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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찐리뷰] 우리 군인에 짓밟힌 광주 시민들…5.18을 잊지 말아요

강선애 기자 작성 2022.05.20 12:42 수정 2022.05.20 15:15 조회 8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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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SBS연예뉴스 | 강선애 기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19일 방송된 '꼬꼬무' 5.18 특집 '나를 잊지 말아요-오월이 오면'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배우 송영규, 강훈, 마마무 휘인이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우리 군인에게 맞아 죽은 사람들

1980년 5월 19일, 평범한 주부 김길자 씨는 집안일을 하다가 전화 한 통을 받았어. 아침에 학교에 간 고등학교 1학년 아들 재학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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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학이는 친구 집인데 무서워서 집에 못 가겠다며 엄마한테 데리러 와달라고 부탁했어. 이에 길자 씨는 아들을 데리러 나갔는데, 거리에는 총을 든 군인들이 쫙 깔려있어. 무섭고 살벌한 분위기에 놀라며, 길자 씨는 아들의 손을 잡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어.

그날 오후,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어. 어떤 젊은 남자가 군인들한테 맞아 죽었다는 거야. 죽은 사람의 검시 보고서를 보니, 끔찍해. 후두부찰과상및열상, 좌안상검부열상, 우측상지전박부타박상, 좌견갑부관절부타박상, 전경골부, 둔부및대퇴부타박상… 뒤통수가 깨지고 눈이 터지고, 어깨 팔 엉덩이 허벅지가 부서졌다는 이야기야. 한마디로, 목숨이 끊어질 정도로 온 몸을 난타당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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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자는 29세 김경철 씨야. 결혼한지 얼마 안 된 새신랑이었어. 며칠전에 딸 백일잔치도 했었대. 경철 씨는 그날 직장 동료들과 점심을 먹고 나오다가 군인들한테 붙잡혀서 다짜고짜 얻어 맞았대. 항의를 할 수도 없었어. 경철 씨는 청각 장애인이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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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이렇게 두들겨 맞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야. 군인들이 길 가던 사람들한테 무작정 폭력을 가했어. 주 타겟은 젊은 사람들이었어. 맞아서 쓰러지면 군홧발로 짓밟고, 옷을 벗겨 팬티바람으로 얼차려를 시켰어. 군인들은 소총 끝에 대검까지 장착했어. 그걸로 찌르겠다는 거야. 우리나라 군인이 우리 국민을 상대로 말이야. 당시 상황을 목격한 기자는 이를 '인간 사냥'이라고 표현했어. 무슨 사건인지 알겠지? 바로 5.18 광주민주화운동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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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리로 나온 시민들, 완전히 고립된 광주

5.18 광주민주화 운동, 왜 일어났는지 알고 있어? 시작은 그날로부터 반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때는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의 사망으로 국가비상사태야. 곧바로 비상 계엄이 선포돼 군인들이 국가를 통제했어. 그러다 12.12 쿠테타가 일어나 전두환이 이끌던 신군부가 권력을 장악했어. 당시 대통령은 최규하 대통령이지만, 실권은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이 갖고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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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전국에서 시위가 일어났어. 그 중심은 대학가였고, 전두환의 퇴진과 계엄령 철폐를 외쳤어.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폭발한 거야. 하지만 신군부는 '박정희 정권이 무너진 혼란을 틈 타 북한이 침략할 수 있다'는 명분으로 오히려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어. 그런데 전쟁을 대비한다면 군대를 최전방에 배치해야 하는데, 우리 군대는 후방으로 이동해. 그 중에 93%가 대학가로 갔어. 시위하는 학생들을 잡으려고. 전국에 군대를 깔아놓고 모든 국민들의 정치 활동을 중지시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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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시위도 소강상태로 접어들었으나 딱 한 곳, 광주는 그 열기가 가라앉지 않았어. 그러자 5월 18일, 공수부대가 광주에 추가 배치됐어. 이들이 시위를 진압할 때는 인정사정이 없었어. 사상자가 속출했고, 병원마다 피범벅이 된 시민들이 넘쳐났어. 그런데 시민들의 저항은 더 거세졌어. 내 가족이, 내 지인이 맞았다는데 그걸 보고 안 나설 수가 없었던 거지. 남녀노소 가릴 거 없이 수만 명이 거리로 뛰쳐나왔어. 군인이 무섭다고 엄마한테 데리러 오라 했던 재학이도 시위에 합류했어.

