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7월 10일(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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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찐리뷰]"그 여자가 매 맞을 짓 했다" 뻔뻔한 미군 살인범…'국가가 조장한 성매매' 기지촌 여성들의 눈물

작성 2026.07.10 16:33 수정 2026.07.10 17:17 조회 6
꼬꼬무 찐리뷰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SBS연예뉴스 | 강선애 기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9일 방송된 '쪽방촌의 이방인'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웹툰 작가 겸 방송인 김풍, 배우 김태훈, 김성은이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동두천의 그녀

때는 1992년 늦여름, 경기도 동두천시에 살고 있는 35살 순남 씨는 아침부터 집안일을 하느라 분주해. 남편은 아침 일찍 출근했고, 집에 혼자 있어. 비까지 추적추적 내려 어쩐지 스산한 느낌이 들던 그때. 누군가 집안으로 조심스레 걸어 들어와. 비에 흠뻑 젖은 채 찾아온 사람은, 동네 동생 혜미 씨. 나이는 26살이야. 순남 씨는 지인의 소개로 혜미 씨를 알게 됐대.

꼬꼬무 찐리뷰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언니, 나 아는 동생이 있는데, 착하고 외로운데, 언니 걔도 좀 나 밥 먹을 때 와서 같이 좀 먹게 하면 안 될까?' 이래가지가 혜미가 오기 시작한 거거든요. '언제든지 네가 배고프면 우리 집에 와라, 내가 밥은 해줄 수 있다' 그랬죠. 애가 이쁘고 착하고, 남들한테 인정도 많고. 걔를 동두천에서는 혜미라고 불렀거든요."

-김순남(가명), 혜미 씨 지인

전북 순창이 고향이라는 혜미 씨가 언제부터 동두천에서 살게 됐는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없었어. 혜미 씨가 워낙 말수가 적은 데다, 자기 얘기를 하는 성격이 아니었거든. 순남 씨 역시 그녀의 과거를 묻는 대신, 찾아올 때마다 따뜻한 밥 한 끼를 차려줬다고 해.

이날도 순남 씨는 비에 젖은 혜미 씨의 몸을 수건으로 닦아주고, 보글보글 찌개를 끓였어. 혜미 씨가 가장 좋아하는 건 순남 씨 표 김치찌개였어. 그렇게 맛있게 먹더래. 그런데, 그 일이 있은 후부터, 순남 씨는 김치찌개를 끓이지 않아. 아니, 끓일 수가 없었대.

꼬꼬무 찐리뷰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한동안 혜미를 못 봤거든요. 그때 당시는 다 목욕탕 가잖아요. 이제 낮에 나오면서 목욕탕 갔는데, 거기(혜미 집)가 딱 바리케이드 쳐 있고 못 가게 돼 있더라고요. '뭐야?' 그랬더니 '혜미가 사고 났어' 이렇게 해서 알게 된 거죠… 그 당시는 김치찌개를 안 먹었어요. 혜미 해준 생각이 나서. 진짜 소름 끼쳐. 죽을 때까지 그런 사건은 없어. 그건 너무 잔인한 거잖아요."

-김순남(가명), 혜미 씨 지인

혜미 씨가 살해를 당한 거야. 생각하기만 해도 너무 마음이 아파서, 차라리 지우고 싶었던 순남 씨의 기억. 동두천, 아니 대한민국을 발칵 뒤집은 잔혹한 사건이 벌어진 건, 1992년 10월 28일 수요일 새벽 2시 무렵이었어.

▲ 누가 그녀를 죽였나

사건 발생 16시간 30분 후인 저녁 6시 30분. 여긴, 서울 동대문구에 위치한 한국외대야. 국제법 전문가 이장희 교수는 퇴근 준비를 하고 있었어. 그런데 연구실을 막 나서려는 그때, 상상도 못 한 전화가 걸려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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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 김찬국 부총장 신학대학 교수가 연락이 와서, '동두천에서 한 여성이 아주 잔혹하게 살해됐다' 그래서. '같이 한 번 현장에 가봅시다' 이렇게 전화가 왔어요."

-이장희, 한국외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

저녁 8시 무렵, 이 교수가 도착한 장소는, 동두천 보산동의 이곳이었어.

꼬꼬무 찐리뷰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꼬꼬무 찐리뷰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좁은 골목 끝, 낡고 허름한 집들. 6.6㎡ 남짓의 작은방이 여러 개 붙어있는 쪽방촌이야. 이곳의 문간방 문을 조심스레 열자,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충격적인 현장이 눈앞에 나타났어.

"아직 경찰이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니까, 우리가 현장을 봤죠."

-이장희, 한국외대 명예교수

꼬꼬무 찐리뷰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 여성. 벽 곳곳의 혈흔이 당시 상황을 짐작케 했어. 얼굴이 함몰된 채 알몸 상태로 숨져 있었던 여인의 사인은, 전두부 열창에 의한 실혈.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숨졌다는 거야. 그런데 그 여성의 시신을 살펴보던 사람들은 모두 얼어붙고 말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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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은 딱 첫 장면이, 피를 많이 흘린 그런 거. 또 맥주병을… 말씀드리기 뭣 하지만… 그때 제가 상당히 쇼크를 받았어요 그래서. 이거 앞으로 이 수사가 제대로 돼야 한다.."

-이장희, 한국외대 명예교수

범인이 피해자의 신체에 여러 개의 이물질을 삽입한 거야. 여성의 입에는 성냥이 물려 있었고, 차마 설명하기 힘든 참혹한 상황이야. 어떻게 사람이 이럴 수 있나, 천인공노할 범행이었어. 현장에 남은 이상한 점은 또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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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가루가 바닥에 뿌려져 있어. 이 흰 가루의 정체는, 세탁 세제야. 이걸 뿌린 의도는 뭘까? 증거를 인멸하려고?

방 안에 있는 모두가 참담하고 혼란스러운 상황 속, 경찰은 뒤늦게 현장 수습에 나섰어. 이 참혹한 죽음을 맞은 피해자가 바로, 혜미 씨였어.

꼬꼬무 찐리뷰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사실 '혜미'는 그녀의 본명이 아니야. 뒤늦게 알게 된 그녀의 진짜 이름은 '윤금이'였어. 금이 씨는 억척같이 일했지만, 늘 가난했대. 금이 씨가 살던 작은 쪽방에는 변변한 세간살이 하나 없었어. 당시 쪽방의 월세는, 4만 원이었어. 지금 돈으로 따지면, 10만 원대 초반 정도 해. 그렇다고 금이 씨가 다른 사치를 한 것도 없어. 겨우 26세. 누구보다 성실하게 살아온 금이 씨는, 왜 이토록 잔혹한 죽음을 맞은걸까.

