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하정우는 "배우는 감독의 오브제"라는 지론을 가지고 있다. 배우이자 감독, 화가이기도 한 그는 자신의 역할에 따라 때론 오브제가 되기도 하고, 때론 누군가를 오브제 삼아 작업하기도 한다.
오브제는 대상으로서의 부정적인 의미를 갖고 있지만, 배우 하정우에게 적용하면 달라진다. 이 오브제는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이야기와 메시지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감독의 스타일에 맞춘 연기 방식을 채택한다.
가령 전체적인 신의 구성은 물론이고 배우의 손짓 하나, 대사 한마디의 톤과 억양까지 통제하는 박찬욱 감독의 작품에선 수동적이지만 한 점 오차 없는 오브제가 되고, 롱테이크를 통해 배우와 인물이 하나 되는 순간을 폭넓게 포착하고자 하는 김성훈 감독의 영화에선 보다 능동적인 오브제가 된다.
"하정우가 연기 잘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장면에선 저도 모르게 '와 연기 진짜 잘한다'라는 말이 툭 튀어나왔어요. 그것도 편집실에서요"
영화 '터널'(감독 김성훈, 제작 어나더썬데이·하이스토리·비에이 엔터테인먼트)의 개봉을 앞두고 만난 김성훈 감독은 일명 '나 살아 있는데' 시퀀스를 언급하며 하정우의 연기력을 극찬했다.
출연 분량이 전체에서 70% 이상을 차지하고 대부분의 신을 롱테이크로 완성한 이번 영화에서 하정우는 그야말로 살아 움직이는 오브제였다. 극 안에서 몸을 운용할 수 있는 공간은 한 평 남짓이지만 충격→낙관→분노→희망으로 이어지는 감정연기의 폭은 100평 이상이었다.
익히 알려졌다시피 하정우의 본명은 김성훈이다. 감독 김성훈과 배우 김성훈이 만난 '터널'은 두 동명의 시너지가 빛나는 영화다. 한 남자에게 닥친 재난과 구조를 다룬 이 작품은 장르물의 재미는 물론 대한민국을 관통하는 사회적 공기까지 전하는 흥미진진한 블랙코미디다.
다소 민감할 수 있는 소재와 이야기가 무겁지 않게 다가오는 것은 하정우 덕분이다. 관객들은 하정우 때문에 이 영화를 선택했다가 뜻밖의 분노, 슬픔, 감동, 기쁨을 안고 극장을 나서게 된다. 하정우는 관객을 터널로 안내하는 훌륭한 가교다.
이 영화와 만나게 될 당신은 하정우와 126분간 터널에 갇힌다. 끔찍한가. 근사하다.
Q. 얼굴이 많이 탔다.
A. '신과 함께'(감독 김용화) 촬영 때문이다. 지난 5월 칸영화제에 다녀오자마자 테스트 촬영을 했고 그 이후 줄곧 찍고 있다. 1, 2편을 동시에 찍어야 해서 내년 1월까지는 이 영화에 매진할 것 같다.
Q. '터널'과 '신과 함께' 촬영 중 뭐가 더 힘들었나?
A. 모든 영화가 다 똑같다. 피할 구석이 없다.
Q. '터널'의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첫 느낌은 어땠나?
A. '더 테러 라이브'(2013)랑 비슷하지 않겠냐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구조대장 김대경(오달수)과의 통화 이후부턴 다르다고 생각했다. 특히 표현에 있어서 말이다. '더 테러 라이브'는 바깥 상황 없이 스튜디오 이곳저곳만 나오지만, '터널'은 내, 외부를 오가면서 여러 공간과 상황이 나온다. 아주 재밌겠다 싶었다.
Q. 이정수의 긍정주의와 불굴의 의지가 비현실적이라고도 볼 수 있다.
A. 그게 감독의 시선이 아닐까 싶다. "고통은 길게, 기쁨은 잠시" 같은 거지. 어떻게든 희망을 보여주고 싶었던 거다. 현실에서는 영화보다 더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벌어지지 않나. 실제로 그런 일을 겪으면 누구나 패닉 상태에 빠질 것이다. 그런데 나 역시도 울고만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나도 좀 살자'라는 마음이 들지 않을까.
