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독립 영화는 계속 제작되어야 한다."
미국 독립 영화계의 총아인 션 베이커가 생애 첫 오스카 작품상 트로피를 거머쥐고 이같이 외쳤다. 자신의 뿌리를 잊지 않은 외침이었다.
3일 오전 9시(한국시간) 미국 LA 할리우드 돌비 극장에서 열린 제97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아노라'는 작품상과 감독상, 각본상, 편집상, 여우주연상까지 총 5개의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아노라'는 성노동자의 결혼 소동극을 통해 현대 사회의 계급성을 풍자한 영화로 미국 독립 영화계에서 꾸준히 활약해 온 션 베이커의 여덟 번째 장편영화다.
아카데미 후보 발표 당시에만 해도 13개 부문 '에밀리아 페레즈', 10개 부문 후보에 오른 '브루탈리스트'의 강세가 예상됐다. 그러나 두 영화가 오스카 레이스 중 뜻하지 않은 논란에 휘말리며 분위기가 반전됐고, '아노라'가 작품상과 감독상을 비롯한 주요 부문을 석권하며 마지막에 웃었다.
'아노라'는 지난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이다. 황금종려상 수상작이 아카데미 작품상까지 탄 사례는 역대 총 세 번이다. 첫 번째는 1956년 델버트 만 감독의 영화 '마티', 그리고 두 번째가 2020년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었으며, 션 베이커 감독의 '아노라'가 이 대열에 이름을 올렸다.
션 베이커는 미국 독립 영화계를 대표하는 작가이자 감독이다. 2000년 '포 레터 워즈'로 데뷔해 '텐저린', '플로리다 프로젝트', '레드 로켓'으로 이름을 알린 션 베이커 감독은 이민자와 성소수자, 성노동자 등 사회에서 외면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일관되게 다뤄왔다.
특히 영화 공정의 각 분야가 분업화된 미국 영화계에서 직접 각본을 쓰고, 편집을 하며 연출까지 하는 몇 안 되는 감독이다. 이날 시상식에서도 작품상과 감독상, 각본상, 편집상을 수상하며 감독이 개인의 이름으로 총 4개의 트로피를 거머쥐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 논란이 영화를 삼켰다…'에밀리아 페레즈'-'브루탈리스트'의 부진
지난해의 경우 '오펜하이머'가 압도적인 1강이었다면, 올해 아카데미 작품상은 '아노라', '브루탈리스트', '콘클라베', '에밀리아 페레즈'의 4파전으로 압축됐다. 그러나 4강 구도는 캠페인 막바지에 논란들이 잇따라 터지며 '아노라'로 급격히 기울었다.
총 13개 부문 후보에 올라 올해 최다 노미네이트작으로 기록됐던 프랑스 영화 '에밀리아 페레즈'는 작품 외적인 문제로 경쟁에서 이탈했다.
타이틀롤을 맡은 배우 카를라 소피아 가스콘이 과거 SNS에 이슬람 혐오와 인종차별 발언을 올린 것이 드러났다. 성전환 수술을 통해 여성으로 거듭난 갱단 보스의 자아 찾기와 과거에 대한 참회라는 작품의 주제와 정반대 되는 소수자 혐오 논란은 아카데미 위원들의 마음을 식게 했다.
더욱이 아카데미를 주관하는 미국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AMPAS) 수년 전부터 국적, 인종, 성비 등에 대폭 변화를 주며 '화이트 오스카' 오명 벗기에 나선 상황이었다. '에밀리아 페레즈'를 지지했다간 역풍을 맞을 수도 있는 분위기였다.
이 같은 논란이 일자 미국 배급권을 확보해 아카데미 레이스를 후원했던 넷플릭스 측은 가스콘을 배척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캠페인에서 가스콘을 배제하는 것은 물론이고 시상식 참석 비용도 지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공표하며 사실상 손절했다. 그러나 가스콘은 이날 아카데미 시상식에 참석했다. 사실상 주요 부문 수상이 물 건너 간 가운데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한 조율이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예상대로 현실은 냉정했다. '에밀리아 페레즈'는 작품상, 감독상 등 주요 부문에서 고배를 마셨고, 여우조연상과 주제가상을 받는데 만족해야 했다. 가장 충격적인 건 이 같은 논란에도 수상이 확실해 보였던 국제장편상이 브라질의 '아임 스틸 히어'에게 넘어간 것이었다. 이로써 '에밀리아 페레즈'는 최다 수상 후보의 최소 수상 타이('파워 오브 도그', '컬러 퍼플' 등 5편)를 기록했다.
