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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찐리뷰]"혈관에 바닷물 주입"…일제 만행에 아스러진 윤동주

강선애 기자 작성 2022.07.01 11:57 수정 2022.07.01 12:32 조회 2,7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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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SBS연예뉴스 | 강선애 기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6월 30일 방송된 '꼬꼬무-'시(詩)와 피(血)'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여자)아이들 멤버 미연, 배우 윤박, 작사가 김이나가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서로를 흠모했던 두 남자

때는 1940년 봄, 경성 연희전문학교. 지금 연세대학교의 전신이야. 이 학교에 새로 입학한 19세 신입생 정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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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하동에서 서울로 유학을 왔어. 어느날 병욱이가 교정을 걷고 있는데 저 앞쪽에서 '그 분'이 걸어왔어. 그를 보자마자 병욱이의 가슴이 콩닥거리고 이마에 땀이 흘러. 병욱이가 남몰래 흠모해오던 '그 분'. 누구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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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똑하게 쭉 곧은 콧날. 부리부리한 눈망울. 한일자로 굳게 다문 입술. 몹시 단정하고 결백했었다. 그는 한마디로 미남이었다."

병욱이가 '그 분'에 대해 묘사한 글이야. 병욱이보다 5살 많은 학교 남자 선배. 병욱이는 이 선배를 한번도 만난 적 없지만 입학 전부터 흠모해왔대. 볼 게 책밖에 없던 그 시절. 문학도였던 병욱이는 입학 전 어느 날, 신문에 실린 시 한편을 읽었고 단번에 그 시에 빠져 들었어. 그날부터 그 사람이 쓴 시를 다 찾아 스크랩하고, 요샛말로 '덕후'가 됐어. 그리고 '그 분'과 같은 학교 같은 과에 진학했고, 드디어 그 분의 실물을 영접한 거야. 병욱이가 '성덕'이 된 거지.

그러던 어느 봄날 아침, 병욱이의 기숙사 방문을 누군가 두드렸어. 문을 연 병욱이는 그대로 얼어 붙었어. 문 앞에 그 선배가 서있던 거야. 선배는 병욱이가 신문에 기고한 글을 보고 찾아왔다며 "글 참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안 바쁘시면 산보라도 나갈까요"라고 제안했어. 병욱이가 흠모하던 그 선배와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어.

병욱이가 흠모하던 선배. 누굴까? 너도 얼굴을 보면 알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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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시인 윤동주야. 병욱과 동주는 만난지 얼마 되지 않아 친형제처럼 가까워졌어. 이듬해에는 같은 하숙집을 얻어 생활도 함께 했어. 같이 지내면서 시 쓰는 것을 옆에서 지켜봤고, 완성된 시를 세상에 발표하기 전에 먼저 보여주며, 그렇게 모든 걸 공유하는 관계가 됐어.

병욱과 하숙하던 이 무렵, 동주는 17편의 시를 썼어. 우리가 기억하는 윤동주의 대표시들은 이때 나온 거야. '서시'도 이때 썼어. 일제 강점기 시절, '서시'가 나온 1941년은 일본의 만행이 극에 달했던 시기야. 일제의 침략전쟁이 한창일 때라 전쟁물자를 조선에서 싹 쓸어 갔어. 조선인은 강제 징병은 기본, 식량에 농사지을 소까지 약탈 당했어. 그러다 보니 우리는 밥도 못해 먹을 지경이었어.

이런 일제 강점기 민족의 암흑기였던 시대에 동주는 시를 쓰고 있었어. 그러던 어느날, 동주가 병욱에게 뭔가를 건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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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시집 원고야. 동주는 그동안 썼던 시 중에 19편을 엄선해 원고지에 옮겨 적고, 손수 철을 해서 시집을 만들었어. 그렇게 만든 윤동주의 육필원고는 총 3부. 동주는 그 중 한 부는 자신이 갖고, 또 한 부는 본인의 스승한테, 그리고 마지막 한 부는 병욱에게 건넸어.

▲ 동주는 형무소에, 병욱은 전쟁터에

이 원고를 받고 얼마 후, 어마어마한 사건이 터졌어. 1941년 12월 8일, 일본이 하와이의 미군기지 진주만을 폭격했어.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거야. 일본은 전쟁에 필요한 군인이 더 필요해졌고, 그래서 본격적으로 우리 청년들을 전쟁터로 끌고 갔어. 그런데 조선인에게 총을 들게 하는 게 불안하잖아. 그 총을 일본에게 쏠 수도 있으니. 그래서 일본은 '황국신민화' 정책을 시작했어. 조선인을 뼛속까지 개조해서 천황의 충성스러운 백성으로 만들겠다, 딴 생각을 못하게 만들겠다는 거야.

