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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찐리뷰] '192명 사망'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승객들 왜 탈출하지 않았나

강선애 기자 작성 2022.05.06 12:02 수정 2022.05.06 14:14 조회 12,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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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SBS연예뉴스 | 강선애 기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5일 방송된 '꼬꼬무- 전하지 못한 목소리 : 지화(火)철 1080호 미스터리'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배우 정인선, 가수 이승윤, 위너 강승윤이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한 남자의 수상한 행동, 불길이 치솟은 지하철

때는 지금으로부터 19년 전, 2003년 2월 18일. 당시 62세였던 전융남 씨는 대구에서 지하철을 탔어. 마침 자리가 나서 앉았는데, 맞은편에 앉은 한 남자의 수상한 행동이 눈에 들어와. 이 남자는 옆에 놓은 약수통의 뚜껑을 계속 열었다가 닫았다가 만지작거리더니, 호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어. 라이터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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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남 씨는 그 수상한 남자가 담배를 피우려는 줄 알고 깜짝 놀라 "보소, 왜 라이터 불을 켜요"라며 제지했어. 바로 그 때, 열차는 중앙로 역에 들어섰고, 그 수상한 남자의 바지에 불길이 치솟았어. 사람들은 열차 출입문이 열리자 남자를 밖으로 끌어내 불을 다급하게 껐어. 그런데 더 큰 문제가 생겼어. 이 남자의 불은 다 껐는데, 남자가 앉았던 자리에서 불길이 활활 타올랐어. 약수통 안에 휘발유가 있었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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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란 기관사가 뛰쳐나와 소화기로 불을 끄기 시작했어. 그런데 꺼지긴 커녕, 옆좌석으로 불이 옮겨 붙었어. 화재 발생 1분만에, 첫 신고 전화가 접수됐어. 불이 번지는 속도는 예사롭지 않았고, 불길은 점점 다른칸으로 이동했어. 뿌연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숨쉬기도 힘든 상황. 119가 올 때까지 기다릴 게 아냐. 승객들이 탈출하기 시작했어.

열차가 있는 승강장은 지하 3층. 탈출하려면 계단으로 올라가서 지하 2층 개찰구를 지나, 지하 1층으로 올라가서 상가 밀집구역을 지나서 지상 출구를 찾아야해. 당시 지하 3층에 있던 사람만 최소 200명. 연기와 유독가스를 피해 올라가는데, 뒤에서 고압전선이 터진 건지 불꽃이 또 튀어. 아비규환이야.

그런데 그때,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와. 이 바람의 정체는 바로, 반대편 승강장에 열차 한대가 들어오고 있는 거야. 1080호 전동차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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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식간에 덮친 화마, 그저 기다린 승객들

중앙로 역에 화재 사고가 발생한 줄 모르는 1080호 승객들은 평온했어. 열차가 멈추고 문이 열리는데 갑자기 연기가 확 들어와. 열차는 승객 몇 명만 내려주고 급히 문을 닫았어. 나머지 승객들은 그냥 가만히 제자리에 앉아 있었어. 왜 가만히 있었냐고? 곧 출발할 테니 잠시 참아 달라는 안내 방송이 나왔거든. 별일 아닌가보다, 하고 그냥 기다린거지.

그런데 곧 출발한다는 열차가 출발을 안해. 매캐한 연기는 계속 들어오고, 전기는 꺼졌다 커졌다 그래. 그제서야 1080호 승객들이 놀라서 창 밖을 봤고, 건너편 1079호 열차에 불길이 치솟고 있는 걸 발견했어. 사람들은 난리가 났어. 나가자니 위험할 거 같고, 기다리자니 연기와 냄새가 점점 심해져. 잠깐 문이 열렸을 때 나간 승객도 있지만, 대다수가 그냥 앉아 있었어. 불길은 1080호 열차로 옮겨 붙었고, 승객들은 119에 막 전화를 걸었어. 20분동안 150통이 넘는 신고전화가 걸려왔대. 이에 소방본부는 초비상. 대구 전역의 소방차와 구급차가 일제히 출동했어.