'브루탈리스트'도 뜻하지 않은 논란에 휩싸여 더 많은 수상의 기대를 접어야 했다. 유대인 건축가의 미국 정착기와 불굴의 예술혼을 다룬 이 영화는 고전 영화의 부활이라는 측면에서 평단과 영화인을 사로잡은 거작이었다. 그러나 영화에 AI를 사용한 것이 뒤늦게 알려져 아카데미 위원들의 투표를 주저하게 했다.
극 중 라즐로 부부가 헝가리어로 대화하는 장면에서 자연스러운 발음을 위해 AI의 도움을 빌린 것이 문제가 됐다. 배우의 역할을 축소하거나, 누군가의 일자리를 AI가 대체한 경우가 아니었다. 그러나 2년 전 할리우드를 마비시켰던 작가 파업이 AI 사용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브루탈리스트'에 대한 영화인들의 반감과 AI에 대한 위기의식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브루탈리스트' 뿐만 아니라 '컴플리트 언노운', '에밀리아 페레즈' 등 올해 작품상 후보에 오른 작품들의 AI 사용이 드러나면서 아카데미 측은 내년부터 출품작에 AI 사용을 명시하도록 하는 규정을 논의하고 있다.
'브루탈리스트'의 AI 사용 논란으로 인해 주연 배우인 애드리언 브로디의 남우주연상 수상도 불투명해지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지만, 브로디는 생애 두 번째 남우주연상 수상에 성공하며 잡음을 연기력으로 이겨냈다. 다만 큰 기대를 모았던 작품상, 감독상이 모두 '아노라'에게 돌아가며 브레디 코베 감독은 AI에 발목이 잡혔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됐다.
◆ '아노라', 이견 없는 지난해 최고의 영화
'아노라'는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총 6개 부문 후보에 올라 5개의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그야말로 알짜배기 수상이었다. 지난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탈 때만 하더라도 14년 만의 미국 영화의 황금종려상 수상이라는 의미 부여에 그칠 줄 알았다.
이는 시작이었다. '아노라'는 아카데미 레이스에 참전했고, 기어이 오스카까지 석권했다. 그 배경에는 '기생충'으로 '칸황금종려상-아카데미 작품상' 동시 수상이라는 금자탑을 쌓은 바 있는 미국 공동배급사 네온의 공도 상당해 보인다.
무엇보다 '아노라'는 주제의식과 완성도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작품이었다. 성노동자, 성소수자, 이민자 등 우리 사회에서 소외받은 인물들의 낮은 목소리에 귀 기울여온 션 베이커 감독은 냉혹한 현실을 제시하면서도 인물에 대한 사려 깊은 시선을 견지해 왔다. 소재주의에 함몰되지 않고, 인물의 상황을 전시하지 않으며 그들의 희로애락을 의미 있는 담론으로 확장했다.
각본상 수상 소감에서도 "성노동자 커뮤니티에 감사드립니다. 당신들은 수년간 저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삶의 경험들을 전해주었습니다"라며 영화의 뿌리이자 토대가 된 성노동자들의 진솔한 고백에 대해 감사함을 표했다.
'아노라'는 600만 달러의 제작비로 완성한 저예산 독립영화다. 함께 작품상 후보에 오른 '듄2'와 '위키드'는 제작비가 각각 1억 9천만 달러, 1억 4천만 달러였다. 제작 규모로 치면 블록버스터 영화에 비할 바 못되지만 높은 성취로 관객들에게 진한 감동을 선사했다.
션 베이커 감독은 아이폰 5S로 찍은 '탠저린'(2015)으로 국내·외에 유명해졌지만 이는 제작비 절감과 하룻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영화적 형식을 위한 선택이었다. 그는 할리우드의 대표적인 극장주의자다. '플로리다 프로젝트'(2017), '레드 로켓'(2021)은 모두 필름으로 촬영했으며 '아노라' 역시 코닥 35mm 필름과 아나모픽 렌즈 사용하고 자연 조명을 활용함으로써 1970년대 뉴 할리우드 시네마의 아날로그적 감성을 살려냈다.
감독상 수상 소감에서 베이커는 "관객과 함께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경험은 특별하다. 현재 영화관, 특히 독립 영화관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팬데믹 동안 미국에서는 약 1,000개의 스크린을 잃었다. 이 추세를 되돌리지 않는다면 우리 문화의 중요한 일부를 잃게 될 것이다"라며 "영화인들은 계속해서 큰 스크린을 위한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 저는 계속 그렇게 할 것"이라며 독립 영화와 극장 영화에 대한 지지를 촉구했다.
'아노라'는 이견이 없는 지난해 최고의 영화 중 한 편이었다. 아카데미 위원들은 작품상과 감독상을 동시에 수여하며 션 베이커 감독의 일관된 영화 세계와 뚝심에 대한 아낌없는 응원과 박수를 보냈다.
<사진 = 게티이미지코리아, 각 영화 스틸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