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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픽처] '호프', 완벽주의자가 만든 여백의 SF…나홍진이 새로 쓴 장르 문법

작성 2026.07.13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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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영화 '호프'는 감독 나홍진의 필모그래피 중 가장 이질적인 영화다. 필모그래피 중 유일한 괴수물이라는 점을 차치하더라도 '미끼'와 '떡밥'을 던지며 지적 호기심을 자극했던 전작을 생각하면 이 영화는 사건의 인과 관계를 공백으로 둔 채 폭주하는 액션으로 그 여백을 채운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여전히 나홍진다운 요소들을 확인할 수 있다. 영화의 외피인 장르가 다를 뿐 작법과 연출, 주제 의식을 구현하는 캐릭터들 역시 나홍진답다. '곡성'이 외지인의 등장으로 잔잔한 호수에 파동을 일으켰다면, '호프'는 외계인의 출현으로 인해 대낮의 파국이 펼쳐진다.

나홍진 감독은 우리 사회의 폭력, 살인, 비극의 근원을 탐구하는데 오랫동안 관심을 가져왔다. '곡성'에서 초자연적, 종교적인 부분으로 질문과 답을 던졌다면, '호프'에서는 그 질문과 답을 우주로 확장한 SF적 상상력에서 찾아냈다. 장르의 확장과 혼합을 통해 연출가로서의 도전은 물론이고, 글로벌 시장을 목표로 하는 폭넓은 보폭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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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프'는 사냥꾼 성기(조인성)를 태운 범석(황정민)의 경찰차가 마을에 들어서면서 시작된다. 두 사람은 호랑이의 습격으로 마을 어귀에 쓰러져 있는 소의 사체와 마주한다. 범석은 골치 아픈 일이 터진 것을 직감한다. 동시에 누군가의 습격으로 쑥대밭이 된 마을과 직면하게 된다. 맹수의 괴음이 사방 곳곳에서 들리고 보이지 않는 공포와 위협을 피해 달리고 또 달린다.

이야기는 단순하다. 시골 마을에 정체불명의 생명체가 나타나고, 이를 피해 살아남으려는 사람들의 사투를 그린다. 외계인이 등장하기에 SF로 분류할 수 있겠지만 따지고 들자면 크리처가 등장하는 추격 액션물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의 수많은 감독이 SF라는 장르에 매력을 느끼고 도전해왔다. 창작자라면 누구나 매력을 느끼는 장르지만 누구도 마스터하지 못한 미지의 영역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대부분의 감독은 서구의 장르처럼 여겨지는 SF를 우리 영화에 주입할 때 생기는 문제를 극복하지 못했다. 장르의 컨벤션을 구현하는데 집중했지만 한국이라는 지리적, 정서적 풍경을 간과해 어설픈 결과물을 내놓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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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홍진 감독은 지극히 한국적인 SF를 만들어냈다. 1980년대 바다와 산을 낀 항구 호포항이 액션을 구동시키는 주무대다. 북한과 인접한 비무장지대의 고립된 마을이라는 설정은 재앙처럼 다가온 외계인의 습격에 공포감을 더할 뿐만 아니라 폐쇄성까지 부각하며 극의 긴장감을 높인다.

다만 시대적 배경과 이야기를 연동해 어떤 사회적 메시지를 드러낼 것으로 예상했지만 이는 흐릿하다. 이야기를 수월하게 전개할 토대와 발판으로 시대적 공기와 제약을 활용한 것에 가깝다. 또한 장르의 쾌감과 오락성을 강화하기 위해 총기 및 여러 무기의 고증은 의도적으로 포기했다.

영화의 포문을 여는 홍경표 촬영감독의 부감샷은 마치 전지전능한 시선으로 산과 바, 마을을 바라보는 것과 같은 느낌을 주며, 이후경 미술감독의 손끝에서 탄생한 호포항은 정체불명의 누군가에게 초토화돼 폐허가 된 채로 관객에게 모습을 드러낸다. 곳곳에 쌓인 시체 더미 역시 디스토피아적 분위기를 조성한다.