▲ 용의자의 정체

사건이 발생한 건 1992년. 지금 같은 과학 수사가 없을 때야. CCTV나 블랙박스도 물론 없지. 수사팀은 가용 인력을 총동원해 주변인 탐문부터 시작했어. 금이 씨의 지인들은 물론, 주변 우범자들까지 만나 이야기를 들었어. 그러다 이웃 중 한 명이 의미심장한 증언을 했어.

"밤 12시 반쯤 넘었을 때였나? 아 웬 젊은 백인 남자가 걔를 부축해서 방에 같이 들어가던데요? 누군지는 모르는데, 내가 그놈 얼굴을 봤어!"

탐문 끝에 목격자를 찾은 거야. 목격자가 본 '백인 남자'. 이 이야기를 하려면, 먼저 이 지역의 특징부터 알아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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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두천은 한강 이북에서 최대 규모인 캠프 케이시를 비롯해 미2사단의 주둔지야. 한때 동두천 땅 40%가 미군기지였어. 이때 당시 주둔 병력의 규모는 무려 1만여 명. 미군들이 동두천에 자리를 잡자, 자연스럽게 한국인들도 하나둘 이곳으로 모여들었어. 그렇게 미군기지 주변에 만들어진 마을 풍경은 이랬어.

꼬꼬무 찐리뷰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거리 곳곳에 영어 간판은 물론, 흘러나오는 음악은 팝송. 한국인과 외국인이 뒤섞인 이국적인 풍경이었어. 이래서 한때 동두천은 달러가 가장 많이 모이는 도시로 불렸어. 심지어 '강아지가 달러를 물고 다닌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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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들 월급날이 이 동두천 월급날이었어. 한 달에 두 번인데, 미군들 15일 봉급, 30일 봉급 그렇게 해서, 이 동네는 공장 그런 게 없고 오로지 그런 것뿐, 미군 부대 다니면서 먹고살고 그랬던 시절이야. 아침에 청소하면서도 돈이 바닥에 막 여기저기 흘리고 간 게 많았어요. 흔적이 그 정도로 흔했었어."

-동두천 상인

꼬꼬무 찐리뷰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진짜 강아지가 달러 물고 다닐 정도로, 달러가 그냥 흔했지."

-동두천 상인

그럼, 금이 씨를 살해한 백인 남자의 직업은? 아마도 미군일 확률이 높을 거야. 그를 잡으려면, 미군 부대로 가야지. 경찰과 목격자는 미군 부대 앞을 지키기로 했어. 그렇게 정문을 드나드는 사람들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길 3일째. 드디어, 사건 당일과 똑같은 차림에 심지어 핏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는 옷을 입은 용의자가 눈앞에 나타났어.

남자가 부대 안에 들어가 숨기라도 하면 그땐 손 쓸 방법이 없어. 목격자가 부대 정문 앞에서 남자의 옷을 낚아챈 그 순간, 경찰이 잽싸게 남자의 손에 수갑을 채웠어. 그렇게 검거된 남자의 얼굴을 보여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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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케네스 마클. 당시 나이는 만 19세였어. 미 육군 제2보병 사단의 이병이었어. 그런데 경찰은, 애써 잡은 마클을 조사하지 않았어. 심지어 구금조차 하지 않았어. 대한민국과 아메리카 합중국 간의 상호 방위조약 제4조에 의한 시설과 구역 및 대한민국에서의 합중국 군대의 지위에 관한 협정. 일명 '한미 SOFA(Status Of Forces Agreement) 때문이었어.

▲ 불공정한 한미 SOFA

1966년 7월에 체결된 '한미 SOFA' 협정엔 미군의 한국 내 법적 지위가 규정돼 있어. 미군이 사용할 수 있는 시설과 구역 문제부터, 세금이나 운전면허 같은 생활문제, 그리고 범죄를 저질렀을 때 처벌에 관한 내용까지, 세세한 내용이 담겨 있어.

주한미군이 한국인을 상대로 범죄를 저질렀을 때, 재판권은 어디에 있을까? 원칙적으로는 한국이 1차 재판권을 가지긴 했어. 단, 조건이 있어. 미군 당국이 직접 재판을 요구하면, 한국이 '호의적 고려'를 해야 해. 호의는 명목일 뿐, 그냥 미군 요청을 들어주라는 의미였어.

그럼, 한국 경찰이 미군 용의자를 검거하면, 기소를 하기 전까지 구금은, 어느 쪽에서 할 수 있을까? 그건 미국 쪽에서 해야 했어.

이런 협정 내용. 너무 불공정하지? 이런 힘의 불균형에는 이유가 있어. 한미 SOFA가 체결된 건 1966년 7월이지만, 그 뼈대는 1950년 7월 12일 일명 '대전협정' 때 만들어졌어. 이때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보름 무렵 지났을 때야. 서울 함락 후 정부는 대전까지 밀려났어. 이때 도와주겠다고 나선 게 미국이야. 이런 상황에 협상의 공정을 생각할 수 있었을까? 문제는, 협상 체결 후 수십 년이 흐른 1992년, 금이 씨가 살해당했던 그 시기에도 현실은 크게 바뀐 것이 없었다는 거야. 그래서 한국 경찰은 마클의 신병을 미군에 넘겨줄 수밖에 없었어.

한국 땅에서 20대 한국 여성이 잔혹한 죽음을 맞았어. 그런데 한국 측에서 범인을 구금할 수 없어. 그리고 마클의 조사는 제한된 시간 동안 미군 관계자 입회하에서만 가능해. 심문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건 물론이고, 초동 수사의 주도권마저 미국에 쥐게 돼. 이런 와중에 한국 수사 당국에선 재판권 행사의 의지조차 없어.

▲ 시민들의 분노

이런 소식을 전해 듣고 동두천 시민들은 분노했어. 이러다 범인이 미국으로 도망가는 건 아닌지 우려가 커져. 이 무렵, 동두천 시내 가게마다 이런 안내문이 붙기 시작했어.

꼬꼬무 찐리뷰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우리 업소는 윤금이 씨 살해 범인이 한국 법정에 설 때까지 주한미군의 출입을 금합니다."

