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7월 11일(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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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찐리뷰] 사형 집행했는데 범인이 아니다?…사형수 오휘웅 50년의 절규

강선애 기자 작성 2025.07.11 12:22 조회 1,8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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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찐리뷰

[SBS연예뉴스 | 강선애 기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10일 방송된 '특집 : 더 리얼' 3부작 중 마지막 '사형수 오휘웅 50년의 절규' 편입니다. 특별히 재심전문 변호사 박준영이 이야기꾼으로, 장성규가 이야기 친구로 나섰고, 배우 류수영과 그룹 에스파 멤버 윈터 또한 리스너로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쌀가게에서 일어난 비극

오늘의 이야기는, 법조인들 사이에선 전설처럼 내려오는 유명한 사건이지만 일반인들은 잘 모르는 이야기야. 때는 지금으로부터 약 50년 전인 1974년 12월 30일 늦은 밤. 인천의 신흥시장이야. 다른 가게들은 일찌감치 문을 닫았는데 딱 한 곳만 불이 켜져 있어. 바로 양장점. 주인아주머니가 밀린 일을 하고 있는데, 맞은편 쌀가게 주인 정숙(가명) 씨가 들어왔어.

"아주머니, 저희집이 좀 이상해요. 제가 아까 시댁 가면서 분명 문고리를 걸어놨거든요. 근데 와 보니까 풀려 있어요."

양장점 아주머니는 얼른 가보자며 정숙 씨를 앞세워 쌀가게로 갔어. 정숙 씨가 조심스레 문고리가 풀린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저기 안쪽 방문도 열려 있는 게 보여. 불 꺼진 방안에 들어선 정숙 씨는, 전등불을 켜자마자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어. 쌀 가게 방 안에서 정숙 씨의 남편과 어린 두 아이가 모두 숨져있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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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장점 아주머니는 바로 옆집 고무신 가게 엄 씨를 불렀어. 엄 씨는 부리나케 달려와서 정숙 씨의 숨진 남편과 아이들을 밖으로 옮겼어. 세 사람이 쓰러져있는 걸 보고 연탄가스 중독인 줄 안 거야. 그런데 남편을 옮기면서 보니, 목에 뭔가가 감겨 있어. 8살 아들과 6살 딸, 두 아이도 끈으로 목이 졸려 있었어.

당시 시신을 병원으로 옮긴 파출소 순경은 "아이들 목에 끈을 묶고, 아빠도 목을 맨 것 같습니다"라고 진술했어. 아빠가 두 자녀를 살해한 후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 같다는 추정이야. 대체 이 가족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사건이 벌어지고 이틀 후인, 1975년 1월 1일 신문엔 이런 기사가 실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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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가 3명 목 졸려 숨져"
"금품 안 없어져 가정불화 자살로 보아"
"일가족 3명이 넥타이와 노끈으로 목 졸려 숨진 변사 사건이 발생했다. 장 씨는 약 10일 전 동업자에게 20만 원을 빌려주고 이를 받지 못해 항상 고민해 오며 부인과 가정불화가 잦았다 한다. 주 여인을 못 나가게 하는 것을 뿌리치고 외출했다가 이날 밤 10시 40분께 돌아와 보니 장 씨는 넥타이로 목이 졸려 엎드려져 있었고 두 남매도 두께 5mm의 노끈으로 목이 졸린 채 방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한다. 장롱에는 현금 8 만 6천 원과 금 목걸이 등이 그대로 발견됐다."
-당시 신문 보도 中

당시 20만원은 현재 3,000만원 정도의 가치야. 남편 현수(가명) 씨는, 누구보다 성실한 가장으로 소문이 자자했다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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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가 같이 장사를 했다고 신랑하고 같이. 그 당시에 잘 됐죠. 왜냐하면 쌀가게 얼마 없으니까. 이 동네에서 그 집 하나로 생각해. 주문이 들어오면 이제 가서 그 아저씨가 리어카로 가서 실었다 주고. 사람이 착실했어요. 식구들하고 먹고 살라고 그냥 일만 악착같이 했지."
-정혜숙, 당시 동네 주민

쉽게 이해할 순 없지만 다른 의심 정황이 없으니 그렇게 사건은 종결되는 듯 했어. 그런데 누군가의 제보로 이 사건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돼.

▲ 수상한 여자

사건 이틀 뒤 경찰서로 한 여자가 찾아와. 제보를 한 사람은 바로 양장점 아주머니의 여동생, 이 씨야.

"그날 그 여자가 좀 이상했어요. 제가 분명히 봤거든요."

대체 누굴 보고 이상하다고 하는 걸까? 이 씨가 뭘 봤다는 건지, 사건 당일로 가볼게.

사건이 벌어지기 두 시간 전. 제보자 이 씨는 언니네 양장점에서 일손을 돕고 있었는데, 쌀가게 정숙 씨가 잔뜩 어두운 표정으로 들어오더래.

"아니 누가 텔레비전을 많이 사놓으면 돈을 벌 수 있다고 해서, 남편이 20만 원을 줬대요. 근데 텔레비전 갖고 온다는 사람이 오질 않아요. 아무래도 사기를 당한 것 같아."

이렇게 남편이 사기 당한 거 같다고 말하는 정숙 씨의 손에서, 이 씨는 수상한 흔적을 발견했어. 이 씨가 경찰서에서 진술한 내용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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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손 엄지 손가락과 집게 손가락 사이에 피가 묻어 있었습니다. 피묻은 물건을 잡았던 흔적으로 보였고 약간 지우다가 만 것 같았습니다. 여자가 말을 하다가 저와 눈이 마주쳤는데 당황한 표정이 되어 황급히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가 2, 3분 뒤에 다시 들어 오는데 얼굴이 창백했습니다. 손에 묻었던 피는 보이지 않았으나, 양손에 붉은색이 도는 것으로 봐, 방금 씻고 온 것 같았습니다."
-당시 제보자 이 씨 증언 中

정숙 씨의 행동, 의심스럽긴 하지? 그런데 이 말을 들은 경찰들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 사실 사망한 현수 씨 목엔 넥타이로 졸린 흔적과 함께, 칼에 베인 상처도 있었거든. 정숙 씨는 그렇게 저녁 8시 45분쯤 양장점에 들러 남편이 사기를 당한 것 같다는 말을 잔뜩 늘어놓다가, 갑자기 시댁에 음식을 하러 가야 한다며 부랴부랴 나갔다는 거야. 그런데 시어머니 눈에도 며느리 정숙 씨가 좀 이상하더래.

