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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픽처] 계급의 벽 위에 비친 달빛…이창동이 묻는 '사랑'의 가능성

작성 2026.09.25 11:04 수정 2026.09.25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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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SBS 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영화 '가능한 사랑'의 제목은 모호하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지극히 자연발생적인 것인데 형용사를 더하면서 감정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표현이 되고 말았다. 어쩌면 이 영화는 제목에서부터 가능하다고 여기는 믿음과 가능하길 바라는 소망 사이에 있는, 현실적으론 가능하지 않은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암시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작품이 그리는 사랑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가능한 사랑'의 주체는 누구인가, 두 부부 모두에게 해당할 수 있느냐라는 의문이 생긴다. 사랑이라는 개념이 각각의 인물에게 조응하지 못하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적어도 그 속성은 다를 것이다. 언뜻 보면 상우와 예지 부부의 관점에서의 사랑은 조건부 시혜적인 성격, 호석과 미옥 부부의 관점에서의 사랑은 부러움을 수반한 선망의 성격이 짙은 것처럼 보인다.

이창동 감독은 노동자와 자본가를 선과 악, 이분법으로 그리지 않는다. 친절한 부자와 화내는 빈자로 묘사하지도 않는다. 그러면서도 네 인물의 사회적 역학 관계와 계급적 먹이사슬 같은 구도도 넌지시 드러낸다. 또한 모든 캐릭터에 다면성을 부여하며 부조리한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딜레마를 마주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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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말하는데 무엇이 이리도 복잡하단 말인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여러 복잡한 모습들을 감추고 있는데 그것들을 관객들과 같이 이야기해 보고 싶었다"라는 이창동 감독의 말에서 이 영화가 다루는 복합적인 층위의 시작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가능한 사랑'에는 자라온 환경, 형성된 성격, 처한 상황도 다른 두 부부가 등장한다. 호석(설경구)과 미옥(전도연)은 해고 노동자 부부다. 호석은 2년 전까지 대기업에서 일하는 정규직 용접공이었으나 회사가 외국계 사모펀드에 팔리며 정리해고됐다. 집단 파업 중 폭력 사태로 입은 신체 부상과 정신적 충격으로 아직도 일상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아내 미옥은 이런 남편을 품으며 밝고 긍정적인 태도로 가족에게 닥친 불행을 극복하고자 한다. 이들에겐 성장이 다소 더디나 착하고 순한 아들 철이도 있다.

예지(조여정)와 상우(조인성)는 다큐멘터리 감독, 사업가 부부다. 예지는 노동자의 삶을 다루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준비한다. 부유한 남편의 도움을 받지 않기 위해 정부 지원금을 따낸다. 상우는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꿈을 실현해 나가려는 예지를 뿌듯해하며 조용히 돕는다. 이들은 블루(Blue)라는 이름의 골든 리트리버를 키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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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한 사랑'은 이창동 감독이 오랫동안 천착했던 대기업 집단 해고를 소재로 한 작품이다. 영화가 완성되기까지의 우여곡절과 긴 시간은 결과적으로 이야기를 넓고 깊게 확장한 셈이 됐다. 이 영화는 대한민국의 노동 문제뿐만 아니라 계급 격차 그리고 창작자의 윤리까지 다룬다.

이 세 가지 소재를 하나로 엮은 스토리 텔링은 캐릭터 구축과 관계 설정을 통해 가능해졌다. 영상 매체가 아닌 활자 매체로 창작을 시작했던 이창동 감독에겐 늘 '문학적'이란 평가가 따라다녔다. 인물의 삶을 폴라로이드로 포착하듯 단편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인물의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캐릭터의 서사를 쌓아 올린다.

이창동 감독과 처음으로 호흡을 맞춘 김지용 촬영감독의 카메라는 인물들을 반복적으로 왼쪽 끝과 오른쪽 끝에 둔 수평 구도로 잡는다. 그러나 둘 다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나란히 선 배치가 아니라 서로를 향해 멀찍이 떨어져 때론 맞서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네 사람이 유일하게 나란히 선 장면에서는 모두 다른 곳을 응시한다. 심리적 거리감과 시선의 긴장감을 의도적으로 유발한다.

'가능한 사랑'은 상징과 은유, 반복과 대조, 역설과 모순 등 문학의 다양한 수사가 영상 언어로 풍성하게 구현돼 있다. 영화를 보고 나왔는데 한 편의 소설책을 읽은 것 같은 깊고 짙은 여운을 남기는 이유다. 긴 러닝타임은 괜한 것이 아니다. 2시간 44분은 네 인물의 삶의 역사를 플래시백으로 들여다보거나 대사로 제시하며 상상하게 한다. 그들의 절망과 욕망, 사랑을 이해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시간이다. 특히 두 부부의 처지의 대비, 행위의 반복을 통해 관계 맺고 있으나 융화될 수 없는 차이과 격차를 명확하게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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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 자'와 '죽은 자' 그리고 '죽은 유령'

영화는 집을 나와 장례식장으로 향하는 호석, 미옥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호석은 은유적 표현으로서 '죽은 자'가 아닌 진짜로 생을 마감한 동료의 장례식장에서 눈물조차 흘리지 못한 채 처참한 현실을 마주한다.