도시 전체가 미군기지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음에도, 시민들은 분노를 참지 못해 행동에 나섰어. 사실 그간 무전취식 하려는 미군들에게 돈을 달라고 했다가 폭행을 당하고, 싸움을 말리다가 부상당한 상인들의 수는 셀 수조차 없어. 미군에 항의라도 할라치면, 오히려 미군 쪽에서는 앞으로 그 식당에 안 가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어. 이러니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참을 수밖에 없었지.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어. 저마다 자신들의 생존권을 걸고 마클의 처벌을 요구한 거야. 항의에 동참한 사람들 중에는 택시 노동자들도 있었어.

<동두천 택시 노동자들에게 드리는 글>
"지난 10월 28일에 윤금이 씨의 미군에 의한 살해 소식을 접하고 누구보다도 미군의 폭력에 시달려온 우리 택시 노동자들이 나서서 이번 사건을 제대로 우리 법정에 세우도록 노력합시다. 이제는 더 이상 미국으로 송환되면 끝이 나서는 안 됩니다. 한국 검찰이 재판권을 행사할 때까지 주한 미군들의 승차를 거부합시다."

이른바, '미군 탑승 거부 운동'을 시작한 거야. 택시 노동자들의 뜻을 모은 사람은, 동두천에서 나고 자란 택시기사 김용수 씨야. 용수 씨가 금이 씨 사건에 누구보다 분노한 데는 이유가 있어.

꼬꼬무 찐리뷰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그때는 택시가 포니였으니까. 운전석 앞에다 드라이버를 다 꽂고 다녔어요 여기 사람들은요. 미군 애들하고 싸우니까. 싸워야 되니까. 한대 치고 도망가고 차비 안 내고 도망가고, 별놈이 다 있거든요. 윤금이 사건 전에, 제 친구도 목이 잘려서 죽었어요. 그게 겪은 지가 얼마 안 됐거든요. 얼마 안 되고 나서 윤금이 사건이 또 터졌다고요. 저 같은 경우는. '이 XX들 이거 진짜 너무한 거 아니야?' 하는 생각이 불현듯이 딱 그냥 올라오는 거예요."

-김용수, 동두천 택시기사

1987년 11월. 병원 응급실에서 장례식장으로 향하는 차 안.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용수 씨 앞에, 한 남자가 말없이 누워있어. 불과 하루 전까지 함께 커피를 마시며 얘기를 나눴던 동료 택시기사 박 씨야. 사인은, 목 부위 자상으로 인한 과다출혈. 정확한 경위는 알 수 없어. 다만 주변 상인들의 말에 따르면, 한 미군이 그의 택시에서 내린 뒤, 박 씨가 문을 열고 나와 쓰러졌다고 해. 그런데 그 미군 가해자가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 알 수 없어. 검찰이 재판권을 포기하면서 가해자의 재판은 한국 법정에서 열리지 않았거든.

사실, 미군이 한국 법정에 선 건 극히 드물어. 1967년에서 1987년 사이, 미군들이 일으킨 범죄는, 확인된 것만 39,452건. 그중에서 한국에서 재판이 열린 건, 234건. 0.59%에 불과한 거야. 100건 중에 1건도 안 되는 거야. 이런 상황에서, 미군에게 친구를 잃고, 같은 동두천 시민의 죽음을 마주한 용수 씨는 분노를 참지 못했지. 1992년 11월 7일, 동두천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어.

"전경들이 여기 시내 서울병원 사거리에서부터 길을 막았어요, 저희가 가는데. 우린 동두천 길을 잘 아니까, 거기서 막으면 뭐 합니까. 막 싸우는 척하다가 골목으로 빠져서 그냥 정문에 가버렸죠."

-김용수, 동두천 택시기사

꼬꼬무 찐리뷰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동두천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어. 일명 '동두천 시민 규탄대회'. 동두천 역사상 최대 규모 집회로 기록될 이날, 동두천 캠프 케이시 정문 앞에는 43개 단체 약 1,000여 명의 시민들이 모였어. "살인 미군 처벌해라!", "미군 신병 인도하라!"는 사람들의 고성에 부대가 떠나갈 듯했어. 그리고 부대의 상징물인 '인디언 헤드'엔 날달걀이 날아들었어.

꼬꼬무 찐리뷰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이쯤 되니 밖을 내다보던 미군들도 사안의 심각성을 느껴. 그럼, 마클의 신병은 한국 측에 인도됐을까? 6일 뒤, 주한미군 사령부에서 입장을 발표했어. 마클이 한국 법정에서 유죄 판결로 징역형을 선고받을 경우, 한국의 수용시설에 수감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거였어. 한국에서의 재판은 허용하되, 선고 전 수감은 사실상 불가하다는 거야. 끝내 마클은 미군의 신병 관리 하에서 수사를 받게 됐어. 이런 마클을 제대로 처벌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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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서울역 앞에는 매주 토요일마다 엄중 처벌을 촉구하는 서명운동이 열렸어. 이 사건은 이제, 동두천을 넘어 전국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거야.

다음 해인 1993년 2월 17일. 아침부터 법원 안팎은 시민단체, 기자, 학생 등으로 발 디딜 틈이 없었어. 이날은 마클의 1심 첫 공판이 열리는 날이었어. 피고인 마클이 대중 앞에 처음 등장하는 순간, 시민들은 분노로 들끓었어.

꼬꼬무 찐리뷰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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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제가 가봤는데, 인파가 대단했습니다. 하여튼 와아.. 대단한 거죠. 상상초월했죠. 밖에도 그렇고. (자신의 행동을) 뉘우친다든가 이런 표정보다는, 조금 오만해 보이고 그게 상당히 그 재판정에 있는 일반 사람들의 마음을 많이 자극하지 않았나."

-이장희, 한국외대 명예교수

뜨거운 관심 속에서 재판을 시작됐어. 그리고 사건 당일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마침내 드러났지.

▲ 그날 무슨 일이 있었나

사건 전날인 1992년 10월 27일 밤 10시 30분 무렵. 마클은 동두천 캠프 케이시 정문 앞에 있는 한 클럽을 찾았다고 해. 이미 숙소에서 맥주 16병에 진 2잔까지 마시고 나온 상태였는데, 마클은 클럽에서 추가로 맥주 5병을 더 마셔. 거의 만취 상태였던 거야. 그리고 부대로 복귀하려고 가게를 나서는데, 골목 끝에 한 여성이 취해 있더래. 바로, 금이 씨였어. 10월 말 쌀쌀한 날씨. 마클은 의무병 출신인 자신이 그저 선의로 위태로워 보이는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줬다고 주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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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마클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금이 씨는 왜 숨진 걸까? 1차 공판 당시 마클의 진술 내용이야.

