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8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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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찐리뷰]수습된 유해 '0명'…장사상륙작전 성공에 가려진 소년들의 희생

강선애 기자 작성 2022.06.24 11:05 수정 2022.08.21 15:35 조회 2,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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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SBS연예뉴스 | 강선애 기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23일 방송된 '꼬꼬무-작전명령 174호, 돌아오지 못한 소년들'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배우 박효주, 가수 폴킴, 솔지가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전쟁터로 내몰린 10대 소년들

자, 여기 특별한 편지 한 통을 보여줄게. 내용을 한 번 봐줘. 보낸 사람의 이름은 '더글러스 맥아더'. 맞아, 6.25 전쟁 당시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했던 그 맥아더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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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을 지원하여 수행한 작전은 최고의 찬사를 받을만 하며, 나는 그들을 충성스럽고 헌신적인 전우로서 영원히 기억할 것입니다."

인천상륙작전을 지원해줘서 너무 고맙다는 내용의 편지야. 맥아더 장군이 보낸 이 편지를 받은 사람은, 6.25 때 '명부대'라는 이름의 작은 부대를 이끌었던 이명흠 육군 대위야. 인천상륙작전에서 이 대위의 명부대가 어떤 역할을 했기에, 맥아더 장군이 이렇게 감동한 편지를 보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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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1950년 9월 11일, 전쟁이 한창일 때야. 서울이 함락되고 계속 남쪽으로 후퇴하던 국군은 낙동강 이남까지 내려왔어. 낙동강 전선마저 무너진다면 대한민국 전체가 북한에 넘어가는 거야. 수세에 몰린 국군에 판을 뒤집을 한 방이 필요해. 그게 바로 인천상륙작전, 바다를 통해 인천에 기습 상륙해 북한군의 허리를 끊자는 거야. 성공하면 북한군을 고립시킬 수 있지만, 노출이 쉬운 바다에서 육지로 상륙한다는 건 너무 어렵고 위험한 작전이야.

인천상륙작전 디데이를 9월 15일로 결정하고, 3일 전부터 비밀스러운 작전이 펼쳐졌어. 먼저 연합군 전함이 전라도 군산 앞바다에 집결해 북한군을 공격하다가 철수했고, 다음 날에는 강원도 삼척 바다에서 공격을 펼쳤어. 놀란 북한군이 반격하려 하면 연합군은 바로 철수했어. 성동격서, 인천상륙작전을 앞두고 군산에서, 삼척에서 먼저 공격을 펼쳐 북한군의 시선을 돌리려 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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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을 하루 앞두고, 부산항에서 큰 배 한 척이 출발했어. 이름은 '문산호'. 이 배에는 어린 소년들이 잔뜩 타있어. 여기 가장 왼쪽 친구의 이름은 이기일. 당시 중학교 3학년 16살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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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또래들이 많았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는데 군에 가야하지 않겠냐, 그래서 바로 입대를 하게 됐다."

전쟁통이라 군인이 한참 모자라. 기차역 같은 곳에서 군인을 모집했고, 기일이도 그렇게 군에 자원했어. 그리고 당시 19세였던 최대환은 고향 친구 4명과 동반입대 했어. 대구에 살았던 18세 이규호도 동네에 박격포가 떨어지는 걸 보고 '여기까지 쳐들어왔구나' 하며 군입대를 결심했어.

규호는 부모님께 군대에 간다고 말씀드렸어. "장손이 전쟁터에 나가겠다고?" 아버지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자리를 박차고 나가셨어. 한참 후에 돌아오셨는데 손에 뭔가를 들고 계셔. 소고기 한 근이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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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만 해도 소고기가 귀했다. 1년에 한번 먹을까 말까 였으니까. 달달 볶아서 날 주는데, 못 먹겠더라. 동생들이 자꾸 봐서. 그래서 안 먹고 동생들 줬다. 전쟁터에 가거든 뒤에서 우물쭈물하지 말고 제일 선두로 가라고 했다. 그래야 살아 나온다고."