영화 '127시간'(감독 대니 보일)에도 제임스 프랑코가 절벽 사이에 팔이 끼여 괴로워하는 장면들이 나온다. 그러다 주인공의 과거에 대한 플래시백이 나오고, 살고자 하는 의지를 불태운다. 그리고 끝내 팔을 자르고 나오지 않나. 그런 일련의 과정을 보여주면 설득력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우리 영화에 코미디적 요소가 강하게 나오는 부분들이 있다. 그 점이 좀 비현실적일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감독의 선택이다. 방식에 정답은 없는 거고.
Q. 터널 내부의 신들은 대부분 롱테이크로 촬영했다.
A. '더 테러 라이브' 때의 경험이 많은 도움이 됐다. 촬영 방식도 똑같이 멀티캠을 써서 덩어리로 찍었다. 그게 이 영화의 성격과 잘 맞았다. 좁은 공간이고 카메라도 잘 보이지 않았다. 실제로 카메라들을 바위틈에 세팅했기 때문이다. 연기하는 데 몰입도가 굉장히 높아지더라. 대부분 영화 현장이라는 게 수십 명의 스태프가 배우를 앞에서 지켜보고 카메라 또한 타이트하게 들어오다 보니 감정이 깰 때도 있다. 이번 영화는 그런 점에서 자유로웠다.
전작인 '아가씨'는 박찬욱 감독님이 촘촘하게 계획을 세워서 재단하듯 찍었다면 이번 영화는 차 안에서 몇십 분 동안 상대 배우 없이 홀로 촬영했다. 큰 그림은 있지만 세밀한 약속은 하지 않은 채 연기를 하는 거다. 촬영하다가 돌더미가 떨어져서 쳐다봤는데 그것 또한 말이 되는 거지. 길게 길게 찍어서 중요 포인트를 채택하는 식이었다.
Q. 그런 환경이 애드리브를 돋보이게 하지 않았나 싶다. 원래 계산된 연기를 하는 쪽인데 이번엔 달랐다.
A. 감독님도 처음부터 즉흥연기를 했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정수가 터널 안에서 하는 혼잣말 같은 것까지 시나리오에 다 기술하지 못했으니 배우가 채워 넣어달라고. 실제 촬영장에서 혼잣말하다가 얻어걸린 게 많다. 가령 "집에 왔다", "꿈꿨어요" 같은 것, 또 탱이한테 욕하는 거 같은 것 말이다. 오케이 사인이 나기까지 머뭇거릴 수 없으니 "꿈꿨어요" 같은 애드리브가 나온 거다. 이 촬영 방식엔 엔지가 딱히 없었다. 그런 과정에서 감독이 내 행동과 대사 중 살리고 싶은 것은 살리고 버릴 것은 버렸다.
Q. 반면, 홀로 연기를 하면서 힘든 점도 있었을 것 같다. "연기는 리액션"이라는 말도 있지 않나. 파트너 없이 연기했을 때의 어려움을 꼽아보자면?
A. 내 생각과 의도대로 잘 전해질까. 코미디가 너무 과하지 않을까. 이런 기본적인 의심을 했다. 혼자 하다 보니 더 커지더라. 보통의 현장은 내가 준비해 온 것을 상대 배우와 맞추면서 조율한다. 그런데 홀로 하다 보니 감정의 온도가 맞는지 헷갈리더라. 그래서 감독님과 정수의 감정 그래프를 그렸다. 사건의 긴장감, 코미디의 발생, 탱이와의 만남, 미나의 등·퇴장 등의 중요 사건마다 감정 시뮬레이션을 했다. 다행히도 순서대로 찍다 보니 감정을 올리고 내리는 식으로 조절도 수월했다. 굉장히 수학적인 방식이었다. 찍고 체크, 곱씹고 반복 등 여러 가지 방식으로 점검해 나갔다.
Q. 그런 과정에서 편집된 장면도 적지 않았을 것 같다.
A. 영화의 첫 시퀀스가 주유소 장면인데 그 전에 빵집에서 케이크를 사는 신이 있었다. 또 렌터카 사장과 거래하는 장면도 있었다. 정수가 굉장히 생존 본능이 강하다는 걸 보여주는 신인데 결과적으론 빼길 잘한 것 같다. 영화 시작하자마자 터널이 무너지는 게 주효했다고 본다. 그 정도의 정보만 가지고 사건이 터져도 무리가 없다는 판단이었다. 미나와의 장면도 더 있었다. 몸을 숙여 양말을 신겨주는 신이라던가 핸드백에서 콤팩트 파우더를 꺼내 얼굴에 두드려주는 신도 있었다. 그런데 찍고 나서 확인해 보니 상황에 맞지 않게 좀 엉큼해 보이더라. 그래서 뺐다.