"그 여자가 나를 계속해서 공격을 해서 제가 그 여자를 병으로 네 번 내리치긴 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방을 나서기 전에 그 여자가 죽었다는 건 부인합니다."
-1차 공판 마클의 진술 中

금이 씨를 무사히 방에 데려다주고 나오려는데, 갑자기 금이 씨가 맥주병을 들고 달려들었다는 거야. 자기는 방어 차원에서 때렸을 뿐, 살해할 의도는 없었대. 물론, 둘만 있었던 공간에서 마클의 일방적인 증언일 뿐이야. 특히 이물질을 삽입한 엽기적인 행각과 세탁세제를 뿌린 건 자신의 소행이 아니라는 게 마클의 주장이야.

근데, 그다음 공판부터 마클은 더욱 황당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해. 진범이 따로 있다는 거야. 사실 사건이 일어난 그날 두 사람이 집 앞에서 만난 사람, 한 명이 더 있었어. 평소 금이 씨와 친분이 있던 미군 램버트야. 그는 702 정비지원대대 소속 상병이야. 이건 이웃들의 목격담으로도 확인이 됐어.

낯선 남자 옆에 있는 금이 씨를 보면서, 램버트는 무슨 일이냐고 물었어. 마클은 램버트의 말을 무시하고, 금이 씨와 집으로 향했대. 그러자 램버트가 자꾸 따라왔다는 거야. 말싸움이 점점 커지더니, 두 사람은 집 앞에서 몸싸움까지 벌였어. 마클을 바닥에 쓰러뜨린 뒤 몇 차례 주먹질을 한 후에야, 램버트는 자리를 떠났어. 마클이 진범으로 지목한 건, 바로 이 램버트였어. 이건 2차 공판 때 마클의 증언이야.

"그는 피해자에게 그날 밤 매우 화가 나 있었습니다. 제가 그 집을 떠나기 전에 램버트가 그 방 쪽으로 가는 걸 봤어요. 나중에 본 현장 사진은 제가 방을 떠날 때 상태도 아니었어요."
-2차 공판 마클의 증언 中

금이 씨와 자신이 함께 방으로 들어가는 걸 본 램버트가, 질투심에 금이 씨를 잔혹하게 살해하고 현장을 훼손했을 거라는 주장이야. 하지만 법정에 증인으로 출석했던 램버트는, 알리바이가 확인 됐어. 마클이 거짓말을 반복하는 거야.

▲ 범인의 민낯

재판정에는 당시 93학번 대학생 새내기, 서주호 씨도 있었어.

꼬꼬무 찐리뷰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케네스 마클이 제 기억으로는 재판 내내 범죄 인정도 안 하고, 태도도 매우 불성실했던 것으로 기억하거든요. 물론 재판은 엄정하게 엄숙하게 진행돼야 하지만, 사건 자체의 특수성 때문에 사람들 감정이 많이 격앙되어 있었고, 그래서 우리가 막 법정에서 마클이 헛소리를 하거나 비아냥대거나 그럴 때, 막 소리도 지르고 그랬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서주호, 당시 93학번 대학생

심지어 재판이 진행될수록, 마클이 이 사건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드러났어. 미군 범죄수사대의 에반스 수사관은 법정에서 이런 증언을 했어.

검사: "피고인은 본건 범행에 대해 어느 정도까지 시인하던가요?"
수사관: "그 여자는 죽을 행동까지는 안 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여자는 매 맞을 행동은 했다고 했습니다."

도대체 '매 맞을 행동'이라는 건 뭘까? 마클은 1심 최후 진술에서 또 한 번 사람들을 분노하게 만들어.

"대한민국 국민에게 공식 사죄합니다. 고인의 명복을 빌고 살아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여전히 합니다. 저는 이 비참한 사건을… 저는 일생을 망쳤습니다. 비참한 일이 있었지만 이것은 가장 비참합니다. 저의 친구와 가족들은 저를 믿습니다. 저는 죽이지 않았습니다. 저를 믿어주십시오."
-마클의 1심 최후 진술 中

최후 진술 어디에도, 숨진 금이 씨에 대한 사죄는 없었어. 국민들에게 사죄하더니, 돌연 자기 신세 한탄을 했어.

국과수 감정 결과, 금이 씨 신체에 삽입된 물건에서 마클의 지문이 검출됐어. 게다가 마클이 신고 있던 신발에선 현장의 세제 성분이 확인됐어. 금이 씨를 폭행하고 모욕하고 현장을 훼손한 범인이, 마클이 맞다는 거야. 국과수 검정이 밝힌 또 다른 사실이 있어. 마클이 저지른 엽기적인 행각은 모두, 금이 씨 생전에 벌어진 일이었다고 해.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금이 씨는 끔찍한 고통을 겪어야 했어.

법원은 금이 씨를 살해한 혐의와 시체를 모욕한 혐의를 모두 인정해 마클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어. 방청객들은 그의 악랄한 범행을 생각하면, 무기징역도 가볍다고 생각했대. 그런데 마클은 이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고 항소했어. 자기가 지은 죄에 비해 무기징역은 너무 무겁다는 거야. 항소심 결과는 어떻게 나왔을까? 1993년 12월 16일, 2심 선고 공판이 끝난 뒤 사람들의 모습이야.

꼬꼬무 찐리뷰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꼬꼬무 찐리뷰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이 화난 표정의 젊은 청년이 당시 스무 살이었던 서주호 씨야.

꼬꼬무 찐리뷰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그때 형이 선고되고, 이거 형량이 말도 안 된다 막 이러면서 우리 학생들이 소리를 되게 많이 질렀던 거 같고. 거의 쫓겨나다시피 했던 거 같고. 다들 정말 분노.. 분노에 찼던 거 같고. 두 번 다시 일어나지 말아야 할 사건인 것 같고. 어떻게 사람이 사람을 그렇게 잔인하게 죽일 수 있습니까."

-서주호, 당시 93학번 대학생

항소심 결과, 징역 15년으로 감형된 거야. 법원의 판단 근거는 이랬어.

"피고인은 전과 없는 초범으로서 우발적으로 이 사건 범행에 이르게 된 점, 이 사건 이후 피해자의 유족들은 한미 양 당국의 심의를 거쳐 미국 정부로부터 71,453,075원을 위자료와 손해배상금으로 수령하여 합의한 점 등을 검토하여 보면 원심이 피고인에 대하여 선고한 형량은 다소 무거워서 부당하다고 인정된다."
-2심 판결문 中

1심 이후 유족들이 미국 정부로부터 위자료와 손해배상금을 수령한 점이 감경 사유로 받아들여진 거야. 재판이 끝난 뒤 학생들과 시민들은 법원 복도를 점거했어. 울분을 터뜨리며 규탄 집회를 했는데, 이례적으로 제지는 없었다고 전해져. 이후 마클은 징역 15년도 무겁다며, 또 상고를 했어. 하지만 대법원에서 기각되며 그의 형이 최종 확정돼.