"며느리가 방에서 빨간 무를 칼로 썰다가 손이 떨리는 것을 보고, 수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게를 비워 두었다고 하니, '내가 가서 집을 봐주겠다'고 하면서 일어서니까 앞을 막으면서 못 가게 하고, 본인이 가겠다면서 총총걸음으로 돌아갔는데, 그 시간이 밤 10시 35분경으로, 저의 집에 와서 약 한 시간 있었습니다."
-시어머니 진술 中

이것도 좀 이상하지? 근데 이상한 점은 또 있어. 시장 구멍가게 사장님도 그날 정숙 씨가 평소와 다른 행동을 했다고 말했어. 사건 당일 저녁 6시쯤 정숙 씨가 와서 남편 심부름이라며 소주 한 병을 사 갔다는 거야. 사망한 현수 씨는 종종 술을 사갔지만 아내가 술을 사간 건 처음이라 좀 이상했다는 거지. 평소 정숙 씨는 남편이 술을 너무 자주 마신다며 불만을 토로했대. 그런데 그날은 자기 손으로 술을 사다 줬다? 좀 이상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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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해 보면 정숙 씨의 사건 당일 행적은 이래. 저녁 6시쯤 평소답지 않게 소주를 사서 집으로 갔고, 8시 45분쯤 손에 피를 묻힌 채 양장점에 와서 남편이 사기당한 하소연을 하고, 9시 30분쯤 시댁에 가서 떨리는 손으로 무를 썰다가, 가게에 간다는 시어머니 말에 황급히 집으로 온 거지. 그게 10시 40분쯤. 아마도 그때 양장점에 가서 문고리가 열려있다는 걸 알린 걸로 보여.

형사들은 장례가 끝나자마자 정숙 씨를 불렀어. 형사들의 추궁에 한동안 말이 없던 그녀는, 어느 순간 지그시 눈을 감더니, 혼잣말인 듯 아닌 듯 이런 넋두리를 했다는 거야.

"아휴... 내가 애들은 죽이지 말라고 했는데..."

이게 무슨 얘기로 들려? 남편을 탓하는 말일까? 그게 아니라면, 또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말일까?

▲ 수상한 남자

주정숙의 말 한마디에 형사들은 분주히 움직였어. 그러더니 한 남자를 경찰서로 데려와. 바로 이 사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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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이름은 오휘웅. 지역 수도사업소에 다니는 서른 살 총각이야. 6남매 중 맏아들로, 동네 사람들 사이에서 리더십 있고 듬직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어. 그가 경찰서로 불려 온 이유는 뭘까? 유부녀인 주정숙과 총각 오휘웅이 심상치 않은 사이라는 거야. 그럼 오휘웅은 주정숙과의 관계를 인정했을까? 의외로 술술 털어놨어. 둘은 약 8개월 전 종교모임에서 만나서 알고 지내다가 최근 한두 달 사이, 깊은 관계로 발전했대.

"주정숙이 하는 말이 남편은 항상 술을 많이 마시고 정이 안 붙는다고 하며 저보고 앞으로 같이 살자고 하기에, '당신이 딸린 식구가 있으니 깨끗하게 이혼하면 내가 살겠다'고 하니까, '그것은 염려 말라'고 하더군요."
-오휘웅 증언 中

그럼 사건 당일 오휘웅의 행적은 어땠을까? 놀랍게도 오휘웅은 그날 저녁, 무려 두 번이나 쌀가게에 갔다고 털어놨어. 그게 저녁 8시에서 8시 30분 사이. 그날 주정숙이 손에 피를 묻히고 양장점에 나타난 게 몇 시였는지 기억나? 8시 45분경이야. 그럼, 오휘웅이 공범인 걸까?

"1974년 12월 30일 오후 8시 30분경 주정숙 씨 집에서 주정숙을 만났는데, '오늘로 전부가 끝나는 날이다' 하기에 '왜 그러냐' 하였더니, '내가 모든 걸 청산할 테니 같이 살자'고 주정숙이가 말하더군요. 그래서 저는 여자가 도망가려는가 했더니, 주정숙은 식구들을 처치했으면 하는 뜻으로 눈짓을 하며, 노끈을 집어서 저에게 줌으로 저는 노끈을 집어서..."
-오휘웅 증언 中

이후 뒷부분은 자고 있던 정숙 씨의 딸, 아들, 그리고 남편 순서로 살해한 과정이 자세히 이어져. 오휘웅이 스스로 살인을 고백한 거야. 주정숙이 가족을 살해해달라는 뜻을 보여서 즉흥적으로 자기가 실행했다는 거지.

주정숙은 범행 이후 빠져나갈 방법에 대해 계획한 것도 다 자백했어. 오휘웅이 세 사람을 살해하고 쌀가게를 떠나자 맞은 편 양장점에 가서 일부러 알리바이를 만들었다는 거야. 주정숙은 '20만 원 사기 스토리'를 며칠 전부터 시장 이곳저곳에 퍼뜨리고 다녔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저와 오휘웅이 죽인 것이 아니고 빚을 진 사람이 죽인 걸로 만들려고 그렇게 소문을 퍼뜨린 것입니다"라고 했어. 남편과 아이들을 강도 살해당한 것으로 위장하려고 했다는 거야. 그래서 문고리를 일부러 열어두고 옷장의 옷들도 흐트러트려 놓았던 거지.

두 사람의 자백으로 그 전모가 밝혀진, 정말 피도 눈물도 없는 끔찍한 살인사건이야. 이 사건은 '인천 신흥시장 일가족 살인사건'으로 불리며 1975년 새해 벽두, 희망에 부푼 사람들을 커다란 충격에 빠트려.

