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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찐리뷰] 호랑이 대신 왜놈들 잡던 포수…홍범도, 78년만의 귀환

강선애 기자 작성 2022.08.19 11:22 수정 2022.08.21 15:36 조회 3,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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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SBS연예뉴스 | 강선애 기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18일 방송된 '꼬꼬무- 전설의 타이거 헌터, 78년만의 귀환'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가수 권진아, 밴드 잔나비의 보컬 최정훈, 래퍼 치타가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카자흐스탄에서 찾은 시신

때는 2021년, 서울의 한 대학교. 이 학교에 장례지도학과 박채원 교수는 한밤중에 전화를 받았어.

"저… 시신을 찾고 있는데요, 좀 도와주실 수 있나요?"

한국이 아닌 카자흐스탄 공동묘지에 있는 누군가의 시신을 찾고 있다고, 도와달라는 전화야. 그런데 시신이 거기 있을지 없을지도 정확히는 모른대. 너무 오래 전에 묻혀서 장담할 수가 없고, 가서 파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거야. 도대체 누구의 시신이길래, 이렇게라도 찾아야 하는 걸까?

이 시신의 주인공은 카자흐스탄의 어느 시골마을에 있는 극장의 수위였대. 근데 이 분은 보통의 수위가 아니야. 요즘 말로 부캐(부캐릭터)가 어마어마해. 총을 한번 쐈다 하면 백발백중, 전설의 총잡이였대. 총으로 바늘귀를 뚫고, 공중에 던진 작은 동전을 총으로 쏴서 맞출 만큼 명사수래. 이 분의 시신을 찾으러 가야한다는 말을 들은 박 교수는 "이보다 더 큰 영광은 없을 거다"라고 생각하고, 카자흐스탄으로 날아가 유해 발굴단에 합류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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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흐스탄에 도착한 유해발굴단은 시신이 묻혔다고 추정되는 곳을 팠어. 땅을 파 내려가는데 이틀이 소요됐어. 이틀이 지났는데 아무것도 안 나오니, 혹시라도 시신을 찾지 못 할까봐 다들 초조해 했어. 그런데 그때, 삽에 뭔가가 걸렸어. 삽을 내려놓고 손으로 조심스럽게 살살 흙을 팠어. 그러자 비닐 조각이 손에 잡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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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적으로 묘지에서 비닐이 나올 수가 없잖아요? 3일째 되는 날에 비닐이 보였어요. 엄청 두꺼운 비닐이. 그 비닐 속에 유골이 싸여 있었어요. 실제로 그 유골을 보는 순간, 얼마나 벅차 오르던지. 그 순간의 느낌은 지금도 저한테 남아있어요. 다들 너무 놀라서 '아, 이제 됐다'고. 순간 울컥해서 그냥 울었어요."
-유해발굴에 참여한 박채원 교수

유골의 주인공이 누구길래, 이렇게 사람들이 눈물을 보였을까.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해줄게. '꼬꼬무' 역사상 가장 옛날로 돌아갈 거야.

▲ 호랑이가 아니라 왜놈을 잡는다

때는 1895년 10월 8일 새벽, 한양의 경복궁. 경비가 삼엄한 이 곳에 칼과 총을 든 남자들이 떼를 지어 들어왔어. 일본 군인과 자객들이었어. "지금부터 여우 사냥을 시작한다." 경복궁에서 여우를 잡는다? 명성황후를 노린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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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앞을 막아 서면 그대로 일본도를 휘둘러. 순식간에 궐 안이 피바다가 됐어. 결국 황후를 찾은 자객들이 발로 차서 쓰러뜨리고 칼로 내리쳤어. 그렇게 명성황후를 시해한 후 시신에 장작을 덮고 불을 붙였어. 명성황후를 시해한 당시 자객들은 칼집에 이런 문구를 새겨 넣었대. '일순전광자노호', 늙은 여우를 단칼에 베었다는 뜻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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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국모가 무참히 살해됐다는 소식에 국민들의 분노가 전국으로 확산됐어. 그 중에 한 사람이 바로, 이 남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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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모의 시해 소식에 분개한 남자. 일명 '홍대장'이라 불리는 이 남자는 당시 나이가 27세로 호랑이 사냥꾼이었어. 지금은 동물원에나 가야 호랑이를 볼 수 있지만, 그 땐 호랑이가 여기저기 나타나서 가축도 해치고 사람도 잡아가고 그랬대. 그래서 호랑이를 잡는 사냥꾼도 있었어. 그 중에서 홍대장은 실력이 탑클래스였어.