나홍진 감독은 구조적으로 두 번의 거대한 클라이맥스를 오프닝과 후반에 배치했다. '곡성'이 사건의 인과를 편집으로 뒤섞었다면, '호프'는 재난에 가까운 사건을 먼저 등장시키고 내막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긴장감을 쌓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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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프'는 크리처물임에도 영화 시작 후 무려 50분간 외계인의 모습을 확인할 수 없다. 이때 범석으로 분한 황정민은 나홍진의 가장 믿음직한 페르소나로서 제 역할을 120% 해낸다. 허공에 헛발질하는 상황 속에서 황정민은 존재하나 보이지 않은 위협을 오로지 반응으로만 보여준다. 그가 만들어내는 리얼리티는 예나 지금이나 관객이 진짜라고 믿게 하는 힘이 있다. 황정민이라는 배우가 가진 특유의 에너지와 연기력의 힘이다.

이후 외계인의 등장과 함께 영화는 폭주하듯 내달린다. 호포항의 좁은 골목을 내달리는 경찰차와 가공할 만한 속도로 뒤쫓는 외계인의 질주는 여느 한국 영화에서도 본 적 없는 속도감과 박력이다.

크리처물은 CG의 완성도를 논외로 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크리처의 완성도가 곧 이야기의 재미로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한국 SF 실패는 우리의 자본력으로 닿을 수 없는 기술 수준에 도전하다 이야기와 캐릭터의 힘을 놓친 탓이 컸다.

'호프'가 재미있다면 그건 크리처의 개성이나 CG의 완성도 때문은 아니며, 이 영화를 재미없게 여긴다 해도 CG의 아쉬움 때문은 아닐 것이다. 장르의 쾌감을 극대화한 액션 연출과 캐릭터의 존재감이 재미의 중추다. 홍경표의 카메라는 마을의 전경을 위에서 아래로 잡는 부감샷만큼이나 배우들의 얼굴을 클로즈업 하는데도 많은 공을 들였다. 황정민, 조인성, 정호연의 얼굴을 스크린 가득 잡으며 인간의 공포와 불안, 좌절과 허무를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호프'를 '전원일기 SF'로 명명하고 싶은 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뿜어내는 이상한 리듬과 온도 때문이다. 영화를 이끄는 핵심 캐릭터는 범석, 성기, 성애지만 호포항 주민들로 등장하는 캐릭터와 그들이 만들어낸 순박한 언어는 독특한 개성과 호흡으로 인해 연신 웃음을 자아낸다. 임현식, 이상희, 황석정, 이용녀가 연기한 캐릭터들은 호포항이 영화의 무대가 아닌 실제 하는 공간처럼 보이도록 숨결을 불어넣는다. 특히 '해솔 아저씨'로 분한 임현식은 구전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다 마침내 등장해 짧지만 인상적인 활약을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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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번의 거대한 클라이맥스는 동시간대 숲 속에서 펼쳐진다. 조인성이 연기한 성기는 극의 또 다른 축을 형성하며 영화 후반부의 카타르시스를 책임진다.

나홍진과 조인성의 조합은 극사실주의 연출가와 판타지 스타의 만남이라는 점에서 부조화처럼 여겨졌다. 결과적으로 서로의 장점은 극대화하고, 단점은 상쇄하는 시너지를 냈다. 어느 장르, 어떤 이야기에서도 영화적인 룩을 보여준 조인성은 날 것의 매력을 끌어내는 나홍진의 극한의 디렉팅을 받으며 배우로서 한 단계 성장했다.