Q. 김성훈 감독과의 첫 만남이 궁금하다.
A. 지난해 여름 '암살' 촬영을 마치고 휴가차 하와이를 가는 길에 하와이 영화제 참석하는 김성훈 감독을 공항에서 만났다. 입국 심사대에서 누군가 "정우 씨, 안녕하세요. 저 김성훈 감독이에요" 하는 거다. 나 역시 반갑게 맞았지만 그의 영화를 못 봤을 때라 달리 할말이 없었다. 어색한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 하와이 시내에서 다시 마주쳤다. 참 별일이다 싶었다. 그리고 귀국행 비행기에서 '끝까지 간다'를 봤다. 놀랐다. '이 사람, 영화를 제대로 만들 줄 아는 사람이구나' 싶었다. 되게 센스 있다고 생각했다. 특히 (이)선균 형의 시체 보관실 시퀀스의 롱샷을 보면서 감탄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터널'의 시나리오를 받았다. 생각해 보면 첫 만남부터 영화적이었다.
Q. 그리고?
A. 작년 4~5월쯤이었나 2고 시나리오를 받았다. 이야기는 되게 재밌는데 마냥 무겁게 만들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감독님을 만나 뵙고 말씀드리고 싶었다. 자기도 그런 각색 방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 일적인 것도 좋지만 사람 자체가 재밌고, 말도 잘 통했다. 그러다 보니 쑥스럽게도 남자 셋이 오사카 3박 4일 여행도 떠났다.
Q. 남자 셋이 떠난 오사카 여행이라니!
A. 김성훈 감독과 장원석 대표(제작사 비에이 엔터테인먼트 대표)가 일본에서 진행된 '아가씨' 첫 촬영장에 놀러 왔다. 보통 첫 촬영장, 그것도 해외 촬영장에 오는 건 실례인데 그분들이 좀 눈치가 없었던거지. 하하. 아가씨 팀들끼리 이야기하는 시간이 많을 수밖에 없는데 거기에 두 분이 끼어서 대화도 나누고 밤새 술마시고 그랬다. 감독님은 과음하셔서 다음 날 하루종일 오바이트 하셨다. 이상하게 그때의 기억이 참 좋았다. 그래서 오사카 여행을 따로 간 거다.
굉장히 건전하게 보냈다. 먹고 마시고 밤새 시나리오 이야기하고. 한국에서는 흡연 되는 카페가 잘 없지 않나. 그렇다고 탐ㅇ탐ㅇ 흡연실에서 작품 이야기를 할 수도 없고. 오사카 숙소에서 영화 이야기로 밤을 새우곤 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아이디어들이 터져나왔다. 잊지 못할 여행이었다.
Q. '터널'은 김성훈과 김성훈의 만남이라는 것도 화제였다.
A. 나와 이름이 똑같다 보니 좀 더 애정이 가는 것도 있었다. 무엇보다 현장이 정말 재밌었다. 사실 영화 촬영을 일주일에 6일간 하는 게 쉽지만은 않다. 상대 배우랑 같이해도 빡센데 처음부터 끝까지 내 컷만 찍으니 세팅할 때 외엔 쉬는 시간도 많이 없었다. 그런데도 힘들지 않았다. 김성훈 감독과 잘 맞아서 그런 것 같았다. 촬영하고 모니터하면서 감독님은 "정우 씨, 이거 너무 좋은데요?"하고, 나는 "감독님, 이 샷 예술인데요?"하고 그랬다. 내가 감독을 해봐서 감독들이 뭘 좋아하는질 잘 안다. "감독님 이 대사, 기가 막히네요!" 이런 말, 정말 좋아한다. 하하.
Q. 김성훈 감독의 장점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A. 굉장히 경제적인 감독이다. 한 샷 안에 많은 정보를 주면서 지루하지 않게 끌고 간다. 그리고 촬영장에 올 때 정말 많은 준비를 하고 오신다는 것도 놀라웠다.