홍대장은 병을 세워놓고 총을 쏘는게 아니라, 눕혀서 쏜 후 총알이 병 주둥이를 통과하게 만들 만큼 사격 솜씨가 좋았대. 거기에 체격도 보통이 아니야. 당시 남자들의 평균 키가 160cm정도인데, 홍대장은 키가 190cm가 넘어. 다른 남자들보다 위로 머리 하나가 더 있는 셈이지. 그런 홍대장이 명성황후 시해 소식을 듣자마자 이런 결심을 했어.

"이제부터 호랑이가 아니라 왜놈을 잡는다."

마음 맞는 포수 몇 명이 그를 따라 나섰어. 이들은 같이 산으로 들어갔어. 그 중엔 15살 양순이, 11살 용환이도 있었어. 바로 홍대장의 두 아들이야. 이렇게 모인 포수가 자그마치 68명. 홍대장은 이들을 하나의 조직으로 묶었어. 이름하여, '산포수 의병대'. 이 의병대를 이끈 홍대장이, 바로 '봉오동 전투'로 유명한 홍범도 장군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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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가 이끄는 산포수 의병대의 주활동 무대는 한반도의 최고봉 백두산이었어. 백두산을 중심으로 함경도 전체에서 활동하며, 1년 동안 치른 전투가 무려 60번이야. 그럼 전투 전적은 어땠을까? 60전 60승. 의병계의 불패신화를 쓴 게 홍범도 장군이야.

홍범도의 전투 전략은 호랑이 사냥과 비슷했어. 호랑이 사냥을 어떻게 하냐면, 먼저 총을 든 포수들이 호랑이가 다니는 길목에 숨어. 그리고 몰이꾼들이 그 쪽으로 호랑이를 몰아. 그럼 흥분한 호랑이들이 도망가고, 사정권에 들어오는 순간 탕! 총을 쏘는 거야. 얘기만 들으면 쉬워 보이지만, 그렇지 않아. 당시 쓰던 총은 화승총이라고, 불을 붙인 심지가 화약에 닿으면 발사되는 총이야. 한발 쏠 때마다 불을 붙여야 하고 사거리는 50m 정도 밖에 안돼. 호랑이가 사정권 안에 들어와야 쏠 수 있는데 만약 첫 발을 놓치면, 두번째 방아쇠를 당겨 보기도 전에 호랑이의 밥이 되는 거야. 기회는 딱 한 번 뿐이란 거지.

그러니 우리 산포수 의병대의 사격 솜씨가 어땠겠어? 다들 최고의 저격수야. 백두산을 매일 뛰어다녔으니 체력도 너무 좋아. 또 동굴이 어디 있고 절벽은 어디 있는지, 내비게이션처럼 백두산 지리를 다 알아. 그래서 전승 신화를 쓸 수 있었던 거야.

▲ 봉오동 전투의 완승

일본군들은 홍대장을 당장 잡아오라고 혈안이 됐어. 근데 잡을 수가 없어. 오늘은 삼수갑산, 내일은 북청, 모레는 봉오골, 신출 귀몰이야. 이 의병대에 차도선이란 분이 계셨는데, 그 분 손녀의 이야기를 들어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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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홍범도, 뛰는 차도선. 하루 저녁에도 천리씩 뛴다고 별명이 차천리예요. 그래서 일본 사람들이 우리 할아버지를 잡으려고 하면, 거기에 가보면 저 산에 있다고 해요. 그래서 잡지를 못했대요. 그렇게 날쌨대요."
-차도선 의병의 손녀 차옥겸 씨

그래서 일본군은 다른 방법을 생각했어. 홍범도의 집에 들이닥쳐서 아내를 끌고 왔어. 홍범도의 아내를 고문실 의자에 묶고, 볏짚을 가져와 발가락 사이사이에 끼운 후 불을 붙였어. 얼마나 고통스럽겠어. 그래도 아내는 이를 꽉 물고 순사들의 고문를 굳건히 버텼어. 순간 아내의 입에서 피가 흘러. 스스로 혀를 깨물었어. 혹시라도 이 고통에 못 이겨서 입을 열게 될 까봐. 그렇게 옥에 갇힌 아내는 버텼지만, 모진 고문으로 며칠 후 숨을 거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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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은 겹쳐서 온다고 하잖아. 이건 홍범도 장군의 일지 한 부분이야.

