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8일(목)

방송 프로그램 리뷰

[스브스夜] '꼬꼬무2' 8.15 저격 사건 '음모론' 조명…'23세 테러리스트' 문세광, 그 배후는?

김효정 에디터 작성 2021.04.09 02:14 조회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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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SBS연예뉴스 | 김효정 에디터] 그 날의 진실은 어디에 있을까?

8일에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2'(이하 '꼬꼬무2')에서는 '8.15 저격 사건'을 조명했다.

이날 방송에는 배우 소유진, 정우, 그리고 모델 주우재가 이야기 친구로 초대되어 이야기꾼들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이야기는 1974년 8월 15일 광복절로부터 시작됐다. 18살의 여고생 장봉화는 늦잠을 자고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TV에 생중계되는 광복절 기념식에서 합창단원으로 참석할 봉화 양은 선착순으로 지정되는 이날 행사의 좌석 중 앞자리에 앉고 싶어 했던 것.

그리고 같은 시각, 서울의 한 호텔에는 요시이라는 이름의 남성이 트렁크에서 꺼낸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는 그 안에서 권총을 꺼내서 총알 다섯 발을 장전하고 허리춤에 숨겨 객실을 떠났다.

오전 8시 40분, 광복절 기념식이 진행되는 장충동의 국립극장에 도착한 봉화 양은 앞 줄에 앉은 친구에게 부탁해 자리를 바꿔 앉고 크게 기뻐했다. 그리고 그 시각 요시이도 국립극장으로 향했다.

이날 행사에 참석하는 차량에는 통행 허가증이 부착되어 있었고, 그리고 참석자들의 가슴에는 각 부처마다 다른 색깔과 숫자가 쓰인 비표가 붙어있었다. 그러나 요시이가 탄 차량에는 통행증도 없었으며 그의 가슴에도 비표는 붙어있지 않았다. 초대받지 않았음에도 그가 국립극장으로 향하는 이유는 단 하나, 박정희 전 대통령을 암살하는 것.

그는 떨리는 마음으로 만일을 대비해 권총의 공 이치 기를 당겨 두며 최후의 순간까지 각오했다. 그러나 걱정과 달리 그가 탄 차량은 아무 검문 없이 정문을 통과했다. 건물 입장을 앞둔 요시이는 삼엄한 경비를 뚫기 위해 차량 기사에게 만 원짜리 지폐를 건네며 "도착하면 내려서 문을 열어달라"라고 부탁했다. 당시 만 원은 쌀 한 가마니를 살 수 있는 정도의 거금. 이에 기사는 군소리 없이 그가 부탁하는 대로 차 문을 열어주고 깍득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그 사이 건물 입구로 향한 요시이는 경호원들에게 일본어로 "나는 일본의 대사관에서 왔다"라고 했다. 이에 당황한 경호원은 당시 최고급 승용차인 포드 20M에서 내려 기사에게 인사를 받는 그를 꽤 높은 사람이라 여겼고 건물의 입장을 허락했다.

건물에 입장한 요시이는 건물 로비에서 자신의 타깃이 도착하기를 숨죽여 기다렸다. 그리고 그때 봉황 번호판을 단 차량이 들어왔다. 바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탄 차량이었다. 그는 곧 경호원에 둘러싸여 로비로 입장했고 요시이는 권총의 방아쇠에 손을 올리고 거리가 더 좁혀지길 기다렸다. 그리고 총을 꺼내려던 그 순간 그는 경호원에 의해 저지당했다.

작전 실패한 요시이는 2단계 작전 수행을 위해 기념식장 안으로 들어갔다.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까지 이목이 집중된 광복절 기념식 생방송. 청회색 정장을 입은 박정희 전 대통령과 오렌지 계통의 한복을 입은 육영수 여사가 입장했다.

애국가 제창이 끝나고 대통령의 경축사가 시작된 지 10분쯤 지났을 때 갑자기 탁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곧 누군가가 소리를 지르며 무대로 질주했는데 이 인물이 바로 요시이였다. 총을 쏘기 시작한 요시이, 이에 현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경호원들은 대통령을 보호하기 위해 급히 무대로 올라왔고, 대통령은 연설대 뒤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관객 중 한 명은 통로를 달려오던 요시이의 발을 걸었고, 이때 또다시 총성이 울려 퍼졌다.