차들도 몰려들었어. 택시, 버스, 트럭 등이 200대가 넘어. 기사들은 생업을 포기하고 거리로 나왔어. 손에는 돌, 각목, 쇠파이프, 화염병을 들었어. 총과 칼을 든 군인들과 맨 몸으로 싸울 수는 없으니 뭐라도 들었던 거야. 이 시위대는 가장 먼저 방송국으로 달려가 화염병을 던졌어. 며칠 째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데 광주와 관련해 보도하는 언론은 단 한군데도 없었어. 기자들은 왜 가만히 있었을까? 이유가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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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보았다. 사람이 개 끌리듯 끌려가 죽어가는 것을 두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신문에는 단 한줄도 싣지 못했다. 이에 우리는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

이건 기자들의 사직서야. 기사를 썼는데 윗선에서 철저히 막아 모조리 삭제된 거야. 광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기사 한 줄 나오지 않으니 아무도 몰라. 광주로 통하는 버스, 기차도 전부 운행 중단됐고, 시외전화도 다 끊겼어. 광주는 그렇게 완벽히 고립됐어.

▲ '시위대=빨갱이' 정신교육까지 받았던 군인들

고립된 광주 시내 곳곳에서는 시민군과 계엄군이 충돌했어. 총을 쏘는 계엄군 앞에서 시위는 점점 더 격해졌어. 진압대 측에서도 사망자가 발생하며, 계엄군의 분노도 더 커졌어. 그러다 결국 우려했던 일이 터졌어. 5월 21일, 전남도청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졌어. 애국가가 끝나자 총소리가 빗발쳤어. 계엄군이 시민들을 향해 수백발의 총을 쐈고, 장갑차에서 기관총도 쐈어. 옥상 위에는 저격수도 있었어. 시위대 앞 쪽에 있던 사람들이 피를 뿜으며 고꾸라졌어. 시위대 뿐만 아니라 지나가던 행인, 시민들한테도 닥치는 대로 총을 쐈어. 이날 하루 최소 50명이 사망했고, 500명 이상이 부상을 당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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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계엄군은 왜 그랬던 걸까. 당시 공수부대원이었던 최병문 씨가 용기를 내 '꼬꼬무' 카메라 앞에 섰어. 그는 "내가 왜 당시 그 자리에 있었는가 싶다. 지금은 '옛날에 우리가 정말 심했구나', '말도 안 되는 짓을 했구나' 하지, 당시에는 몰랐다"라고 말했어. 그는 시민들을 무차별 학살한 것에 대해 "'광주 폭동'이라고 했다. 빨갱이와 다 똑같은 폭도로 인식하고 있었다"라며 "'쟤들은 폭도다, 때려도 된다'라는 생각이었고 그게 옳은 길인 줄 알았다"라고 전했어. 시위하는 사람은 무조건 빨갱이다, 그 배후에는 북한이 있다, 그러니 때려 잡아야 한다. 이렇게 생각했다는 거야.

심지어 당시 공수부대는 광주에 투입되기 석 달 전부터 정신 교육을 받았대. 상부에서 부대원들에게 '시위대는 빨갱이이자 적'이라고 주입시켰고, 이른바 '충정훈련'이라는 시위 진압 훈련도 따로 실시했어. 충정훈련이란 진압봉으로 사람을 때리는 훈련이야. 어디를 어떻게 때려야 한 방에 제압하는지 집중적으로 훈련을 받았대.

이러한 참상을 만든 것은 전두환과 신군부. 그러나 정작 싸우는 것은 시민과 군인이었어. 권력자들은 쏙 빠지고 애먼 청년들만 피를 본 거야.

