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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브스夜] '꼬꼬무2' 대한민국 의문사 1호, 최종길 교수 사건…살인에도 처벌받는 관계자 0명

김효정 에디터 김효정 에디터 작성 2021.07.23 02:33 조회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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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SBS연예뉴스 | 김효정 에디터] 국가가 저지른 잘못에는 공소시효가 없어야 한다.

22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2'(이하 '꼬꼬무2')에서는 '강요된 침묵, 그리고 비밀 수기 : 대한민국 의문사 1호'라는 부제로 대한민국 의문사 1호 최종길 교수의 죽음에 대해 조명했다.

이날 방송에는 김은희, 이이경, 코드 쿤스트가 이야기 친구로 등장해 장 트리오가 들려주는 그날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그리고 이날 장항준은 아내 김은희 작가의 등장에 "세계적인 스타다. 정말 모시기 어려운 분이다"라고 했고, "종로구 옥인동이 낳은 세계적인 거장, 한국의 아가사 크리스티"라고 설명해 웃음을 자아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그날의 이야기가 시작되며 진지해졌다. 이야기는 1973년 10월 25일 서울 연세대 세브란스 정신병동에 제 발로 찾아온 27살의 한 남자에게 주목했다.

정신을 차린 최종선(27)은 절친인 해당 병원 레지던트에게 펜과 노트를 가져 달라고 은밀하게 부탁했고, 이와 함께 자신을 정신병동에 입원시켜 달라는 부탁을 해 의아함을 자아냈다.

이에 그의 절친은 그가 자신의 직장 사람들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스스로 정신병동 입원을 택한 것이라고 밝혀 눈길을 끌었다. 그리고 종선 씨는 깊은 밤마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이불을 뒤집어쓰고 노트에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기록했다.

그는 "나는 이 글을 쓰기 위한 최적의 장소로 이곳을 선택했다. 지금의 나에게 있어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후일을 위해 형님 죽음에 대한 오늘의 한을 생생히 남겨두는 것이다"라며 "그러므로 이 글은 진실 이외에는 아무 가식도 없는 나의 유언이다"라는 글귀로 98쪽에 달하는 수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글은 세상을 발칵 뒤집을만한 엄청난 비밀이 담겨 있었다.

그 비밀이 무엇인지는 열흘 전으로 가야 알 수 있었다. 사실 종선 씨는 중앙정보부의 엘리트 요원이었다. 그는 72년 중정 공채 시험에 수석 합격했고 중정 안의 중정인 감찰실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얼마 전 다른 요원이 그의 형님인 최종길 교수의 협조가 필요하다는 요청에 형님을 자신의 직장인 남상 중정으로 모시고 왔었던 것. 단순한 협조 건이라고 생각했던 종선 씨. 그러나 종길 씨와 종선 씨의 만남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출입자 통제소에 맡긴 그의 형 종길 씨의 신분증은 며칠이 지나도록 그대로 있었고 이에 종선 씨는 무슨 일이 있음을 직감했다. 그래서 그는 감찰 실장을 찾아가 종길 씨를 풀어달라 요청했다. 그리고 사흘 후 감찰 실장은 종선 씨에게 아침 7시까지 당직실에서 대기하라는 이야기를 전한다.

이에 당직실로 곧바로 달려온 종선 씨. 그에게 감찰 실장은 형 종길에 관한 이야기들을 계속 언급했고, 그는 최 교수가 오늘 새벽 1시 30분 자신의 간첩 행위를 자백하고 7층에서 투신자살하셨다"라며 그가 자신의 혐의를 처음에는 완강히 부인하다가 어느 순간 신변의 위협을 느껴 자백했고, 이후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데려다줬더니 그곳에서 투신했다고 주장했다.

누구보다 다정다감한 한 가정의 가장이자 친구나 동료, 제자들에게도 좋은 사람이었던 종길 씨가 간첩이라는 이야기는 종선 씨에게는 전혀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이에 종선 씨는 사건의 현장을 보여달라 부탁했으나 중정 측은 현장이 너무 비참해서 가족들에게는 안 보여주는 게 낫다는 결론을 내리고 사체는 곧바로 국과수에 보냈다. 종선 씨는 이상한 분위기에 몰래 현장을 찾았고, 그곳은 현장 보존은 고사하고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아 사건 조작을 의심케 했다.

그리고 사건 발생 30년 즈음에 중정이 보관하고 있던 당시 현장 사진이 공개됐다. 피를 흘린 채 쓰러져있는 최 교수의 모습. 이를 본 이야기 친구들은 시신의 상태가 이상하다며 투신자살에 의한 것이 아닌 시신을 옮겨둔 것이 아닌가 의혹을 제기했다.

