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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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브스夜] '꼬꼬무' 선거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시기…김대중의 '킹메이커', '선거판의 여우' 엄창록은 누구?

김효정 에디터 작성 2024.04.12 07:18 수정 2024.04.12 09:13 조회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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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SBS연예뉴스 | 김효정 에디터] 김대중의 킹메이커는 누구?

11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에서는 '선거판의 나이트(knight)'라는 부제로 킹메이커 엄창록이 세상에 드러난 그날 이야기를 추적했다.

1971년 1월, 서울의 한 중학교에 다니던 홍준이는 자신을 다급하게 찾는 선생님의 부름에 응했다. 빨리 집으로 가라는 이야기에 홍준이는 서둘러 학교를 나서려고 했지만 정문 앞에는 홍준이를 데리러 온 경찰들이 깔려있었다.

영문을 모르는 홍준이는 당황했고, 선생님의 도움으로 간신히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대로 경찰서로 연행되고 말았다.

중학생 소년 한 명을 연행하는데 지프차 다섯 대와 80명의 경찰이 동원된 상황.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며칠 전 홍준이는 자신을 보고 싶어 하는 할머니를 만나기 위해 큰집으로 향했다. TV를 보며 시간을 보내던 홍준이. 그런데 그 순간 커다란 굉음이 들려왔다.

굉음이 들려온 것은 큰집의 마당. 그곳에는 자욱한 연기와 함께 탄 냄새가 가득했다. 그리고 수사 결과 장난감 화약이 폭발한 것으로 드러났다.

사고의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다음날 이 사건은 일간지 1면을 도배했다. 폭발 사건이 벌어진 곳은 당시 대선후보였던 김대중 의원의 자택이었던 것.

대통령 선거를 석 달 앞둔 시점에서 수사기관은 김대중 의원의 조카 김홍준 군을 용의자로 지목했다. 그렇게 홍준이는 국내 최연소 정치테러 용의자가 된 것. 이에 국회에서도 특별조사위원회가 꾸려졌고 국회의원들은 이 사건의 배후로 엄창록을 지목했다.

조직의 명수이자 조작극의 전문가라 불린 엄창록. 그는 김대중 의원의 비서였다. 그리고 이 사건 전까지는 세상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그는 킹메이커, 선거판의 여우, 마타도어의 귀재라고까지 불리는 존재였다.

대체 그는 어떤 인물일까.

김대중 의원이 똑똑한 한약방 청년 엄창록을 만난 것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였다. 이미 수차례 낙선했던 김대중 의원은 형편이 어려웠던 그에게 병원비를 보태주며 인연을 맺었고 누구보다 그를 신뢰하며 함께 선거를 준비했다.

그리고 그의 도움 덕에 4전 5기로 국회의원에 당선된다. 하지만 당선 3일 후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한다. 1961년 5월 16일 군부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며 그는 의석에 앉아 보지도 못하고 의원직을 내려놓게 된 것.

그로부터 5년 후 두 사람은 7대 국회의원 선거에 도전장을 내민다. 그런데 김대중 의원이 출마한 곳은 목포의 전쟁이라 불리며 세간의 관심이 집중된 목포. 앞서 박정희와 정부 정책에 대해 여러 비판을 쏟아냈던 김대중 의원. 이에 박정희는 "공화당 의원 열 명 스무 명이 안 돼도 좋다. 김대중만은 떨어뜨려라"라는 특명을 내렸다.

또한 그는 거대 정치 세력 여당을 만들기 위해 목포에 다리 건설 계획, 공장 유치 등 지역사회 개발 등의 화려한 공약을 내걸었고 시민들에게 선물 공세까지 했다. 그렇게 민심을 공화당 쪽으로 모으고 있던 그때 엄창록은 일반적인 선거 방식과는 다른 방법으로 자신들의 표를 모았다.

조금은 치사하기도 하고 야비한 방법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는 엄창록. 그리고 그는 선거 운동원들에게 유권자의 집에 가서 반드시 화장실에 들르라는 당부를 했다. 세수하는 척 들어가서 고급 비누를 두고 가라는 것. 그는 유권자가 화장실을 방문할 때마다 비누를 사용하고 향기를 맡을 때마다 후보를 연상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지지자와 중립, 상대당 지지자로 나뉘어 대문에 표기한 공화당. 이에 공화당은 무려 2억 원의 자금을 쏟아부어 자신들의 지지자들에게 돈을 건네 완전히 자신들의 편으로 만들었다.