사건 발생 일주일 후, 현장검증이 실시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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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현장검증 주변에는 약 3천여 명의 시민들이 이른 아침부터 몰려들어 주먹을 쥐고 분노에 가득찬 욕설이 빗발치는 듯했다..(중략)..한편 범인 오 씨는 범행 때 사용했던 노끈과 넥타이 등으로 모든 것을 단념한 듯 순순히 범행일체를 재연했다."

-당시 신문 보도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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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쪽에 파출소 있는데 거기서 여기까지, (주정숙이) 갓 쓰고 이렇게 오는데 사람이 너무 많았어요. 여기 양쪽 길에 그냥 꽉 찼었으니까. 막 욕도 하고 막 손가락질하고 그랬죠."
-정혜숙, 당시 동네 주민

결국 오휘웅과 주정숙, 두 사람은 살인 혐의로 검찰에 송치돼. 그런데 그 후로, 이 사건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돼. 50년 전 이 사건이 법조인들 사이에서 아직도 회자되는 이유는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놀라운 반전 때문이야.

▲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오휘웅과 주정숙은 교도소에 수감된 채 검찰 조사를 받았어. 검찰에 와서도 주정숙의 태도나 진술은 경찰 조사 때와 같아. 오휘웅과 공모해서 범행을 저질렀다는 거지. 그럼 오휘웅은 어땠을까?

"저는 세 사람을 살해한 사실이.. 없습니다."

오휘웅이 갑자기 범행을 완전히 부인한 거야. 분명 경찰 조사 과정에선 범행을 구체적으로 자백했을 뿐 아니라, 현장검증까지 했잖아. 그런데 검찰에 오자마자 자기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는 거지. 담당 검사가 "경찰에서 왜 그러한 사실이 있다고 했냐"고 다시 물었어. 그러자 오휘웅은 이렇게 답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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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에서는 엄문에 못 이겨서 허위로 자백을 한 것입니다."

검사는 주정숙에게 오휘웅이 범행을 부인하고 있다고 전했어. 그 이야기를 들은 주정숙의 반응, 아주 펄쩍 뛰는 거야. "아닙니다! 오휘웅은 틀림없이 제 남편과 자식들을 죽였습니다"라며. 고문 때문이 아니라 오휘웅이 자기 혼자만 살아보겠다며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거야. 심지어 자신도 오휘웅의 피해자라고 말해.

"노끈도, 칼도 제가 준비한 게 아니라 오 씨가 알아서 챙긴 거라고요. 사실대로 말하면 나도 오 씨에게 죽을 거 같아서 강도로 위장한 거예요."

여기서 누가 거짓말하고 있는지 확인하려면, 사건을 다시 처음부터 짚어봐야 해. 결백을 주장하는 오휘웅이 얘기한 사건 당일 저녁 동선은 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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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연말 회식 자리에 참석했던 오휘웅은, 자신이 활동 중인 종교회관에 가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눴고, 8시 10분경 나왔대. 그 자리에 주정숙이 오지 않아 궁금했던 그는,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주정숙네 쌀가게에 들렀다는 거야. 주정숙이 반가워하며 건넨 인삼주를 한 잔 들이킨 후, 오휘웅은 바로 나와서 근처 칠OO 사진관으로 갔어. 이날 밤 자기 집에서 열리는 종교 모임이 있는데 그 사람들에게 보여줄 단합대회 사진을 찾으러. 그때가 8시 20분경이야. 이 시간들은 목격자들을 통해 모두 팩트인 걸로 확인 됐어.

사진을 찾고 나오는데, 바로 앞에 군고구마 장수가 보여. 얼른 군고구마 50원어치를 사서 다시 쌀가게에 들러 주정숙에게 건네고는 집으로 갔다는 거야. 집에 도착해보니 이미 오휘웅 집에선 스무 명 넘는 사람들이 모임을 하고 있었고, 그들과 얘기도 나누고 찾아 온 사진도 같이 봤대. 여기까지가 오휘웅이 주장한 그날 저녁의 행적이야.

경찰 조사과정에서 주정숙과 오휘웅이 동일하게 진술한 범행 시점은, 군고구마를 사서 다시 쌀가게에 들렀을 때야. 이때 계획에 없던 살인을 즉흥적으로 모의해서 자고 있던 세 명을 목 졸라 살해하고 오휘웅은 자신의 집으로 갔다는 거야. 그럼, 오휘웅의 귀가 시간은 언제일까? 한번 시간 계산을 해보자.

처음에 8시 20분경 사진관에서 나왔다고 했어. 사진관에서 쌀가게까지 거리는 1분. 쌀가게에서 오휘웅의 집까지는 4~5분이 걸리는 거리야. 그럼, 사진관에서 나와 군고구마를 사서 쌀가게에 들렀다가, 주정숙의 도움으로 최대한 신속하게 세 사람을 죽이는 범행을 저지르고, 집까지 가는데 얼마나 걸렸을까? 아무리 빨라도 오휘웅은 집에 9시 전후로 도착했을 걸로 계산돼. 그런데 그날 오휘웅 집에 있던 종교모임 사람들이 진술한 그의 귀가 시간이 언제냐, 바로 8시 30분경이야.

논리적으로 볼 때 오휘웅의 범행 시간이 도저히 나오질 않는 거야. 뿐만 아니라 전문가는 이 점도 고려해야 한다고 해. 얘기를 들어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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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러 훈련을 받은 사람이면 모를까 그렇지 않고 처음 사람을 살해하는 그런 입장이 있다면 세 사람을, 처음에 주저도 할 것이고 또 어떤 행동에 있어서 지연도 있을 것이고. 그렇게 빠르게 이루어지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이동 시간까지 고려를 하게 된다면 상당히 무리가 있죠."
-오윤성, 순천향대 경찰행정학과 교수

게다가 시간도 시간인데, 그날 오휘웅을 만난 스무명이 넘는 사람들은 그가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고 말해. 집에 오자마자 사람들 질문에 대답도 잘하고 찾아온 사진도 나눠 보면서 웃기도 했다는 거야. 더군다나 옷이나 손에 핏자국도 없었다고 해. 여기까지 봤을 때 누가 거짓말을 하는 걸로 보여?