어린 학생들은 학교에 가자마자 "우리들은 대일본제국의 신민입니다"를 외쳤고, 일본 천황이 있는 동쪽을 보고 90도 절을 한 후 수업을 받았어. 조선어를 읽거나 쓸 수도 없었어. 수업이 끝나면 전교생이 '신사'에 가서 참배를 해야 했어. 그 시절 서울 남산에는 무려 12만 8천평 규모로, 일본 천황과 신을 모신 신사가 있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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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일본은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아예 없애버리려고 '창씨개명'을 실시했어. 이름을 일본어로 바꿔야 하는 거야. 창씨개명을 거부하면, 학교도 다닐 수 없고, 최소한의 일상생활도 불가능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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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동주도 창씨개명을 피하지 못했어. 졸업 후 일본으로 유학가기로 했는데, 창씨개명을 안하면 안 받아주는 거지. 1942년에 창씨개명을 한 윤동주, 그의 이름은 '히라누마 도주'가 됐어. 동주는 창씨개명을 하기 5일 전에 '참회록'이란 시를 쓰며, 자신의 선택을 부끄러워 했어.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러운 고백을 했던가"

그 부끄러움을 안고, 동주는 일본 유학을 떠났어. 근데 이듬해 충격적인 소식이 날아와. 동주가 치안유지법을 위반했다며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는 거야. 당시 일본은 독립운동가를 잡아 넣기 위해 무력 항일 투쟁이 아니더라도, 그런 사상만 갖고 있어도 처벌했어. 그렇게 동주는 징역 2년을 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됐어.

같은 시기, 경성에 있던 병욱이에게는 일본국 징집영장이 날아 왔어. 강제 징집이지. 살아 돌아온다는 보장이 없어. 전쟁터에 끌려가기 며칠 전 병욱이는 고향 집으로 내려갔어. 그에게는 꼭 지킬 것이 있었거든. 병욱이는 어머니에게 "절대로 일본 순사들 눈에 띄면 안됩니다. 저나 동주형이 돌아올 때까지 소중히 간수해주세요"라며 뭔가를 맡겼어. 동주가 줬던, 육필원고야. 우리말과 우리글이 다 금지됐던 시기. 한글로 쓰여진 이 시집은 불온문서와 다름 없었어. 들키면 바로 소각이야. 병욱이는 어머니에게 시집을 맡기고 전쟁터로 향했어.

▲ 주검으로 돌아온 동주, 그리고 수상한 주사

그리고 1년이 지났어. 1945년, 동주의 고향집으로 전보가 하나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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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6일. 동주 사망. 시체를 찾아가시오."

동주의 아버지와 당숙이 곧장 후쿠오카 형무소로 향했어. 근데 사망 원인이 이상해. '뇌일혈'. 뇌 안에서 출혈이 생기는 뇌출혈과 비슷한 병으로, 갑자기 혈압이 높아져 뇌혈관이 터지면서 사망에 이르게 된 거야. 20대 혈기 왕성한 청년이 뇌일혈로 사망? 석연찮았어. 그런데 직원 하나가 다가오더니 묘한 말을 꺼내. "유족이 오지 않아서 시신을 규슈 제국대학으로 옮기려던 참이었다"는 거야. 시체를 해부용 시신으로 넘기려 했다는 말인데, 여기에도 소름 끼치는 비밀이 숨어 있어.

동주의 가족들은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어. 복도에 푸른 죄수복을 입은 청년들이 줄지어 서있는데, 전부 조선인들이야. 이들은 '시약실'이란 곳에 들어가려 대기 중이었어. 그 때, 줄 서있던 청년 중 하나가 황급히 뛰어와서 말을 걸었어. 처음에는 누군지 못 알아봤는데, 자세히 보니 동주의 고종사촌인 송몽규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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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규는 동주와 같은 해에 태어나서 연희전문학교도 같이 다녔어. 일본 유학도 함께 떠났는데 형무소도 같이 수감돼 있었던 거야. 근데 몰골이 말이 아니야. 안경은 반쯤 깨져있고, 몸은 뼈만 앙상해. 몽규는 말했어.

"어떤 주사인지 모르겠는데, 저 놈들이 맞으라고 해서 맞았더니 이 모양이 됐어요. 동주도 저랑 똑같이 그 주사를 맞고 그리 됐어요."

대체 그 주사가 뭐길래? 수감돼 주사를 맞은 사람들 중에 주사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없었어. 하나 이상한 건, 주사를 맞기 전에 '암산 테스트'를 시켰다는 거야. 암산 테스트는 새로운 약물을 임상실험할 때 부작용을 알아보는 용도로 사용되곤 한대.