이에 중정은 종선 씨에게 시신 부검 입회를 강요했다. 자신들끼리 죽여두고 은폐했다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협조라 하는 것. 그리고 중정은 끝까지 협조하지 않으면 종선 씨는 물론 최교수의 주변인들까지 모두 불러 조사하고 그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종선 씨는 "형님에게 반역자의 누명을 씌우지 마라, 사상적 제한을 가하지 마라. 동료 교수와 제자를 건드리지 마라"라며 이 조건을 중정부장의 서면으로 보장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중정은 조건을 들어주겠으나 서면은 안 된다고 했고, 대신 "존경하는 중앙 정보부장님, 우리는 나라를 배신한 천인공노할 최종길의 가족으로서 그가 간첩이었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비록 조국을 배반하고 양심의 가책을 못 이겨 결국은 스스로 생명을 끊은 그가 한없이 밉고 원망스러우나 살아있는 가족은 무슨 죄가 있겠는가. 부디 살아남은 우리 가족을 불쌍히 여겨 우리를 용서하고 보호해주시며, 자손들이 밝게 살아갈 수 있도록 허락해주십시오"라는 굴욕적이고 당혹스러운 탄원서의 서명을 쓰게 만들었다.

피가 거꾸로 솟지만 달리 방법이 없으니 서명을 하고 만 종선 씨는 다음날 형수님을 찾아가서 그제야 모든 상황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그의 형수는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탄원서에 서명한다.

이에 종선 씨는 시신 부검 입회를 허락했다. 단, 최 교수 측 변호사와 의사도 부검에 함께 들어가게 해달라고 요청했으나 이는 묵살당했고, 가족들의 동의 없이 중정은 그대로 부검을 진행했고 부검 결과 증거는 없지만 투신자살이 확실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가족들과 작별 인사도 못한 종길 씨는 다음 날 장례식을 치렀다. 가족들은 중정의 압박에 빈소도 마련하지 못하고 직계 가족 이외에 장례식 참석도 불가한 상황에 조촐하고 외로운 장례식을 보내야 했다.

그리고 나흘 후 충격적인 일이 벌어진다. 언론이 일제히 유럽 거점 대규모 간첩단 적발 소식을 전한 것. 그리고 그 필두에 서울법대 교수 최종길이 있고 그가 중정에서 간첩임을 자백하고 여죄를 조사받던 중 창문에서 투신자살했다는 내용이 그대로 전해져 충격을 안겼다.

최교수의 죽음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는 상황에서 이것이 반정권 운동으로 번질 것을 우려한 중정은 여론을 잠재우기 위한 방법으로 간첩단 적발 소식을 보도했다고 밝혔으나 종선 씨의 배신감은 상상 이상이었다. 이 이야기에 충격을 받은 종선 씨는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갔고, 그곳이 바로 이날 처음 언급했던 정신병동이었던 것.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중정에 맞서 그는 중정에서 보고 들은 것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기록했고, 이 기록이 언젠가 진실을 밝히는 증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2주 동안 스스로를 감금시킨 채 수기를 써 내려갔다.

그리고 그는 수기의 마지막 구절에 "나는 그들 속으로 호랑이 굴속으로 돌아갈 것을 결심했다. 어떤 모욕 어떤 고초를 겪더라도 그 안에 남을 수 있을 때까지 남아 형님 죽음의 진상을 살인과 조작의 증거를 살인 수사관을 찾아내리라. 그들 속에 남아 내 형을 죽인 그들 마음에 아픔을 멈추지 않게 하리라. 살인의 악몽에서 깨어 나오지 않게 하리라"라고 스스로 증거가 될 것을 결심했다. 형이 간첩인데 동생이 중정 요원이라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이에 종선 씨는 자신이 중정 요원이라는 것은 형이 간첩이 아니라는 증거라며 스스로를 증거가 되도록 했다.

최 교수 사망 1년 후, 그의 아내에게는 은밀한 연락 한 통이 걸려왔다. 명동 성당에서 '암흑 속의 횃불'이라는 제목으로 최교수 1주기 추도 미사를 진행한다는 것.

이에 최 씨의 아내는 중정의 눈을 피해 명동 성당으로 향했고, 그곳에 모인 수많은 이들을 보며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감격했다. 특히 당시 미사를 연 신부들은 목숨을 내놓고 미사를 진행했을 정도로 당시 상황은 어려웠고, 이에 유가족들의 감동은 더 컸다.

이날 미사를 주관한 것은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 함세웅 신부. 그리고 며칠 후 그에게 종선 씨가 찾아와 자신의 수기를 전했다. 자신은 언제 발각될지 모르니 그날이 올 때까지 수기를 지켜달라는 것. 이에 당시 정권 비판에 앞장섰던 신부님은 믿을만한 수녀님께 다시 맡기고, 그 수녀님은 또 다른 수녀님에게 맡기고, 그 수녀님은 그것을 소금 항아리에 보관해 눈길을 끌었다.