"일본군 500명과 싸움하여 107명이 죽고 내 아들 양순이 죽고
의병은 6명이 죽고 중상자가 8명이 되었다.
그 때 양순은 중대장이었다.
5월 18일 12시에 내 아들 양순이 죽었다."
-홍범도 일지 中

아버지를 따라 나섰던 큰아들 양순이 전사했어. 아내에 이어 아들도 세상을 떠난거야.

일본군의 추격은 더 집요해졌어. 일본군은 의병대가 총기와 총알을 구할 수 없도록 통로를 다 막았어. 결국 의병대는 만주로 근거지를 옮겼어. 1919년, 전국에서 3.1 만세운동이 일어났고, 만주까지 그 열기가 이어지며 의병들이 속속 모여 들었어. 이 의병들을 홍대장이 군대 조직으로 재편했어. 이름하여, '대한독립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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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당한 독립군으로 몸을 포연탄우 중에 던져 반만년 역사를 광영케하여 국토를 회복하여 자손만대에 행복을 줌이 우리 독립군의 목적이요, 민족을 위하는 길이다."
-대한민국 원년 12월, 노령 주둔 대한독립군 대장 홍범도

'대한민국 원년'이란 날짜는 1919년을 가리켜. 강력한 무장투쟁으로 1920년에는 반드시 나라를 되찾겠다고 선언한 거야. 이 때 홍범도의 나이는 52세였어.

국경 근처로 독립군 부대들이 총집결했어. 이 부대들이 힘을 합쳐서 국내로 밀고 들어오겠다는 거야. 근데 전력이 일본군과 비교가 안되지. 그래서 전략을 잘 짜야 해. 홍범도는 다시 호랑이 사냥을 하 듯 계획을 세웠어.

1920년 6월 4일 새벽, 두만강. 독립군 대원들이 은밀하게 강을 건너 국경을 지키고 있는 일본군 소대를 기습 공격했어. 놀란 일본군이 때로 몰려오면, 독립군은 두만강을 건너 다시 만주로 도망쳤어. 호랑이를 몰 듯, 일본군을 유인한 거야. 다음날 밤 11시, 일본군 정예부대 '월강추격대'가 출격했어. 당시 일본의 군사력은 세계 3위였대. 기관총, 장총, 대포까지 신형 무기를 장착했어. 월강추격대가 두만강을 건너 독립군이 주둔하고 있는 봉오동에 다다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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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만강 끝자락에 있는 이 봉오동은 지형이 조롱박 모양 같았어. 입구에 기다란 골짜기가 있고, 그 골짜기를 따라 안으로 들어오면 높은 산들로 둘러싸여 있는 분지 지형이야. 이 곳에 독립군 700명 가량이 숨어있었어. 독립군 선발대가 골짜기 입구에서 일본군을 유인했어. 총을 쏘다가 도망쳤고, 그러자 일본군들이 쫓아왔어. 봉오골 입구에서 25리, 약 10km 떨어진 지점까지 들어왔어. 그 사이에 날이 밝았고, 나무 수풀 사이로 독립군의 총구가 모습을 드러냈어. 다들 숨죽이고 홍대장의 명령만 기다렸어.

"바로 지금이야!"

홍대장의 신호탄과 함께 독립군의 총구가 일제히 불을 뿜었어. 삼면에서 쏟아지는 공격에 일본군이 정신을 못 차렸어. 그렇게 독립군이 쉽게 이기나 했는데, 독립군의 총알이 슬슬 바닥을 드러냈어. 그 틈에 일본군이 산을 오르기 시작해. 이대로 붙으면 독립군이 위험해.

