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4일(수)

스타 끝장 인터뷰

[스브수다] "전형적인 건 싫었다"…박훈이 보여준 악역의 품격

강선애 기자 작성 2020.04.29 09:02 수정 2020.04.29 11:02 조회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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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훈

[SBS연예뉴스 | 강선애 기자] 보통 드라마는 권선징악으로 주인공이 행복과 사랑을 얻는 이야기를 다룬다. 선한 주인공이 악한 상대를 만나 역경을 해치고 끝끝내 이겨내는 과정은 시청자에게 쾌감과 재미를 선사한다. 그래서 드라마에서는 주인공 못지않게 그 대척점에 있는 악역도 중요하다. 악역이 얼마나 갈등 상황을 만들고 긴장감을 유발하느냐에 따라 극의 재미가 크게 달라진다. 연기력이 뒷받침되는 배우가 악역을 맡아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배우 박훈은 최근 종영한 SBS 드라마 '아무도 모른다'(극본 김은향, 연출 이정흠)에서 악역을 담당했다. 그가 연기한 극 중 밀레니엄 호텔 대표 백상호는 다소 괴짜스럽긴 해도 선한 어른처럼 보였으나, 알고 보면 살인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자기를 지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이코패스 적인 인물이었다. 철없는 아이마냥 발랄하게 웃던 백상호의 눈빛이 날카롭게 돌변하면, 등골이 오싹하는 긴장감이 느껴졌다. 선인지 악인지 명확하게 구분 지을 수 없는 묘한 느낌의 백상호는 기존 드라마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악역이었다.

▲ "전형적인 악역은 싫었다" 틀을 깬, 박훈만의 묘한 백상호

감독이나 작가가 선악을 헷갈리게 연기해달라는 주문을 따로 하지는 않았다. 다만 박훈은 백상호를 "전형적인 악역으로 표현하고 싶지 않았고,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그려내고 싶었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대본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아이디어를 더해 백상호를 해석하고 확장하는 과정을 반복했다. '아무도 모른다' 만의 미스터리한 요소들 위에서 박훈은 백상호란 캐릭터를 선하게도 악하게도 표현하며 계속 변주를 줬다.

"결과적으로 백상호는 악한 사람이다. 악역을 맡았을 때 배우가 하는 함정들이 있다. 목소리를 깔거나, 분위기를 무겁게 잡거나, 인상을 더 쓰곤 한다. 난 그런 거에 얽매이고 싶지 않았다. 악역으로서의 공포를 밝음에서 어둠으로 떨어지는 낙차로 표현하고 싶었다. 백상호를 보면, 아이들과 만나는 장면에서는 굉장히 하이톤이고 깨발랄하다. 그런 사람이 악해질 때의 간극을 잘 표현한다면, 나중에는 백상호가 평범하게 이야기해도 공포심이 느껴질 거라 생각했다."

박훈

드라마 속 백상호의 선악 구분이 헷갈렸던 시작은, 의문의 추락사고를 당한 고은호(안지호 분)를 병원으로 옮기고 치료를 받게 하는데 백상호가 그 누구보다 앞장섰던 행동 때문이었다. 구급요원에게 서두르라며 보채는 백상호의 모습에서 그가 정말 은호의 안전을 바라는 좋은 어른일지도 모른다는 착각이 생겼다.

"은호가 빌딩에서 떨어지고 병원으로 옮기며 백상호가 구급차에서 구급요원한테 빨리 가자고 화를 낸다. 거기서부터 백상호의 정체에 대한 혼란이 시작됐을 거다. 그 장면은 고민 끝에 나온 애드리브였다. 백상호 입장에서는 현장에 다른 사람도 있으니 악한 모습을 보이는 게 이상할 거 같았다. 구급요원한테는 아이를 위하는 마음을 보여주면서도, 오두석(신재휘 분)과 찰나의 순간에 눈빛을 주고받으며, 백상호가 선역인지 악역인지 헷갈리게 두 개의 모습을 공존하는 표현방식을 쓰고 싶었다."

