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본 이희준은 불편한 캐릭터를 편하게 연기하는 배우였다. 배우는 캐릭터라는 가면을 쓰고 살아본 적 없는 인생을 내 것인 것처럼 연기하는 사람들이지만, 그 퍼포먼스는 기술과 감정이라는 요소가 황금 비율로 섞일 때 빛을 발한다.
뛰어난 배우는 감독의 자질을 갖고 있다. 배우들이 작품과 캐릭터를 분석할 때의 눈은 감독의 시선과 다른 듯 같다. 배우가 자신의 캐릭터만 본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연기는 독무가 아니다. 액션과 리액션의 합인 만큼 나의 캐릭터뿐만 아니라 상대의 캐릭터까지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경험이 많은 배우들은 작품 전체를 조망하는 눈까지 가지고 있다.
이희준은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자신이 연출한 단편 두 편을 선보였다. 2018년 만든 '병훈의 하루'와 지난해 촬영한 '직사각형, 삼각형'이다. 감독 데뷔는 목표한 결과가 아니었다. 개인적 경험에서 시작된 도전이 거듭된 경우다.
"운이 좋게도 좋은 감독님과 많은 작품을 해와서 연출 욕심은 없었어요. 그런데 '왜 이런 영화는 없지?'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아무도 안 만드는 영화, 그런데 내가 보고 싶은 영화를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병훈의 하루'가 나왔고, '직사각형, 삼각형'이 나오게 됐습니다"
◆ "공황장애 그린 '병훈의 하루', 나를 받아들이는 시간"
2018년 만든 첫 단편 '병훈의 하루'는 공황장애를 앓고 있는 한 남자의 외출을 그린 작품이다. 감독의 자기 고백적 성격이 짙다. 이 영화를 만들 시기, 이희준은 가장 뜨거운 전성기를 보내고 있었고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을 관통하고 있기도 했다.
"무명으로 오랜 시간을 보내다 드라마 '넝쿨째 굴러온 당신'으로 얼굴이 알려지게 됐어요. 그로 인해 많은 제안이 들어왔고, 무리해서 활동을 했어요. 영화 '감기'와 '환상속의 그대', 드라마 '넝쿨째 굴러온 당신', 연극까지 네 작품을 동 시기에 진행했거든요. 과부하가 왔던 것 같아요. 어느 날 현장에서 대사가 잘 안 나오는 거예요. 공황장애의 시작이었어요. 당황해서 화장실에 들어가서 정신 차리라고 스스로 뺨을 때리고, 좀 나아지면 겨우 촬영하는 식이었어요. 순간순간은 모면했지만 나아지지 않았고 증상은 더 심해졌어요"
이희준은 자신을 치유하기 위해 노력했다. 특히 배우와 영화 관계자를 대상으로 하는 법륜스님의 강연을 들으러 가서 큰 치유를 받았다고 했다.
"손을 들고 질문했어요. 연기를 그만두고 싶다고 했어요. 배우는 배역에 공감해야 하는데 공감은커녕 당황하는 신에서 말을 더듬고 대사가 안 나올까 봐 대본에서 그 신을 가장 먼저 찾고 겁을 내는 상황을 설명했어요. 제가 보잘것없어지는 것 같아 연기를 관두고 싶은데, 그러기엔 연기를 너무 좋아한다고. 스님께서 '컴퓨터도 하드웨어가 멀쩡해도 소프트웨어가 과부하가 걸릴 수가 있지 않느냐고. 컴퓨터는 껐다 켤 수 있지만 사람은 아니다. 병원에 가서 신경 안정제를 처방받아서 먹으라'고 하셨어요. 또 '그 배역이 얼마나 당황스러우면 말을 더듬을까를 생각하면서 대사를 좀 더듬으면 안 되냐'고 하시더라고요. 그 말씀을 들으니 가슴속 무거운 돌이 내려간 느낌이 들더라고요. 그 강연을 듣고 여의도 길을 걷는데 처음으로 푸른 하늘과 녹색의 나무가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그 좋았던 기분을 잊기 싫어서 새벽에 글로 남겼어요. 나아가 이걸 영상으로 기록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구했어요. 그게 '병훈의 하루' 토대가 됐어요"
러닝타임 17분짜리 단편 '병훈의 하루'는 심리극으로서 훌륭한 작품이다. 사실상 1인극인 이 작품은 잠에서 깬 병훈의 모습으로 시작하고 카메라는 그의 하루를 차분히 따라간다. 병훈은 앓고 있다. 그의 정신을 괴롭히는 실체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현대인이 저마다 말할 수 없는 불안과 고민, 스트레스를 안고 산다는 점에서 병훈의 고통이 낯설지 않다. 특별한 사건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인물의 동선을 따라가다 보면 인물이 겪는 감정의 파고를 보는 이도 체감하고 일견 공감하게 된다.
