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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브스夜] '꼬꼬무' 최초의 한일전과 월드컵…"결과는 패배, 과정은 승리" 투지에 전 세계가 감동

김효정 에디터 작성 2022.01.14 02:26 수정 2022.01.14 09:28 조회 1,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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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SBS연예뉴스 | 김효정 에디터] 월드컵 본선 진출, 그 시작은?

13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에서는 '1954 출격 - 대한민국의 이름으로'라는 부제로 대한민국 역사상 첫 한일전이 열린 그날의 이야기를 조명했다.

1954년 1월 전쟁이 끝난 지 6개월도 되지 않은 날, 홍덕영 씨는 허름한 여관방에 도착했다. 그리고 이어 스무 명의 장정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이들의 정체는 바로 군인. 간첩 잡는 특무 부대부터 다양한 부대에서 모여든 사내들. 이들은 그 일을 위해 각 부대에서 차출된 특수 정예 요원이었다.

같은 시각 지금의 청와대인 경무대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이 그 일을 거세게 반대했다. 그러나 장택상 의원은 물러나지 않았고, 이승만은 결국 그 일을 허락했다. 그리고 장 의원은 곧바로 여관방에 있던 군인들을 불러 모아 "드디어 각하의 출격 명령이 떨어졌다. 단 실패했을 때는 현해탄에 목숨을 던져야 한다"라며 각오를 다졌다. 이에 군인들은 임무에 실패했을 때는 명을 따르겠다고 각서까지 썼다.

이들의 임무는 바로 축구 한일전. 이 경기가 바로 공식적인 최초의 한일전.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 경기로 한 경기를 일본에서 하면 한 경기는 한국에서 이뤄져야 하는 것. 이에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절대 일본인들을 우리 땅에 들어오게 할 수 없다고 했고, 결국 두 경기 모두 일본에서 치를 것을 제안했다. 해방된 지 10년도 채 되지 않았던 시기여서 신중할 수밖에 없었던 것.

일본은 반대할 이유가 없었고, 이에 최초의 한일전 출격 명령이 떨어졌다.

축구를 할 수 있는 방법은 군입대 밖에 없었던 시절. 전쟁 직후 축구를 하기 위해 군인이 된 선수들은 가죽과 나무로 만들어진 축구화를 신고 달려야 했다. 특히 축구화의 스터드를 직접 못으로 박아 사용했던 선수들. 이에 선수들에게 망치는 필수였다.

국가 대표임에도 장비도 열악했던 선수들. 사실 대통령이 한일전을 반대한 이유도 돈이었다. 경기를 치르기 위한 비용도 없었던 것. 이에 모금 운동을 펼쳤고, 재일 동포들이 십시일반 모금을 해 한일전을 치를 수 있게 됐다.

일본으로 떠나는 출국일은 바로 1954년 3월 1일. 선수들의 마음은 어느 때보다 비장했다. 그리고 선수들을 배웅하는 국민들의 마음도 마찬가지였다. 손에는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쳤다.

비장한 마음으로 도착한 일본에는 수백 명의 재일동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첫 경기 일주일 전, 하지만 우리 선수들은 축구장이 아닌 농구장에 있었다. 며칠 째 눈, 비가 내리는 상황에 신발이 하나뿐이라 연습을 할 수 없었던 것.

흙 한번 못 밟아보고 일주일이 지나고 3월 7일 첫 번째 한일전이 열리는 날. 악천후에 우리 선수들은 경기를 미룰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하지만 일본은 양보하지 않았고, 눈이 그치길 기다려 예정대로 경기를 진행했다.

경기가 시작되기 직전 일본 도쿄 하늘에 태극기가 펼쳐졌다. 이에 홍덕영 선수는 "우리나라 태극기를 정정당당히 걸어놓고 일본 일장기와 맞대결을 한다는 것이 모든 분야에 한해 처음이었다. 우리 태극기가 먼저 걸리고 일장기가 걸렸다. 일장기가 바람에 흘러가는데 그걸 봐도 기분이 좋았다"라고 했다.

최초의 한일전은 너무나 열악했다. 쌓였던 눈이 다 녹으며 축구장은 갯벌이 되어 버렸고, 축구화는 이미 젖고 공은 물에 젖어 돌덩이가 됐다.