규호, 대환, 기일이처럼 전쟁에 나선 학생들. 바로 '학도병'이야. 이런 학도병들이 바로 이 배, 문산호에 타고 있는 거야. 무려 7백여명이나.

▲ 극비 작전명령 174호

학도병들은 정식 군인이 아니라 군번이 없고, 목에 걸고 다니는 군번줄도 없어. 학도병에게는 군번 대신, 이런 '유격대원증'을 나눠줬대. 그걸 허리춤을 뜯어 넣거나, 옷깃에 감췄어. 학도병에게 유격대원증은 군인이라는 유일한 증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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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산호에 탄 학도병들에게는 '육군본부 직할 독립 제1유격대대'라는 명칭이 부여됐어. 이명흠 대위가 이끌어서 이 대위의 이름을 따서 약칭 '명부대'라 불렀대. 어린 소년들이 모여 있으니, 문산호 내부는 마치 학교에 온 것처럼 화기애애했어. 전쟁이 뭔지, 군대가 어떤지 알지 못한 소년들은 두려움 없이 하하호호 웃었어. 자신들이 배를 타고 어디로 가서 어떤 작전에 투입되는지도 몰랐어. 이런 학도병들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이명흠 대위는 한숨을 내쉬었어.

문산호가 출항하기 이틀 전, 이 대위는 육군본부에서 명령을 받았어. '작전명령 제 1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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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본부 직할 유격대장은 예하 제1대대를 D일 H시 P장소에 상륙을 감행시켜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여 제1군단 작전을 유리하게 하라. 세부는 작전 교육국장으로 하여금 지시하게 함"

혹시라도 명령서가 북한에 넘어 갈까 봐 시간과 장소가 명시되지 않은 작전명령서야. 세부 내용은 작전국장이 이 대위에게 구두로 전달했어. "영덕 해안에 상륙해서 북한군의 후방을 교란하라. 거기서 딱 3일만 버티고 철수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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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덕은 북한군 점령지야. 상륙작전은 전문 훈련을 받은 특수부대가 해야하는 건데, 그럴 병력이 없으니 총 잡은지 2주 밖에 안된 학도병들을 데리고 호랑이 소굴로 들어가라는 거야. 선택지는 없었어. 명령은 따라야 하니까. 이 명령을 품고 문산호에 오른 이 대위는 어린 학생들을 보고 한숨 밖에 안 나왔던 거지.

이 대위는 대원들을 불러 모아 보급품을 나눠줬어. 보급품은 3일치 식량으로 먹을 미숫가루와 건빵, 그리고 군복과 총이었어. 근데 좀 이상해. 군복이 북한군 옷이야. 북한군으로 위장해 침투하는 작전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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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의 용사들이여, 우리는 지금 영덕군 장사리로 간다"
"적군이 점령한 200고지를 탈환하고 보급로를 끊는다"

아침까지만 해도 여기가 어딘지, 장사리가 어디 있는지도 몰랐던 학도병들이, 그렇게 장사상륙작전에 투입됐어.

▲ 아비규환 전쟁터, 200고지를 점령하라

장사리는 산으로 둘러싸인 해안 지형이었고, 북한군의 핵심인 김무정 군단이 점령한 상태였어. 여기 해안에 명부대가 상륙해서 200고지를 탈환하고 7번 국도를 차단해 북한의 보급로를 끊는 작전이였어. 여기서 상륙작전이 시작되면 인근 북한 병력이 다 이쪽으로 모일테니, 이후 인천상륙작전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노림수도 있었어. 그런데 훈련을 딱 2주 받은, 사격도 안 해보고 총 장전하는 법만 배운 학도병들이 이런 작전을 수행할 수 있을까. 게다가 이동 중에 태풍으로 거센 파도가 몰아치며 학도병들은 멀미로 고통을 호소했어. 도착도 하기 전에 다 죽게 생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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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위는 학도병들에게 말했어. "모두 손톱과 발톱, 머리카락을 잘라 제출한다. 부모님께 드릴 말씀도 같이 적도록 해." 혹시라도 잘못되면 이걸로 장례를 치러야 하니까. 순간 배 안에는 긴장감이 가득해.