특히 외계인의 무차별적 공격에 직면해 인간의 공포, 고통, 분노를 보여준 숲 속 시퀀스는 조인성의 필모그래피에서도 가장 빛나는 순간으로 기록될 만하다. 이후 도로로 이어지는 긴 추격 시퀀스는 나홍진이 조인성을 선택한 이유를 보여준다. 액션으로 비극과 재난을 체험하는 영화를 보여주고자 했던 나홍진의 연출 비전은 조인성이 보여주는 영화적인 룩, 히어로물 같은 비현실적 액션과 만나 독특한 아드레날린을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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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애'로 분한 정호연은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 스타성과 연기 역량의 아쉬움을 동시에 노출한다. '오징어 게임' 시리즈로 국내외 주목은 받은 이 신데렐라는 '호프'를 통해 영화 매체의 시험대에 올랐다. 이 과정에서 연기 기본기, 특히 발성에 아쉬움을 드러낸다. '호프'는 시각효과와 더불어 사운드를 극대화한 영화라 대사가 뭉개지는 아쉬움도 적잖이 포착된다. 대부분 정호연의 신에 몰려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격렬한 카체이싱과 총격신을 여전사처럼 소화하며 영화의 다채로운 그림을 조성하는데 기여했다.

나홍진 감독의 영화에서 사건은 인과관계로 명확히 설명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현상이다. 물론 '호프'에는 비교적 명확한 원인과 결과가 있다. 어느 순간 인간에서 외계인으로 시선을 옮겨가면 외계인이 과연 악인가, 혹은 유해한 침략자인가에 대한 질문과 직면한다.

나홍진 감독은 절대자의 목소리를 빌려 이야기를 푸는 방식을 선호한다. '누가복음' 24장을 모티브로 했던 '곡성' 만큼의 지분은 아니지만 '호프'에도 영화 말미 히브리서 11장 1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는 구절을 대사로 인용하며 외계인의 전사(前史)를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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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절대자의 언어를 모티브 삼아 처음부터 플롯을 설계하고, 구조를 짰던 전작과 달리 '호프'는 외계인의 서사를 급작스럽게 제시하고 설명한다. 차라리 거대한 공백으로 뒀다면 사건을 일으킨 미스터리로만 기능하는 장르의 완결성을 띠었을 것이다. 속편을 위한 포석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호프'는 그다음 이야기가 궁금한 영화는 아닐뿐더러 더 나은 이야기를 만들기 힘든 한계를 가지고 있다.

나홍진의 영화에서 인간은 닥쳐온 비극 앞에 나약함과 어리석음을 드러내는 불완전한 존재였다. 끝 간 데 없는 절망과 비애로 영화를 문을 닫았던 전작들과 달리 '호프'(HOPE)는 제목 그대로 희망적이다. 특유의 염세주의적인 분위기는 관통하지만 이 영화 속 인간은 불굴의 의지와 함께 영웅적 면모도 드러낸다. 나홍진 감독이 SF와 액션, 미스터리를 혼합하는 도전을 하면서 오락적 재미도 놓치지 않기 위해 선택한 첫 대중 노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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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홍진은 이창동, 박찬욱, 봉준호 등 이름 석자가 브랜드가 된 거장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감독이 됐다. 동시에 세 작가주의 감독과 차별되는 색깔을 가진 감독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나홍진의 영화는 관객을 능동적 관람자로 만든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관객은 감독이 제시한 본편 이상의 상상력을 발휘하고 무수한 해석을 내놓는다.

'호프'는 장르적 쾌감과 액션의 체감에 집중한 오락 영화라는 점에서 그의 앞선 영화와는 큰 차이가 있다. 상상의 여지가 넓은 영화는 아니며 해석의 폭도 제한적이다.

이미 많은 것을 보여준 감독은 자신이 구축해 놓은 개성과 색깔 안에서 전진하느냐 퇴보하느냐로 평가받곤 한다. 그런 점에서 '호프'는 관객이 기대한 것과 나홍진이 보여준 것 사이에서 플러스, 마이너스로 평가가 나눠질 영화다.

한국 영화 사상 최대 제작비가 투입된 '호프'는 상업적 결과를 두고 업계의 비상한 관심을 받고 있다. 그러나 관객이 염두에 두는 것은 700억 원이라는 예산이 영화의 완성도와 재미를 살리는데 온전히 쓰였는지 여부일 것이다. '호프'는 156분이라는 긴 물리적 시간을 스펙터클과 카타르시스, 아드레날린을 만들어내는데 오롯이 집중했다.

ebada@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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