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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브스夜] '꼬꼬무' 하와이안 피스톨 모티브 된 '김상옥 의사'…그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

김효정 에디터 작성 2021.11.19 02:46 수정 2021.11.19 15:06 조회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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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SBS연예뉴스 | 김효정 에디터] 김상옥 의사의 그날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18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에서는 '1 vs 1000의 사나이 - 신출귀몰 경성 피스톨'이라는 부제로 김상옥 의사의 그날을 조명했다.

1923년 1월 12일의 어둑한 종로 거리, 갑자기 폭발음이 들리며 땅이 흔들리고 돌덩이들이 날아갔다. 화약 냄새가 진동하는 거리는 그야말로 아비규환. 그리고 이때 구경꾼들은 한 건물이 폭삭 무너진 것을 보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폭파된 건물의 정체는 바로 종로 경찰서.

이곳은 당시 독립항쟁을 억압하는 총 본부였으며 수많은 독립운동가들과 우리 국민들이 고문을 겪으며 참변을 당한 곳이었다. 물고문부터 손톱 뽑기, 전기고문, 거기서 끝이 아니라 여성들에게는 성고문까지. 이런 종로서의 폭파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던 것.

이 사건으로 경찰서들은 발칵 뒤집혔다. 이들은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지나가던 조선인만 다쳤다. 일본의 피해는 없다"라며 언론 보도를 조작했으나 실제로는 초비상 사태가 되어 폭파범을 찾기에 혈안이 됐다. 그리고 일본 경찰은 얼마 지나지 않아 용의자를 특정했다. 이들이 지목한 용의자는 바로 불령선인(일본어로 일본에 반항하는 조선인=독립운동가) 김상옥.

당시 한국인들을 상대로 온갖 고문을 일삼던 일본 순사 미와 와사부로는 이 사건의 대장으로 임명된다. 그의 주특기는 고문으로 김구 선생부터 안창호, 김좌진, 안중근, 김원봉 등 그의 손에 고문을 당하지 않은 독립운동가가 없을 정도.

그리고 그는 밀정을 풀어 독립운동가와 가족들에게 정보를 캐냈고, 이로서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했다. 특히 당시 이렇게 활동하던 밀정의 숫자는 이름이 확인된 것만 무려 895명에 달했고 실제로는 수만 명으로 추정되는 것으로 알려져 충격을 안겼다.

밀정 관리에 탁월했던 미와는 밀정을 시켜 종로서 폭파를 시킨 인물을 찾아 나섰고, 용의자로 3년 전 조선총독부 총독을 암살하려 했던 경성 피스톨 김상옥을 특정한 것. 3년 전 김상옥 능 일본 경찰들은 눈에 불을 켜고 쫓았으나 찾을 수 없었다. 동대문 홍길동이라 불릴 정도로 신출귀몰했던 그를 쫓는 것은 무리였던 것.

김상옥은 영화 '암살'의 하정우가 맡았던 하와이안 피스톨의 모티브가 된 인물이자, 영화 '밀정' 속의 박희순 역할의 모티브가 된 인물이기도 했다.

본래 동대문의 잘 나가는 청년 사업가였던 그는 엄청난 사업 수완으로 전국 체인점까지 차리며 직원을 무려 50명까지 둘 정도였다. 남부러울 것 없이 편안한 삶을 살던 김상옥. 그런데 그의 인생을 완전히 뒤바꾼 사건이 생겼다.

1919년 3.1 만세 운동 당시 직원들과 만세 행렬에 참여했던 김상옥은 만세 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일본 헌병에게 무자비하게 당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을 보며 충격을 받았던 것. 만세를 불렀단 이유로 팔이 잘리고 장검에 찔려 죽는 상황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한 그는 낮에는 청년 사업가로 밤에는 비밀 신문을 만들며 해외 독립운동 소식을 전했다.

엄청난 리더십과 자금 지원까지 하며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김상옥은 얼마 못가 밀정의 눈에 띄었고 바로 종로 경찰서에 체포됐다. 끔찍한 고문을 40일 동안 당했던 그는 결국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됐고 평화적인 방법을 포기하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무력으로 맞서기로 마음을 바꿨다.