출항한지 10시간이 지난 새벽 2시경. 장사리 해안 100미터 지점 쯤에 도착했어. 갑자기 대포소리가 들리고 총알이 빗발쳤어. 내리기도 전에 북한군에 노출된 거야. 급하게 후퇴하려 했더니 배가 한쪽으로 기울어. 암초에 걸려 배가 그 자리에 멈춰 버렸어. 이대로 있다가는 상륙도 하기 전에 몰살될 위기야. 결국 이 대위가 결단을 내렸어. "전원 상륙 개시!" 그리고 배 문이 열렸어.

눈앞에 캄캄하고 아무것도 안 보여. 파도는 높고 바람에 배는 요동쳤어. 육지까지 100미터가 남았는데, 대포며 총알이며 빗발쳐. 다들 겁이 나서 발이 안 떨어져. 1중대부터 상륙을 시작했는데, 내리는 족족 적군의 총에 맞아 쓰러지고 파도에 휩쓸려 떠내려 가고. 아비규환이야. 보다 못한 문산호 선원들이 먼저 나섰어. 밧줄을 몸에 묶고 바다로 뛰어들어 헤엄을 쳐서 육지로 다가갔어. 그리고는 해안가 소나무에 밧줄을 연결했어. 이어 2중대 상륙 개시 명령이 떨어졌어.

2중대였던 규호가 뛰어내릴 차례야. 근데 발이 안 움직여. 바로 그때 누군가 "야 이규호!"하며 불러. 보니까 같은 동네에 사는 형이야. 형이 "야, 내 뒤에 붙어! 형만 꼭 붙잡고 따라와!"라고 말했고, 규호는 알겠다며 형을 따라 나섰어. 그런데 앞서 가던 형이 갑자기 푹 고꾸라져. 총에 맞은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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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을 끌어안고 보니까 허벅지에서 피가 철철 났다. 형을 배 안으로 옮기는데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하지만 더 지체할 시간이 없어. 규호는 울면서 다시 밧줄을 잡았고, 한발한발 앞으로 나아갔어. 그렇게 한참 만에 모래사장에 도착했어. 날은 어느새 밝아졌어.

북한군의 총알이 계속 날아오는 가운데, 학도병들은 손으로 모래를 파고 그 속에 들어가 총을 겨눴어. 근데 총이 안 나가. 바닷물에 젖어서 망가진 거야. 부랴부랴 물을 빼고 들어간 모래를 털어냈어. 그런데 갑자기 북한군 진지에서 불길이 치솟아. 뒤따라 온 미국 호위함에서 함포 사격에 나선거야. "지금이다, 전 대원! 200고지를 향해서 돌진!"

5중대는 산으로 올라가고 다른 중대는 옆으로 퍼져 주위를 감쌌어. 팔꿈치와 무릎이 다 까지는데도 엉금엉금 산을 기어 올라가며, 북한군이 숨어서 공격하던 전투용 진지 '토치카'를 하나씩 폭파시켰어. 200고지까지 향하며 총에 맞고 안 맞고는 순전히 운이야. 규호는 얼굴에 총알이 스쳐가는 부상을 당했어. 피가 뚝뚝 떨어졌지만 닦을 새도 없이 막 총을 쏘며 밀고 올라갔어. 정신을 차려보니 산꼭대기에 와 있었어. 사방이 조용해. 더 이상 날아오는 총탄도 없어. 북한군이 모두 도망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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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개시 12시간만에 명부대는 200고지를 탈환했어.