▲ 가려진 진실

검찰 수사가 시작되고 교도소로 오휘웅을 면회 온 사람이 있어. 바로 오휘웅의 아버지야. 경찰서에 있을 때도 매일 찾아갔지만 면회가 불가능해서 아들을 만날 수가 없었거든. 아버지를 본 오휘웅의 첫 마디는 이거였어.

"아버지, 저 안 죽였어요! 억울해요."

사실 오휘웅이 경찰 조사를 받던 날, 오휘웅의 어머니도 경찰서에 가서 참고인 조사를 받았어. 형사가 오휘웅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더래. 그런데.. 그 순간 복도 너머로 익숙한 소리가 들려. 아들 목소리야. 그리고 이어진 비명소리와 절규. 아들을 고문하는 소리야.

어머니가 참고인 조사를 마치고 나오는데 형사들이 모여있는 곳에서 "아니 근데, 얘는 진짜 억울한 거 같은데?" 이런 얘기가 들려. 오휘웅 어머니는 자기 아들 얘기라는 걸 직감했어. 그런데 그때, 한 형사가 그러더래.

"아, 귀에다 대면 귀걸이, 코에다 걸면 코걸이지."

그 말에 참지 못하고 어머니가 소리쳤대.

"댁도 자식 낳아 기를 것 아니요! 우리 애는 병아리 목도 못 잡는 애인데, 이게 뭔 고생이냐고요!"

그랬더니 그 형사가 입에 담지도 못할 욕설을 퍼붓더라는 거야. 그 일을 겪고 어머니는 몇 날 며칠 가슴을 치며 우셨대. 하지만 아들에게 더 안 좋은 일이 생길까봐, 어디에 하소연도 제대로 못했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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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시간이 지나 가족들이 이 모든 사실들을 다 털어놓은 사람이 있어. 이 사건의 진실에 다가가고자 했던 사람, 바로 이 사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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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조갑제 기자. 그의 이야기를 들어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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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부터 기자 생활을 했는데, 경찰서 출입기자를 한 6년 동안 할 때 그때 수사, 특히 경찰서에서 형사들이 범인을 어떻게 다루느냐 하는 것을 보면은, 그때 고문은 다반사였다고. 기자들이 있는 데서도 고문을 했어요. (오휘웅 담당) 형사 한 분은 '그런 사건에서 손을 안 대고 수사를 할 수 있습니까?' 하는 식으로 마치 하나의 관례인 것처럼 그렇게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저도 뭐 경찰서 출입을 오래 하면서 그런 상황을 여러 번 봤기 때문에, 손을 댔다든지 하는 게 뭘 의미하는지는 저도 알고. 그래서 가혹행위가 있었다는 확신을 갖게 됐습니다."
-조갑제 기자

형사들의 답변에서 고문 의혹을 포착한 조 기자는 수사 과정에서 또 다른 의혹도 발견했어. 사건 당일 오휘웅의 집에서 열린 종교모임에 참석한 송 씨. 송 씨는 경찰에서도 검찰에도 몇 번 불려 가 조사를 받았는데, 그때 기억이 지옥 같았다는 거야.

어떤 사람이 송 씨가 쓴 진술서를 읽더니 '이렇게 하면 안 되니까 시간을 고쳐라'고 이야기하는 걸 들었다는 거야. 무슨 시간을 고치라는 걸까? 맞아. 오휘웅이 집에 도착한 시간. 송 씨는 분명 오휘웅이 집에 도착한 시간이 저녁 8시 30분이라고 말했는데, 수사관이 시간을 다시 말하라고 겁을 주며 서류에 마구잡이로 지장을 찍으라고 했대.

목격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오휘웅이 8시 30분경에 집에 도착했으니, 8시 20분에 사진관을 나와 집까지 가는데 이동 시간은 10분이 전부야. 그 10분 동안 범행이 일어났다는 건 말이 안돼. 그런데 검찰 기록에 오휘웅의 귀가 시간은 밤 9시 10분으로 기록됐어. 그럼 오휘웅에게는 10분이 아니라, 50분이라는 시간이 생겨. 세 사람을 살해할 수 있을 만한 시간이지.

이 사건에는 주정숙과 오휘웅의 자백 말고는 오휘웅이 범인이라는 실제적인 증거가 하나도 없는 거야. 오휘웅이 노끈으로 목을 조르고 장롱에서 넥타이, 머플러를 꺼내고, 칼로 목을 긋기까지 했다는데, 현장에서 나온 지문들은 다 주정숙의 것이야. 심지어 오휘웅의 지문은 단 한 점도 나오지 않았어.

그럼 상식적으로 '주정숙이 범인이다'라는 결론이 나오잖아? 그런데 여자 혼자 남편과 두 아이를 직접, 목 졸라서 살해한다는 걸, 당시에는 누구도 믿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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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여자 단독으로 어떻게 했겠느냐. 특히 남편은 몰라도 키우던 애 둘을 어떻게 했겠느냐. '내가 죽인 게 아니고 오휘웅이 죽였다'고 이야기를 했을 때는 그거 믿었겠지. 또 여자 힘으로 어떻게 남편을 죽일 수 있었겠느냐, 이런 의문을 가졌다고 보는데. 그 의문이 풀리는 게 수면제를 먹였다는 거거든. 수사가 한참 진행되고 나서 수면제 이야기가 나오더라고요. 수면제 먹였다는 사실이 처음부터 밝혀졌으면, 나는 오휘웅이 말려들지 않았을 거라고 봅니다."
-조갑제 기자

주정숙이 약국에서 다량의 수면제를 사갔다는 진술이 수사 과정에서 나온 거야. 형사들은 뒤늦게 주정숙에게 수면제를 복용시킨 사실이 있는지 물었어. 처음엔 부인하던 주정숙이 결국 인정해.