▲ 무차별 시민 학살, 살기 위해 총을 든 시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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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살 박기현 군은 수학여행에서 돌아온 날 자전거 타고 서점에 책 사러 나갔다가 계엄군 진압봉에 머리를 심하게 맞아 사망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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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살 최미애 씨는 집 앞 골목에 남편을 마중 나왔다가 계엄군이 쏜 총에 맞아 뱃속에 있던 아이와 함께 세상을 떠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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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살 전재수 군은 뒷동산에서 미끄럼 놀이를 하다가 총소리 듣고 놀라서 도망치는 중에 벗겨진 고무신을 줍다 빗발치는 총알에 맞아 사망했어.

더는 가만히 있을 수 없던 시민들은 광주를 지키기 위해 총을 구하러 다녔어. 파출소와 예비군 무기고를 뒤져 총을 구했고, 그렇게 시민군이 결성됐어. 시민들은 시민군에 열렬한 박수를 보냈고 한 마음으로 응원했어. 허기지면 안 된다고, 따끈한 주먹밥을 만들어 손에 쥐어 줬고, 너도나도 집에 있는 쌀이며 반찬이며 다 내놨어. 구멍가게에선 빵과 음료를 나눠주고, 약국에서는 피로회복 음료를 박스채로 갖다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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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차고 넘치는게 또 있었어. 바로 피야. 서로 헌혈하겠다고, 병원마다 길게 줄을 섰대. 모두가 가족의 마음으로, 이 난리통에도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싸우고 있었던 거야.

사망자가 너무 많아 관이 모자랐던 당시, 18세 홍금숙 씨도 사라진 오빠들을 찾기 위해 시내를 돌다가 시체를 발견하고 정신이 번쩍 들어 집으로 돌아가려 했어. 그러다 광주 외곽에 관을 구하러 가는 시민군 버스를 얻어 탔어. 계엄군은 그 버스를 향해 무차별 난사를 했고, 버스에 타고 있던 18명 중 금숙 씨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사망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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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숙 씨는 지금도 혼자 살아남은 것을 후회하고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어. "잠만 자려고 하면, 울음소리 때문에 잠을 못 잔다. 환청이 들리고, 배 아프다 살려달라 한다. 그 때는 '어떻게 해서든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살고 나니까 '내가 그때 죽었어야 했는데' 싶다"라고 말해.

계엄군 투입 9일째인 5월 26일. 시민들은 도청에 모였고, 계엄군은 탱크까지 동원한 최후의 진압 작전을 예고했어. 이에 시민군은 대표단을 만들어 계엄군과 협상을 시도했어. 시민들이 내건 조건은 병력 철수, 폭력 진압 사과, 시민 석방이었어. 하지만 계엄군은 '마지막 경고이니 무기를 버리고 모두 해산하라'며 그 어떤 요구도 받아들이지 않았어. 이제 곧 계엄군이 쳐들어 올 거야. 폭풍전야, 전남도청에는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어.

▲ 도청에 남은 최후 결사대, 주검으로 돌아온 아들

재학이 어머니는 도청으로 달려갔어. 곧 계엄군이 들어올 테니 집에 가자고 해도 재학이는 "엄마, 창근이가 죽어서 들어온 것 같다"며 "창근이가 다 수습된 걸 봐야 집에 가지. 지금은 못 가겠다"고 말했어. 창근이는 재학이랑 초등학교 동창이야. 재학이는 통행금지 저녁 7시 전에는 집에 돌아가겠다고 엄마한테 약속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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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군들은 도청에 남아 마지막을 대비했어. 시민군 지도부는 까까머리랑 단발머리를 불러냈어. 어린 학생들만 모은거야. 그리고 "너희라도 꼭 살아남아서 이 일을 기억하고 증언하라"고 부탁했어. 이에 그중 일부는 떠밀리듯 도청을 나왔고, 나머지는 그대로 도청에 남았어.

