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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픽처]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큐어'가 깨운 인간의 악마성

김지혜 기자 작성 2022.07.14 18:02 수정 2022.07.15 09:25 조회 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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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사와 기요시의 대표작 '큐어'

[SBS 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불안은 영혼을 잠식하고, 공포는 고통을 초래한다. 25년 전 만들어진 한 편의 영화를 보며 든 단상이다. 이 작품에는 현대인의 아픈 자화상이 그려져 있었다.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큐어'(1997)는 인간 내면에 자리한 근원적 불안과 공포를 건드린다는 점에서 장르의 본질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수작이다.

더욱이 이 영화는 인간 내면에 자리한 악의 보편성이 작동돼 끔찍한 범죄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더욱 섬뜩하다. 악을 깨우는 전도사가 있다고는 하지만 현대인의 내면에 침전해 있는 어둠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소름 끼친다. 그 방식이 요즘의 오컬트 무비처럼 요란스럽지도 않다. 오히려 기이할 정도로 정적인 분위기 속에서 보이지 않는 강력한 에너지를 느끼게 해 공포감을 조장한다.

명작은 동시대에 또는 후대에까지 직간접적 영향을 끼친다. 참조의 형태든, 영감의 형태는 그 방향은 다양하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2000년대 초반에 만들어진 몇몇 한국 영화가 떠오르며, 몇 해 전 방영된 한 케이블 드라마도 떠오른다. 모두 참신한 이야기로 화제를 모았지만, 이 작품들 모두 '큐어'의 영향권에 있었음을 알게 된다.

'큐어'는 4K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국내 관객과 만나고 있다. 영화제와 특별전을 통해 공개돼 일찌감치 일본 호러 스릴러의 걸작으로 자리매김한 영화를 진일보된 퀄리티로 만날 수 있는 기회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대표작 '큐어'

◆ 우리 내면엔 모두 악마가 있다

도쿄에서 벌어진 연쇄 살인 사건, 현장에서 체포된 범인들은 하나같이 살인과는 무관해 보이는 사람들이다. 회사원, 교사, 경찰, 의사라는 직업으로 그 사람의 내면까지 판단할 수 없지만 일상의 패턴과 주변 사람의 증언으로 미뤄 봤을 때 살의를 띤 인물이라고는 볼 수 없다.

형사 타카베(야쿠쇼 고지)는 범인은 다르나 살인 방식이 똑같다는 점에서 이 사건을 하나의 카테고리로 엮고 수사를 이어간다.

대부분의 범죄 영화에서 가해자들은 '인격 괴물'로 묘사된다. 이 영화의 무시무시함은 평범한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는 최면 상태에 빠져 살인을 저지른다는 것이다. 범인들이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기에 행동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게 만드는 측면이 있다.

전도사 역할을 하는 마미야(하기와라 마사토)가 등장한다. 그러나 이 인물은 매개의 역할, 악을 깨우는 행위를 할 뿐이다. '최면이라는 장치로 유도 살인이 가능한가'라고 의문을 제시할 수 있다. 타카베의 친구이자 정신과 의사인 사쿠마도 "아무리 최면에 걸려도 인간의 근원적인 본성은 변하지 않아. 만약 그들의 마음속에 살인을 거부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그들은 살인을 하지 않았을 거야"라는 견해를 밝힌다. 최면이 인간의 자유의지, 윤리관까지 바꿀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영화는 여기에서 더 나아간다. 최면은 외부적 요인이고, 악의 발생은 내면으로부터 기인한다. 마미야는 마주하는 사람들에게 "너는 누구냐"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 단순하면서도 심오한 물음으로부터 모든 사건이 촉발된다. 인간 내면에 자리한 질투, 불안, 분노, 열등감, 자격지심, 피해의식 등의 극단적 발로가 살인 행위라는 결과로 이어진다.

가해자이자 피해자인 범인들이 가슴 밑바닥에 깔고 있던 그 어둠이 괴물의 그것과 같을까. 그렇지 않다. 우리 모두가 살아나가며, 관계 맺으며 느끼는 감정 중 가장 어두운 속성을 띨 뿐이다. 다만 인간의 이성으로 억누르며 살았던 그 감정이 어떤 기제에 의해 폭발한 것이다. 이 영화는 '인간은 본디 악하다'는 성악설을 이야기하는 걸까. 그보다는 '인간은 본디 약하다'는 것에 가깝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대표작 '큐어'

◆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형사와 범인의 대결, 스릴러 영화의 익숙한 구도다. 영화 '양들의 침묵'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는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은 ▲ 형사가 범인을 잡고, ▲ 형사와 범인이 대화하며, ▲ 도망친 범인을 잡는 형사의 구조로 영화를 구상했다고 밝혔다. 이러한 골격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누가' 아닌 '어떻게'와 '왜'다. 구로사와 감독은 빛과 어둠, 물과 불을 활용한 이미지로 인간의 불안과 공포를 극대화한 연출을 선보인다.

음악이 거의 등장하지 않은 영화다. 대신 귀를 거슬리게 하는 소음이 의도적으로 등장한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빈 세탁기, 공장의 요란한 기계음은 불안의 전조 역할을 하며 께름칙한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반대로 살인은 무미건조하게 이뤄진다. 클로즈업이 아닌 풀샷, 롱테이크로 인물의 행위를 조망하듯 보여준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대표작 '큐어'

수사 중 불길한 예감이 들어 급히 귀가한 '타카베'는 목을 맨 아내를 보고 침묵의 비명을 지른다. 절망의 순간, 차마 소리 내 울지 못하고 마른 비명으로 공포와 비애를 표현한 야쿠쇼 코지의 연기가 놀랍다. 그러나 이는 타카베는 환영이었다. 현실을 자각한 순간 이 남자가 보인 건 안도가 아니었다. 그 미묘한 온도차에서 아내를 향한 타카베의 속박을 엿볼 수 있다.

공포 영화는 대체로 사건의 묘사가 공포의 핵심 역할을 하지만 이 영화는 범죄의 동기인 인간의 심연에 집중한다. 영혼이 불안과 공포에 잠식됐을 때 인간은 그 어떤 존재보다 무서운 존재가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2022 SUMMER 4K 리마스터링 큐어

'큐어'의 마지막 시퀀스는 인상적이다. 표면적으로 사건이 모두 마무리되고 일상의 평화가 찾아왔다고 생각한 순간, 그것이 거대한 착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상상 너머의 공포를 마지막 장면에도 심어둔 채 영화는 조용히 막을 내린다.

영화의 제목은 보기 전까지는 호기심으로 다가왔으나 영화를 보고 나면 거대한 미스터리로 남는다. 치료(Cure)의 주체는 누구인가. 그것은 치료인가 전이인가.

좋은 영화는 답을 내리는 영화가 아니다. 질문을 던지고, 관객의 답을 끌어낸다. 타카베 앞에 놓인 빈 접시, 한 모금의 담배, 그가 입은 검은 정장은 거대한 호기심으로 작동한다. 영화가 끝나고, 관객의 시간이 펼쳐진다.

ebada@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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