이에 김상옥은 만주의 무장독립단체에 접선해 독립자금 5천 원을 대고 무기 지원을 받기로 했다. 당시 5천 원이라는 금액은 172개월치 경관의 월급으로 14년 동안 한 푼도 안 쓰고 모아야 만들 수 있는 돈이었다.

그리고 그는 암살단을 조직해 조선총독부 총독을 제거할 목표를 세웠다. 미 의원단 방문일을 디데이로 잡은 김상옥과 암살단. 이들의 움직임을 감지한 일본 경찰은 위험인물이라 생각되는 인물들은 미리 잡아두는 예비 검속으로 미 의원단 방문 하루 전 불령선인 천여 명을 붙잡았다. 그리고 그 명단에는 김상옥도 물론 있었다.

하지만 일본 경찰들이 그를 잡기란 쉽지 않았다. 신출귀몰한 그는 일본 경찰들 앞에서 홍길동처럼 유유히 사라진 것. 김상옥의 방 벽장 속에서 권총 케이스와 족자를 발견한 일본 경찰. 족자에는 "족자-미국 의원단의 내한을 계기로 하여 충독 이하 왜놈 고관들을 살해하는 동시에 친일반역자 및 일인 경찰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고등계 형사들을 소탕하여 우리 민족의 우국지정을 미국 의원단을 통하여 전 세계에 알리기로 하자"라는 글귀가 적혀있었다.

이에 일본 경찰서는 곧바로 김상옥의 가족들과 주민, 동지들을 붙잡아 고문을 시작했다. 이때 가장 큰 고초를 겪은 이는 24살의 여성 동지 장규동은 성고문까지 받아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암살단 단원들도 검거되어 재판에서 중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김상옥에 대해서는 사형 선고가 내려졌다.

잡히면 죽는 신세가 된 김상옥은 상해로 넘어가 김구 선생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을 만나 다시 한번 거사를 치를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은밀하게 경성으로 잠입한 그는 고문 후유증으로 몸이 완전히 망가진 여성 동지 장규동을 만나 충격에 빠졌다.

그리고 끝까지 독립운동을 함께 하고 싶다며 상해로 데려가 달라는 장규동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해 그는 함께 상해로 다시 건너갔다. 그러나 장규동은 얼마 못가 스물다섯의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이에 김구 선생은 관을 사서 장례를 치르라며 100원을 건넸다.

하지만 김상옥은 관 대신 총을 사서 돌아왔고, 장규동 동지를 위한 진짜 복수를 계획했다. 일본 총독을 제거하려는 목표를 안고 상해를 떠나 경성으로 향하는 김상옥. 그는 상해를 떠나기 직전 사진을 촬영했는데 그것이 바로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공개한 사진이었다.

사진 속 뒷짐을 진 김상옥. 그는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는데 아무것도 못하고 가만히 있는 손이 너무 부끄러워서 내놓을 수가 없다며 두 손을 가리려 뒷짐을 지었다.

일행과 함께 비단 장수로 변장해 상해를 떠난 김상옥은 커다란 상자 안에 소형 폭탄과 권총을 숨겼다. 그리고 거사를 기다리며 상해에서 보내주기로 한 대형 폭탄을 기다렸다. 하지만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소식이 없고 결국 소형 폭탄을 이용해 거사를 치르기로 했다.

그리고 이에 앞서 소형 폭탄의 성능을 테스트하기 위해 그는 종로 경찰서로 향했다. 주위를 종로로 돌리고 남대문에서 총독을 암살할 계획을 세운 것과 동시에 자신의 가족과 동지들을 향한 참혹한 고문을 한 종로서에 대한 복수로 폭파를 했던 것이다.