전반 15분 첫 골이 터졌다. 그러나 첫 골의 주인공은 우리나라가 아닌 일본. 그런데 이 골로 분위기가 바뀌었다. 우리 선수들의 눈에는 독기가 서리기 시작했고, 움직임이 달라지며 주도권을 우리가 잡았다.

그리고 첫 골이 터진 지 불과 6분 만에 동점골이 터졌다. 하지만 관중석은 조용했다. 재일동포 수백 명이 와있지만 혹시라도 나중에 해코지라도 당할까 기쁨을 드러내지 못했던 것. 한국 분위기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생중계가 이뤄지지 않아 2시간 이후에서야 결과를 알 수 있었던 것. 그럼에도 국민들은 라디오 가게 앞으로 중계를 듣기 위해 모여들었다.

이날 최종 스코어는 5대 1, 대한민국의 완승이었다. 열악한 환경 속에 투혼을 보여준 한국 선수들. 이때 관중석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제대로 기뻐하지도 못했던 재일 동포들이 눈물을 터뜨리며 감격한 것.

일주일 후 2차전의 결과는 2대 2 무승부. 이에 대한민국은 당당하게 월드컵 본선 티켓을 따냈다. 일본의 중심에서 승리한 선수들은 그야말로 금의환향. 부산에서 서울로 오는 정차역마다 환영 인파가 가득했고, 이승만 대통령은 선수들을 경무대로 초청해 이들의 공을 치하했다.

선수들은 이제 월드컵 본선 경기를 위해 스위스로 향했다. 이에 방송에서는 당시 월드컵 공식 포스터를 공개했다. 월드컵 본선 진출 16개국 중 유일하게 우리나라 국기 태극기만 포스터에서 보이지 않았던 것. 이는 약소국가의 설움을 보여주는 것이라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본선을 위해 스위스로 향하는 출국날. 항공권을 어떻게 사야 하는지도 몰랐던 우리 대표팀은 항공권을 구하지 못해 선발대와 후발대로 나뉘어 스위스로 가야만 했다.

1진 선수와 감독이 먼저 일본 도쿄에서 스위스로 갔다. 일본에서 태국 방콕, 인도의 캘커타, 이탈리아 로마, 스위스 취리히까지 이어지는 지옥의 환승 여정. 예약도 안 한 탓에 민항기든 군항 기이든 걸리는 대로 비행기를 잡아 탔다.

그리고 가는 내내 우리 선수들은 감독이 써준 쪽지에 담긴 작전을 공부했다. 우리와 맞붙는 상대국들은 세계 최강, 견줄만한 상대가 아닌 데다 정보도 없으니 구체적인 전술을 지시할 수 없어 감독이 해줄 수 있는 것은 기본적인 이야기뿐. 하지만 우리 선수들은 이마저도 달달 외우며 경기를 준비했다.

첫 경기 3일 전, 무려 5박 6일, 비행시간만 64시간이 걸려 도착한 선수들은 경기 시작도 전에 지쳐버렸다. 그리고 이후 간신히 2진 선수들도 스위스에 도착했다.

첫 번째 우리의 상대는 세계 최강 헝가리. 최근 4년간 치른 경기에서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고 경기 시작 10분 안에 골을 넣는 최강국이었다. 그리고 최고의 스트라이커 페렌츠 푸스카스가 헝가리 팀에 있었다. 악마의 왼발 푸스카스.

구름같이 몰려든 관중들. 그들이 궁금한 것은 헝가리가 어떤 플레이를 펼치고 몇 골을 넣을 것인가였다.

우리 선수들은 태극기를 펼치고 그 위에 손을 모아 파이팅을 외치고 경기를 시작했다. 몸도 제대로 못 푼 상황에 세계 최강 헝가리와 맞붙은 우리 선수들. 그런데 헝가리 선수들이 당황했다.

선수 전원이 수비를 한 것. 이에 푸스카스는 악마의 왼발을 제대로 써보지도 못했다. 마의 10분이 흘렀는데도 0 대 0.

그런데 이때 우리 감독님이 벤치에서 소리를 질렀다. 감독님은 "져도 좋다 한 골만 넣자. 그래야 우리 국민들이 속이 좀 시원하지 않겠니"라고 했던 것. 이에 하프라인을 넘어 공격을 시작한 우리 선수들. 하지만 헝가리는 헝가리였다.