백상호는 외모부터 말투, 행동 하나하나에 '평범'이란 게 존재하지 않았다. 단정하게 수트를 입는 듯한데 색이 튀었고, 은쟁반 위에 고급스럽게 놓고 먹는 음식은 컵라면이었다. 백상호의 이중적인 면모를 보여주고 싶다는 박훈의 치밀한 캐릭터 분석에서 나온 결과물이었다.

"백상호는 겉은 화려하지만 알맹이는 그렇지 못하다. 은쟁반 위의 컵라면, 고급 잔에 따라 마시는 캔커피, 그런 건 이중적인 면모를 보여주려 한 장치였다. 의상 콘셉트도 그 부분에서 확장했다. 호텔 소유주의 고급스러움이 아니라, 화려하지만 특이한, 정식에서 벗어나는 스타일을 찾았다. 기성품에선 그런 느낌을 못 살릴 거 같아 스타일리스트와 함께 동묘시장에 가서 의상을 구입해 수선해서 입었다. 쓰리피스를 입어도 타이를 안 맨다든지, 그런 식으로 정식에서 빗겨나 어디로 튈지 모르는 백상호의 외형적인 걸 표현하고 싶었다."

박훈

'아무도 모른다'를 유심히 본 시청자라면, 백상호가 유독 '껌'을 자주 씹는다는 걸 발견했을 것이다. 이 역시 백상호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장치 중 하나였다.

"껌은 운동성을 표현하고 싶어 넣은 장치다. 백상호가 아이들을 대하는 모습을 보면, 맹수가 약한 동물을 사냥할 때와 비슷하다. 처음부터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고, 공격성을 숨긴 채 계속 주위를 맴돌며 때를 노린다. 그런 게 백상호의 방식과 닮았다. 맹수가 어슬렁거리는 운동성을 연기에 넣고 싶었다. 그래서 많이 움직이면서 연기했고, 멈춰있는 장면에서는 껌을 활용했다. 화면에 백상호의 얼굴만 나와도, 껌을 씹느라 턱을 계속 움직인다. 숨죽인 듯 하지만 계속 움직이는 그런 운동성에서, 캐릭터가 주는 긴장감을 쭉 유지할 수 있었던 거 같다."

▲ 철저한 분석과 준비…그래서 남달랐던 악역 백상호

백상호가 더 특이하게 보였던 건, 같은 보육원 출신 동생들이자 밀레니엄 호텔 직원인 오두석, 고희동(태원석 분), 배선아(박민정 분)와 함께 할 때의 기묘함 때문이었다. 이들은 악행을 함께 모의하며 하나같이 양심에 거리낌이 없었고, 가족 같이 편안한 분위기면서도 그 안에 존재한 서열이 고압적인 상하관계를 만들었다. 이런 묘한 관계성을 지닌 네 사람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배우들 간의 합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래서 박훈의 주도하에 네 사람은 따로 모여 아이디어 회의와 연습을 진행했다.

"밀레니엄 호텔의 네 사람은 내가 봐도 관계가 묘하다. 가족인 듯 가족이 아니고, 잘못된 표현방식들을 갖고 있다. 그걸 현장에서 짧은 시간 안에 만들어내는 건 한계가 있다고 생각해, 호텔 응접실 촬영을 하기 전에 항상 네 배우가 모여 아이디어 회의를 하고, 각자의 캐릭터에서 관계성을 표현할 수 있도록 연구했다. 그런 리허설을 거친 후 촬영을 진행했는데, 매번 그렇게 했기에 그들의 관계성이 더 기묘하게 나올 수 있었던 거 같다. 배우들이 다들 연기 열정이 커서 즐겁고 흔쾌히 작업에 참여했다. 그래서 더 친해졌고,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이 재미있었다."

박훈

특히 배선아 역을 연기한 배우 박민정과 박훈은 실제 부부 사이다. 부부가 한 드라마에 출연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닌데, 두 사람은 저마다 캐릭터와 혼연일체 한 연기를 펼치며 부부 사이라는 걸로 드라마 몰입을 방해하지 않았다.