▲ 일본의 만행, 끔찍한 생체실험

이 정체불명의 주사, 뭔지 짐작이 돼? 그래, '생체실험'. 일본은 2차 대전 때 만주 '731 부대'에서 생체실험을 자행한 것으로 알려졌어. 그들은 생체실험 대상자를 '마루타'라고 불렀어. '마루타'는 일본 말로 '껍질 벗긴 통나무'란 뜻이래. 이들이 '통나무'에 한 생체실험은 상상을 초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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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량의 가스로 대량살인을 할 수 있는가. 비둘기도 넣고 사람도 넣고 개도 넣고 여러 대상을 넣었다. 실험장이 유리로 되어 있어서 (마루타가) 쓰러지는 상황을 알 수 있었다" -전731부대 운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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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실험을 했던 마루타를 본 적 있다. 손에 물을 담그고 얼도록 방치한다. 발이 없다든지 손발이 절단됐다든지 그런 상태였다." -전 731부대 특별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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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사람을 해부했다" -전 731부대원

이런 잔인한 실험의 대상은 전쟁 포로와 독립운동가들이었어. 이에 대한 증거나 증언도 모두 남아있어. 중국 지린성 기록보관소가 공개한 일본 관동군 731부대 관련 자료를 분석한 결과, 일본군이 독립투사 등을 범죄자로 몰아 731부대로 끌고 간 뒤 생체실험 도구로 이용했다는 내용이 나와.

하지만 일본은 지금도 아니라고 발뺌하고 있어. "731부대는 있었으나 생체 실험은 하지 않았다"라고 주장해. 근데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사건이 하나 있어. 이 사건을 잘 들여다보면, 동주가 맞은 주사가 뭔지 그 단서가 들어있어.

1945년 5월 일본군에 잡힌 미군 포로들은 생체실험 대상자가 되어 한 대학병원으로 옮겨졌어. 그 곳이 바로, 규슈 제국대학이야. 동주가 있던 형무소와 가깝고, 동주의 시신을 보내려 했던 바로 그 곳이야. 이게 우연의 일치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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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이 학교에서는 어떤 실험을 했을까. 그건 1948년에 열린 미군 생체실험 관련 재판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어. 기록을 살펴보면, '규슈 제국대학의 의과 교수였던 센바라는 사람이 미국인 포로들의 정맥에 바닷물을 주입했다'는 내용이 나와. 전쟁이 계속 되면서 수혈용 혈액이 부족했던 일본은 이를 대체할 것을 찾기 위해 이런 실험을 시행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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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물을 혈관에 주입하면 어떻게 될까? 전문가에 따르면, 바닷물에는 다양한 오염물질이 있기 때문에 생체에 주입하는 건 굉장히 위험한 일이래. 특히 전문가는 "소독을 완전히 한다 해도 일부 세균이 우리 몸속에 들어가면 전신 감염 유발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뇌혈관에 감염증이 오면 혈액성분이 뇌조직으로 스며 나온다. 그게 바로 뇌일혈 증상과 비슷하다"라고 말했어. 동주도 같은 실험을 받았을 수도 있다는 합리적 의심이 가지.

하지만 후쿠오카 형무소나 규슈 제국대학은 기록이 없다는 말만 하고 있어. 남아있는 유의미한 기록은 '후쿠오카 형무소의 연간 사망자수' 뿐이야. 1943년 사망자 수는 64명이었는데, 1944년 131명, 1945년 259명으로 집계돼 있어. 해마다 사망자 수가 2배 이상으로 늘었어. 이들이 생체실험에 동원된 마루타가 아니었을까 추측되고 있지만, 진실은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았어.

▲ 스스로 부끄러워 했지만, 절대 부끄럽지 않았던 윤동주

1945년 3월 6일, 두만강 건너편에 있는 동주의 고향마을에서 동주의 장례식이 열렸어. 27년 1개월이라는 아주 짧은 생을 마감한 동주. 그날 장례식장에서는 동주가 쓴 '자화상'이란 시가 낭독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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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윤동주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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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가 쓴 시를 보면 부끄러움이란 정서가 깔려있어. 동주는 왜 이토록 부끄러워 했을까. 시 쓰는 거 말고는 할 수 있는게 없다는 게, 자신이 죄를 짓는다는 생각이었을까.

생의 마지막 순간, 동주의 모습은 어땠을까? 그 모습이 판결문에 기록돼 있어. 판결문에는 동주의 죄목이 세세히 적혀있어.