집단 해고 사태를 겪고 난 SP 중공업의 노동자들에게는 '죽은 자'와 '산 자'라는 경계가 쳐졌다. 그들은 해고당한 이들을 '죽은 자', 살아남은 자를 '산 자'로 부른다.

과거엔 노동이 착취와 대우의 문제였다면 현재는 노동의 가치가 희석되고, 경영 효율에 의해 노동자의 필요 자체가 부정당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호석과 그의 동료들은 이길 수 없는 무모한 싸움을 했다. 남은 건 상처와 원망뿐이다.

회사가 나눈 '산 자'와 '죽은 자'의 포지션은 동료들의 단합에 균열을 일으켰다. 그들은 옥쇄 파업까지 하며 회사와 맞설 것을 다짐했지만 폭력 사태 중 누군가는 끝까지 싸웠고, 누군가는 투쟁을 포기했다. 호석은 끝까지 싸웠으나, 등을 돌린 동료들은 그들 나름의 부채감으로 호석을 피한다.

호석은 자신을 '죽은 유령'으로 명명한다. '산 자' 곁을 떠돌며 그들은 원망하는 모습에 자신은 병들었다고 절규한다. 이창동 감독은 호석을 통해 육체는 살아있으나 정신은 죽은 상태인 해고 노동자의 공허와 절망을 담아내고, 그런 호석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아내 미옥과 아들 철이를 비추며 자유에 대한 열망과 관조의 힘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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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인의 고통을 카메라에 담는 자...그 친절은 순수한가

SP중공업 사태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준비하던 예지는 장례식장에서 미옥과 호석을 만난다. 미옥은 친절하고 따뜻하게 다가오는 예지가 싫지 않고, 호석은 자신들의 일상에 불쑥불쑥 카메라를 들이대는 예지가 불쾌하기만 하다.

이창동 감독은 예지를 통해 창작자의 윤리라는 화두를 던진다. 이야기를 만들고 가공하는 것은 창작자의 숙명이다. 갈등과 고통은 예나 지금이나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소재이며 재료다. 창작자는 전에 없던 이야기를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자신의 고통을 소재 삼거나 타인의 고통을 재료 삼는 선택을 하곤 한다. 자전적인 이야기는 자신을 갉아먹지만, 타인의 고통을 소재로 삼는 건 착취의 경계에 놓인다. 예지는 이창동 감독의 자기 반영적인 캐릭터다. 창작자가 타인의 삶을 재료로 이야기를 만들 때 어떤 태도와 자세로, 어디까지 침투해야 하는가를 예지를 통해 묻는다.

속내를 좀처럼 알 수 없는 상우는 폐부를 찌르는 날카로움으로 예지가 보이는 선의와 본질을 꿰뚫는다. 해고 노동자 가족의 곁에 머물며 그들의 상처를 헤아려보고자 하는 예지의 행동을 상우는 '메소드 연기'라고 규정한다. "그 사람들하고 너는 다른데, 너는 같다고 생각하잖아"라는 상우에 지적에 예지는 "나는 그들을 사랑하려는 것"라고 말한다. 그에 앞서 예지는 호석을 두고 '한국에 없는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이 말을 할 때 예지의 눈빛은 매력적인 피사체, 소위 그림이 되는 인물을 발견한 것 마냥 반짝였다.

예지의 친절과 남편 상우의 상냥함은 가진 자의 여유, 약자에 대한 따뜻한 손길로 볼 수도 있지만 목적과 목표가 뚜렷한 친절이다. 그 친절과 호의는 약자의 고통과 상처가 경계 없이 발현될 때 카메라를 들이대는 무례함으로 민낯을 드러낸다.

부자 남편의 도움이 싫어 정부 지원금을 따내려 하면서도 500만 원짜리 가방과 고급 블라우스를 입고 노동자들의 아픔을 이해하는 척 고개를 끄덕이는 건 위선일까 아닐까. 선한 의도와 목표가 뚜렷한 접근은 공존할 수 있는 것인가. 이 또한 영화가 던지는 날카로운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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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탐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

영화는 시작과 동시에 검은 스크린 위에 '탐하지 말라'라는 십계명의 마지막 문구를 띄운다. 탐욕은 실제적인 행위를 지칭할 수도 있지만, 성경은 마음에 일렁이는 욕망도 죄로 삼았다.

'가능한 사랑'의 네 인물이 무엇을 탐했는지 묻는다면 명확히 말하기 어렵다. 타인의 고통을 탐한 예지와 상우의 경제적 자유를 탐한 미옥은 그나마 분명하지만, 삶의 의지를 잃은 호석과 원하는 것을 다 가진 상우의 욕망은 미묘하다.