"수면제 열 알을 사이다에 타서 아이들에게 먹였고. 남편에게도 수면제 탄 사이다와 소주 1병을 다 먹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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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 신경안정제 A. 이 약에 대해 알아봤어.

"강력한 수면제이며 지금은 마약류로 구분 되어있는 향정신성 의약품으로 1알당 보통 30분 안으로 잠들 수 있다."
"알코올이나 사이다 같은 자극성 있는, 흡수를 촉진 시키는 성분과 함께 복용 했을 때, 심하면 의식불명이나 호흡곤란이 올 수도 있다."
"6세, 8세 아이에게는 1알만 먹여도 성인에게 3, 4알 정도 먹는 수준으로 위험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이런 약을 사이다에 열 알을 타서 먹였으니, 어쩌면 아이들은 그 자체로 목숨이 위태로웠을지도 몰라. 그런데 이 신경안정제가 확인된 시점이 언제냐면, 바로 경찰에서 진술 조사와 현장검증까지 마치고 검찰에 송치하기 직전이야. 이미 오휘웅과 주정숙이 잔인하게 일가족을 살해했다는 대대적으로 보도가 된 이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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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거기 수사했던 사람이 수사 며칠 해보고 '아, 이거 아니다. 오휘웅은 아니다'라고 판단했다고 봅니다. 그럼 그때는 구속 취소를 해야 되거든. 그렇게 하면은 어떻게 될까. '당신 참 양심 있는 사람이다' 할까? 아니면 '이 바보야' 할까? 그럼 선택할 수 있는 게 조작을 해 가지고 밀고 나가는 방법이 하나 있는 거예요. 잘못했다고 판단해도, 그걸 돌릴 수가 없어."
-조갑제 기자

▲ 또 다시 판이 뒤집히다

지금까지 상황 정리해볼게. 경찰에서 검찰로 사건이 넘어오고 나서, 오휘웅은 형사들의 고문 수사를 폭로하며 범행을 부인하고 있고, 주정숙은 '그가 사전에 모든 걸 계획하고 지시했다'고 말하고 있어. 그런데, 검찰 수사 도중 또 한 번 상황이 뒤집혀.

꼬꼬무 찐리뷰

"모든 것은 경찰에서 진술서를 쓴 그 사실과 틀림이 없습니다. 한 인간이 이 세상에 왔다가 사회에 한 사람으로서 너무도 입에 담을 수 없는 일을 저질렀기에 검사님께 사실을 부인하였으나, 보이지도 않고 형태도 없는 양심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기에, 부인한 것을 뉘우칩니다. 그간에 잘못을 너그럽게 보아 주십시오."

이 자술서를 쓴 주인공은, 오휘웅이야. 그가 다시 범행을 인정한거야. 당연히 무슨 일이 있었겠지? 형사들이 조사실로 몰려와 자신을 어디론가 끌고 갔고, 모진 고문을 한 후에 진술 내용을 불러 주길래, 어쩔 수 없이 자술서를 썼다는 거야. 경찰 조사에 이은 검찰에서의 자백. 여전히 실질적인 살인의 증거는 없었지만, 범행을 인정하는 오휘웅의 이 자필 자술서는 결정적이었어.

1975년 3월 12일, 인천지방법원 제101호. '인천 신흥시장 일가족 살인사건'에 대한 첫 재판이 열려. 주정숙은 검사 신문에서 오휘웅의 지시에 따라 남편과 아이들에게 약을 먹였고, 그가 세 명을 살해했다고 진술해. 이어서 오휘웅에 대한 검사 신문이 이어져. 여기서 오휘웅은 이렇게 말해.

"공소장 기재 내용은 사실과 다릅니다. 범행을 공모한 사실이 없습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다시 또 오휘웅이 범행을 부인한 거야. 하지만 당시 법정에서 고문에 대한 질의응답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법정에서 이걸 확인했어야 하는데, 당시 그걸 못 했다는 게 굉장히 아쉽지.

판사는 다음 재판에서 증거조사를 하겠다고 말해. 오휘웅은 주정숙이 손에 피를 묻힌 채 찾아갔던 양장점 주인과, 그날 오휘웅의 귀가 시간을 확인해 줄 사람들을 증인으로 신청했어. 그런데 무죄를 주장하며 다음 재판을 준비하던 오휘웅에게, 상상도 하지 못한 충격적인 소식이 들려와. 다음 재판을 앞둔 주정숙이 교도소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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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정숙 입장에서는 내 자식들 그리고 내 남편 다 포기를 한다 하더라도, 나는 이 남자만 있으면 되겠다라고 하는 그런 생각을 했을 가능성이 굉장히 높아요. 결국은 자기가 뭔가를 계획을 하지 않았다 라고 부인을 할 수 없는 상황이거든요. 왜, 자기가 수면제를 타고 거기에 넣었다 라고 하는 건 그건 팩트니까. 자기는 빠져나갈 수가 없는 거고, 한 사람(오휘웅)은 나는 안 했다라고 빠져나가는데. 가만히 보니까 자기가 생각을 했던 모든 것이 다 어그러진 거죠. (결국) 자기는 안 했다라고 하면서 자살을 해요. 그러니까 오휘웅이한테 던져버린 거지."
-오윤성, 순천향대 경찰행정학과 교수

주정숙의 죽음으로 법정에서 오휘웅은 불리해졌어. 그녀의 수상한 행동이나 신경안정제 구입, 진술의 모순점은 더 이상 법정에서 언급되지 않아. 즉, 일가족 살인사건 재판의 모든 초점이 오휘웅에게로만 집중됐던 거야.

▲ 장갑의 행방

그렇게 드디어 재판 마지막 날이야. 1심 선고가 코 앞에 다가온 시점에서, 갑자기 재판장이 이런 질문을 해.

판사: 그날 피고인이 입었던 옷은 무엇이었나요.
오휘웅: 검은 하의에 잠바 차림이었습니다.
판사: 장갑은 가지고 있지 않았나요.
오휘웅: 작업할 때 쓰는 면장갑을 하의 뒷주머니에 넣고 다녔습니다.
판사: 피해자 집에 갈 때 장갑을 갖고 있었나요.
오휘웅: 종교회관에 갔을 때 그곳 책상 서랍에 넣어두었는지, 그냥 바지에 넣고 갔는지 기억이 잘 안납니다.