구조를 위해 현장에 진입한 소방대원들. 현장까지 진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어. 검은 연기로 시야는 가려지고 화재로 인한 뜨거운 열기는 방화복을 입은 소방 대원들이 화상을 입을 정도였어. 그럼에도 대원들은 쓰러진 사람들을 정신 없이 옮기고 또 옮겼어.

하지만 상황은 갈수록 더 악화됐어. 전동차가 있는 지하 3층까지는 방화복을 입어도 접근할 수 없는 상태였어. 화염은 1시간 40분 동안 계속됐고, 본격적인 진화 작업은 화염이 걷힌 후에나 가능했지. 지하 3층에서 생존자는 단 한 명도 없었고, 전동차 안은 사람들의 뼈만 남고 모두 타버린 상황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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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타는 실종자 가족들

지하철의 특수성 탓에 누가 탔고 몇 명이나 탔는지 알 수 없어, 피해자의 신원을 확인하는 게 불가능했어. 이에 중앙로 역에는 가족들과 연락이 닿지 않는 수많은 이들이 몰려들었어. 이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병원을 찾아다니며 가족을 찾았어. 하지만 사건 발생 10시간이 지나도 가족의 생사 확인조차 어려운 사람들이 다수였어.

그 사람들 가운데에는 전재영 씨도 있었어. 집은 경북 김천인데, 이날 병원 진료를 받으러 대구에 온 아내 박미영 씨와 7살 난 딸 혜진 양을 찾으러 무작정 대구로 왔어. 그러나 부상자, 사망자 명단 어디에도 아내와 딸을 찾을 수 없었어. 하루만에 중앙로역 바로 직전인 대구역 CCTV에서 아내와 딸을 포착했어. 손을 꼭 잡고 지하철 계단을 내려가고 있던 아내와 딸의 모습. 그리고 이들이 탄 것은 바로 1080호 열차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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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영 씨 같은 사람들이 줄을 이었지만 이들이 가족을 찾을 방법은 많지 않았어. 열차 안에 남은 것은 유골 일부분과 타다 남은 물건들 뿐이었고, 특히 수많은 유해가 뒤엉켜 누가 가족인지 알 수 없었어. 이에 경찰 감식반과 국과수 법의학자들이 총동원돼 유해 발굴 작업을 시작했어. 실종자 가족들은 불에 타지 않을, 가족들이 지니고 있었을 법한 소지품 목록을 적어 유해 발굴단에 전달했어. 이에 재영 씨는 딸이 걸고 있던 미아 방지 목걸이, 아내가 차고 있던 예물 시계를 적어냈어.

19살의 딸 상임 양을 찾아 헤매던 엄마 황명애 씨도 자신이 딸에게 해 준 리본모양의 반지, 쓰고 있던 안경 등 딸의 소지품을 적어 냈어. 명애 씨는 "딸이 살아있기를 바라지만 현실은 엄마가 '내 아이가 여기 죽었습니다' 하고 자료를 만들어야 했다"며 부모가 자식이 여기서 죽었다는 걸 밝히려 애를 써야했던 당시 상황을 떠올리며 눈물을 보였어.

▲ 350명의 사상자, 탈출조차 못한 승객들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 대체 왜 이런 비극이 벌어졌을까? 참사의 시작점은 당시 56세의 방화범 김대한이야. 정신질환도 없고 전과자도 아니었던 그는 2년 전부터 시작된 건강 악화로 세상을 비관했대. 이에 혼자 죽기는 억울하니 같이 죽자는 마음으로 일부러 사람들이 많은 시간과 장소를 노려 범행을 저질렀어. 이 말도 안 되는 방화로 350명의 사상자를 만들었고 그 중 사망자만 192명이야.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있어. 이 사고로 발생한 전체 사망자의 74%가, 뒤늦게 승강장에 들어온 전동차 1080호에서 나왔어. 처음 불이 났던 1079호에서는 사망자가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어. 1080호에 사망자가 집중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지하철역에는 모든 상황을 컨트롤하는 종합사령실이 있어. 수십대의 모니터를 보며, 열차가 역에 잘 섰는지, 무슨 일이 일어나진 않았는지 실시간 감시해. 1079호에 불이 난 시각은 오전 9시 52분. 사령실 모니터에도 열차에 불이 나고 연기가 뒤덮는 게 포착됐어. 그런데 정작, 종합사령실은 아무 것도 안했어. 아무도 모니터를 안 보고 있었던 거야.