▲ 마클의 실체

1992년 10월 28일. 26세의 금이 씨에게 고문에 가까운 끔찍한 범행을 저질렀을 당시, 마클의 나이는 만 19세였어. 그는 대체 어떤 사람인 걸까. 전문가의 이야기를 들어볼게.

꼬꼬무 찐리뷰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전위된 폭력성이라고 하거든요. 이 사람을 죽이겠다는 목적보다도 자기의 분노를 표현하는 게 더 핵심적인 목적이었다는 겁니다 이 사람한테는. 예를 들면 램버트는 자기 마음대로 제압하거나 자기의 폭력을 투사하기에 어려운 상대였단 말이에요. 피해자를 더 모욕하고 피해자를 도구화하고 자기의 분노나 전능감을 보여주기 위해서 피해자가 살아있는 동안 신체를 훼손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최이문, 경찰대 행정학과 교수

전형적인 강약약강. 마클의 범행은 램버트를 향한 분노에서 시작됐을 가능성이 크다는 거야. 이병인 마클과 상병인 램버트. 계급이 높고 나이도 많은 램버트 대신, 금이 씨에게 화풀이를 하며 자신의 지배력을 과시했다는 거야. 또 전문가는 마클이 반사회적 인격장애로 보인다고 해. 타인에게 연민을 느끼지 못하고, 사회 규범이나 규칙을 따르지 않아. 반복적으로 범법행위와 거짓말을 하고, 충동성과 공격성을 보이는 게 특징이야.

마침내 한국 교도소에 수감된 마클. 그의 교도소 생활은 어땠을까? 더 놀라운 얘기가 계속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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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흘러 1994년 5월 17일. 천안소년교도소야. 천동성 교도관은 창고에서 물품 정리를 마치고 복도로 나오던 중이었어. 그런데 창문 너머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 호송 차량이 교도소로 들어오고, 뜨거운 취재 열기 속 케네스 마클이 현장에 도착했어. 이날은 바로, 마클이 교도소에 수감되는 날이야. 이후 마클은 천동성 교도관의 골칫거리가 됐다고 해. 보통 영치품이 들어오면 교도관은 내용물을 확인한 뒤 문제 물품은 재소자에게 설명 후 폐기하게 돼 있어. 그런데 이 과정에서 마클은 늘 욕설을 하며 행패를 부렸대. 천 교도관은 그를 '개차반 그 자체'라고 표현했어. 그러다 1995년 5월 5일, 한 사건이 벌어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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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수요일 미군 부대에서 부식하고 소포를 가져와요. 근데 그날 공휴일인 경우는 그다음 날 소포를 줬거든. 근데 이놈이, 오늘 당장 가져오게 해라 해서, 복도 유리창 깨고, 소화기를 뿌린 거야. 교도관한테."

-천동성, 당시 천안소년교도소 교도관

마클이 사동 안을 난장판으로 만든 거야. 결국 마클은 공무 집행 방해 혐의로 추가 기소됐고, 그 결과 벌금 200만 원이 고지됐어. 그런데 그마저 납부를 거부해, 노역 100일이 추가됐어.

그런데, 이토록 불평불만이 많은 마클이 수감돼 있던 교도소는, 우리가 생각하는 교도소와 달랐어. 마클이 수감된 곳 사진을 보여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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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SOFA 수용자 사동이야. 미군 범죄자에게는 6.69㎡의 취침실이 제공돼. 일반 수용자들에 비하면 훨씬 넓은 공간이야. 방에는 개인 침대가, 화장실에는 수세식 변기가 갖춰져 있어. 세면실, 주방, 운동실, 세탁실, 접견실 등 별도 시설로 공동 이용이 가능해. 음식도 다른 미군 부대와 똑같은 걸로 제공돼. 심지어 물까지도.

"천안소년교도소가 90년도에 신축된 건물이라서 건물도 깨끗했고, 그리고 미군을 수용하게 되면, 식당이라든지 세탁실이라든지 샤워장이라든지 운동할 수 있는 공간이라든지, 게임실, 이런 걸 마련해 주게 돼 있고. 미군들은 미군 병사 1인이 먹는 똑같은 분량의 부식을 일주일에 한 번씩 미군 부대에서 가지고 와요. 그러면 걔들이 거기 식당에서 조리해 먹을 수 있도록 해야 해요."
-천동성, 당시 천안소년교도소 교도관

이런 특혜가 주어지는 이유는, 한미SOFA 협정 합의의견 13호에 해당 내용이 명시돼 있어서야. 이 밖에도 까다로운 조건들은 더 있어.

*접견실: 방문객과 수용자들을 위하여 안락한 환경과 만족할 만한 분위기를 조성해 주어야 한다.
카드, 놀이기구 및 운동 비품을 포함한 오락기구를 언제라도 수용자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마련하여야 한다.
상기 기준은 필요에 다라 미8군 헌병대와 대한민국 법무부 교정국과의 합의하에 보충할 수 있다.
-SOFA 수용자 구금시설에 대한 최저 기준

마클이 지냈던 교도소 환경. 금이 씨가 살던 월세 4만 원 쪽방보다 더 나은 거 같지? 이러다 보니 곳곳에선 SOFA 개정에 대한 요구가 터져 나와. 그런데 마클도 가만히 있지 않아. 2000년 8월 21일, 마클은 코리아 타임즈 독자의견 게시판에 기고문을 보내. 제목은 'Why change SOFA'. 왜 한미SOFA 규정을 고치냐는 거야. 글의 내용도 SOFA 개정은 웃기는 소리라는 거였어.

▲ 또 다른 비극

그런데 이 무렵, 또 하나의 사건이 벌어졌어. 1999년 1월 30일. 동두천 보산동에 살고 있던 45세 신 씨가 숨진 채 발견됐어. 온몸에는 폭행의 흔적이 선명했고, 목에는 두꺼운 전선이 감겨 있었어.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범인이 남긴 단서는 하나. 피해자의 립스틱으로 적은 'Whore'이라는 단어. '매춘부'라는 뜻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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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은 수사를 통해 몇몇 미군을 용의선상에 올렸지만, 사건은 결국 영구미제로 남아. 용의자로 지목된 이들이 미국으로 출국했거든. 그런데 사건이 벌어진 이 동네. 동두천시 보산동. 익숙하지? 신 씨의 집은 금이 씨의 집에서 불과 100미터 거리의 쪽방이었어. 공통점은 이뿐만이 아니었어. 이들의 직업은, 당시 '양공주', '양색시'라고 불렸던 기지촌 여성, 미군 위안부였거든.