총격을 끝낸 요시이를 관객들과 경호원들이 덮쳤고, 현장의 총성은 멈추었다. 그리고 이때 미동도 없이 쓰러진 육영수 여사가 포착되었고 이를 발견한 경호원들은 육영수 여사를 급히 병원으로 이송했다.

육영수 여사가 실려나가던 순간, 합창단석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총성의 희생자가 합창단석에도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안타까운 주인공은 바로 봉화 양이었다. 봉화 양은 한 달 동안 연습한 노래는 부르지도 못한 채, 병원으로 급히 이송되었지만 결국 사망했다. 이는 자리만 바꾸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는 비극이라 안타까움을 더했다.

그리고 이 모든 장면은 TV로 생중계되었고, 두 사람이 실려나간 얼마 후 행사는 예정대로 진행되어 충격을 안겼다.

당시 육영수 여사의 담당의는 "두부 관통 총상을 당한 상태였다. 쇼크 상태로 의식은 없고 호흡만 유지하는 상태였다"라며 4시간이 넘는 대수술을 하고 긴급 수혈까지 했지만 결국 그가 사망했음을 밝혔다.

이 사건의 저격범 요시이, 그는 23세의 재일 교포 문세광이었다. 당시 언론은 그가 북한의 지령을 받아 박정희 암살을 도모했으나 엉뚱한 희생자를 낳았다고 전했다. 그리고 이 사건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 진실로 인해 여러 가지 음모론을 만들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범인이 바꿔치기됐다는 설. 현장 사진과 영상 등의 분석을 통해 총성이 울린 곳과 문세광이 있던 곳이 일치하지 않는 것에 의혹이 제기되었다. 또한 문세광이 사형 직전 남긴 말 또한 음모론에 불을 지폈다. 당시 그는 "나를 사형한다고? 뭔가 잘못됐어. 그 놈들한테 속은 내가 바보지"라는 말을 남겼던 것.

특히 문세광의 권총에 장전된 총알은 5발, 그리고 권총에 남은 총알은 1발임에도 현장에서 울려 퍼진 총성의 숫자가 동일하지 않아 현재까지도 논란이 일고 있다. 영상을 통해 확인된 총성은 최소 6발에서 최대 7발. 그렇다면 적어도 2발에서 3발은 문세광이 아닌 다른 인물들이 쏜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 총성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총성의 주인공을 찾는 것은 현장의 총알을 찾으면 쉽게 끝나는 문제. 그러나 이 사건은 감식반이 현장에 파견되기도 전에 중간 수사 결과가 발표되었다. 사건에 경찰이 나서기 전 중앙정보부가 먼저 나섰던 것.

문세광은 사건 직후 남산의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를 받았다. 그리고 사건 발생 다음 날 감식반이 현장에 출동해 현장을 감식했다.

감식반들이 찾은 첫 번째 탄흔은 문세광이 앉아있던 자리에서 발견됐다. 처음에 들린 탁 소리가 바로 그 자리에서 났던 것. 이는 문세광이 허리춤에서 권총을 꺼내다가 오발된 것으로 추측됐다.

그리고 두 번째 탄흔은 연설대 좌측, 세 번째 탄흔은 태극기 좌측, 마지막 탄흔은 천장에서 발견되었다. 이 탄흔 들 중 육영수 여사와 봉화 양을 저격한 탄흔은 찾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제 총알만 찾으면 될 문제. 발사 시 빠르게 회전하는 총알은 사람의 지문처럼 서로 각기 다른 강선흔을 남겼다. 이에 총알만 찾게 된다면 누구의 총알인지 확인이 가능했다. 그러나 감식반은 총알을 전혀 찾아내지 못했다.

이들이 도착하기 이전 청와대 경호실에서 모든 총알을 가져갔던 것. 그리고 이들은 수거한 총알을 국과수에 넘겨 조사를 의뢰했다. 경호실에서 국과수에 넘긴 총알은 총 4개, 그중 하나는 문세광의 좌석 옆자리에서 발견되었고 또 하나는 연설대 옆, 3번째는 태극기 뒤에서 발견되었고 이 세 개의 총알은 모두 문세광의 것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4번째 총알은 봉화 양의 좌석 근처에서 발견되었고 이는 문세광의 총알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사건 당시에는 이 총알의 주인공이 누군지에 대해서는 극비에 부쳤다. 그리고 사건 발생 31년 만에 밝혀진 진실은 경호원 최 씨가 봉화 양을 쏜 것으로 드러났다.

