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스트리밍 서비스로 영화를 보다 보면 정지 버튼을 누를 수 있잖아요. 보다 말고 다른 짓을 할 수도 있고요. 하지만 극장이라는 곳에는 감독이 만든 2시간이라는 리듬이, 하나의 시간 덩어리가 존재해요.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영화를 틀겠다고 약속돼 있고, 관객은 그걸 존중하죠."
봉준호 감독은 극장에 대해 감독과 관객의 약속이 이뤄지는 공간이라고 설명했다. 극장은 영화가 감독의 의도로 구현되는 기술집약적 공간이다. 이건 TV로 대변되는 홈시어터가 절대 넘볼 수 없는 영역이다. 뿐만 아니라 개개인의 기억과 감정이 서린 정서의 공간이기도 하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전 국민의 취미였던 영화 관람이 비싼 취미로 인식되면서 사람들은 극장이 아닌 집에서, TV와 핸드폰으로 영화를 즐긴다. 전통적 개념의 극장의 의미가 무색해진 시대라고는 하지만 물리적 공간이 주는 매력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찾아가는 극장의 특별함과 스크린에서 봐야 하는 영화의 가치는 여전히 살아남아 있다.
서울에는 예술 영화를 볼 수 있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단관 극장이 여럿 있다. 그러나 도심을 벗어나면 그러한 공간의 발견과 혜택은 귀한 경험이 된다.
출판도시이자 문화예술가들의 마을인 경기도 파주 회동길에 '시민들의 자부심'으로 불린 공간이다. 바로 명필름아트센터(대표 심재명, 이은)이다. 영화 '접속', '공동경비구역 JSA', '와이키키 브라더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카트' 등을 만들며 한국 영화 르네상스를 이끈 영화사 명필름이 2015년 개관한 복합문화공간이다. 지역 시민들과 영화인들의 큰 사랑을 받았던 명필름아트센터가 10년의 역사를 뒤로 하고 문을 닫는다.
명필름아트센터의 심재명 대표는 "오는 2월 1일을 끝으로 운영을 종료하게 됐다. 오랫동안 발걸음을 해주셨던 관객, 영화인들에게 미안한 마음이다"라고 전했다.
심재명 대표는 영화관 운영은 중단하고, 영화사인 명필름을 서울로 이전한다는 계획을 밝혔다. 영화관 운영을 중단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경영 수익 악화다. 서울이 아닌 곳에서, 주말 운영 만으로 흑자를 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애정과 열정으로 영화관을 운영해 왔지만, 현실적인 벽에 부딪히며 냉정한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폐관'이라는 표현은 이 공간이 가진 의미와 가치를 생각하면 맞지 않게 느껴진다. 영원한 안녕을 의미하는 '마침표'가 아닌 다음을 기약하는 '쉼표'라는 표현으로 명필름아트센터의 10년 역사를 정리하고자 한다.
◆ 영화를 영화답게…영화인과 파주 시민이 사랑한 극장
경기도 파주출판도시 내 위치한 명필름아트센터는 승효상 건축가가 설계했다. 지하 1층에는 영화관, 1층에는 두 개의 회의실과 한 개의 프로덕션 공간, 2층에는 도서관, 편집실, 음향작업실, 공동연구실 등이 있다. 또한 3층에는 영화학교인 명필름랩이 위치하고 있다.
규모와 디자인만으로 압도하는 공간이 아니다. 영화를 영화답게 볼 수 있는 최적의 극장이었다. 단관 극장으로는 드물게 4K 영사 시스템과 돌비애트모스 사운드시스템을 갖춘 곳으로 박찬욱, 봉준호 감독이 영화 관람을 위해 찾는 '영화인들의 영화관'으로 불리기도 했다.
또한 명필름은 이곳을 개관하면서 종로에 있었던 영화사 사무실도 이전했다. 영화로 번 돈 대부분을 영화를 만들고, 영화를 상영하며, 영화인을 육성하는 공간을 만드는데 투입한 과감한 결정이었다.
충무로 시절부터 30년 넘게 영화를 만들어온 제작자 심재명 대표와 이은 대표에게 명필름아트센터는 '꿈이 실현된 공간'이었다. 심재명 대표는 "최선을 다해 만든 영화가 최적의 상태로 관객에게 보여드리고 싶은 건 영화인들의 기본적 바람"이라면서 "과거 제작 영화의 기술 시사에서 영사기 문제로 영화 전체의 포커스가 나갔던 일이 있었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가장 맥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명필름아트센터는 영화인이 그 소망과 정신을 가지고 만든 영화관이어서 자부심이 크다"고 말했다.
명필름아트센터는 영화의 색감과 소리가 가장 선명하게 구현되는 공간이었다. 심재명 대표는 "영화 '로마' 오프닝 장면의 바닥을 쓰는 빗자루 소리,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블랙 앤 크롬 버전'의 특별한 색감, '엘비스'의 생생한 사운드를 들으면서 한 사람의 관객으로서 전율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불을 켜지 않는 영화관의 매너, 그에 맞춰 끝까지 자리를 일어나지 관객의 태도에 매번 감사했다"고 전했다.
