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친구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북경에서 서울로 날아온 최현(박해일 분)은 술 한잔 하자는 친구에게 대뜸 경주에 내려가야겠다고 말한다. 더불어 7년 전 경주의 한 찻집에서 본 춘화(春畵)를 기억하느냐고 묻는다. 최현의 뜬금없는 말에 친구는 말한다.
"하여튼, 추억으로 사는 사람이에요"
장률 감독의 '경주'는 단순히 한 남자의 경주 여행기가 아니다. 이 영화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도시 경주를 배경으로 시간과 기억을 되새기고 삶과 죽음을 이야기한다.
최현은 춘화를 찾아 온 경주에서 그림 대신 찻집 주인 공윤희(신민아 분)를 만난다. 사랑스러우면서도 엉뚱한 또 어딘가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윤희는 최현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리고 뜻하지 않게 윤희의 계 모임에 따라간다. 모임에서 윤희의 새로운 면과 주변인들의 흥미로운 모습을 마주하기도 한다. 그리고 최현은 윤희의 제안에 따라 그녀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는다. 최현은 짧고 긴 하룻밤 동안 과거를 떠올리고 현재를 바라보며, 죽음을 생각하고 삶을 되새긴다.
'경주'는 일상의 소소한 에피소드를 통해 삶의 본질과 인간의 본성을 꿰뚫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장률 감독의 색채는 또렷하다. 뜻밖의 상황이 발생하는 아이러니와 서로 다른 속성을 띤 사람들의 관계를 통해 소소한 웃음을 전달한다.
도시 지명을 딴 제목 탓에 자칫 관광지의 매력을 특화한 영화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 작품은 경주라는 공간을 그럴듯한 그림으로만 활용하지 않았다. 경주는 최현의 기억을 지배하며 추억을 떠올리는 공간이며, 윤희에게는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공간으로 그려진다.
영화는 최현이 중국 여자와 결혼해 북경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는 정보만 제공할 뿐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왜 중국으로 갔는지와 같은 전사(前史)는 생략한다. '경주'는 1박 2일이라는 짧은 기간 최현의 발자취를 쫓지만, 그 시간 안에서 우리는 이 인물을 조금은 파악할 수 있다.
최현은 대학 시절 연인인 여정(윤진서 분)을 불러내 과거를 추억하는데, 상대방에게 그 과거란 매우 불편하고 언짢은 것이다. 최현은 여정에 의해 '무책임한 남자였다'로 정의 내려지는데 정작 그는 자신의 옛 모습을 기억해내지 못한다. 이처럼 추억이란 누군가의 기억에 의해 편집, 복사, 가공이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윤희는 삶과 죽음을 달관한 여자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상은 아니다. 이별의 아픔과 상실의 고통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윤희는 고분능에 누워 "나 여기 들어가도 돼요?"라고 무덤에게 말을 건넨다. 그녀는 여전히 괜찮지 못하다. 이처럼 죽은 사람을 묻은 무덤이 산 사람에게 가장 안락함을 선사하는 공간으로 변하는 마술이 이 영화에는 있다.
영화에서 춘화가 의미하는 바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춘화는 최현의 박제된 기억을 상징하는 매개일 수도 있다. 공간과 시간안에 머물러 있는 어떤 추억으로 기능하는 것이다. 결국 최현은 춘화를 다시 보지 못한다. 대신 기억을 더듬어 돌아온 경주에선 새로운 만남이 있었고, 그로 인해 자신을 바로 보게 되는 계기를 마련한다.
'경주'는 시간 여행이라는 테마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영화다. 현재와 과거가 교차하는 도시 경주에서 기억을 더듬는 한 남자, 그리고 그곳에서 뜻밖의 모습으로 마주하게 되는 여자들을 통해 과거와 현재, 보다 더 넓게는 삶과 죽음을 생각해보게 한다. 영화는 한 여름밤의 꿈처럼 아련하고, 무채색으로 채운 수묵화처럼 담담하게 한 남자의 여정을 담아냈다.
보문단지, 고분능 등 경주의 유명 관광지는 익숙한 듯 새롭게 다가온다. 영화의 주요 배경인 찻집 아리솔과 경주의 분위기를 머금은 골목골목의 풍경도 아름답고 정겹다.
이 영화에서 박해일은 박해일만이 할 수 있는 연기를 하고, 신민아는 한발 정도는 나아갔다. 두 사람이 펼친 연기는 과장되지 않고, 지극히 사실적이다. 최현과 공윤희의 얼굴이 박해일과 신민아에게 자연스레 겹치는 것도 그 이유일 것이다.
또 영화감독 류승완과 '씨네 2000'의 이춘연 대표, '나우필름'의 이준동 대표, 국회의원 송호창, 가수 백현진 등 각계의 인사들이 카메오로 출연해 소소한 재미를 전한다.
'경계', '이리', '두만강', '풍경' 등의 작품을 통해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경계인의 눈으로 공간을 관찰하고 세상을 바라봤던 장률 감독의 세계관은 이번 영화에도 깔렸다. 롱테이크를 빈번하게 활용함으로써 카메라와 인물의 거리를 둔 것도 변함없다. 여전히 그의 작품은 멀리서 봐야 더 명확히 보이는 풍경화 같다.
장률 감독은 이번 영화를 통해 대중과의 거리를 좁혔다. 자신의 색깔을 유지하면서 그만의 방식으로 대중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특히 음악과 대사를 최소화했던 전작들과 달리 그때 그때의 분위기를 고스런히 전달하는 음악과 재기발랄한 대사들이 보는 이의 마음을 연다.
두 시간을 훌쩍 넘어서는 완행인 '경주'는 느리고, 길고, 불분명하지만, 분명 아름다운 영화다.
15세 이상 관람가, 상영시간 145분, 6월 12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