공황장애는 원인도, 발현도, 치료 방식도 저마다 다르다. 이희준이 설정한 병훈의 공황장애는 오염강박이다. 이희준은 대사보다는 표정과 몸짓으로 병훈의 불안을 표현했다. 극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다소 과한 몸짓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이 장면에서 이희준이라는 배우가 얼마나 몸을 잘 쓰는 배우인지도 엿볼 수 있다.
"이번에 영화를 다시 보니 말씀대로 좀 과해 보이긴 하더라고요. 한편으로 든 생각은 '내가 이때 정말 힘들었구나'였어요"
'병훈의 하루'는 명동의 수많은 군중 속으로 사라지는 병훈의 뒷모습으로 끝을 맺는다. 이 엔딩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영화의 감독이자 공황장애 경험자로서의 생각 모두를 엿볼 수 있는 답변이었다.
"병훈이 힘든 하루를 버텨내고 살아 나가는 모습을 그려보고 싶었어요. 나를 받아들이는 이야기인 거죠. 일례로 100미터 달리기를 하다가 넘어졌고 무릎에 피가 났다고 쳐요. 그때 '왜 넘어졌어. 바보야, 이겨내야지' 하고 자책하면 무릎의 피를 닦을 수가 없어요. '아, 내가 원래 뛸 수 있는 것보다 빨리 뛰었구나. 내 페이스에 맞게 뛰자'라고 생각하면 아주 쉽게 해결된 문제인데. 오랫동안 이런 식으로 나를 너무 자책해 왔어요. 공황장애가 완전히 치유됐다고 말할 순 없지만 지금은 그런 증상을 느끼면 '왜 왔어?가 아니라 '어, 왔구나. 너 더 잘하고 싶어서 그러지? 머물고 있고 싶은 만큼 있다가 가'라고 되뇌어요"
◆ '직사각형, 삼각형', 틀림이 아닌 다름을 보여준 풍자극
올해 전주영화제 코리안시네마 부문에 상영된 '직사각형, 삼각형'은 좋으려고 만난 가족 모임에서 해묵은 갈등이 하나둘씩 수면으로 드러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이희준이 6년 만에 다시 메가폰을 잡은 영화로 가족이라는 가장 가깝고 먼 관계 사이에서의 균열, 감정의 파동, 가치관의 대립을 소동극 형식으로 풀어냈다.
"한국 사람의 한국 이야기를 다뤄보고 싶었어요. 가족 간의 다툼을 다룬 이야기지만 정치, 사회 등의 갈등에도 대입해 볼 수 있는 이야기예요.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영화 '대학살의 신'을 좋아해서 지난해 연극에도 출연했어요. 구조적인 측면에서는 그 작품의 영감을 받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러닝타임 45분의 '직사각형, 삼각형'은 단편보다는 길고, 장편보다는 짧은 중편 영화다. 주요 인물 8명의 티키타카가 영화의 핵심인 만큼 대사의 양이 많다. 이희준이 시나리오를 쓰는 방식도 궁금했다.
"이렇게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을 하게 될 줄 알았다면 대학교 때 작법 수업이라도 들을 걸 그랬어요. '직사각형, 삼각형'은 한 시간 만에 쓰긴 했어요. 대사가 많은 작품이긴 한데 대사를 입으로 발화해 가면서, 인물의 감정을 느끼면 써 내려갔던 것 같아요. 물론 다 쓰고 난 다음에 다듬는 과정은 여러 번 거쳤고요"
'직사각형, 삼각형'은 일주일의 리허설을 통해 단 3일 만에 촬영을 마쳤다. 배우들의 연기 앙상블이 단연 돋보인다. 연극계에서 이희준과 오랜 기간 인연을 맺어온 정종준, 이제신, 오용, 김희정, 진선규, 정연, 오의식 등이 출연했고, 전작 '병훈의 하루'에도 출연했던 권소현도 또 한 번 열연을 펼쳤다.