하지만 기회는 또 있었어. 불이 나고 1분 만에 화재감지기가 작동했어. 곧장 사령실의 경보음이 울리고, '중앙로역 화재발생'이라는 경고 문구도 떴어. 그런데 이번에도 아무것도 안했어. 전에도 화재경고가 잘못 울린 적이 있다고, 오작동인 줄 알았대. 결국 사령실에서 화재사실을 알게 된 건 화재가 나고 3분이 지난 후야. 그 때가 9시 55분. 그 시간에 1080호는 아직 이전 역에 있었어. 7살 혜진이와 엄마, 19살 상임이, 그리고 수백명의 탑승객이 타고 있던 그 열차야. 아직 중앙로역에 들어오지 않았던 이 열차가 못 들어오게 막으면 됐어.

그런데 정작 사령실에서는 "중앙로역에 화재가 발생했으니 진입시 조심히 운전해서 가라"라는 말만 전했어. 이에 1080호 기관사는 별 일 아니라고 생각하고 중앙로역에 진입했고, 승강장에 진입해서야 연기를 발견했어. 그리고 기관사는 무정차 통과가 가능했음에도 지령이 없었기에 중앙로역에 그대로 정차했어.

화재 발생 4분 후, 1080호 승객들은 곧 출발한다는 안내 방송 때문에 그 자리에서 열차가 떠나기만 기다렸어. 기관사나 사령실은 승객들을 대피시켜야 했지만 대피 방송은 하지 않았고 열차 출발에만 몰두했어. 그렇게 허비한 시간이 5분, 그 사이 전기는 다 끊어지고 사령실과 교신도 안 되던 기관사는 뒤늦게 열차 출입문 개방 버튼을 눌렀지만 전기가 끊어진 상황에 문이 열릴 일은 없었어. 그대로 열차에 갇혀버린 승객들. 열차 안은 유독가스와 열기로 가득찼고 승객들은 무방비로 노출됐어.

5 호칸에서는 승객들이 유리창을 깨서 몇 명이 탈출했고, 4 호칸에는 마침 탑승했던 역무원이 수동으로 문을 열고 탈출을 도왔어. 하지만 대부분의 승객은 수동으로 문을 여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지. 이러한 상황에 기관사는 1 호칸의 출입문만 수동으로 한 두개 열어준 후, 본인만 서둘러 탈출했어.

어디가 계단인지 출구인지 분간이 안 되고 숨쉬기도 어려운 상황에 전동차에서 탈출한 승객들도 중앙로역을 빠져나가기는 쉽지 않았어. 특히 방화셔터에 가로막혀 쓰러진 사람들이 다수였어. 나중에 보니, 검게 그으른 방화셔터에 수많은 손자국과 발자국이 찍혀 있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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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인재가 만든 대형 참사

한 명이라도 제 역할을 했다면 아무도 죽지 않았을 이 사고는 인재와 인재가 겹쳐 350명의 사상자를 만들었어. 더 충격적인 일은 계속됐어. 이후 지하철 공사 측이 사건을 은폐하려 했던 의혹이 드러난 거야. 당시 탈출에 성공한 1080호 기관사는 11시간 잠적했는데, 이 시간 동안 지하철 공사의 간부들이 그를 이곳저곳으로 데리고 다니며 경위서를 쓰도록 하고 회의를 했대.