이제껏 수사나 신문 과정에서 한 번도 나온 적 없던 단어 '장갑'. 판사는 왜 갑자기 재판 막바지에 와서 장갑 얘길 꺼냈을까? 맞아. 지문 때문이야. 범행을 인정하는 오휘웅이 범인이라면 당연히 현장에서 지문이 나왔어야지. 그런데, 사건 현장엔 주정숙의 지문만 확인됐고 오휘웅의 지문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어. 물론 장갑을 꼈다면 그럴 수도 있지. 그런데 수사기록 어디에도 장갑에 대한 내용은 없어. 판사가 보기에도 이상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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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뭐냐면, 어렵게 찾은 자료야. 이번에 '꼬꼬무'에서 '특집: 더 리얼'을 준비하면서 지금으로부터 50년 전, 1975년 오휘웅의 현장검증, 바로 그때 그 장소에 있던 분을 어렵게 찾았어. 지금은 은퇴하신 박근원 사진기자가, 당시에 신문에도 실리지 않았던 현장검증 사진 원본을 무려 50년 만에 공개하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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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서 뭐가 눈에 띄어? 아까 판사가 법정에서 오휘웅에게 장갑에 대해 질문했지? 그런데 현장을 재연하는 오휘웅의 손에 장갑이라곤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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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검증이라고 하는 것은 최대한 그 당시 상황을 정확하게 재현하는 겁니다. 재판단계나 이쪽에서 '그때는 장갑을 껴서 그렇다'라고 주장을 할 것 같으면, 현장검증에 꼈었어야죠. 근데 이 사람(오휘웅)의 지문이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수사 자체가 뒤죽박죽이에요. 현장검증에서 장갑을 안 꼈다는 건 팩트니까."

-오윤성, 순천향대 경찰행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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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하는 쪽에서 장갑을 확인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물론 장갑을 확보도 못 했고. 근데 오휘웅 아버지의 진술로는 '그 장갑은 오휘웅 집에 있었다. 있었는데, 경찰이 와서 압수도 안 해갔다' 이렇게 되면은, 이 수사가 얼마나 엉터리 수사였다는 걸 보여주는 겁니다."
-조갑제 기자

이런 뒤죽박죽 조사는 오휘웅의 초기 경찰 취조 과정에서도 엿볼 수 있어.

형사 : 마대끈은 누가 준비했지?
오휘웅 : 누가 해놓았는지 거기에 있대요. 그걸로 시작했습니다. 노끈이 약해서 넥타이를 꺼내 가지고 시작했던 것입니다.
형사 : 넥타이가 아니지?
오휘웅 : 넥타이예요.
형사 : 머플러 같은 것 있었지?
오휘웅 : 머플러가 아닙니다.
형사 : 얼룩덜룩한 머플러지?
오휘웅 : 그 머플러도 있었습니다.
형사 : 머플러로 해서 쌀가마니 옆에 두었지? 넥타이로 한 게 아니잖아? 이거 머플러 사용했지?
오휘웅 : 예.

그냥 원하는 대답이 나올 때까지 몰아간 거야. 근데 이건 극히 일부에 불과해. 이 사건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무수한 모순점이 발견돼. 무엇보다, 오휘웅이 범인이라는 결정적인 물적 증거는 법정에서도 등장하지 않았어.

만약 오휘웅이 50년 전이 아닌 2025년 현재 재판을 받는다면, 지금까지 드러난 증거들로 그에게는 '무죄' 판결이 내려졌을 거야. 왜? '무죄추정의 원칙'이라고 하는데, 충분한 증거가 없는 상황에선 아무리 그 사람이 범인같아도 무죄로 추정해야 한다는 거야.

▲ 사형수 오휘웅의 절규

1975년 6월 30일. 마침내 1심 판결이 내려져.

"주문, 피고인 오휘웅을 사형에 처한다."

결국 사건 현장에서 지문 한 쪽, 혈흔 한 점, 장갑 한 짝 나오지 않았는데 오휘웅에겐 사형이 선고됐어. 그는 억울하다며 항소했어. 하지만 2심, 또 대법원 상고도 기각 됐어. 사건이 벌어지고 1년 2개월 만에 오휘웅에겐 사형이 최종 확정돼.

그런데 절망 속에서도 사형수 오휘웅은 포기하지 않아. 법이 바로 서 있다면 언젠가 자신의 억울함을 알아줄거라 믿으며 3년 넘게 계속해서 재심을 청구한 거야. 기각되면 또 청구하고 기각되면 또 청구해. 무려 여섯 번이나.

당시 오휘웅의 실제 목소리가 녹음된 게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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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식칼을 가지고 죽였다면 거기에서 내 지문이 나와야되는 거예요. 그러면 내 지문이 그 방에서, 예를 들어 티셔츠 머플러나 넥타이 식칼 이라든지 이런 것들에서 내 지문이 나왔냐 하면 안 나왔다 이거예요. 내 1심 판결에서 그 지문이라는 게 나오지 않았어요. 그래서 나를 갖다가 미끄러뜨렸고, 이런 내가 잘못된다 하더라도 나와 같은 희생은 일어나서는 안 된다 이런 얘기예요."
-오휘웅

그때 오휘웅을 만난 사람들은 그가 일반적인 사형수들과 달랐다고 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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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40년 지났나, 40년도 넘죠. 그런데도 뚜렷이 기억하고 있죠. 그 사람의 모습도 기억이 나고 그 사람이 했던 이야기도 기억이 나고. 자기를 경찰관이 고문을 해서 자기가 그렇게 자백을 하게 만들었고. 그 목사님한테도 붙들고 너무나 억울하니까 나 좀 살려달라고 매달리고. 되도록 자기가 억울한 거를 여러 사람에게 알리고 싶어 했어요."
-김혜원, 당시 서울구치소 교화위원

심지어 주정숙의 변호사조차 오휘웅에 대해 이렇게 말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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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휘웅이) 한참을 막 울더라고. 울면서 그 눈물을 그냥...정말, 정말 억울한 난 그런 눈물을 처음 봤어. 그냥 눈물이 막 그냥... 그 정말 주먹 같은 눈물을 흘리는데 '변호사님, 저는 정말 안 죽였습니다. 저는 정말로 억울합니다' 아, 그러는데 나도 그냥 눈시울이 뜨거워 가지고 그런 기억이 나."
-최낙구, 당시 주정숙 변호사

억울함을 호소하는 오휘웅에게, 뭔가 새로운 국면이 찾아왔을까?