그리고 모두 숨죽여 때를 기다렸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의 사망으로 독재정권이 무너진 날 최종길 교수 죽음의 진상을 공개하라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이에 종선 씨도 수기를 공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후 곧바로 터진 신군부의 권력 장악으로 이는 또다시 미루어졌다.

이후 또다시 7년이 흐르고 민주화를 위한 시민들의 저항이 거세지며 드디어 사건 발생 15년 만에 종선 씨의 수기가 공개됐다. 얼마 후 검찰이 재수사 결과 발표, 검찰은 최 교수가 간첩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단, 그가 타살됐는지 자살했는지는 알 수 있는 증거가 없었고, 검찰은 사건 발생 15년이 흐른 때에 공소권 없음으로 사건을 종결시켰다.

그로부터 10년 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발촉, 이에 다시 조사해달라고 최 씨의 동료 교수들과 학생들이 진정서를 제출했고 이때 중심에는 아버지의 길을 그대로 걸어온 최교수의 아들 최종선 씨가 있었다. 원래 화가가 꿈이었던 최교수의 아들은 아버지의 죽음 이후 아버지의 길을 대신 걷기로 결정하고 진짜 최교수가 걸어온 길을 그대로 밟아갔다.

재조사 착수로 놀라운 사실들이 드러났다. 당시 최교수를 봤다는 증인이 등장한 것. 특히 그의 증언에 따르면 최교수는 고문을 당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뒤늦게 최교수의 부검 사진 속 수많은 상처와 멍에 대한 법의학자의 소견이 공개됐다.

중정은 추락할 때 부딪혀서 생긴 상처라고 주장하지만 법의학자들은 "심장이 멎으면 그 순간부터 어딜 맞아도 멍이 안 생긴다. 그런데 이 같은 색조를 가진 멍은 시간이 걸리는 것읋 두서너 시간 이상이 걸린다"라며 추락사 전에 생긴 손상일 것이며 고문으로 생긴 상처라고 해도 무방하다는 입장을 전했다.

고문의 확실한 증거가 나왔으나 당시 조사에 참여했던 수사관들의 태도는 하나같이 뻔뻔했다. 특히 한 수사관은 "고문이니 뭐니 하는 건 사회에서 떠드는 남의 말 좋아하는 사람들 때문이다. 그리고 그 떠드는 사람들은 다 공산당이다"라고 말해 보는 이들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사건 관계자들이 입을 다문 상황에서 사건은 미궁으로 빠지는 듯 보였다. 그런데 이때 중정 간부 하나가 충격적인 진술을 했다. 당시 김계장이 최종길을 밀어 떨어뜨렸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고, 자신에게 직접 밀어 떨어뜨리는 동작을 선보였다는 것. 이에 김계장에 그날의 진실을 들으려 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사망한 상태로 밝혀졌다.

이후 수사는 계속 진행됐고 2002년 5월 조사 결과가 발표됐다. 그들의 조사 결과는 "최 교수가 간첩임을 자백한 적이 없음에도 중정은 고문사실을 은폐할 목적으로 간첩이라고 자백하고 투신자살한 것처럼 조작했다"라는 것. 그러나 최교수의 죽음에 대한 것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았다.

이에 그의 아들은 "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를 다 밝혀내지는 못했다. 관련자를 적시하기까지 했었지만 누구도 혐의를 시인하거나 자백하거나 사과를 구하거나 하는 일이 없었다"라며 씁쓸해했다.

그렇다면 최교수는 왜 타깃이 됐던 것일까. 당시 유신헌법 공표 후 반대 시위의 중심은 대학이었다. 대학가에 번지는 시위를 막기 위해 묘수가 필요했고 이에 중정은 간첩 카드를 빼들었다.

특히 당시 서울법대생이 시위에 나섰다가 구금된 적이 있는데, 이에 대해 교수회의에서 최 교수가 "학생들의 행동에는 정당한 이유가 있다. 스승으로서 어떻게 모른 척할 수 있냐. 총장을 보내서 대통령에게 항의하고 사과를 받아야 한다"라고 주장한 것을 해당 대학에 상주하던 중정요원이 들었고 이를 윗선에 보고해 미운털이 박혀버린 것이었다. 정말 당혹스러운 내용이지만 당시 최교수와 함께 간첩으로 적발된 총 54명의 인원 중 진짜 간첩은 단 한 명도 없었던 것으로 드러나 더욱 충격을 안겼다.

간첩으로 몰렸던 이들은 전원 무죄 판결. 그렇다면 그들을 간첩으로 조작, 은폐한 윗선들과 고문한 수사관들 중 처벌을 받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공소시효로 사건은 종결됐다.

이에 이야기 친구들은 시효가 끝나서 책임질 수 없다는 국가의 태도에 분통을 터뜨리며 "국가가 저지른 범죄는 공소시효를 폐지해야 한다"라며 분명한 책임과 처벌이 이뤄져야 또다시 이러한 일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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