'미군 위안부'라는 말 들어봤어? 1961년 11월 9일. 정부는 '윤락행위등방지법'을 제정하고 성매매를 금지해. 누구라도 윤락행위를 하거나 이를 알선, 조장해서는 안된다는 거야. 위반 시엔 징역 혹은 벌금형이야. 그런데 다음 해인 1962년에 정부는 전국 104곳을 특정 구역으로 지정해서 사실상 성매매를 예외적으로 허용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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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옥(가명) 씨가 있었던 '빼벌'도 그중 한 곳이었어. 빼벌은 경기도 의정부 캠프 스탠리 앞에 만들어진 기지촌을 말해. '빼벌'은 '배밭'을 미군들이 발음하지 못해 변형된 단어라는 얘기도 있고, 한번 들어오면 절대 빠져나가지 못한다는 '펄'에서 유래된 단어라는 얘기도 있어. 그런 빼벌에 순옥 씨가 발을 들인 건, 16세 무렵이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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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는 남의 집 식모살이도 우리 언니들은 많이 했거든요. 다 돈 벌러 갔어요. 그때는 다 가난해서. 영등포의 소개소에 갔다가, 소개비가 얹혀진 거예요. 거기서 며칠 잔 거 먹은 거 거기 며칠 있던 거 또 더해서 이제 빼벌로 오게 된 거예요. 그때는 도망칠 생각을 포기하게 된 거예요."

-최순옥(가명), 전 미군 위안부

돈을 벌기 위해 직업소개소를 찾아갔던 가난한 소녀들은 영문도 모른 채 기지촌으로 내몰렸어. 심지어 이 무렵엔 이런 일까지도 있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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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직소녀 30명 윤락가에, 일당 5명 영장>

"서울 마포 경찰서는 김 씨 등 5명을 영리를 위한 약취유인매매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신문에 '미군전용 홀 구직자 구함'이란 광고를 낸 뒤 찾아온 윤 모 양 등 10대 소녀 30명을 평택군 미군 기지촌 주변의 창녀촌 포주들에게 팔아왔다는 것이다."

-1970년 7월 24일 동아일보

말 그대로 인신매매야. 운 좋게 탈출한 소녀들이 있기도 했지만, 다시 잡혀 오면 포주들에게 모진 폭행을 당했어. 그러니 감히 도망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어. 그렇게 15세, 16세 어린 소녀들은 미군을 상대하고 달러를 벌어야 했어. 1963년 대검찰청 자료에 따르면, 전국의 기지촌 여성은 13,947명. 그중 약 79%가 경기도에 거주했다고 해. 이게 공식적으로 확인된 인원만 이만큼이니, 실제로는 더 많았을 거로 추정돼.

▲ 국가가 만든 기지촌

그럼 정부의 입장은 어땠을까? 박정희 정권은 기지촌을 장려하고 후원했어. 클럽에 면세 주류를 제공하고, 시설자금을 보조함과 동시에 기지촌 업주들에게 해외 기지촌 견학까지 지원했대. 대한민국 총수출액이 6억 2,200만 달러였던 1969년 당시, 미군 관련업으로 벌어들이는 외화가 엄청났거든. 무려 7,000만 달러. 그러니 정부에게 기지촌 여성들은 달러를 버는 애국자이자, 외화 획득의 역군이었던 거야.

꼬꼬무 찐리뷰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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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우리나라에 달러를 벌어들이는 데가 하나도 없었어. 양공주들이 다 돈 벌어서 달러가 그때 생산이 됐었어.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기여를 한다 뭐 한다 해서, 그때는 포주가 있었어. 서울역 앞에서 똘마니들 시켜서 거기서 데리고 와서, (기지촌 여성을) 감금해 놓고서 몸 팔게 하고. 엄청 고생 많이 했죠, 양공주."

-동두천 주민

그러다 이 기지촌은 또 한 번의 전환점을 맞았어. 1971년 12월에 한미 1군단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이 미군들의 기지촌 관련 불만을 듣게 됐거든. 기지촌에서 성병 발병률이 높고 인종차별이 심해, 미군들이 한국 배치를 꺼린다는 거야. 그래서 등장한 게 이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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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지촌 정화대책'

이 안에는, 기지촌 여성들을 위한 전용 아파트를 짓는 계획부터, 성병관리, 업소개선 방안 등의 내용이 담겨 있어. 그럼 수년에 거쳐 이 대책을 구상해 온 책임자는 누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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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이야. 대통령이 승인한 국가 차원의 사업이야. 그러니 진행 속도가 빨랐겠지? 전국 기지촌을 찾아간 공무원들은 여성들을 모아놓고 이런 연설을 해.

"여러분은 모두 애국자입니다.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달러 획득에 기여함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당시 공무원들은 기지촌 여성을 '민간 외교관'이라 부르며 영어와 각종 교양 수업까지 했다고 해.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사업은 성병 퇴치. 일주일에 두 번씩 성병 검진을 받은 여성들은 항상 이걸 소지하고 다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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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진단수첩'. 자신의 건강을 증명하는 '검진증'이야. 여기엔 에이즈 검사 항목까지 존재했어. 성병 검사에서 만약 양성 판정을 받거나 검진증을 소지하지 않은 경우, 바로 성병관리소인 낙검자 수용소에 감금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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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성병관리소)서 사고 나는 경우 가끔 있었어요. 기절하고 쓰러져서 뭐 했다거나, 죽었다는 얘기도 듣고. 그 페니실린 주사가 엄청 독하거든요. 그거 맞으면 걷지도 못해요 진짜. 질질질 끌고 가야 돼. 얼마나 아픈지 몰라요."

-최순옥(가명), 전 미군 위안부

당시 성병 치료제로 사용된 페니실린. 페니실린은 세균성 성병 치료에 효과적이나 쇼크 위험이 있어서 충분한 사전 검사가 필요해. 그런데 성병관리소에선 사전 검사를 생략하고 약물을 사용했어. 그러다 보니 부작용으로 사망하는 여성들까지 발생해.

그런데, 건강하고 깨끗한 신체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교양을 쌓기 위한 노력은 모두 미군을 위한 일이야.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이유는 뭘까? 그 시작은, 1969년 닉슨 독트린에서 비롯된 거야. 닉슨 대통령이 아시아의 안보는 아시안인들이 지키라며, 해외 주둔 미군 감축방침을 발표한 거야. 박정희 정권에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어.