바로 그때, 하얀 안개가 산을 덮어 시야가 완전히 차단됐어. 쨍하던 하늘에서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지고, 천둥 번개가 내리쳤어. 일본군이 얼굴을 감싸고 비명을 질러댔어. 하늘에서 엄지 손가락만한 우박이 떨어져서 머리에 맞고 피를 흘린 거야. 맞으면 살갗이 다 패일 정도로 큰 우박이 떨어졌대. 하늘이 돕는다는 게 이런 걸까. 결국 일본군은 전투 3시간만에 싹 물러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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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군의 사망자 157명, 중상자 200여명, 경상자 100여명이요.
아군의 사망자 장교 1인, 병사 3인, 중상자 2인이며
아군은 안전지로 퇴각하고 적은 패잔군을 수습하여 다음날에 도강하여 우리 국내로 패퇴하다."
-독립군승첩 中

그야말로 완승이었어. 봉오동 전투는 독립군과 일본군이 제대로 맞붙은 첫번째 전투였대. 독립군이 승리한 소식이 두만강 건너 국내에도 전해졌고, 국민들은 "독립운동에 희망이 있구나", "뺏긴 나라를 찾을 수 있어" 하며 희망과 자신감이 생겼어. 그러다보니 독립운동도 더 활기를 띠기 시작해.

"독립전쟁의 원년이라 선포한 첫 해에 첫번째 승리니까 승리 의미가 크죠. 우리가 일본군의 의도를 좌절시켰다는 거, 그 자체가 상당히 중요한 성과라고 보는 거죠. 독립군이 이제는 일본군하고도 괄목상대할 정도의 수준이 됐다. 이런 정도의 자부심을 불러일으키는 거죠."
-반병률 역사학자

▲ 청산리 대첩의 승리…하지만 더 악랄해진 일본

하지만 엄청난 시련이 다가오고 있었어. 일본이 피의 복수를 계획해. 이름하여 '간도지방 불령선인 초토화 계획'. 일본 입장에서 '불령 선인'은 우리 독립운동가를 가리켜. 간도에 있는 독립군을 모조리 없애겠다는 의미야. 새로 소집한 일본군 병력이 무려 2만 5천여명. 이에 반해 우리 독립군은 다 합쳐도 2천명이 될까 말까 였어.

봉오동 전투를 마친 홍대장의 부대는 주둔지를 청산리로 옮겼어. 이 일대가 1000m가 넘는 산악지대야. 숲이 울창해 매복하기 좋아. 2만명이 넘는 일본군이 청산리 여기저기로 막 밀고 들어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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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전투는 청산리 안에 백운평이란 곳에서 시작됐어.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부대가 지키고 있었어. 그 결과는? 김좌진 부대의 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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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 대첩 두번째 전투는 완루구 라는 곳이야. 바로 여기에 홍범도의 부대가 있었어. 홍대장이 산 정상에서 아래를 살피는데, 남쪽과 북쪽 양쪽에서 일본군이 밀고 올라와. 이번에도 호랑이 잡듯 했어. 먼저 남쪽에서 올라오는 일본군을 산 정상으로 유인해서 코 앞까지 왔을 때 잽싸게 아래로 후퇴했어. 그러니 일본군은 자기들이 이긴 줄 알고 의기양양 산 정상을 차지했어. 이때 북쪽에서 올라오던 일본군들은 산 정상에 있는 군인들이 독립군인 줄 알고 막 총을 쐈어. 자기들끼리 자멸전을 벌인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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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 일대에서 6일동안 총 10번의 전투가 벌어졌어. 이 전투들을 통틀어서 '청산리 대첩'이라 부르는 거야. 일본과 한번 붙은 게 아니라 길고 긴 대전투였던 거야. 전투의 결과는? 10전 10승. 독립군의 전승이야.

이 소식에 누구보다 기뻐한 사람들은 간도에 있던 우리 동포들이었어. 당시 그들은 독립군을 물심양면으로 도왔어. 그 때 발행된 독립신문 내용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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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지방에 있는 부인들은 음식을 준비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전선으로 와 전투에 피로한 우리 군을 위로했다. 어떤 군인들이 먹지 않을 때에는 부인들이 울며 권하기를 '여러분이 만일 이를 먹지 않으면 우리는 돌아가지 않겠노라' 하며 기어이 취식하도록 하여 군인들이 큰 위안을 받게 하였다."

-독립신문 내용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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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들이 먹을 것만 내준 게 아니야. 어렵게 농사 지어 번 돈을 다 독립금 자금으로 내줬어. 무기 운반도 주민들이 도맡아 했어. 목숨을 걸어야 할 수 있는 일이야. 총을 든 의병만이 아니라, 모두가 같이 싸운 거야.

이걸 두고 어떤 학자는 이렇게 말했대. "독립군이 물고기라면, 이름 없는 민초들은 헤엄칠 물이었다"라고. 청산리 대첩은 물과 물고기, 모두가 힘을 합쳐 만든 승리였어.