첫째, 조선민족을 해방하고 독립국가를 건설하려 한 죄

둘째, 조선인의 민족성을 향상하여 독립운동의 가능성을 키우려 한 죄

셋째, 일본의 패전을 바라고 조선 독립을 결의한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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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는 법정에서 이 죄들을 인정했을까? 판결문 마지막 장에 '판시 사실은 피고인의 공술에 의하여 이를 인정한다'고 적혀있어. 동주가 모든 혐의를 인정했다는 거야. 일본의 법정에서 당당하게 조국의 독립을 이야기했다는 거지. 겉으로 드러난 증거가 없어서 "나 그런 적 없다"고 빠져나갈 수 있는데도, 동주는 이런 선택을 했어.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

그렇게 동주가 떠나고 6개월 후, 꿈에 그리던 독립을 맞았어. 전쟁터에 끌려갔던 병욱이는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왔어. 병욱이가 고향에 돌아오자 마자 한 일은, 숨겨둔 동주의 육필원고를 확인하는 것이었어. 병욱이의 어머니는 집 마루를 뜯고, 그 밑에 묻은 독에서 명주 보자기를 꺼냈어. 그 안에는 소중히 간직한 동주의 육필원고가 있었어.

동주가 처음에 만든 원고는 총 3부였지. 동주가 소장하고 있던 건 일본 경찰에게 뺏겼고, 스승님에게 드린 건 행방이 묘연해. 병욱이가 숨겨둔 게 세상에 남은 유일한 원고야. 병욱이와 어머니가 아니었다면, 동주의 시는 세상 밖으로 못 나왔을 거야.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아픈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길"

1948년 동주의 3주기를 앞두고, 그의 첫 시집이 드디어 세상에 나왔어. 유족과 친구들, 지인들이 나서서 시집을 펴낸 거야. 초판본에는 동주의 시 31편이 실렸고, 그 중 19편이 병욱이의 육필원고에 있던 시야. 그 초판본이 바로 이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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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제목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첫 장을 넘기면 우리가 잘 아는 '서시'가 나와. '서시'는 책의 '서문' 같은 개념이야. 동주는 서문을 시로 적었어.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 '서시'-

동주가 사랑했던 하늘, 그를 뒤흔드는 바람, 그를 위로해주던 별, 그리고 그가 끝까지 고민했던 시인으로서의 길. 그 모든게 '서시'에 담겨있어. 그래서 시집의 제목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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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동주는 원래 시집 제목으로 다른 걸 생각했었대. 이 표지에 썼다 지운 흔적이 있어. 동주가 생각했던 제목은 '병원'이야. 병욱이한테 이 원고를 줄 때 동주가 이런 말을 했대.

"처음에는 제목을 '병원'이라 붙일까 했어요. 지금 이 세상은 환자 투성이니. 혹시 이 시집이 아픈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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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욱이는 그 후에 대학교수가 됐고 평생 국문학자의 길을 걸었어. 그리고 동주와의 인연도 끝까지 놓지 않았어. 이 두 사람은 결국 가족이 돼. 정병욱 교수의 여동생이 윤동주 시인의 남동생과 결혼을 한 거야. 서로 흠모하던 선후배가 사돈이 된 거야.

그 뿐만이 아니야. 정병욱 교수의 호(號)가 뭔 줄 알아? '백영'. '흰 백(白)' 자에 '그림자 영(影)', '흰 그림자'란 뜻이야. 윤동주 시에 '흰 그림자'라는 게 있어서 그것을 호로 삼았대. 윤동주 시인을 사랑하는 마음을 이름으로 새긴 거야.

근데 정병욱 교수는 생전에 윤동주 시인의 이야기를 거의 꺼내지 않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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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은 윤동주 시인에 대해서는 말씀을 잘 안하셨다. 윤동주 시인을 후세 사람들이 자유롭게 읽고 또 이해하도록 해야지, 자신이 윤동주를 소개하는데 자꾸 부연설명하고 얘기하는 것이 마땅치 않다고 생각하신 거 같다. 세미나 같은 곳에서도 윤동주에 대해 발표하신 분이 '잘 아시니 말해달라' 해도, 추억에 잠기신 그런 표정으로 가만히 계셨다."

-정병욱 교수 차남 정학성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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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 정병욱 교수는 1982년, 6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어. 그는 눈을 감기 전에 이런 글을 남겼대.

"오늘날 나에게 문학을 이해하고 민족을 사랑하고 인생의 참뜻을 아는 어떤 면이 있다고 하면은, 그것은 오로지 그가 심어준 씨앗의 결실임을 나는 굳게 믿고 있다.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그가 내 곁에서 날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윤동주에 대한 마음을 평생 품었던 정병욱. 전남 광양에 있는 그의 고향집은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이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보존돼 있어. 윤동주와 정병욱, 이 두 분이 같이 찍은 사진이 있어. 유일하게 남은 한 장의 사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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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강선애 기자 sakang@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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