1979년 9월 13일. 마침내 그날이 오고야 말았어. 누군가 오휘웅을 불러. 연출조야. 연출조는 사형수를 데리고 사형장까지 동행하는 교도관을 말해. 교도관, 검사, 종교계 관계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오휘웅은 사형장 마룻바닥 돗자리 위에 올랐어. "유언이 있으면 하라"는 이야기에, 침이 마른 듯 머뭇머뭇하던 오휘웅은 어렵게 입을 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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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절대로 죽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하느님도 알고 계십니다. 저의 유언을 가족에게 꼭 전하여 제가 죽은 뒤에라도 이 원한을 풀어주도록 해주십시오. 검사, 판사도 정신 바짝 차려서 저와 같이 억울하게 죽는 이가 없도록 해주십시오. 이런 엉터리 재판 집어치우십시오!"
-오휘웅의 유언

현장에서 이 유언을 들은 사람들은 쿵! 하고 가슴에 커다란 바윗덩어리가 내려앉는 것 같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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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그 남편과 그 자녀 둘은 죽이지 않았습니다. 이런 이것만큼은 믿어 주시기 바랍니다' 하고 내가 집례를 해줬어요. 마지막 유언의 고백이기 때문에 안 죽인 걸로 내가 받아들이고 있어요."

-김준영 목사, 당시 한국기독교 교화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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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이제 집행장에서 (사형)당했다는 얘기를 듣고는, '우리가 그때 그 사람의 편이 돼줬었어야 되지 않나' 하는 그런 후회가 있더라고요."
-김혜원, 당시 서울구치소 교화위원

오휘웅은 그렇게 서른 네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어.

조갑제 기자는 오휘웅의 사형집행 이후, 당시 수사를 진행한 형사들과 검사, 1심과 2심, 그리고 대법원 판사들도 만났지만 누구 하나 오휘웅의 죽음에 책임을 느끼는 것 같진 않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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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심 판사와) 상당히 오랫동안 이야기를 했는데, 뭔가 찜찜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더라고. 자신의 판결이 정당했다는 걸 주장을 하면서도, 고민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런데 그 정도의 고민이 있었다면 사형선고를 하면 안 되지 그렇지 않습니까? 이거는 '물증 없는 사형 선고', '확신 없는 사형 선고'였다고 해도 되는 거 아닌가요? 그 시대적 배경, 1970년대라는 아직은 인권, 그리고 고문에 대한 문제의식이 일반화되지 않았을 때의 그 분위기를 상징하는 거라고 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시대의 희생자야 이 사람이."

-조갑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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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오휘웅이 사형이라고) 선고는 했는데, 참 뭐… 마음이 불안하고 또 괴롭고 그래서, 2심 재판장을 찾아가서 혹시 또 억울한 점이 있나 잘 좀 살펴달라고 부탁도 하고 그랬습니다."
-당시 1심 판사

심지어 어떤 형사는 이렇게 말했대.

"아, 그 사람 사형당했어요? 난 풀려날 줄 알았는데..."

▲ 끝나지 않은 이야기

오휘웅이 억울한 죽음을 맞았다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걸까? 조갑제 기자는 이 질문을 책으로 엮어 던졌고, 이는 법조계 사람들에게 따끔한 자극이 됐어. 그런데 그 책에 자극을 받았던 사람들 중에 누가 있었냐? 우리나라에서 재심 변호사, 라고 하면 떠오르는 한 사람. 바로 박준영 변호사. 그도 자극을 받은 사람들 중 하나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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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제 기자님이 쓰신 글을 봤고요. 그 책을 구입해서 봤습니다. 억울함을 주장하는 그 목소리의 힘이 각별한 사건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판결 확정 이후에 집행되기까지 시간이 꽤 길었잖아요. 그 시간 동안 재심을 청구하고 또 주변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라는 거죠. 그 억울함을 주장한 기간 그리고 방식 그리고 함께한 사람들, 이걸 의미 있게 보거든요. 마지막 유언으로 남긴 한을 누군가는 풀어줘야 하는 게 아닌가, 누군가가. 또 그 역할이 주어진다면 시작을 해봐야 하는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박준영 변호사

그땐 박준영 변호사도 30대 중반, 엄청 혈기왕성할 때라, 바로 법원과 국가기록원에 문의해서 자료를 찾아봤는데, 쉽지 않았대. 원칙적으로 사형이 확정된 사건의 기록 보존 기한이 30년이거든. 오휘웅이 79년에 사형을 당했으니, 보관된 자료들은 이미 모두 폐기된 것으로 파악된 거야.

박준영 변호사에게 마지막 희망은 오휘웅의 가족이었어. 가족이 기록을 보관하고 있을 수 있으니까. 그래서 5년 전 한 온라인 채널에 출연해 오휘웅의 가족들을 찾고 싶다고 얘기를 한 적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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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수 오휘웅 씨의 가족이 있다면 연락이 왔으면 좋겠어요. 오휘웅 씨의 동생들이 있었습니다. 동생들이 지금 한 50~60대 되셨을 거예요."
-5년전 박준영 변호사

하지만 연락은 오지 않았어.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오휘웅 사건을 가슴에서 이제 내려놓아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꼬꼬무'를 만난 거야. '꼬꼬무'라면 오휘웅의 가족을 찾아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안고 이번 이야기를 함께 준비한 거야. 그래서 어떻게 됐을까? 과연 50년 전, 오휘웅의 가족을 찾을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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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동안 신흥시장 일대를 샅샅이 뒤진 '꼬꼬무' 제작진. 몇 날 며칠을 수소문하며 찾아 헤맨 끝에, '꼬꼬무' 제작진이 이 곳을 찾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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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알겠어? 바로 50년 전 사건 당일에, 오휘웅이 사진을 찾으러 갔던 곳이 칠OO 사진관이거든. 그런데 그 동네에 그 이름 그대로 남아 있는 거야. 우연히 발견한 제작진은 얼마나 놀랍고 반가웠겠어. 만약 그때 그 사장님이 그대로 있다면 오휘웅 가족에 대한 소식도 알고 있지 않을까 싶었지. 하지만 해당 사진관 주인은 이미 오래전 바뀐 상태였어. 결국 사진관에서도 오휘웅 가족의 소식은 듣지 못했어.

