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5월 9일(금)

방송 프로그램 리뷰

[스브스夜] '꼬꼬무' 천안초 축구부 화재…세 번의 기회 놓쳐 하늘로 간 아홉 개의 별

김효정 에디터 작성 2025.03.28 06:17 수정 2025.04.01 18:40 조회 3,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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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SBS연예뉴스 | 김효정 에디터] 꿈의 공간이었던 합숙소는 왜 악몽의 공간이 되었나

27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에서는 '악몽의 합숙소 - 천안초 축구부 화재'라는 부제로 안타까운 그날을 조명했다.

2002 월드컵 이후 축구 신드롬이 일어나고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꿈을 안고 천안초로 모인 아이들.

25명의 천안초 축구부 아이들은 30평 남짓한 합숙소에서 함께 지냈다. 꿈과 너무 다른 현실에 엄마와 아빠가 보고 싶기도 했지만 함께 먹고 자고 운동하며 끈끈해진 아이들은 어느새 집보다 축구부 합숙소가 더 제집처럼 느껴졌다.

그러던 2003년 3월 26일 밤 11시. 어려운 형편에도 축구를 하는 것을 허락해 준 부모님을 위해 누구보다 더 열심히 훈련하던 장호는 잠에서 깨어 주방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폭발음과 함께 뜨거운 열기가 장호를 덮쳤고 순식간에 장호의 얼굴과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필사적으로 현관 앞까지 간 장호. 하지만 그대로 의식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불은 삽시간에 숙소 전체로 번졌다.

천 명 이와 친구들은 겨우 현관문을 열고 탈출했지만 그렇게 나온 아이들은 고작 다섯 명. 슬레이트 지붕으로 된 단층 벽돌집에 컨테이너 형태였던 합숙소는 스티로폼에 합판을 대어 만든 단열재 때문에 더욱 빨리 불이 번졌고 유독가스까지 단시간에 분출되었다.

몇 분 사이 탈출이 더 어려워지자 아이들은 창문을 깨고 밖으로 나가고자 했다. 하지만 방범용 창살로 막혀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고 결국 환풍기를 뜯어 낸 구멍으로 탈출을 시도했다.

목격자의 신고에 구조대가 신고 접수 4분 만에 도착하고 화재는 단 10분 만에 진압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모두 안전하지 못했다. 무려 8명의 아이들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던 것.

특히 후배와 친구들을 먼저 탈출시키느라 탈출하지 못한 고학년 아이들의 이야기가 가슴을 아프게 했다.

그리고 생존자들 중 장호와 민건이, 그리고 천명이는 생사를 오가고 특히 현장에서 쓰러졌던 장호는 전신 40% 화상을 입고 중환자실에 입원했다.

함께 축구 선수의 꿈을 꾸던 민수 민우 형제. 형 민우는 사고 당일 동생이 보고 싶어서 민수의 합숙소를 찾았다. 그날따라 무거운 발걸음에 민우는 발길을 돌려 다시 동생을 불렀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돈 3천 원을 동생에게 용돈으로 주었다. 그렇게 민우는 민수의 합숙소에서 9시쯤 떠났다. 그런데 불과 2시간 후 벌어진 충격적인 사고에 동생 민수가 세상을 떠나게 된 것.

무사히 퇴원을 하게 된 천 명 이와 달리 중환자실에서 집중 치료를 시작한 장호. 장호는 목소리도 내지 못하며 엄마의 목소리에 근육으로 답을 할 뿐이었다. 그리고 이후 겨우 의식을 찾은 장호가 가장 먼저 한 이야기는 친구들의 안부를 묻는 것.

친구들의 소식을 들은 장호는 눈을 뜰 때마다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장호 곁에 있던 민건이가 사고 열흘 만에 세상을 떠나고 그렇게 사망자는 9명으로 늘어났다.

병원에 홀로 남은 장호. 장호의 어머니는 "3개월 동안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는 이야기만 들었다"라며 "장호 얼굴이 새카맣게 타버렸으니까 곰에 비유하면서 곰돌이같이 너무 예뻐, 엄마가 곰을 제일 좋아하거든 그랬다. 그러면서 단 한 번도 울지 않았다. 그런데 정말 겪어보지 않으면 내 심정이 어땠을지 모른다. 아이를 살릴 수 있다면 내가 대신 죽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라고 눈물을 흘렸다.