▲ 작전 성공, 하지만 남겨진 소년들

작전에 성공했지만, 주변을 둘러보니 처참한 광경이 펼쳐졌어. 사방이 전우들 시신이야. 처음 겪는 친구들의 죽음. 대환이는 동반입대한 친구들을 찾아 나섰어. 근데 안 보여. 말로만 들었던 전쟁의 비참한 실상을 마주했어. 이 대위와 소년들은 전우의 시신을 한군데로 옮기고 장례를 치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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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도 잠시, 적들이 언제 또 쳐들어올지 모르니 전열을 재정비해야해. 총을 손질하고 참호를 팠어. 어느덧 해가 저물었고, 참호를 파고 안에 들어가있는데 부모님과 가족들의 얼굴이 떠올랐어. 고향 생각에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어.

다음날 아침부터 적들의 반격이 시작됐어. 북한군이 밤새 병력을 배치했는지, 아침이 되니 일제히 사격을 퍼부었어. 7번 국도를 차단해서 보급로를 끊어야 하는 이 대위는 마음이 급해졌어. 서둘러 폭파조를 투입했고, 7번 국도에 놓인 다리 2개를 폭파했어. 이뿐만이 아냐. 장사리 마을, 271고지까지 다 접수했어. 이 일대가 전부 태극기 물결로 변했어. 어린 소년들이 정말 대단한 일을 해낸거야.

하지만 작전 3일째, 북한군이 전차까지 앞세워서 새카맣게 몰려왔어. 이제 빨리 피해야해. 구조요청을 하려니 무전기와 통신장비가 다 먹통이야. 타고 온 문산호는 이미 좌초됐고. 그래서 이 대위는 해안을 따라 남하해서 포항 인근 아군 부대에 합류하기로 계획을 세웠어. 근데 거기까지 가려면 북한 점령지를 지나야 해. 모두가 바짝 긴장해서 걷고 있는데, 갑자기 헬리콥터 한 대가 다가왔어. 미군 헬기였어. 이 대위는 헬기를 타고 동해에 있던 유엔군 함정에 가서 직접 구조요청을 한 후 부대로 복귀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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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선이 다음날 새벽 5시에 오기로 했어. 근데 문제가 있어. 구조선이 도착할 위치가 장사리 해안이야. 200고지는 북한군이 다시 점령했는데, 다시 거기로 돌아가야 해.

그날 밤, 소년들이 해변으로 이동해 풀숲에 몸을 숨기고 밤을 꼴딱 새웠어. 새벽 5시, 저 멀리 구조선이 나타났어. 구조선에서 구명정 두 척이 다가왔고, 하나 둘씩 구명정에 올라탔어. 근데 바로 그 때, 200고지에서 기관총이 불을 뿜어. 유엔군도 즉각 지원사격에 나섰어. 유엔군에서 함포를 쏘고, 200고지에 전투기가 포탄을 퍼붓고. 온 산이 불바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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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틈에 소년들은 구조선으로 돌진했어. 구명정 두 척으로 안되니, 누군가는 밧줄에 매달리고, 누군가는 헤엄을 치고, 그렇게 구조선으로 향했어. 여기저기서 총에 맞고 쓰러졌지만, 그런 친구를 보고도 도와줄 수가 없었어. 다들 그냥 울면서 앞만 보고 갔어.

기일이도 구사일생으로 구조선에 도착했어. 올라가야 하는데 기진맥진해서 힘이 안 들어갔어. 먼저 배에 탄 소년들이 필사적으로 손을 잡고 끌어 올렸어. '이제 살았구나' 했는데 갑자기 박격포가 구조선 중앙에 떨어졌어. 힘겹게 배에 오른 소년들이 바다로 튕겨 나가고, 갑판 위는 온통 피바다야. 팔, 다리가 잘린 소년들이 여기저기서 울부짖고 있어.

미군 소령이 이러다 다 죽는다며 철수를 명령했어. 구조선 문이 닫히기 시작해. 이 대위가 미군 소령을 가로막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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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됩니다! 아직 못 탄 아이들이 있지 않습니까!"

