기사를 봤고, 또 기적처럼 기사 속 사진을 보자마자 43년 전에 헤어진 엄마라는 걸 알아본 거야.

▲ 누명을 벗기까지 71년, 하지만 이미 세상을 떠난 할머니

먼 길을 돌아 드디어 만난 엄마와 아들. 일평생 불행의 연속이었던 할머니의 삶에 마치 하늘이 내린 보상처럼 두 번의 기적이 찾아왔어. 그리고 비로소 맹철수 씨는 자신의 진짜 이름이 전학철이란 걸 알게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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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이름이 3개라고 했잖아? 학철 씨의 지금 현재 이름은 '전철수'야. 당시 개명이 쉽지 않아서, 성만 되찾으셨대. 그래서 자기 원래 성 전씨, 43년동안 썼던 이름 철수를 합쳐서 세번째 이름 전철수가 된 거야.

자신의 이름만큼이나 기구했던 어머니의 사연을 알게 된 철수 씨는 43년 전에 잘못된 재판을 바로잡자며 재심을 신청했어. "아들도 찾고 이제 아무도 부러울 게 없지만, 내가 죽고 없어도 빨갱이라는 누명만은 벗고 가고 싶다"는 할머니의 바람이 있었어. 철수 씨는 생업도 접고 혼자 법원, 검찰청, 기록보존소에 출퇴근 하며 재판 기록을 찾아 다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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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어렵게 찾아낸 재판 자료들은 다 한자로 써진 옛날 문서였어. 변호사도 판사도 읽지 못했어. 이에 철수 씨는 혼자 옥편을 찾아가면서 한글자 한글자 한글로 옮겼어. 오로지 어머니의 억울함을 풀어 드리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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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 일병 김현호 씨도 법정에서 증언해주기로 했어. 그리고 경기도 양주에 피난 갔을 때 같이 살았던 사람도 찾아냈어. 이 정도면 재심에서 좋은 결과가 나올 거라 생각했어. 할머니도 드디어 누명을 벗겠다는 기대에 부풀었어. 그리고 1996년 7월, 할머니 부역 혐의에 대한 재심 판결이 내려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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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심 청구인들의 재심 청구를 모두 기각한다"

할머니의 억울함을 재판부는 인정하지 않았어. 무죄라는 새로운 증거가 없다는 거야. 김일병과 피난처 증인들의 말보다, 할머니를 부역자로 몬 양 씨의 증언이 더 신빙성이 있다는 거야. 그렇다고 재판부가 양 씨를 불러 대질심문을 한 것도 아냐. 그냥 1950년 당시 재판 내용으로만 판단한 거야.

결과를 받은 복연 할머니는 몸져 누웠어. 그리고 2010년 4월, 김복연 할머니는 끝내 누명을 벗지 못 한 채 세상을 떠나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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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도 아들 철수 씨는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어. 어머니 살아 생전에 이걸 못 해드렸다는 죄송한 마음이 들어서 이번엔 더 악착같이 매달렸어. 2017년 다시 재심을 신청했어. 이번엔 간첩 누명 사건에 경험이 많은 장경욱, 신윤경 변호사가 도와주기로 했어. 그리고 5년이 지나 2021년 5월, 드디어 판결이 나왔어. 이번에 나온 판결문이야.

"피고인 망(亡) 김복연. 1950년 8월 초순경, 피고인이 서울이 아닌 양주에 거주하였을 개연성이 있는 점에 비추어 증인 양 씨의 진술을 그대로 믿기 어렵다."

"1950년 6월 28일 새벽, 국군을 구조한 전력이 있는 피고인이 한 달 뒤 세들어 살던 김정자 등을 밀고할 특별한 계기나 이유를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검사가 제출한 증거만으로 공소사실을 인정하기 부족하고 달리 이를 인정할 증거가 없으므로 이 사건 공소사실은 범죄의 증명이 없는 경우에 해당한다."

"주문 피고인은 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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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부는 할머니한테 죄가 없다고 봤어. 사실상의 무죄 판결이야. 근데 왜 무죄라고 하면 되는데 '면소'라고 했을까? 면소는 소를 면제한다, 소송 절차를 종결 시킨다는 뜻이야. 더 이상 재판을 진행시킬 필요가 없을 때 내려지는 판결이야. 할머니한테 무기징역을 내린 그 특별 조치령 법이 1960년에 이미 없어졌어. 법이 사라졌으니, 유죄 무죄 판결을 못하고 면소라는 판결을 내릴 수 밖에 없다는 거야.

김복연 할머니가 누명을 벗기까지 무려 71년이야. 그 모진 세월을 견뎠지만 할머니는 끝내 '당신은 부역자 빨갱이가 아닙니다' 이 말을 듣지 못하고 떠나셨어.

꼬꼬무

"끝나고 나니까 허무한 생각도 들죠. 그동안 한 게 꿈이었나 현실이었나 그런 생각도 들고. 내려가는 열차 칸에서 울었어요. 이 판결문을 드리지 못한 생각에. 살아 계신다면, 무사히 해결했다고 그랬겠죠."

-아들 전철수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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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고생 그만 하시고 하늘에서 편히 눈 감고 마음의 짐 덜고 사셨으면. 다음 생애에 태어나신다면 그런 힘든 일 겪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김복연 할머니 막내딸

김복연 할머니는 자신의 억울함과 떳떳함을 밝히기 위해 수없이 방송, 신문, 법원의 문을 두드리고 포기하지 않았어. 결국 자신의 결백을 끝까지 지킨 건, 할머니 본인이 아닐까.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강선애 기자 sakang@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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