이를 알아낸 엄창록은 늦은 밤 집집마다 찾아가서 표시를 바꾸어 공화당이 정말 써야 할 돈을 다른 곳으로 세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6.8 부정 선거라 불릴 정도로 부정이 난무했던 선거일, 불을 끈 사이 투표함을 바꾸는 올빼미 투표 전략을 쓰는 이들에 대항해 손등 전을 준비하였고 투표함 바꿔치기를 막아냈다.

그 결과 선거는 공화당의 압승이었지만 목포만은 김대중의 신민당이 승리했다. 그렇게 스타정치인이 탄생했고, 이 선거를 통해 엄창록이라는 선거의 귀재가 진가를 발휘했다.

이후 김대중은 엄창록과 함께 대권에 도전했다. 대선보다 더 힘들 수도 있었던 당내 경선에서 김대중은 엄창록 덕분에 대 역전극을 펼치며 당내 대표로 선정되어 박정희 대항마로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리고 엄창록은 킹메이커로 나섰다.

그런데 그 무렵 엄창록에게 계속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김대중의 자택에 폭발이 일어나는 것을 시작으로 정체불명의 상대에게 미행을 당하거나 했던 것.

중정부가 그를 회유하기 위해 그의 집 앞에서 육군헌병들이 보초를 서서 사람들을 막고 상공에 뜬 헬기 때문에 주민들의 항의도 받았다는 기록도 나왔다.

그리고 1971년 4월 신민당 캠프에 비상이 걸렸다. 엄창록이 연락 두절된 것. 이에 신민당 당원은 그를 찾아 집으로 갔다. 하지만 그곳에는 모르는 이들이 남편을 데려갔다며 눈물을 흘리는 엄창록의 아내만 남아있었다. 그리고 이틀 뒤 엄창록은 이사를 가며 자취를 완전히 감춰버렸다.

그럼에도 선거는 계속되어야 했고, 김대중은 백만명의 군중이 모인 장충단에서 연설을 하며 박정희 독재에 맞섰다. 그러나 약 95만 표 차이로 선거는 박정희의 승리로 끝이 나고 말았다. 엄창록이 있었다면 결과는 어땠을지 알 수 없는 상황.

선거가 끝난 후 묘한 이야기가 떠돌았다. 경상도 지역에 뿌려진 정체불명의 유인물에는 "호남인이여 단결하라"라는 지역감정을 유발하는 내용이 쓰여있었던 것.

이는 지역감정을 최초로 선거한 이용한 사례로 보기도 하는데 엄창록의 전략일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이에 혹자들은 엄창록을 지역감정의 설계자라고 부르기도 했지만 이것이 정말 엄창록이 만들어낸 것인지 진실은 알 수 없었다.

대선이 끝나고 한 달 후 돌아온 엄창록. 하지만 그는 김대중의 참모들이 모인 곳에는 발걸음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우연히 만난 이들에게 알 수 없는 사람들에게 납치를 당했다는 이야기만 했을 뿐이었다.

어떤 기록에는 엄창록이 돈을 받고 중정에 협력했다는 증언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를 잘 아는 한 사람은 "만약 회유를 당했다고 해도 권력에 의해 당했지 본심은 그것이 아닐 것이다. 그가 자진해서 선거 운동을 포기한 것이 아닐 거다"라고 말했다.

대선이 끝나고 유신 시대가 시작됐고 당분간 선거는 열리지 않았다. 그리고 김대중 의원은 여러 가지 정치적인 사건으로 인고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1987년 노태우 측에서 엄창록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엄창록은 어차피 이길 것이라며 그들에게 돌아가라고 했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대로 노태우가 승리했다.

엄창록은 이 선거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선거에 등장하지 않았다. 이후 사망하기 전까지도 선거 결과가 어땠는지 궁금해했다는 엄창록.

선거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시대, 그 시대 속에서 많은 고초를 겪어야 했던 그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의 삶에 대해 한번쯤 되새겨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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