한편 청산리에서 대패를 당한 일제의 분노는 극에 달했어. '물고기를 잡으려면 물을 없애야 한다'라며, 그들의 총구는 민간인으로 향했어. 간도 지방에 있던 조선인들을 총으로 창으로 보이는 대로 학살했어. 독립군이든 아니든, 어른이든 아이든,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조선인을 싹 다 죽여버렸어. 그렇게 무려 3천 7백여명이 죽었고, 온 마을이 불에 탔어. 이 사건을 '간도참변'이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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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즈음에 홍대장의 둘째 아들도 사망했어. 전투 중에 병을 얻었는데 병이 악화됐어. 그때 나이가 불과 25세. 홍대장은 부인, 큰아들, 둘째아들까지. 모든 가족을 다 잃었어. 독립군들은 간도참변 난리통에 흩어졌고, 홍대장도 이 때 자취를 감췄어.

▲ 러시아 망명, 여전히 품었던 독립의 꿈

그리고 1년 후인 1922년, 홍대장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어. 어디에? 홍범도 장군의 유일한 생전 영상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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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감이 대단하지? 기골이 장대해. 여러 사람들 사이에서도 눈에 확 들어와. 그런데 여기 이 장소는 어딜까?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야. 극동지역민족대회에 홍범도와 독립군들이 우리나라를 대표해 참석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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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사진을 보면, 좀 이상하지? 입고 있는 군복, 모자, 허리에 찬 권총이 전부 러시아꺼야.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간도참변이 한참일 때 홍대장은 러시아로 피신했어. 홍대장 뿐만 아니라 많은 조선인들이 러시아로 넘어갔어. 마침 그때 러시아가 손을 내밀었어. '어차피 갈 곳이 없으니 러시아로 와서 우리 혁명군을 도와달라. 그럼 우리가 대한민국의 독립투쟁을 지원하겠다'라고 러시아가 제안한 거야. 당시 홍범도에겐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겠지. 그래서 홍범도는 러시아로 망명했어. 여기, 홍범도가 작성한 러시아 입국문서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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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란에는 '의병', 목적과 희망에는 '고려 독립'이라 쓰여있어. 홍범도가 어떤 심정으로 망명했는지 너무나 선명하게 알 수 있지. 그가 바라는 건 오직, 대한민국의 독립 뿐이었어.

그 사이 러시아가 공산화되고 소련이 건국됐어. 격동의 1922년, 홍범도는 소련군 대위로 편입됐고 소련 공산당에도 가입했어. 그런데 독립군을 지원하겠다던 러시아가 그 약속을 안 지키는 거야. 홍대장은 결국 군복을 벗고 농부가 됐어. 황무지를 개간해서 논밭으로 만들었어. 혹시 '고려인'이라고 들어봤어? 일본의 핍박을 피해 러시아로 이주한 고려인들. 고생 끝에 척박한 땅을 농지로 일궜다는 그 고려인 1세대가 바로 이 분들이고 그 중심에 홍대장이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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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농사꾼으로 산 세월이 15년. 어느덧 홍범도는 69세 노인이 됐어. 그리고 그 주변의 고려인들도 생활이 점차 안정되어 갔어. 근데 1937년, 갑자기 날벼락이 떨어졌어. 러시아에서 고려인들을 기차에 태워 어딘가로 강제 이주시켰어. 안 가겠다고 반항하는 사람은 처형까지 하며 강압적으로 말야. 고려인들은 10년 넘게 가꾼 생활 터전을 두고, 맨몸으로 기차에 올랐어. 그렇게 춥고 화장실도 없는 기차에 짐짝처럼 실린 고려인들. 열차 안의 상황이 너무 열악해서 죽은 사람도 많았고, 그 때 사망한 고려인 수는 무려 500명 이상으로 추정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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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한 기차가 시베리아를 횡단해 도착한 곳은 카자흐스탄이었어. 이동거리만 6000km. 기차에 내리자 앞에 보이는 건 모래바람이 부는 황무지였어.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있는 땅이 아니었어. 이렇게 강제 이주된 고려인 수는 무려 17만여명. 러시아는 왜, 멀쩡하게 잘 살고 있던 고려인들을 이런 허허벌판으로 데려왔을까? 그 이유가 너무 황당해. 일본인과 닮아서래. 일본인과 닮은 조선인 중에 일본의 첩자가 있을 수 있으니, 아예 멀리 보내버리자고 한 거야. 고작 그 이유로, 무려 17만명을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 시켰어.