전반 12분 푸스카스의 첫 골이 터졌고 이후 헝가리 선수들은 쉴 새 없이 골문을 두드렸다. 이에 방송에서는 FIFA에도 없는 당시 경기 영상을 공개했다. 헝가리 국영 필름 보관소에 저장되어 있던 경기 영상을 입수한 것.

4대 0으로 전반전 종료. 그런데 이후 우리 선수들은 하나 둘 쥐가 나서 쓰러지기 시작했다. 이에 심판이 경기를 중단시켰다. 선수 교체도 못하는 당시 규정에 골키퍼 홍덕영 씨는 공을 잡으면 경기장 밖으로 차서 시간을 버렸다.

하지만 결국 홍덕영까지 쥐가 나는 상황에 이르렀고 최종 스코어 9대 0으로 대패했다. 이는 역대 월드컵 최다 골 차이로 아직도 깨지지 않는 기록이다.

부끄럽고 창피해서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한 선수들은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그런데 그들에게 많은 이들이 응원을 보내왔다. 숙소에는 선물들이 쌓여있기까지 했던 것.

당시 중계방송을 하던 아나운서는 우리 대표팀에 대해 "한국 대표팀은 전쟁이 끝난 지 1년도 채 안 된 나라의 선수들이다. 그들은 엄청난 투혼을 보여주고 있다. 응원을 부탁드린다"라고 했고, 헝가리 감독도 경기 후 "한국 팀은 쓰러져도 계속 다시 일어났다. 마치 지지치 않는 사자들이 뛰는 것 같았다"라며 우리 선수들의 투지에 박수를 보냈다. 그렇게 전 세계가 우리 선수들의 투지에 감동했다.

2일 뒤 열린 2차전은 터키와의 대결이었다. 1진 선수들의 컨디션 문제로 우리는 2진 선수들이 경기에 출전했다. 그런데 이 경기에 관심이 있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무관심 속에 진행된 경기의 결과는 7대 0. 단 두 경기의 실점이 총 16점이었다.

터키전에 중앙 수비수로 뛴 한창화 선수의 아들 배우 한정수는 "사실 스코어만 듣고는 실망스럽고 창피했다. 그런데 이후에 속사정을 듣고 당시 생각을 해보니 전쟁 직후 아시아를 대표로 결선에 갔다는 것만으로도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아니었나 싶었다"라며 "30대까지도 아버지가 어려운 일을 해냈다는 걸 몰랐는데 나이가 들수록 힘든 일을 해내셨구나 생각하게 됐다"라고 말했다.

터키전 다음날 짐을 싼 우리 선수들. 결승전을 보고 싶었지만 체류비가 없어 귀국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던 것.

그날 이후 우리나라가 다시 월드컵 무대를 밟기까지 무려 32년이 걸렸다. 그리고 이후 9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 단 6개국밖에 세우지 못한 대기록을 우리나라가 세운 것.

2002년에는 월드컵을 개최하고 4강 신화까지 이뤄낸 우리나라. 홍덕영 씨는 2002 월드컵 유치위원단으로 활동했고, 푸스카스와도 그때 재회했다. 그리고 그는 당시 우리나라 월드컵 유치에 힘을 실어줬다.

홍덕영 씨의 방에 항상 걸려있던 사진 한 장. 사진 속에는 젊은 시절 자신의 축구화를 수리하는 모습이 담겨있었다.

이에 그의 아들은 "꼭 한번 안아주고 밥 좀 사 먹이고 싶은 생각이 든다. 외지에 나가서 힘들고 배고픈 상황에서 어떻게든 한번 해보겠다는 궁지에 몰린 청년의 결기가 느껴지니까 그런 기분이 든다. 기쁘게 버텨줘서 기쁜 기억을 남겨줘서 감사하다"라고 했다.

안성준은 그날의 이야기에 대해 "결과는 패배였으나 과정은 승리였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라고 했다. 또한 제갈성렬은 "난 올림픽에 3번 나갔다. 메달 유망주였지만 노메달에 그쳤는데 그때의 경험들이 지도자가 되는 데 도움이 됐다. 이 이야기를 보는 많은 선수들이 눈앞의 성과가 아니라 최선을 다 하고 후회 없는 경기를 한다면 금메달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라고 진심을 전했다.

마지막으로 방송은 1954년 당시 주장이 스위스에 들고 갔던 태극기를 공개했다. 이를 본 안성준은 "이 것이 바로 우리한테 힘이고 작전이 아니었을까"라고 당시 선수들의 마음에 공감해 눈길을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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