십여 차례 대수술을 한 장호는 그 후로도 5년간 미국을 오가며 몇 차례 수술을 했고 그렇게 꿈에 그리던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카메라 앞에 선 장호는 "지금은 2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지금 현재는 괜찮다고 표현하고 싶은데 그때 당시에는 너무 힘들었다. 지옥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치료실에 비명 소리도 그렇고 제가 느끼는 고통도 견딜 수 없는 아픔이라서. 엄마 원망 안 할 테니까 나 좀 죽여달라고, 하늘에서 지켜줄 테니까 나 좀 죽여달라고 했다. 그날 엄마가 처음 우셨다. 견딜 수 있으니까 조금만 참자고 그렇게 나를 다독이셨다"라며 눈물을 보였다.

장호의 지옥 같았던 시간을 버티게 해 준 것은 축구에 대한 꿈이었다. 빨리 나아서 축구를 하겠다는 생각으로 버틴 장호. 그는 "축구를 못한다고 생각했다면 견딜 수 있었을까"라며 당시를 떠올렸다.

25명의 사상자가 나온 2003년 천안초 축구부 화재 사건. 하지만 사고 한 달 전 일어난 사망자 192명, 부상자 151명의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에 상대적으로 관심을 받지 못했다.

학교에서 벌어진 역대 최대 사고인 이 사고의 원인은 전기 누전. 하지만 유가족들은 이 사건이 인재라고 입을 모았다. 아이들을 지켜낼 수 있었던 세 번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 기회를 살리지 못했다는 것.

합숙소가 만들어진 10년 동안 단 한 번도 진행되지 않은 소방 훈련 및 점검. 당시 약 120평 미만의 학교 시설은 소방 점검 대상이 아니라 방치되었던 것이다. 특히 관할 교육청에서는 학생 관리를 위한 점검을 했다고 허위로 서류를 조작하기도 했다.

또한 사고 전 발생했던 23명의 목숨을 앗아간 씨랜드 화재 참사. 이후 많은 것들이 바뀌었지만 천안초는 참사의 교훈을 놓치고 아이들을 살릴 수 있던 기회를 잃었다. 특히 합숙소에서 3개월 전 불이 날 뻔했던 사건이 있었지만 이후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에 유가족들은 왜 미리 조치를 취하지 않았냐며 아쉬움과 분노를 터뜨릴 수밖에 없었던 것.

그리고 사고 당일 현장에 어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아이들을 보호하고 관리해야 하는 감독과 코치가 사고 당일 합숙소 밖에 있어 아이들을 지켜줄 어른이 없었던 것이다.

유가족과 생존자들은 평생을 고통 속에 살아가야 하는데 감독과 코치는 업무상 과실치사로 금고 1년 2개월, 집행유예 3년형을 받았고 학교장과 허위로 서류를 조작한 교육청 담당자들은 벌금형을 받을 뿐이었다.

건강을 회복한 장호는 가장 먼저 운동장으로 달려갔지만 이전과 달리 축구를 할 수 없는 몸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절망했다. 오른쪽 발가락 세 개를 잃으면서 퇴원 당시 장애 판정을 받은 장호. 그는 화상과 수많은 수술을 거치며 축구 선수의 꿈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사고 후 전국 초등학교 합숙소는 폐쇄되었고 천안초에는 축구부 자체가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이후 아이들의 꿈을 지켜주고 싶었던 유가족들이 축구부 재창단을 제안했고 축구부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천안초 축구부 유니폼에 새겨진 앰블럼에는 하늘에 별이 된 아홉 명의 아이들을 기리는 별 9개가 그려져 있었다.

이후 천안초 축구부는 매일 같이 경기에 패하며 무려 40연패를 했다. 사고로 인해 축구를 잘하는 아이들은 천안초에 오는 것을 꺼려했던 것.

하지만 가까스로 첫 승을 하고 이후 경기에서 한 번 두 번 승리를 챙겨갔다. 그리고 2009년 충남 소년체전에서 우승을 하고 현재까지 충남 최강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힘들 때마다 학교를 찾아간다는 장호. 그는 축구부 아이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친구들과 함께 뛰었던 기억, 먼저 떠난 친구들을 떠올린다며 꼭 다시 만나서 축구를 할 수 있는 그날을 염원했다.

매년 3월 26일이 되면 천안초에서는 아이들을 기리는 추모식이 열린다. 그리고 지난 3월 26일은 22주기.

합숙소에서 누군가가 노래를 시작하면 아이들이 떼창을 했던 Never Ending Story. 아이들의 이야길 담아낸듯한 "그리워하면 언젠가 만나게 되는 어느 영화와 같은 일들이 이루어져 가기를" 가사처럼 지금도 변함없이 빛나고 있는 아이들의 꿈이 이루어지길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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