약속한 통금시간이 지났는데 재학이가 집에 돌아오지 않자 엄마는 초조해졌어. 그때 재학이한테 전화가 왔어. "엄마, 나 여기서 끝까지 남기로 했어." 엄마가 울고불고 매달렸지만 아들은 요지부동이었어. 끝까지 도청을 지키겠대. 5월 27일, 그렇게 도청에 남은 최후 결사대는 200명 남짓. 이들은 각자의 마지막을 준비했어. 가족에게 전화하는 사람, 유서를 쓰는 사람, 그리고 집에서 깨끗하게 목욕재계를 하고 나온 사람도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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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군이 이미 도청을 포위한 새벽 3시 50분경 도청에서 방송이 흘러 나왔어. 가두방송의 주인공 박영순 씨는 간절하게 외쳤어. "광주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다. 모두 도청으로 나오셔서 시민, 학생들을 살려달라.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죽어가고 있다. 광주시민 여러분, 우리는 끝까지 광주를 사수할 것이다. 우리 형제, 자매들을 잊지 말아 달라"고 호소했어. 이 애절한 목소리는 광주시내에 울려퍼졌어.

그리고 새벽 4시, 도청 곳곳에서 총성이 울렸어. 일방적인 계엄군의 공격이 1시간 가까이 이어졌고, 시민들은 하나 둘 쓰러져갔어. 그 속에 재학이도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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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 속 재학이와 친구 종필이는 사망한 채 발견됐어. 재학이는 머리랑 배에 총을 맞았대. 당시 재학이는 16살, 광주상업고등학교 1학년이었어. 어린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애끓는 마음. 어머니 김길자 씨는 지금도 매일 재학이를 생각한대. 꿈에도 나오지 않는 아들이 야속하기도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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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엄마 안 보고 싶니? 꿈에서라도 한 번 꼭 보자. 엄마는 너무너무 보고싶어. 재학아, 오늘 저녁에는 꼭 한번 보자. 하늘나라에서 친구들하고 즐겁게 잘 살아."

그날 새벽, 재학이를 포함해 시민군 17명이 사망했고 200여 명이 체포됐어. 그리고 다음날 계엄군은 도청 진압을 자축했고, 작전 수행 중 사망한 이는 한 명도 없었다는 뻔한 거짓말을 했어. 신군부 수뇌부도 기뻐했어. 그 중심에 있던 전두환은 정적 김대중에게 내란 음모 혐의를 씌웠어. 북괴의 사주를 받아 광주에서 폭동을 일으켰다고 몰아갔고, 결국 김대중은 사형선고를 받았어. 그리고 마침내, 전두환이 대통령에 취임했어.

▲ 결국 드러난 광주의 진실, 사과 없이 떠난 전두환

이런 참상이 벌어졌는데도 국민들은 동요하지 않았어. 국민들 대부분은 빨갱이들이 폭동을 일으켰다고 알고 있었으니까. 광주에서 진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무도 몰라. 언론에서 '5.18 광주'는 금기어가 되어 버렸고, 입만 뻥긋해도 유언비어 유포죄로 잡아갔어. 광주 내에서는 더 심했어. 감시는 기본이고, 집합금지로 유족과 피해자들을 모이지 못하게 했어. 그래서 추도식 한 번 제대로 못 했대. 재학이 어머니는 유족 2세 모임을 창설하는 자리에 가려 했다가, 못 가게 막는 사람들에 머리를 맞아 부상을 입기도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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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무리 감추려 해도 진실은 반드시 드러나는 법. 7년이 지나 1987년 여름, 독일에서 외교 행낭 하나가 한국에 도착했어. 독일 정부에서 보낸 건데, 비디오 테이프 하나가 들어 있어. 이 테이프의 주인은 장용주 신부야.