'그것이 알고 싶다'를 통해 이를 인정한 최 씨는 "어쨌든 간에 괴로웠다. 마음이 착잡하고 기분이 안 좋았다. 각하를 경호해야 하니 지향 사격 한 발을 했는데 그 한 발이 봉화 양을 맞힌 것이다"라고 말했다.

아직도 여전히 부족한 총알. 그날의 수사 기록을 통해 또 다른 총알의 존재를 확인했다. 사건 발생 나흘째 발견된 이 총알은 무대 동북쪽 장막 밑에서 발견되었고 이는 국과수의 감정 결과 문세광의 것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총 5개의 총알이 발견되었지만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은 육영수 여사를 관통한 총알. 그렇다면 이 총알은 관통되지 못하고 육영수 여사의 몸에 남아 있던 것이 아닐까? 이에 당시 담당의는 "총알이 머리를 완전히 관통했다. 적어도 수술 현장에서는 총알이 없었다는 것을 내가 증언했다"라며 육영수 여사의 머리를 관통한 총알은 찾지 못했다고 전했다.

그리고 30년이 지나 공개된 수사 기록 일부 중 또 하나의 총알을 찾아냈다.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또 하나의 총알이 있었지만 이는 국과수에 넘기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보고서에 따르면 "청와대 경호원 몇몇과 총알을 찾다가 무대 뒤 벽에서 총알 한 개를 습득하고 경호관들에게 주었다고 하나, 이 총알을 인수한 경호관의 성명은 알 수 없어서 회수할 수 없었다"라며 분실한 것으로 알려졌다.

증거 관리에 소솔 한 것도 사건 당일 허술했던 경비도 모두 경호관들의 소관. 그리고 여기에는 분명 이유가 있었다. 행사 며칠 전 청와대 경호실에서 전화가 걸려와 "행사 때 웬만하면 다 들여보내. 너무 딱딱하게 굴지 말고"라는 당부를 했다는 것. 이에 당시 경호관은 "10월 유신 이후 눈치 경호를 해라는 명이 떨어졌다. 대통령과 국민 간에 거리를 너무 엄한 분위기가 되지 않도록 하라는 지시가 있었다"라고 설명했다. 유신 출범 이후 친근한 이미지를 주기 위해 경호를 유연하게 하라고 했던 것.

사건 당일 문세광이 타고 왔던 차량도 의혹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그가 타고 왔던 포드 20M은 당시 아파트 한 채 값의 승용차였다. 그리고 이 차량은 차량 조회도 되지 않아 위장 번호판을 단 차라는 소문도 돌았다. 또한 고관대작이 빌려준 것으로 그의 배후에 대한 의혹도 제기됐다.

문제의 그 차량 번호는 1091. 그리고 방송은 이 차량의 주인을 찾아냈다. 문세광이 타고 왔던 차량은 바로 영화 '택시 운전사'의 주인공(독일 기자를 광주까지 태워 준 택시 기사)이 된 실존 인물 김사복 선생이었던 것. 그리고 이 차량은 사실 호텔 고객 전용 택시였고, 당시 문세광을 태우고 국립극장으로 간 것은 김사복 선생이 아닌 그의 스페어 기사였던 것으로 밝혀져 놀라움을 자아냈다.

문세광의 배후에 대한 의혹도 다양했다. 당시 수사본부는 그의 배후로 조총련을 지목했다. 그가 북한을 지지하는 재일 동포 단체인 조총련의 소속으로 북한 공작원에 포섭되어서 지령을 받았다고 생각한 것. 실제로 문세광도 동일한 증언을 했다. 그러나 일본 경찰은 조총련이 사건에 관여했다는 증거를 찾지 못했고, 문세광은 조총련이 아닌 남한을 지지하는 재일 동포 단체인 민단 소속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일본 최악의 빈민촌 오사카 이카이노에서 태어나고 자란 문세광. 총명했던 그는 어느 날부터 크게 비뚤어지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에서 재일 동포로 살아가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가혹했다. 천대와 차별을 통해 문세광은 점점 분노와 원망이 쌓여갔다.