이 대위가 소령의 멱살을 잡고 매달렸어. 하지만 울부짖고 애원해도 소용이 없었어. 미군 소령은 칼을 들고 닻줄을 잘라 버렸어. 배가 출발하기 시작했어. 헤엄쳐서 오는 소년들을 바다에 그냥 두고. 당시 대환이도 배에 타지 못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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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못 태우고 배는 떠났다. 그 당시 광경은 참, 뭐라 말도 못할 정도로 실망이었다. 생사고락을 같이 하다가 이제, 수십 명은 남겨두고 배는 배대로 떠나니. 가끔 생각난다. 장사 후퇴할 때 그 모습이."

구조선도 눈물바다였어. 배에 탄 소년들은 멀어지는 친구들을 보며 발만 동동 굴렀어.

"그 사람들은 우리 배 떠날 때까지도 인민군하고 대치하고 있었던 거다. 탈 수 있도록 방어하다가 그렇게 된 거다. 그러니 안타까웠다. 저 사람들은 못 탔는데."

▲ 필사의 탈출

당시 장사리에 남겨진 소년들은 대환이를 포함해 약 30여명. 북한군이 몰려오기 전에 최대한 빨리 이 곳을 피해야했어. 미친듯이 산속으로 뛰기 시작했어. 뛰다보니 우거진 풀숲에 겨우 몸을 숨길 수 있었어. 주변 동태를 살피는데 순간, 한 동네에 사는 고향친구 진목이를 발견했어.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있던 거야. 너무 반가워 안부를 묻는데, 뒤에서 갑자기 누가 총을 들이대. 북한군이야. 그렇게 장사리에 남은 아이들은 모두 북한군의 포로가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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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은 포로가 된 소년들에게 잘 대해줬어. "이제 곧 우리 인민군이 조국을 해방시킬 것이야. 다들 수령님의 품으로 오지 않갔나?"라며 회유했대. 근데 어느 날부터 북한군이 불안해하고 초조해 하는게 보여. 막 짐을 싸더니 부대가 북쪽으로 이동한다는 거야. 알고보니 그 사이에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거야. 연합군이 서울로 밀고 들어가고 밑에서는 낙동강 아래 방어선이 밀고 올라오니, 장사리에 있던 북한군들은 북으로 후퇴할 수 밖에 없었어. 북한군은 태백산맥을 따라 북쪽으로 후퇴하기 시작했고, 포로가 된 소년들은 줄에 묶인 채로 발이 부르트도록 걷고 또 걸었어.

소년들은 열흘 밤낮을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계속 끌려갔어. 너무 힘들어 지쳐 쓰러지면, 북한군이 어떻게 했는지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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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 한 사람이 평발이어서 걸음을 못 걸었다. 그걸 인민군은 대창으로 찔러 죽였다. 총알로 가면 고통이 없는데, 총알이 아깝다고 동족을 그렇게…"

대환이는 탈출 할 기회만 노렸어. 장사리를 떠나 10일을 걸어 어느새 강원도 오대산까지 올라왔어. 이동거리가 약 200km. 밤낮 없는 행군에 인민군 병사들도 골아 떨어졌어. 이때다 싶어 대환이는 진목이를 깨웠어. 그리고 부대를 빠져나와 밤새 산 속에 숨어있다가 해가 뜨자마자 남쪽으로 무조건 뛰었어. 얼마나 갔을까. 저기 앞에 국군들이 보여.

"살려주세요!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했습니다!"

근데 안 믿어. 위장 때문에 입은 복장 때문에 북한군인줄 아는 거야. 대환이가 윗옷을 벗더니 바늘로 꿰맨 자리를 허겁지겁 뜯어 냈어. 거기서 나온 건, 유격대원증. 이런 날을 위해 숨겨 둔거야. 이날이 10월 3일. 대환이는 이날을 절대 잊을 수가 없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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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루 말할 수가 없죠. 말로 표현을 못하죠. 반갑죠. 살아왔으니."