영화는 후반부 네 인물을 별장이라는 한 공간에 모이게 해 각자의 욕망을 드러내게 한다. 분명 한국의 어딘가지만 서양 건축 양식이 이상하게 섞인 이 고급 별장은 네 인물이 어우러짐에서 어그러짐으로, 느슨함에서 팽팽함으로, 균열에서 파국으로 치닫게 되는 장이 된다. 지난밤 '사랑밖에 난 몰라'로 시작해 '페스티벌'을 나눠 부르며 하나 됐던 네 사람은 동틀 무렵 꿈에서 깨 냉혹한 현실과 마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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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는 계급이라는 것이 실재하지 않고 시스템적으로도 작동하지 않는다. '가능한 사랑'은 각기 다른 처지의 사람들이 엮였을 때 피부로 느껴지는 벽과 자연스레 그어지는 선을 끊임없이 보여준다. 상우와 예지가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말들은 불편한 현실을 상기시키고 때론 불쾌감까지 선사한다.

두 부부는 같은 시간과 공간을 나누며 어울리지만 섞일 수 없고, 같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없다. 제목 '가능한'에 담긴 순진한 낙관이 서늘한 물음표로 다가오는 순간이 영화엔 여러 번 있고, 이것은 쌓이고 쌓여 의도치 않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창동 감독은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사랑할 수 없는 사람도 사랑해야만 할 때, 그 사랑을 어떻게 해나가야 하느냐'고 묻는다. 성경은 믿음, 소망, 사랑 중 최고는 사랑이라고 명확히 답을 내렸지만 영화는, 감독은 사랑으로 향하는 경로를 제시할 수 없다. 지금의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고, 인간도 그리 선량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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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배우의 완벽한 앙상블은 '가능한 사랑'이 보여주는 인생의 절망, 사람의 욕망, 세상의 모든 사랑을 다양한 층위로 해석하게 하는 중추다. 자신이 정한 틀에 배우를 끼워 맞추려 하지 않고, 배우 스스로가 캐릭터의 원형을 만들어가길 원하는 이창동 감독의 디렉팅은 네 배우로 하여금 창의의 폭을 넓혔고 각각의 필모그래피 정점에 선 역량을 펼치게 했다.

전도연의 연기는 2시간 44분이었으나 미옥의 삶 44년이 읽힌다. 인생의 무게를 특유의 밝음으로 이겨내려는 순박함과 부(富)를 향한 순수한 동경, 자유를 향한 본능적 갈망, 친절의 본질을 알게 됐을 때 드러나는 적의 등의 감정을 미세한 얼굴 근육, 목소리의 떨림까지 사용해 표현하며 네 캐릭터 중 가장 관객에게 밀착된 정서를 전달한다.

설경구는 버림받은 노동자의 절망과 분노, 죽은 유령의 공허를 침묵과 절규로 표현해 내며 역시나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다. '박하사탕'의 '영호'로부터 시작된 배우 설경구의 여정이 '가능한 사랑'의 '호석'으로 이어지는 느낌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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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여정은 감독의 자기 성찰, 자기반성적 캐릭터를 맡았다는 부담을 이겨내고 창작자의 호기심과 욕망을 집요하고 징그럽게 표현해 냈다. 전형성에 창의성을 더하는 조여정 특유의 연기 리듬이 특히 돋보이는데 몇몇 장면에서는 전도연의 깊이를 능가하는 노련함을 보여준다.

조인성은 상대적으로 능동적 해석이 어렵고, 표현의 폭도 제약적인 캐릭터를 맡았지만 감독이 원하는 바에 끝내 도달하는 연기를 해냈다. 특히 후반부 동물적 본능, 찰나의 욕망을 표현한 연기는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형성하며 관객을 감정적으로 불타오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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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역 정섶의 특별한 연기도 인상적이다. 그가 연기한 철이는 이창동 감독이 '데칼로그' 연작 리메리크(지금의 '가능한 사랑'과는 사실상 큰 연관이 없다)를 준비할 때 구상한 캐릭터다. 해당 프로젝트의 필수요건과 같은 설정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철이'가 가지는 상징성과 존재감은 '가능한 사랑'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 밀양'에서 송강호가 연기한 종찬과 같은 존재다. 전지적 시점의 관찰자이자 이 모든 사건과 인물을 선입견이나 가치판단 없이 객관적으로 응시하는 인물이다.

달 역시 중요한 상징이다. 예지와 미옥의 관계는 수평인 줄 알았으나 수직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 그들에게 공평한 건 올려다보는 달, 내리비추는 달빛뿐이다. 상우의 프라이빗 해변이 나만의 자유를 상징한다면 달은 세상 모두를 비추는, 평등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가능한 사랑'은 이창동 감독의 첫 번째 넷플릭스 영화다. 그러나 시청자가 시작과 중단을 결정할 수 있는 TV나 모바일이 아닌 감독이 제안하는 시간의 흐름을 온전히 안내하는 극장에서 봐야 그 깊이와 여운을 온전히 누릴 수 있다.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온기의 달빛을 느끼며 영화가 남기는 질문과 여운을 곱씹어 볼 시간은 2주 남짓이다.

ebada@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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