그러던 중 그가 테러리스트가 된 트리거가 된 사건이 발생했다. 저격 사건 1년 전 일본에서 KT 납치사건이 발생했고, 이는 일본 내의 한국인에 대한 인식을 최악으로 몰고 갔다. 한일 관계는 최악으로 치닿았고 재일 동포들의 삶은 더욱 비참해졌다. 일본 내 한국인에 대한 핍박은 갈수록 심해져 재일 동포들 사이에서는 김대중 구출 위원회까지 조직되었고 문세광도 이 단체에서 활동했다.

그를 비롯한 구출 위원회 회원들은 협박 전화를 통해 한국 정부에 압박을 가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그의 과격한 테러리스트로서의 면모들이 발현되었던 것.

결국 "나는 조국에 혁명의 바람을 몰고 오는 구국의 영웅이 될 거야"라며 박정희 암살을 결심한 문세광. 그는 독재정권만 무너뜨리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 믿었다. 그리고 사실 그는 중정부가 예의 주시하고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저격 사건 하루 전날 김대중 납치 사건은 "한국 외교관들은 무관하며 범인은 찾지 못했다"라며 유야무야 수사를 종결했고, 다음 날 8.15 저격 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건으로 한일 관계는 완전히 뒤바뀌었다. 한국 정부는 조총련이 배후라며 일본에 수사를 요청하며 압박했고, 일본 정부는 수세에 몰렸다. 국내 민심도 폭발해 "또다시 국모를 죽인 일본에 원수를 갚자"라며 이 사건을 제2의 을미사변으로 여기며 매일같이 일본 규탄 대회를 펼쳤다.

반일감정이 절정으로 치솟고, 이에 정부는 일본에 책임을 제대로 지지 않으면 외교를 단절할 것이라 엄포를 놓았고, 이에 일본의 부총재가 직접 방문해 사과하고 조총련 규제까지 약속했다. 그리고 이후 KT 납치사건, 저격 사건 모두 흐지부지하게 종결되었다.

그리고 사건 발생 넉 달만인 1974년 10월 19일 오전 문세광은 내란목적 살인, 국가보안법, 반공법 위반 등 6가지 죄목 유죄로 사형이 확정됐고, 3일 뒤 사형 집행되었다.

교수대에 선 문세광은 마지막으로 "나를 죽인다고? 뭔가 우습다. 뭔가 잘못됐어"라는 말을 남겼다. 그리고 그는 사형 집행 전 한참을 흐느끼고는 최후 진술했다. 최후 진술에서 문세광은 "나는 바보였습니다. 내가 한국에서 태어났더라면 이러한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을 겁니다. 박 대통령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전해주십시오. 국민들에게도 미안하다는 말을 전해주세요. 육 여사와 죽은 여학생의 명복을 저승에 가서도 빌겠습니다. 저놈들에게 속아서 이러한 과오를 범한 나는 바보였으므로 사형을 당해도 당연합니다"라고 했다.

당시 그가 지목한 저 놈들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들이 나왔다. 일부 언론은 저 놈들이라는 표현 대신 조총련이라고 표기하기도 하고, 또 다른 누군가를 의심하기도 했으나 현재까지도 진실은 드러나지 않고 있다.

그날의 이야기를 들은 소유진은 "음모가 아니라 팩트는 있다니까.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을 움직인다"라며 "나는 팩트가 너무 궁금한데 그것이 밝혀지지 않으니까 계속 음모론이 나오는 것 같다"라고 했다. 이에 장성규는 "저놈들이 누구였는지 그에게 되물어봤다면 어땠을까"라며 의혹만 남기고 진실을 찾으려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은 것에 대한 아쉬움을 드러냈다.

또한 장항준은 "23살이라는 나이는 아무것도 모를 나이, 모든 것을 버리고 극단적인 선택에 빠지는 나이다"라며 "자기 신념에 대해 조금이라도 의심을 했다면 이 사건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안타까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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