그런데, 대환이와 진목이는 집으로 돌아왔을까? 아니. 대환이와 진목이는 바로 국군에 합류해서 다시 전투에 나섰어. 그럼 앞서 구조선에 탔던 규호와 기일이는 집으로 돌아갔을까? 이 역시 아니야. 두 사람도 바로 전쟁터로 합류했어. 소년들이 집에 돌아온 건 1953년 7월, 휴전이 되고 나서야. 집을 떠난지 3년만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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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온 아이들은 가족들을 만나 감격의 눈물을 흘렸어. 하지만 대환이는 전쟁이 끝나고도 한동안 고향집으로 돌아가지 못했어. 함께했던 고향 친구 진목이가 전쟁터에서 사망한 거야. 대환이는 혼자만 살아 남았다는 죄책감에 친구 가족들을 볼 면목이 없다며 집으로 바로 돌아가지 못했어.

▲ 문산호와 함께 잊힌 소년들

그럼, 장사상륙작전의 전사자 수는 몇 명이나 될까? 몇 명이 전사했는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죽거나 실종된 사람이 139명이라 알려져 있긴 한데, 이건 그냥 추정치야. 포로가 됐던 소년들은 대환이와 진목이를 빼고 행방을 몰라. 북한으로 끌려갔는지, 대환이처럼 탈출했는지, 살았는지 죽었는지 파악이 안돼. 문제는 애초에 작전에 참여한 인원이 몇 명인지 정확히 몰라. 알려진 숫자는 772명인데, 이것도 지휘관이었던 이명흠 대위가 기억하는 숫자야. 전쟁 상황인걸 감안하더라도, 왜 이렇게 모르는 거 투성이냐? 기록 자체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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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처음에 봤던, '작전명령 174호' 그 종이 한 장 빼고는 기록이 아예 없어. 그래서 그 기록을 찾아나선 사람이 있어. 바로 이명흠 대위야. 이 대위는 늘 죄책감에 시달렸대. 무모한 작전인 걸 뻔히 알면서 어린 학생들을 사지로 내몰았다는 것에. 그래서 결국 직접 명부대 대원들의 행방을 찾아 나섰어.

이 대위는 국방부에 참전자 명단을 요청했어. 그런데 기록이 없으니 참전했던 사람이 증거를 대라는 황당한 답변을 받았어. 그럼 사전에 제출했던 손톱과 머리카락은? 그것도 없대. 전쟁통에 다 잃어 버렸대. 이 대위는 작고할 때까지 30년 넘게 학도병들의 행방을 찾아 다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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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해서 만든 명단이 바로 이거야. 이대위 평생의 노력이 담긴 미완성의 명단.

그럼 상륙작전을 하다가 죽은 수많은 소년들이 유해는 어떻게 됐을까? 수습된 유해 역시 '0명'이야. 찾으려던 노력 자체가 없었어. 사진을 하나 보여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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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좌초된 문산호 사진이야.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문산호는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었대. 동네 애들이 놀이터 삼아 놀기도 하고, 고철을 팔기도 했대. 방치돼 훼손되어간 거야. 그러다 조금씩 배가 가라앉았고, 어느날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

문산호에 대한 탐사는 1991년에 시작됐어. 배가 완전히 가라앉은 후야. 장사상륙작전에 참전했던 생존 대원들이 방송국에 의뢰해서 침몰한 배를 찾아 나섰어. 침몰한 배는 모래 밑에서 발견했지만, 거기서 아무것도 찾지 못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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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유해 발굴에 나선 건 1997년. 전쟁이 끝난지 44년만이야. 하지만 이 때도 아무것도 찾지 못했어. 그리고 다시 25년이 지난 2022년, 올해초 한번 더 발굴 작업이 진행됐어. 생존 대원들의 간절한 요청에 따른 발굴이었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어. 이미 너무 늦어버린 거야.

장사리에 있던 그 어린 소년들은 지금 90대 할아버지야. 생존해 계신 분은 20명도 안 돼. 이분들의 마지막 소원은, 유해라도 찾아서 희생된 당시 소년들의 가족을 찾아주는 것이야. 그런 일들이 꼭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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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강선애 기자 sakang@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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