다시 시련이 시작됐지만, 근면성실한 우리 민족은 그 황무지 개간에 매달렸어. 그리고 놀랍게도 그 황무지를 기름기 흐르는 농지로 만들었어.

▲ 영웅, 78년만에 고국에 돌아오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부부가 홍대장을 찾아와 고려인을 위한 고려인 극장을 만들었는데, 그 곳의 수위를 맡아달라고 부탁했어. 홍대장은 흔쾌히 수락했어. 얼마 후 부부가 또 다른 제안을 해. 홍대장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연극으로 만들어보자는 거야. 홍대장이 이야기를 풀어내고 부부가 이야기를 썼어. 그게 바로 '홍범도 일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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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지는 '의병들'이란 제목으로, 연극으로 상연됐어. 흥행은 대 성공. 지금으로 따지면 천만 관객급이야. 덕분에 홍대장은 카자흐스탄의 셀럽이 됐어. 홍대장은 극장 구석에서 연극을 지켜봤대.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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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후에 신문에 이런 부고가 실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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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 동무를 곡하노라. 홍범도 동무가 여러 달동안 숙환으로 집에서 신음하시다가 75세를 일기로 1943년 10월 25일에 세상을 떠나셨다.
그는 1868년 평안남도에서 출생하여 부모를 어려서 여의고 머슴살이로 생을 유지했다.
일찍부터 착취에 대치하여 분투하였으며 조선 독립 운동의 거두가 되어 고군분투하였다.
홍범도 동무에 대한 기억은 그를 아는 친우들에게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다."

홍범도는 조국의 독립을 끝내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어. 그는 죽기 전에 "내가 죽고 우리나라가 해방된다면, 날 꼭 조국에 데려다 달라"는 유언을 남겼대.

하지만 이 유언을 따르기는 힘들었어.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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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오랜 시간을 보낸 러시아 지역도 그렇고, 다 나중에 공산화됐잖아요. 사회주의에 대한 한국 사회가 갖고 있는 반공주의, 금기시하는 그런 것들이 홍범도 장군에 대한 관심을 좀 덜게 했죠. 소련 공산당에 가입을 하니까 공산주의자 아니냐, 빨갱이를 덧씌우는 그런 부분도 작용해서, 늦게 부각을 받게 된 거죠."
-반병률 역사학자

2021년이 되어서야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모시게 됐어. 무려 78년만이야. 처음에 유해 발굴하던 이야기 기억하지? 그 때 찍은 사진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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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닐에 싸여있던 유해는 묻힌지 78년이 지났는데도 보존상태가 좋았어. 전문가들도 이런 경우가 드물대. 언젠가는 고국에 돌아가겠다는 그의 바람이, 이런 기적을 만든게 아닐까.

2021년 8월 15일.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카자흐스탄에서 한국으로 돌아왔어. 장군의 유해를 실은 비행기는 카자흐스탄 상공을 세번 선회하고 고국으로 향했어. 대한민국 공군의 호위를 받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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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의 독립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신 홍범도 장군님의 귀환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지금부터 대한민국 공군이 안전하게 호위하겠습니다. 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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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공항에 도착한 홍범도 장군의 유해. 최고의 예우 속에 조국에 돌아온 홍범도 장군에게 정부는 최고 훈장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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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 본 적 있어? 영국인 기자가 찍은 실제 의병들의 사진이야. 옷도 무기도 허름한 모습이지. 의병들은 사진 찍은 기자한테 이런 말을 했대.

"우리는 어차피 죽게 되겠지요. 그러나 좋습니다. 일본의 노예가 되어 사느니 자유인으로 죽는게 훨씬 값진 일입니다."

사실 역사 속에는 이름 없는 의병들이 훨씬 많아. 독립군들, 물고기가 살 수 있게 물이 되어준 수많은 민초들이 있어. 단재 신채호 선생이 한 말이 있어. "영토를 잃은 민족은 재생할 수 있어도, 역사를 잊은 민족은 재생할 수 없다"라고. 그 분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우리가 지금 이렇게 숨 쉬며 살 수 있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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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강선애 기자 sakang@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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