1968년 1월 21일, 북한 무장 공비 31명이 서울 청와대 인근까지 침투하는 사건이 벌어졌어. 바로 '김신조 사건'이야. 그해 10월, 11월에도 무장 공비 사건이 연이어 벌어졌어. 북한의 동향이 심상치 않아. 이런 상황에 1971년 세 번째 대선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가까스로 당선돼. 그러니 미국의 지지를 상징하고, 안보를 보장하는 주한미군의 존재가 절실하지. 그러다 1971년 3월 말, 미7사단 병력과 공군부대가 한국에서 철수하자, 한국 정부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어. 미군의 철수를 막기 위해 뭐라도 해야 해. 그 방법 중 하나가, 기지촌 정화운동이야.

꼬꼬무 찐리뷰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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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통령이 이 사람들(주한미군) 잡아두라고 그러더라고. 안 되면 깃발이라도 잡아두라고. 그래서 소위 탄생된 게 미군 기지 주변 정화 계획이라는 게 생긴 거예요. 엄청난 돈을 쏟아부었습니다."

-이재선, 당시 한미 제1군단 부사령관

▲ 쪽방촌의 이방인

문제는 이러는 동안, 그곳의 여성들은 계속해서 미군 범죄의 피해자가 됐어. 1969년 부평의 은자 씨, 70년 파주의 정례 씨, 77년 군산의 복순 씨와 영순 씨. 전국 기지촌에서 잊을 만하면 피살 사건이 일어났어. 그런데 기지촌 여성들의 죽음에 관한 뉴스, 국민들은 듣지 못했어. 금이 씨가 숨지기 전까지, 기지촌 여성들의 죽음은 제대로 알려진 적이 없거든. 행여나 미국과의 외교 갈등이 생기는 걸 원치 않는 사람들이 많았으니까. 그러다보니 모두의 외면 속에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를 치르는 건, 늘 기지촌 여성들 스스로의 몫이었다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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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동두천에서 여성의 죽음이라는 거는 간혹 가다 있었어요. 옛날에 여자들이 죽으면 꽃상여 메고 시내 막 돌아다니고 그랬었어요."

-김용수, 동두천 택시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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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이 아가씨 죽인 거, 그것도 시체 저도 봤거든요. 거기서 두 번 제가 눈으로 본 건. 암매장했는데 돌로 덮어서 해놨는데, 죽여서 우리가 아가씨들이 다 가서 찾았어요. 막대기 하나씩 갖고. 그 잡혀도 얘네들은 모르겠어요. 미국 가서 처벌되는지. 그냥 불명예 제대하고 만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러니까 우리가 보호받는 느낌은 전혀 없었고. 나중에는 '아 우리가 나라에서 버려졌었구나' 그걸 나중에 느낀 거지, 그 당시에는 잘 몰랐어요."

-최순옥(가명), 전 미군 위안부

한때 국가가 '애국자', '민간 외교관'으로 추켜세웠지만, 실상은 '양공주', '양색시'라 멸시받았던 이들은, 대한민국 역사가 지우고픈 그늘이었어. 대한민국을 찾은 이방인을 상대하며 청춘을 보냈지만, 대한민국 국민인 적은 없었던 그 진짜 이방인은, 기지촌 여성들이었어.

그런데 순옥 씨와 이야기를 나누던 '꼬꼬무' PD는 내내 마음에 걸리던 게 하나 있었어. 순옥 씨의 손목 상처들이었어. PD는 조심스럽게 그 상처에 대해 물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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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으려고 한 건 여러 번 했어요. 연탄도 몇 번 얹어놔보고… 그냥 비참했어요. 스스로가. 그 방 안에 갇혀서 일하는 게, 어릴 때 가만히 천장을 보며 생각해 보면. 그냥 속상하고… 그냥 속상한 거예요. 스스로가 나 자신을 어떻게 할 수 없으니까.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지? 어릴 때 가끔 그런 생각날 때? 그래서 여러 번 했었어요 죽으려고. 근데 안 되더라고요 뜻대로."

-최순옥(가명), 전 미군 위안부

차별과 혐오의 시선 속에서 죽지 못해 살아왔다는 순옥 씨의 사정. 그녀 혼자만의 사정은 아니야. 사실, 금이 씨가 숨졌을 때에도 "아니 양공주 한 명 죽은 게 뭔 대수라고 나라가 이렇게 난리야?" 이런 식으로 막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어. 어쩌면 마클이 내내 당당할 수 있었던 건, 이런 이유 때문일지도 몰라.

▲ 끝나지 않은 범죄

수감 12년 3개월이 흐른 2006년 8월 14일. 마클은 가석방 됐어. 다음날 바로 미국으로 떠난 마클. 그는 축구와 하키를 관람하며, 평화로운 나날을 보낸 듯 보여.

꼬꼬무 찐리뷰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그런데 이 사진들을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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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전부 마클의 머그샷이야. 2015년부터 2019년까지 찍힌 거야. 범죄자 인상착의 기록 사진이지. 혐의는 대부분 음주운전이야. 그가 체포된 게 이게 전부일까? 한국과 달리 미국의 형사기록은 대부분 공개가 원칙이야. 사법부 권력을 감시하고 국민의 알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서. 그래서 '꼬꼬무'는 미국법 전문가와 함께, 마클의 법원출입 기록을 확인해 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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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릴랜드주 기록으로 보기에는, (범죄 이력이) 한 14건, 15건 정도? 음주운전 사건이 상당히 많았다는 점이 좀 특이하고요. '양육비 지급 문제'가 있고. 눈에 띄는 거는, '가정폭력' 사건도 있었다고 볼 수 있고요. 웨스트버지니아주에서 범죄 이력을 보시면, 24개의 '가택침입죄'죠. 그다음에 74건의 '사기죄'… 어떤 자기 절제라든가 자기 컨트롤에는 조금 문제가 있던 사람이 아니었나. 그리고 거기에 가정폭력까지 연결되는 걸 보면, 한번 자기 컨트롤이 안 되면 폭력까지도 가는 그런 성향이 있구나, 라는 사람으로 판단이 됐습니다."

-안준성, 미국 메릴랜드주 변호사

여전히 그는, 절제도 반성도 없어 보여. 그럼 금이 씨 사건에 대한 입장은 어땠을까? 지난 2010년 마클은 한국 관련 이슈를 다루는 블로그에 직접 해명 댓글을 달았어.