"내가 보고 듣고 아는 진실을 외면하고 기피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 장용주 신부는 광주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애썼어. 80년 5월 광주의 모습을 담은 외신 보도 영상을 독일에서 구한 장 신부는 이걸 국내로 들여오기 위해 움직였고, 7년만에 독일 정부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국내로 반입할 수 있었어. 신부님은 지하 골방에서 이틀 동안 천 개 정도의 비디오테이프를 복사해 전국의 성당으로 보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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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각 지역의 성당에서 이 영상을 보려고 줄을 섰고, 그렇게 조금씩 광주의 진실이 알려졌어. 이 테이프는 퍼지고 퍼져 국회까지 진출했어. 국회에서 이 비디오가 상영되고, 1988년 청문회가 열렸어. 신군부 수뇌부가 줄줄이 출석됐는데, 이들은 변명과 모르쇠로 일관했어. 발포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명령을 내린 사람은 없대. 당시 군인들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자유 발포였고, 그래서 정당방위라는 주장을 했어. 그럼, 전두환은 뭐라 말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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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는 총기를 들고 일어난 하나의 폭동이야. 그러니까 계엄군이기 때문에, 계엄군이 진압하지 않을 수 없지않나. 군대라는 것은 지휘계통에 의해 움직이는 거다. 난 계엄사령관 부하였다. 또 보안사령관이기 때문에, 보안사령관은 보안사만 지휘하지 그 외의 거는 지휘권이 없다. '광주를 진압하고 내가 대통령이 됐다' 이렇게 나오던데, 그건 말도 안되는 소리다." –전두환 2003년 인터뷰 중-

당시 모든 권력을 쥐고 있었던 건 전두환 보안사령관이었단 걸 모두가 알고 있어. 그런데 전두환은 광주민주화운동을 '폭동'이라 정의하며 자신은 관련이 없다고 발뺌했어. 하지만 국민들은 포기하지 않고 목소리를 높였고, 결국 5.18 특별법이 제정돼 책임자에 대한 재판이 열렸어. 전두환은 사형 판결을 받았어. 그런데 2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됐고, 수감 2년만에 국민 통합을 명분으로 특별 사면됐어. 그리고 지난해 사망했지. 그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 어떤 형태의 사죄나 속죄는 단 한 번도 하지 않았어.

▲ 5.18을 잊지 말아 주세요

이를 지켜보는 피해자와 유족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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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3일 전두환이 죽은 날 아닌가? 왜 그 사람은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고 우리 국민을 총, 칼로 죽여놓고 본인은 책임회피를 끝까지 했나. 죽을 때까지도 책임회피를 했다. 지금도 발포 명령자가 누군지 모르지 않나. 그런게 가슴 아프다." -5.18 유족 박현옥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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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가면 안 된다. 역사라는 것을 정리를 못하고 죽는 것은 역사의 미완의 과제로 남는 거다. 그 사람이 자기 권력을 잡기 위해서, 그 한 사람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고통 속에 살았다. 한 사람 인생이 아니라 한 가정이 무너졌다." -5.18 피해자 김태찬 씨

1980년 5월 광주에서는 무고한 시민 274명이 사망했고 3,700여 명이 부상당했어. 그리고 계엄군은 23명이 사망했고 115명이 다쳤어. 당시 광주에서 실종됐다고 신고된 사람만 400명이 넘어. 그 중 공식 인정된 행방불명자는 78명이야. 이들은 다 어디 있는 걸까. 실종자들에 대해서는 여전히 소문만 무성해. 군인들이 트럭에 싣고 가버렸다, 산 속에 암매장 됐다, 그런 말들만 돌아. 실종자를 찾을 길은 막막해. 40년이 더 지났지만, 광주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

"행방불명자, 그게 우리의 큰 숙제다. 우리 살아 있는 사람들의 몫이다. 분명 5.18 때 행방불명 됐는데, 그 가족들의 심정, 그 사람들은 40년 동안 어떻게 살았겠나. 사는 것 같이 살았겠나." -5.18 피해자 홍금숙 씨

당시 공수부대원으로 광주에 투입됐던 최병문 씨는 동료들이 용기내 입을 열어주길 부탁했어.

"옛날 우리 동료들이 한 번 용기를 내줬으면 한다. 부대원들은 알고 있다, 관여된 사람은. 현장에 있던 동료들이 나서서 '그때 어떤 사람 어디에 묻었다' 이런 식으로만 얘기해줘도 큰 도움 안 되겠나. 그 사람들 뼈라도 찾았으면 싶은 마음이다."

재학 군의 어머니는 끝까지 5.18을 잊지 말아 달라고 애원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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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5.18을 꼭 영원히 안 잊어버리고 기억하게끔. 5.18을 끝까지 잊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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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선애 기자 sakang@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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