시설의 수준과 공간의 안락함으로 인해 영화인들 사이에서 빠르게 입소문이 났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 '어쩔수가없다'의 기술시사가 이곳에서 열렸다. 기술시사는 편집이 끝난 영화를 마지막으로 점검하고, 영화를 만든 사람들이 완성본을 처음으로 만나는 자리다.
심 대표의 말대로 이곳은 파주 시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은 공간이기도 했다. 주말 방문객이 집중되는 지역 특성을 고려해 토요일과 일요일만 영화를 상영해 왔음에도 좌석 점유율은 평균 50%를 웃돌았다. 파주 주민의 쉼터였고, 서울에 사는 영화 마니아들의 나들이 장소로 큰 사랑을 받았다.
명필름아트센터만의 큐레이팅도 돋보였다. 보통의 단관 영화관, 예술영화관들이 독립영화, 다양성 영화 위주의 편성을 하지만 명필름은 상업영화, 독립영화를 아우르는 편성을 해왔다. 이 영화관의 상영회차는 하루 평균 4~5회였지만, 회차에 따라 동시기 최고 흥행작을 볼 수 있었고, 아무 데도 상영하지 않은 거장의 미개봉작도 만날 수 있었다.
주말 극장을 찾은 한 관객은 "명필름아트센터 때문에 다른 곳으로 이사 갈 생각을 안 했다"며 운영 종료 소식을 아쉬워했다. 낯가림 없이 관객을 맞아주던 1층 카페 '모음'의 마스코트 머털이(강아지)도 볼 수 없게 됐다며 속상해했다. 온라인에도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다. 파주에서 예술영화, 독립영화를 좋은 공간에서 볼 수 있어서 내 삶이 윤택했다. 그간 애쓰신 명필름 관계자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다.", "내 인생의 시네마천국, 명필름아트센터. 파주에 살면서 가장 좋았던게 주말에 아무때나 휘리릭 가는 거였는데…" 등 아쉬움의 글들이 이어졌다.
◆ 극장은 닫지만 영화는 계속된다…명필름의 30주년과 재도약
2025년은 명필름아트센터의 개관 10주년이었다. 동시에 명필름의 창립 30주년이기도 했다. 심재명 대표는 명필름 3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에서 대표작 '접속'을 상영했고, 영화의 주역인 장윤현 감독과 한석규, 김태우를 초청한 GV 행사를 열었다.
명필름이 파주로 본진을 옮기기 전 제작한 영화는 '건축학 개론'(2012)이었다. 전국 411만 명을 동원하며 멜로 영화 역사를 통틀어 가장 흥행한 영화로 기록됐다. 이 영화를 통해 수지는 '국민 첫사랑'이라는 수식어를 얻었다.
파주로 영화사를 이전한 후에도 왕성한 제작 활동을 펼쳤다. '아이 캔 스피크', '당신의 부탁', '태일이', '싱글 인 서울', '옆에서 숨만 쉬어도 좋아', '길 위의 김대중'까지 6편의 장편 영화를 만들었다. 상업영화뿐만 아니라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까지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선보였다.
명필름아트센터의 또 다른 수확 중 하나는 명필름랩을 통한 영화인재 양성이다. 서울에 한국영화아카데미라는 기관이 있다면 명필름랩은 수도권 유일의 영화양성기관이다. 무료로 운영됐으며 기숙공간까지 제공됐다.
총 8기까지 운영돼 '눈발'(감독 조재민), '환절기'(감독 이동은), '수퍼 디스코'(감독 이주호), '박화영'(감독 이환), '국도극장'(감독 전지희), '빛나는 순간'(감독 소준문), '해야 할 일'(감독 박홍준) 등의 영화가 제작, 개봉됐다. 이 중 '박화영'과 '해야 할 일' 등은 그 해 최고의 독립영화로 각광받으며 다수의 영화제에서 수상하는 의미 있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
심재명 대표는 명필름랩의 향후 운영 계획에 대해 "명필름랩은 명필름문화재단에서 하는 거라 젊은 영화인들 육성은 계속할 생각이다. 단, 그 방식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논의 중"이라고 밝혔다.
극장은 2월 1일까지 열려있다. 현재 명필름아트센터의 10년을 마무리하는 기획전을 진행하고 있다. 명필름의 대표작인 '와이키키 브라더스'(2001)를 비롯해 미개봉작 '길위의 뭉치'(2026), 프로그래머와 명필름아트센터 대표가 추천하는 '레이디 버드'(2017)와 '해피엔드'(2025), '믹의 지름길'(2010) 등 총 11편을 상영한다. 이 중 5편은 감독과 배우가 참여하는 관객과의 대화(GV)도 진행한다.
서울로 돌아오는 명필름은 올해 한국 토종 애니메이션 '꼬마' 개봉을 준비 중이다. 또한 여러 시나리오를 기획, 개발 중에 있다. '영화관을 운영하던 영화사'라는 타이틀은 당분간 쓸 수 없게 됐지만 본업인 영화 제작에 더 많은 에너지를 쏟을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