Q. 감독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이번 영화가 잘됐으면 하는 바람을 말할 때 감독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도 인상적이었다.
A. 여행하면서 감독님 본인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데뷔작 '애정결핍이 두 남자에 미치는 영향' 이후 약 7년간 쉬시지 않았나. 친한 감독들은 다 잘나가는데 자신은 데뷔 이후 긴 공백을 가졌다. 딸은 커가고 "아빠, 뭐하는 사람이야?"라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고 하더라. 작은 방에 틀어박혀서 시나리오를 쓰고 쓰고 고쳐 쓰는 그 인고의 시간이 오늘날 김성훈 감독을 만든 게 아닌가 싶다. 무엇보다 내가 만난 감독 중 가장 영화 찍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다. '터널'을 하면서도 촬영이 안 끝났으면 좋겠다고 하더라.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나 역시 배우는 게 많았다.
최근엔 딸이 '터널' 포스터를 그려서 아파트 현관문에 붙여놨다며 사진을 보여주더라. 그걸 보면서 '감독님을 위해서라도 이번 영화는 잘돼야 한다. 홍보 활동, 무대인사도 정말 열심히 해야겠다'라는 결심을 했다.
Q. 지겹겠지만 먹방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다.
A. 먹방 신이 이야기와 잘 어울리지 않으면 "이건 오버다"라고 생각할 때도 있는데 아무래도 나보단 감독님들이 더 신경을 쓰지 않을까 싶다. 자기가 만들어 낸 이야기와 캐릭터가 '하정우의 먹방에 훼손되지 않을까', '집중력이 깨지지 않을까' 이런 고민을 많이 할 것이다. 결국 상관이 없기에 배치했다고 생각한다. '베를린'에서도 아내를 의심하면서 표종성이 바게트를 먹는 신이 분위기상 맞지 않는다고 판단해 결국 편집되지 않았나. 감독님들은 생각보다 많이 계산해서 먹방을 넣는다. 나로서는 관객들이 재밌어하면 나 역시 재밌다. 하정우의 연기에 있어 먹방은 건빵에 별사탕 같은 거라고 볼 수 있다.
Q. 케이크 먹는 신에서 오렌지를 맛깔스럽게 먹는 장면이 특히 재밌었다.
A. 케이크가 주어졌고, 뭘 먹고 어떻게 먹을지는 내 판단이었다. 생크림 위에 데코된 여러 가지 과일이 있었는데 왠지 오렌지에 눈길이 갔다. 껍질이 있지만 느낌 있어 보였고,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집어들었다.
Q. 후반부에 사이다 같은 귓속말이 나온다. 한편으론 정수가 대경에게 실제로 그런 말을 했을까에 대한 의심도 든다.
A. 터널에 갇혀 있던 정수의 답답함을 드러내는 대사라고 생각했다. 실제 촬영할 때는 장난으로 오달수 선배의 귀에다 "밥은 먹고 다녀요?", "나는 조선의 국모다!!"라고 말했다. 두 번째 대사에서 빵 터지시더라. 하하하.
Q. 1년 2편씩 필모그래피가 쌓이고, 평가를 받는 과정을 반복하고 있다. 배우로서의 커리어는 늘고 있지만 그만큼 따라붙는 고민도 많을 것 같다. 배우로서도 그렇고 연기에 대해서도 말이다.
A. 매번 늘 하는 생각인데 다음 작품에서 어떤 캐릭터, 어떤 이야기를 보여줄까에 대해 고민한다. 경력이 쌓이고 작품 수가 많아지면 영화, 연기를 바라보는 시각이 좋아질 거라 예상했는데 늘 새롭고 어렵다. 어쩌면 아무것도 몰랐을 때가 더 거침없고, 더 느낌 있는 연기를 했었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다. 부족한 부분을 어떻게 채워나가고 어떤 표현 방식으로 보여줄까 고민한다.
인간 하정우로서는 인간관계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는 것 같다. 사적인 관계들, 지인이나 친구 사이에도 현실적인 문제로 벌어짐을 느낄 때가 있다. 되게 슬프다. 그렇다면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포기할 것은 포기하고 가야 하나 아니면 끝까지 부여잡고 가봐야 하나. 그런 판단과 선택들이 어렵다. 그다음엔 결혼 문제, 30대 후반인데 사람 만나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요즘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
<사진 = 김현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