"공연 준비하듯 일주일 동안 배우들을 모아놓고 연습을 했어요. 실제 촬영에서 롱테이크로 촬영할 수 있도록 철저히 리허설을 한 거죠. 그 과정에서 배우들이 어떻게 연기를 하고, 전 어떻게 연출할지에 대해 논의를 많이 했어요. 그 후 박세승 촬영감독('살인자 ㅇ남감' 촬영)님과 스태프들을 차례대로 불러서 배우들이 연기하는 걸 보여주고 촬영 계획을 짰고요"
배우 출신 감독이 촬영 현장에서 가장 큰 빛을 발할 때는 연기 디렉팅을 할 때다. 이희준 역시 이 점에 자신감을 보였다. 그는 "배우를 하면서 감독이 이렇게 이야기하면 잘 이해할 텐데 할 때가 있다"면서 "연기의 결과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캐릭터의 심리를 이야기해 주면 배우들은 더 잘 알아듣는다. 이를테면 '좀 가식적으로 해봐'라고 말하는 건 표현 방식의 결과물이다. 배우들은 감독의 의도를 고민하게 된다. 나는 표현 방식이나 결과물보다는 캐릭터의 심리를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디렉팅 했다. 또한 제가 오랫동안 알아 온 배우들이라 그들이 어떻게 연기를 준비하는지를 알고, 어떻게 말해야 원하는 방향대로 연기를 끌어낼 수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는 점이 편하다"고 설명했다.
영화의 제목인 '직사각형, 삼각형'은 법륜스님 즉문즉설에서 따왔다. 종이를 접어 앞으로 보면 직사각형이지만 옆에서 보면 삼각형이라는 설법은 각기 다른 관점과 견해의 차이를 좁히는 현답이다. 이희준은 엔딩에 나오는 노래말의 가사도 직접 쓰며 '틀림이 아닌 다름을 인정하자'는 메시지를 전했다.
'직사각형, 삼각형'은 엔딩이 가장 좋다. 가족의 미세한 균열은 크고 작은 갈등을 야기하고, 서로를 공격하고 원망하는 상황으로 치닫는다. 고속으로 촬영한 엔딩 시퀀스는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찰리 채플린의 말이 떠오른다. 각자의 이해가 부딪히며 육체적 충돌까지 일어나는 이 장면은 눈살이 찌푸려져야 하지만 묘하게 웃음이 난다. 이희준의 아내이자 모델인 이혜정, 이희준과 '황야'로 인연을 맺었던 허명행 감독도 깜짝 출연해 '웃픈 육탄전'에 시너지를 냈다.
전주에서 감독으로 관객과 만났던 이희준은 오는 6월 배우로 스크린에 컴백한다. '습도 다소 높음'으로 인연을 맺었던 고봉수 감독의 신작 '귤레귤레'를 선보일 예정이다. '델타보이즈', '튼튼이의 모험'을 보고 고봉수 감독의 팬이 됐다는 이희준은 직접 러브콜을 보내 두 편의 작품을 연달아했다.
"터키 카파도키아 올로케이션으로 찍은 '귤레귤레'는 고봉수 감독과 수다를 떨다가 '펀치 드렁크 러브'(감독 폴 토마스 앤더슨) 같은 영화를 만들어보자는 뜻이 맞아서 진행된 영화예요. 상처 입고 트라우마를 가진 사람들이 만나 서로에게 위로가 돼주는 이야기인데 고봉수식으로 풀어냈어요.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이희준은 자신을 '도파민 중독자'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연기를 하는 행위 자체가 자신에겐 흥분되는 일이라고. 그도 그럴 것이, 그는 혹사에 가까울 정도로 숨 가쁜 활동을 하며 매번 대중이 깜짝 놀랄만한 연기를 선보이고 있다. 지난해에는 시리즈 '악연'과 '귤레귤레' 촬영, 공연 3편을 잇달아 올리며 각기 다른 얼굴을 보여줬다.
"작품을 고르는 기준이요? 대본을 읽었을 때 재밌다고 생각하는 것을 골라요. 어쩔 땐 재미만 쫓는 제가 도파민 중독 같기도 해요. 연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흥분되는 일이거든요. '살인자 ㅇ난감'때도 노인 분장을 하고 1:17로 싸워서 이기는 장면을 찍는데 그렇게 흥분될 수가 없었어요. 촬영을 마치고 숙소에 와 샤워하면서 멍든 몸을 보는 게 그렇게 기분이 좋더라고요. 어렵거나 안 해본 것에 오히려 재미를 느끼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