"제 친구 한 명이 이 사이트에서 저에 대해 온갖 이야기들이 올라오고 있다는 걸 알려줬습니다. 기록을 위해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저는 누구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마클의 해명 댓글

마지막까지 자신의 혐의를 부인한 마클. 그는 2023년 2월 14일, 5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어. 그리고 자신이 살던 동네 공동묘지에 묻혔어.

▲ 이름 없는 죽음들

그럼 금이 씨의 마지막은 어땠을까? 사건 발생 이틀 후인 1992년 10월 30일. 금이 씨는 급히 화장된 뒤, 상패동 공동묘지에 뿌려진 것으로 알려져 있어. 사실 이곳은, 기지촌 여성들이 비석 하나 없이 묻혀 있는 곳으로 유명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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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지난 4월, 상패동 공동묘지를 찾은 '꼬꼬무' 제작진은 뜻밖의 광경과 마주쳤어. 한때 상패동 공동묘지가 있던 자리는, 근린공원 조성 공사가 한창이었어.

꼬꼬무 찐리뷰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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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가 공원을 만들어요. 그건 도시계획 시설상 공원이기 때문에. 그러다 보니까 묘지 이전을 저희가 했고, 다 지금 묘지는 이제 없어요 거기는. 다 이전이 된 상태예요."

-동두천 시청 관계자

확인된 연고자가 있는 228기의 유골은 유족들이 수습해 다른 곳으로 이전했다고 해. 연고자가 없는 유해는 입찰을 통해 선정된 경북의 한 장례업체가 이장을 담당했어. 그런데 무연고 묘는, 무려 780기였어. 이들 중 대부분은 기지촌 여성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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팻말 몇 개만 남은 자리. 숨진 뒤에도 연고지를 떠나야 했던 사람들. 사는 동안 고향을 떠나 떠돌이 생활을 했는데, 죽은 뒤에도 무연고자가 돼 낯선 땅을 떠돌고 있는 이방인들이야. 금이, 정례, 은자, 복순이었지만, 이름대로 불리지 못했던 그녀들의 죽음. 그렇게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어. 이들의 넋을 어떻게 위로해야 할까.

▲ 피고 대한민국

그리고 지난 2022년 9월 29일, 또 하나의 재판이 열렸어. 법원 앞에서 초조해하고 있는 사람은, 의정부 빼벌에 있던 순옥 씨야. 이날은 미군 위안부들이 8년 동안 이어온 손해배상청구소송의 대법원 판결이 있는 날이었어. 피고는 대한민국. 정부가 주한미군을 위해 성매매를 정당화하고 불법 행위를 조장했다는 거야. 사실 순옥 씨는 항소심 때 재판정에서 대표발언을 하기도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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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감히 나라에 이런 거 이렇게 한다는 게 말이 되나 싶고 떨렸어요. 떨렸는데, 그래도 해야 되겠다 싶어서. 그거 얘기하다가 나도 모르게 감정이 좀 실리더라고. 막 눈물이 나더라고요. 그래서 울었더니 나중에 알고 보니까, 방청석이 다 울었다고 그러더라고요."

-최순옥(가명), 전 미군 위안부

순옥 씨는 재판정에서 이런 말을 했어.

"존경하는 재판장님. 우리는 국가가 기지촌을 형성하고 내버려 둔 책임이 있다고 봅니다. 우리를 애국자라 칭송한 국가는 기지촌에서 수시로 일어나는 미군 폭력과 악랄한 포주에 대한 처벌을 하지 않았고 인신매매의 창구가 되는 직업소개소를 단속하지 않아 많은 여성들이 기지촌으로 팔려왔습니다. 우리가 잘못한 게 무엇이기에 내 나라에서 버림을 받아야 하나요? 안에서는 달러벌이 애국자로, 밖에서는 손가락질받는 그런 삶을 살아온 우리의 삶이 너무나 억울합니다."
-미군 위안부 피해자 대표발언 中

그럼, 대법원의 판단은 어땠을까? 대법원은 "대한민국에게 배상할 책임이 있다"는 결론을 내렸어. 미군 위안부는 미군에 의한 폭력을 묵인한 국가 폭력이 맞다는 거야. 어느새 소녀에서 할머니가 된 순옥 씨의 눈에선 눈물이 뚝뚝 떨어져. 옆사람도, 그 옆사람도 하나 둘 소리 내어 울기 시작해.

꼬꼬무 찐리뷰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걸 의심을 안 하고 살았잖아요. '나는 인간으로서 대접받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어'라고 얘기를 하세요. 내가 법적으로 보호받는다 이런 생각? 그리고 변호사를 산다? 상상을 못 하셔요. 이 분 중에 한 분이 일성이 '제가 이제 드디어 처음으로 대한민국 국민이 된 것 같습니다'라고 얘기를 하는데, 그게 그 부분이 제일 울컥했어요."

-안김정애, 기지촌여성인권연대 대표

2014년 소송을 제기할 당시 참여했던 미군 위안부 수는 122명. 하지만 그 사이 27명의 여성들이 세상을 떠났어. 끝내 그 싸움의 끝을 보지 못한 그들을 위해, 남은 이들은 고인의 무덤 앞에 판결문을 올려드렸다고 해.

'세계 여성의 날'을 앞둔 지난 3월 7일. 성평등가족부에서는 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사과했어. 정부가 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한 국가의 인권침해를 인정한 첫 사과였어.

평생을 이방인으로만 살다가 비로소 대한민국 국민이 된 것 같다는 순옥 씨. 마지막으로 딱 한 가지를 바랐어.

꼬꼬무 찐리뷰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그냥… 평범하게 좀 봐줬으면. 내가 그런 데를 가고 싶어서 간 건 아니잖아요. 이렇게 (기지촌 여성을) 바라보는 게 좀 안 좋을 거 아니에요. 그냥 똑같은 존재로 봐줬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

-최순옥(가명), 전 미군 위안부

꼬꼬무 찐리뷰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윤금이 씨 사건 영향으로 2001년에는 (범죄를 저지른 미군) 신병 인도 시점이 앞당겨졌다, 그 대신에 (개정된 SOFA) 하위규정에 가면 법원으로부터 무죄 판결을 만약에 미군인 피의자가 받았다면, 더 이상 우리 검찰이 상소를 못 하게 하는 규정이 또 들어갔고요. 미국 대표의 입회가 없는 하에 이루어진 심문은 유효한 증거로 삼지 않는다, 이런 것은 상당히 독소조항이다. 한국이 옛날하고는 많이 달라졌잖아요. 그러면 여기에 맞게끔, 그런 (SOFA) 규정들은 전부 삭제해야죠 이제는."

-이장희, 한국외대 명예교수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강선애 기자 sakang@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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