"부부가 한 작품에 나오는 게 흔치 않은 일이긴 하지만, 난 배우 박민정 씨와 연기했을 뿐이고, 박민정 씨도 배우 박훈과 연기했을 뿐이다. 우리는 이미 연극에서 상대역으로 많이 공연을 해봤던 사람들이고, 연기한 횟수만 따지면 200~300번이 된다. 그래서 서로가 어떻게 연기할지를 잘 알고 있어, 호흡 면에서는 편했다. 다만 걱정은, 우리가 부부라는 사실이 시청자 몰입에 방해가 되지 않을까 싶었던 건데, 다행히 많은 분들이 작품을 보고 부수적인 재미 정도로 느낀 거 같다."

'아무도 모른다'에서 박훈의 연기에 탄성이 터져 나온 장면은 여럿 있다. 그 가운데 백상호가 어릴 적 서상원(강신일 분)의 학대 속에 익혔던 '신생명의 복음'의 구절을 기계처럼 빠르게 읊조리는 부분은 소름 끼치도록 무서우면서도 박훈의 절정의 연기력에 감탄했던 장면이다.

"백상호가 지닌 트라우마가 보여지는 장면이었는데, 마치 몸에 붙은 하나의 부속처럼 기계적으로 복음 구절을 내뱉어야 해서 연습이 많이 필요했다. 감정적으로도 굉장히 고통스러워야 해서, 연기 준비하면서 악몽도 많이 꿨다. '아무도 모른다'는 경계선에 선 아이와 좋은 어른과 나쁜 어른, 어떤 어른이 좋은 어른인가 그 역할에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차영진(김서형 분)이 황인범(문성근 분)이란 좋은 어른을 만났다면, 백상호는 서상원이란 나쁜 어른 밑에서 자랐다는 걸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백상호의 악함이 합리화되면 안 되겠지만, 그의 트라우마가 드러나는 장면이라, 수위 조절에도 신경 썼다."

박훈

▲ "언젠가 인정받는 배우가 됐을 때, '고생했다'는 말 듣고 싶어"

'아무도 모른다'의 탄탄한 극본과 감각 있는 연출, 배우들의 호연은 호평을 이끌었다. 특히 '좋은 어른'에 대한 화두는 드라마를 본 시청자도, 박훈 개인에게도 의미 있게 다가온 부분이다.

"'아무도 모른다'의 주제의식이 너무 좋았다. 나 자신한테도 좋은 어른이 뭔가, 어떤 어른이 되어야 하나 스스로 질문을 많이 했다. 이 드라마에는 청소년 연기자들도 많이 나왔는데, 그 친구들한테도 좋은 어른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현장에 더 일찍 나가고 나름 열심히 준비하려 했다. 이 작품은 시청률이 다가 아니라, 두고두고 회자될 드라마가 됐다고 생각한다. 또 장르 특성상, 이런 주제의식이 있는 작품을 만드는 다른 분들께도 유의미한 작품이 되지 않았나 싶다."

박훈은 외적인 강렬함 때문인지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의 차형석, '해치'의 달문 등 선 굵은 캐릭터를 주로 맡아왔다. 그런데 정작 '악역'으로 정의할 수 있는 캐릭터는 이번 '아무도 모른다'의 백상호가 처음이었다. "오해들 하시는데, 악역은 이번이 처음이었다"는 박훈은 앞으로 더 다양한 장르에서 새로운 캐릭터를 맡아보고 싶다는 바람을 드러냈다.

"배우는 한 것보다 해야 할 게 많다고 생각한다. 장르는 마다하지 않는다. 어떤 이야기 속에서 어떤 캐릭터를 해야 하는지가 정해지면, 당연히 새로운 시도를 해야 한다. 난 원래 부족한 사람이라 칭찬만 받고 싶진 않다. 욕을 먹어도, 그걸 통해서 성장할 거란 걸 믿는다. 그런 과정을 밟아 나가다가, 정말 사람들한테 인정받는 배우가 됐을 때, 어떤 거창한 수식어나 칭찬보다 '고생했다', '애썼다'라는 말을 듣고 싶다. 그 말에는 '좋은 일 나쁜 일 이런저런 일 다 겪고 결과적으로 여기까지 왔어. 정말 고생했다'는 마음이 담겨 있다. 그런 단계를 밟아 나가는 배우가 되고 싶고, 그 과정에 있어 '아무도 모른다'가 한 걸음이 됐다고 생각한다."

[사진제공=스토리제이컴퍼니]

강선애 기자 sakang@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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