'꼬꼬무' 제작진은 매일 그 동네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어. 그렇게 단서를 찾고 찾고 또 찾았어. 그러다 마침내, 오휘웅의 가족을 찾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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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휘웅의 동생, 오태석입니다. 기억은 생생해요. 어떻게 그 일을 갖다 잊어버리겠어요. 자상한 형님이셨죠. 내가 말을 못하니까 형님이 대신 '연탄 가지고 왔다'고 설명해주니까. 하지 말라고 다른 일 하라고 가시라고 해도 부득부득 와서 도와주겠다는데 어떻게 해요. 그땐 좋았었죠… 그날도 전 몰랐는데 법무부 버스가 오는데 관을 하나 내리더라고요. 알고 보니까 형이었던 거예요. 그래서 안 거죠. 아버지가 형님을 보고서 그냥 통곡을 하시는 거예요. 가족이 다 무너진 거죠."

-오태석, 오휘웅의 둘째 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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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하죠. 엄청 억울하죠. 저보다는 그 안에 있는 사람이 얼마나 더 고통스러웠겠습니까?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리 해봐야 형 그 고통을 못 따라가죠."
-오휘웅의 셋째 동생

언어장애를 가진 동생의 연탄 배달을 돕던 착한 형. 사형수 오휘웅의 한은 고스란히 남겨진 가족들의 한이 됐어. 어머니는 경찰 조사 때 들었던 아들의 고통스런 소리를 내내 잊지 못해 힘들어하시다 병을 얻어 3년 만에 돌아가시고, 아버지도 '죽고 싶을 만큼 고문을 당했다'는 아들의 하소연을 들으면서도 도움이 되지 못한 자신을 탓하다 아들 곁으로 가셨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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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도 못 잡는데 어떻게 사람을 죽인대요 그래. 이런 법이 어디 있고 어떻게 대체 재판을 했길래 이렇게 억울한 사람을 죽일 수 있나요."

-오태석, 오휘웅의 둘째 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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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서 원이 돼서 가족한테 풀어달라고, 그런 말씀하셨고. 억울한 원을 지금이라도 기회가 된다면 항상 풀어드리고 싶죠. 가족들 입장에서는. 형님의 한이 풀어졌으면 그거라도 하늘에 계시더라도 그러면 좋겠어요."
-오휘웅의 셋째 동생

이런 말이 있어. '쇠도 달궜을 때 때려야 한다'. 한번 굳어버리면 나중엔 아무리 세게 때려도 소용이 없는 거야. 형사사건에 있어서 재심은, 잘못 굳어버린 쇠를 펴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야. 몇 배의 시간과 힘이 필요하고 다시 쇠를 달굴 온기와 믿음도 필요해. 그럼에도 결국 실패하는 경우도 많아.

하지만 그렇게 굳어진 쇠를 잘 펴는 사람 있어. 바로 박준영 변호사야. 잘못된 수사와 재판으로 억울한 일을 겪는 사람들이, 결국 제대로 된 판결을 받도록 해주는 사람. 수많은 사건들을 재심을 통해 억울함을 풀었지. 그가 또 한번 그 어려운 길에 걸음을 내딛어. 재심변호사 박준영이 오휘웅 가족을 만났어.

꼬꼬무 찐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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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석: 저는 어떻게 해서든지 이걸 형님이 억울한 사정을 갖다 풀고서는 명예를 되찾았으면 좋겠다 싶어가지고 이렇게 했었는데. 기록해 놓은 게 아무것도 없으니… 제발 좀 억울함을 풀어 주십시오, 정말 생사람을... 생사람을 갖다가 이렇게 죽여서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세상에. 이렇게 억울할 때가 있어요. 아휴, 진짜... 진짜 형님 생각하면 정말 목이 메입니다. 아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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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영: 오휘웅 선생님 개인의 불행이기도 하지만 가족의 불행이잖아요 사실. 이제 오늘 만남 이후에 이제 이곳저곳 다니면서 자료수집을 할 거거든요. 시간이 그냥 순식간에 일이 진행되지는 않습니다. 많이 필요합니다.

박준영 변호사는 이제 사형수 오휘웅의 변호인이야. 사실 이번 오휘웅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준비하면서, 박준영 변호사와 '꼬꼬무' 제작진은 이게 제대로 방송될 수 있을까 생각했대. 가족이든 자료든 그 무엇하나 아무것도 찾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함이 있었거든. 하지만 50년의 시간이란 장벽을 뛰어넘는, 뜻밖의 순간들이 있었어. 조갑제 기자가 자신의 자료 창고를 한 달 넘게 뒤진 수고로움 끝에 오래된 수사 기록을 건네주셨고, 인천 경기 지역 신문사 관계자 분들, 박근원 사진기자도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귀한 자료들을 보내 주신 거야.

하지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사형수 오휘웅의 이야기를 온전히 매듭지으려면, 아직도 많은 분들의 관심과 도움이 필요해. 사형수 오휘웅에 대한 기억이 있다거나, 이제라도 진실을 고백하고 싶은 수사기관 관계자들. 그리고 관련 자료를 갖고 계신 분들은 꼭 '꼬꼬무'에 연락을 주셨으면 좋겠어.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강선애 기자 sakang@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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