종로서 폭파 후 후암동의 여동생 집에 숨어있던 김상옥은 곧 은신처가 들켜 남산으로 피신했다. 그리고 이후 그의 가족들은 종로서로 끌려가 모진 고초를 겪었다. 김상옥은 한 겨울 남산 덤불 속에 숨어 동상을 입는 고통을 참아야 했다.

시간이 지나 남산에서 나온 김상옥은 한 동지의 집에 은신했다. 하지만 이 또한 밀정의 눈에 금세 발각됐다. 그리고 일본 경찰은 그를 잡기 위해 주택가를 4중으로 포위했다. 이에 동원된 경찰이 무려 천 여 명. 하지만 이들은 쉽게 김상옥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이에 일본 경찰은 집주인과 그 집 12살짜리 막내딸을 총알받이로 내세워 김상옥을 압박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김상옥과 일본 경찰의 추격전이 펼쳐졌다. 백발백중으로 일본 경찰을 명중시키는 김상옥을 따라가기 바쁜 일본 경찰. 하지만 곧 한 건물의 변소에서 김상옥의 발길이 멈추었다.

변소를 포위한 일본 경찰, 그런데 이때 변소 안에서 한 발의 총성이 울렸다. 이어 일본 경찰들의 총알이 변소 안으로 빗발쳤다. 하지만 대응 사격은 없었다. 잠잠해진 변소 안, 그럼에도 경찰들은 선뜻 문을 열지 못하고 김상옥의 어머니는 총알받이로 앞세웠다.

문을 연 김상옥 어머니는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그곳에는 벽에 등을 기댄 채 양손에 총을 쥐고 숨을 거둔 김상옥이 있었던 것. 두 눈을 부릅뜬 채 당장이라도 총을 쏠 듯한 눈빛으로 그렇게 숨을 거둔 그는 동상에 걸려 발가락이 모두 떨어져 나간 상태였다. 그런 아들의 죽음을 마주한 어머니는 도저히 자리에서 일어설 수 없었다.

마지막 변소에서 울린 총성은 김상옥이 스스로를 향해 쏜 것이었다. 그는 상해를 떠나기 전 그는 동지들에게 "나의 생사가 이번 거사에 달렸소. 만약 실패하면 내세에서 만나봅시다. 자결하여 뜻을 지킬지언정 적의 포로가 되지는 않겠소"라고 스스로 마지막을 맞을 준비를 했다.

김상옥 의사의 의거 이후 남은 가족들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일본 경찰들이 그들을 지독히 괴롭혔던 것. 김상옥의 동생인 김춘원은 형 대신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지만 툭하면 종로서로 불려 가 고문을 당하기 일쑤였다. 이에 그의 딸른 "조금만 더 사셨다면 해방하는 걸 보고 돌아가셨을 텐데 그걸 못 보고 돌아가셔 너무 안타깝다"라며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김상옥 의사 의거 당시 29살이었던 그의 아내는 병원 사택에 지내며 홀로 아들 딸을 키웠다. 그러나 아들 태용은 20대에 병으로 요절, 딸은 심각한 대인기피증을 앓다가 세상을 떠나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남편에 이어 아들, 딸까지 먼저 떠나보낸 김상옥의 아내는 대체 어떤 마음으로 살아갔을지 가늠도 되지 않는 것.

보통 독립운동가들은 독립운동의 기록을 거의 남기지 않고, 마지막 거사를 앞두고는 사진을 한 장씩 찍었다. 안중근 의사, 윤봉길 의사, 박재혁 의사, 이봉창 의사 등 가족이나 동지들한테 피해가 갈까 봐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으려 조심하던 이들이 자신의 죽음 직전이라는 것을 직감하고 사진을 남겼던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이는 혹시 자신을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기억해주길 바라는 마음은 아니었을까.

방송 말미에는 종각역 한쪽에 위치한 김상옥 의사 의거 표지석의 존재를 조명했다. 또한 김상옥 의사 의거 터 정류장 뒤편 외딴 골목길에 위치한 그가 마지막까지 싸우다 자결한 곳은 그를 기억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이에 그의 손자는 "장소 보존도 해드리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고 속상하다"라며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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