그리고 화재 다음날, 황당하게도 200명의 군인이 투입돼 빗자루와 삽으로 잔해들을 쓸어 담고 물청소를 했어. 가족들은 소지품 하나라도 더 찾으려고 애태우고 있었는데 그걸 다 갖다 버린거야. 그렇게 버려진 쓰레기 포대에서 나중에 실종자들의 유해와 소지품 150여 점이 발견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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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고가 대형 참사가 될 수밖에 없던 진짜 원흉은 지하철 그 자체였어. 처음 방화범이 뿌린 휘발유는 2리터로, 그 양으로 전동차 두 대가 모두 전소되는 건 말이 안 돼. 이는 당시 지하철 안전기준의 문제였어. 지하철 설비 소재에 대한 세부 기준이 없고, 특히 화재 시 가장 치명적인 유독가스에 관련된 기준은 어디에도 없었어. 천 커버에 스펀지 재질로 만들어진 당시 지하철 의자는 불에 굉장히 잘 탔어. 정기적인 방염처리가 필수임에도 대구 지하철은 개통 이후 단 한 차례도 방염처리를 하지 않았던 것으로 밝혀졌어. 엄격하지 못한 기준에 안일한 생각으로 만들어진 값싼 지화(火)철이었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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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지하철 화재참사로 사법처리가 된 사람은 10명. 방화범 김대한은 무기징역, 1080호 기관사는 5년형을 받았어. 하지만 불쏘시개 전동차를 만든 책임은 누구도 지지 않았어. 그리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유가족들과 생존자들에게 돌아갔어.

▲ 남은 사람들의 고통과 슬픔, 절대 잊으면 안 될 그날

사고 이후, 세상에서 가장 슬픈 전시회가 열렸어. 희생자 유류품 전시회로, 국과수에서 발굴한 유류품을 하나하나 사진으로 찍어 전시한 거야. 그걸 보고 자기 가족의 것이라 생각하면 알려주고, 그걸로 유해를 대조해보겠다는 거지. 678개의 유류품이 4천장의 사진으로 담겨, 가족을 찾았어. 전시장은 가족의 물건을 찾는 사람들의 눈물로 가득 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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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명애 씨도 여기서 딸의 물건을 찾았어. 딸이 살아있기만 바랐던 어머니는 사진을 보는 순간 내 아이의 물건임을 알고 주저앉았대. 명애 씨는 "그때 '이제 정말로 네가 갔구나', '엄마가 아무리 부정해도 네가 갔구나', 생각했다"라며 눈물을 보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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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영 씨도 아내의 시계와 딸 혜진이의 목걸이를 발견했어. 탈출 의지를 잃고 아이만 보호하려 했던 아내의 마지막 흔적을 접한 재영 씨도 눈물을 흘렸어.

유해를 수습하는데 총 3개월이 걸렸고, 그해 6월 29일 합동 영결식이 열렸어. 고통은 유가족들만의 것이 아니었어. 생존자들도 일상으로 회복 자체가 힘들었어. 생존자들은 사고 후유증으로 고통받았고 또한 본인만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어.

올해가 대구 지하철 화재참사 19주기야. 사고 직후엔 모두들 내 일처럼 가슴 아파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사람들은 '이제 그만 잊으라', '이제 그만 좀 하라'고 한대. 하지만 여전히 소중한 이들을 잊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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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사고로 25살 딸 지은 양을 잃은 아버지 윤근 씨는, 딸의 결혼 선물로 주려고 25년간 딸의 목소리를 녹음해 왔던 테이프를 공개했어. 그 테이프에는 1979년 태어난 갓난 아이의 울음소리부터, 아빠에게 애교를 부리는 어린 지은 양의 귀여운 목소리도 담겨있어. 윤근 씨는 "딸이 사고로 가버리니 줄 사람이 없어졌다"며 "목소리를 이제 나 혼자 듣는다. 고맙게 반갑게 들어야 할 딸은 가고 없다"며 가슴 아파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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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지하철 참사 후 많은 것들이 바뀌었어. 지하철 설비 소재는 모두 불연재나 극난연재로 교체됐고, 화재대비 매뉴얼도 마련됐어. 또한 승강장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비상정지 시킬 수 있는 버튼도 생겨났어.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안전은 그들이 우리에게 남겨준 유산인 셈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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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잊지 말아야 할 대구 지하철 참사. 가슴 아픈 참사에도 이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추모비나 추모 공원은 없어. 사실 당시 성금과 정부 지원금으로 한 공원이 마련됐으나 그곳은 '시민 안전 테마파크'라는 이름이 붙었어. '추모'라는 단어가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준다는 것이 그 이유였어. 훗날 명칭 변경을 약속하고 건립됐으나 아직도 명칭 변경은 이뤄지지 않고 있어. 지금이라도 우리는 추모라는 단어의 의미를 되새기고, 그들을 기억하고 추억하는 옳은 방법은 무엇일지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어때?

강선애 기자 sakang@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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