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실화 사건을 기반으로 한 영화들이 선호하는 형식이 있다. 오프닝 크레딧에 "이 영화는 실화를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라고 고지를 하고, 엔딩 크레딧에 실제 사건이었음을 알 수 있는 사진이나 영상 기록을 제시한다. 이는 실화의 충격과 몰입감을 높이고 실제 사건이 제시하는 감동을 극대화하는 효과를 낸다.
오프닝과 엔딩의 형식이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면 영화의 핵심인 이야기는 감독의 연출과 각본과 배우들의 캐릭터 디자인에 의해 새롭게 만들어진다고 볼 수 있다. 놀라운 실화와 영화적 허구 사이에서 세련된 줄타기가 영화 성패의 핵심이다.
오늘(21일) 개봉한 영화 '하이재킹'(감독 김성한) 역시 1970년대 일어난 실제 사건을 기반으로 충격과 감동의 드라마를 써 내려간 작품이다.
1971년 속초 공항에서 승객 50여 명을 태우고 김포로 향하고 있던 조종사 태인(하정우)과 규식(성동일)은 기내가 아수라장이 되는 상황에 직면한다. 이륙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기내에 사제 폭탄이 터진 것. 폭탄을 터트린 이는 20대 초반의 용대(여진구)다. 용대는 폭탄을 터트린 후 조종실을 장악하고 북으로 기수로 돌릴 것을 명령한다. 일촉즉발의 상황 승객칸에 있던 승무원 옥순(채수빈)과 항공보안관 창대(문유강)는 공포에 떨고 있는 승객들을 안심시키려고 애쓴다. 폭발로 인해 규식은 한쪽 시력을 잃고 태인은 용대의 협박에 시달림과 동시에 승객의 안전까지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하이재킹'은 1971년 발생한 '대한항공 F27기 납북 미수사건'을 극화했다. 2022년 9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도 소개돼 화제를 모았다. 당시 51분간 벌어진 공중 납치 상황을 영화는 1시간 10분(전체 러닝타임은 1시간 40분)으로 확장해 리얼 타임에 가깝게 전개해 나간다. 이는 영화가 시작되고 약 15분 여만에 영화의 주요 인물들이 비행기에 탑승함을 의미한다.
이 영화는 누군가의 선택들을 비중 있게 다룬다. 특히 타인의 생명을 담보로 한 절체절명의 순간, 인간은 어떤 행동을 하고 그 행동은 어떤 결과를 빚어내는 가를 대비한다. 영화는 접점이 전혀 없었던 태인과 용대의 사연을 연이어 다루며 두 사람이 비행기에서 대치할 때 긴장감을 극대화한다.
물론 영화가 힘주는 것은 태인이라는 인물이다. 영화의 오프닝을 장식하는 건 사건 발생 2년 전 태인의 상공 훈련 장면이다. 공군 파일럿이었던 태인은 훈련 도중 전역한 자신의 사수가 운항하는 여객기의 수상한 모습을 발견한다. 하이재킹이 의심되는 상황에서 상부의 격추 명령이 떨어지지만 승객의 안전을 담보할 수 없기에 명령 이행을 거부한다. 태인은 이 일로 인해 강제 전역을 당하고 민간 항공사 여객기의 부기장이 된 것이다.
이 장면의 배치는 태인의 선택과 판단에 대한 트라우마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영화는 다시 한번 비슷한 상황을 제시하며 이번에는 비행기 바깥이 아닌 안에서 조종대를 쥔 태인에게 모든 선택의 권한을 부여한다.
하정우는 정의감과 책임감 넘치는 태인 역을 맡아 극을 이끈다. 다소 전형적인 캐릭터로 볼 수 있지만 관객이 처음부터 끝까지 감정을 이입할 수 있는 리딩 캐릭터로서 부족함이 없다. 재난 영화에서 특유의 재기 어린 연기로 관객에게 웃음과 감동을 선사해 왔던 하정우는 이번 작품에서는 웃음기를 뺀 진중한 연기로 관객의 마음을 울린다. 실존 인물이 실제 상황에서 발현했을 법한 휴머니즘을 영화적으로 재현하며 중, 후반부의 긴장감, 감동으로 연결시킨다.
상업영화에서 주인공의 운명을 어떻게 결정짓는가는 아주 중요한 요소다. '하이재킹'은 태인의 캐릭터에 많은 허구적 요소를 가미했지만 운명의 방향까지 바꾸지 않았다. 그러나 태인의 선택과 운명이 빚어내는 눈물에 신파적 요소는 없다. 실화와 실존 인물이 빚어내는 숭고함과 장엄함은 하정우라는 배우에 의해 구체화되고, 엔딩에 이르러 상당한 파급 효과를 발휘한다.
그렇다고 해서 내내 묵직한 것만은 아니다. 하정우가 오프닝에서 김동욱과 완성한 상공 훈련 장면은 후반부 스토리의 수미 쌍관적 기능뿐만 아니라 오락 영화로서 활력 넘치는 볼거리를 선사한다. 2년 전 여름 '탑건:매버릭'으로 고공비행의 쾌감을 느꼈던 관객이라면 한국화 한 이 장면을 재밌게 즐길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영화는 '용대'에게도 전사(前史)를 부여해 시대의 비극과 결부하고자 했다. 실제 사건에서 납치범에 대해 알려진 정보는 22살의 무직 남성이었다는 것뿐이다. 범행 동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영화는 형이 월북했다는 이유로 '빨갱이' 프레임을 씌우고 감옥으로 내몰았던 시대의 비극을 용대에게 투영했다. 그렇다고 해서 개인의 불우한 환경과 억울한 사연으로 동정심을 유발하고자 한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인물을 그저 납작한 빌런으로 묘사하고 싶지 않았던 제작진의 고민의 결과다.
'하이재킹'은 한국형 하이재킹 영화라는 점이 강점이라면 강점, 약점이라면 약점이다. 전자의 경우 1970년대를 재현한 고증이 불러일으키는 호기심과 향수와 정겨움이 크고, 후자의 경우 다운그레이드를 감안해야 하는 CG 등이 다소 아쉬움을 자아낸다. 비행기가 이륙하고 테러 상황이 발생한 후 기내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상황에 대한 디자인도 독창적이라고는 볼 수 없다.
그러나 퇴로가 없는 밀폐된 공간에서 쉴 틈 없이 이뤄지는 용대의 도발과 이에 대처하는 태인의 사투는 생생한 항공 사운드와 카메라 워킹으로 긴장의 밀도를 높였다. 4DX, 돌비시네마관과 같은 특수관에서 관람한다면 하이재킹 장르물로서의 쾌감을 보다 생생하게 즐길 수 있다.
'하이재킹'은 지난해 여름 개봉했던 '비상선언'의 기시감과 싸워야 한다는 과제도 안고 있다. 시대와 상황이 다른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소재의 유사성 때문에 비교가 될 수 있다. 분명한 것은 '하이재킹'은 영화 같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라는 점이다. 실화의 힘과 휴머니즘이 선사하는 감동은 힘이 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