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30일(토)

영화 스크린 현장

[빅픽처] 흑백 영화 '자산어보'에서 컬러 장면이 의미하는 바

김지혜 기자 작성 2021.04.07 15:53 수정 2021.04.07 15:55 조회 1,7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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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일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SBS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내가 섬사람들을 두루 만나보았다. 어보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사람들의 말이 제각기 달라 이를 정리하고 표현할 수 없었다.

섬 안에 창대라는 젊은이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좋아하였으나 집안이 가난하여 책이 많지 않은 탓에 식견을 넓히지 못하였다. 그러나 성품이 신실하고 정밀하며 물고기와 해초, 바다새 등을 모두 세밀히 관찰하고 깊이 생각하여 그 성질을 터득하고 있었으므로 그의 말은 믿을 만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오랜 시간 그의 도움을 받아 책을 완성하였는데, 이름 지어 자산어보라 한다. (정약전의 '자산어보' 서문)

'자산어보'의 서문에는 창대라는 이름이 등장하지만 당시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공저도 아니고 그저 고마움을 표시하는 정도의 인사말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고, 책은 지은이의 산물일 수밖에 없다. 업적이나 이름 아래 가려진 무수한 인물이 있을 테지만 기록되지 않은 이의 공은 쉬이 잊혀지고 만다. '자산어보'를 쓴 정약전은 서문에 '창대'의 이름을 언급하며 고마움을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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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역사가 외면한 이야기나 인물은 영화적으로 훌륭한 소재가 된다. 지난달 31일 개봉한 영화 '자산어보'(감독 이준익)가 좋은 예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어류학서인 '자산어보'를 쓴 정약전의 이야기이자 그의 벗 창대의 이야기가 흑백의 수려한 영상 아래 한 편의 수묵화처럼 펼쳐진다.

이준익 감독은 '동주' 이후 5년 만에 다시 한번 흑백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사극은 역사를 다루는 장르인 만큼 관객의 호불호가 뚜렷하다. 애초 진입 장벽이 높은 장르를 택하면서 흑백 화면을 고집한 것은 시대를 재현하는데 이보다 적합한 방식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는 신유박해(조선 순조 원년인 신유년(1801)에 있었던 천주교 박해사건으로 이승훈·이가환·정약용 등의 천주교도들이 처형 또는 유배되는 등 약 100명이 처형되고 약 400명이 유배된 사건)로 인해 흑산도와 강진으로 각각 유배된 정약전과 정약용, 고초 끝에 순교한 정약종의 이야기를 빠른 전개로 보여주고 흑산도와 강진으로 귀향을 떠난 두 형제의 이야기를 따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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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중심은 역사적으로 친숙한 정약용이 아닌 그의 형 정약전이다. 이준익 감독은 조선의 근대성에 대한 관심이 정약전에 대한 호기심으로 이어졌다고 했다.

그는 "역사를 보는 관점에 따라, 동학농민운동, 갑오개혁 등 조선 근대의 시작에 관한 다양한 주장이 있다. 국가의 근대성을 명확하게 구분 짓기 어려우니 개인의 근대성에서 찾아보자고 생각했다. 그 출발은 동학이었다. 동학을 보다 보니 서학이 보였고 신유박해에 초점이 맞춰졌다."라고 설명했다.


정약전은 여러모로 시대를 앞서 간 인물이다. 사대부 집안의 학자인 정약전은 성리학 사상을 고수하는 다른 양반들과 달린 열린 사상을 가졌다.

"상놈도 없고, 양반도 없고, 임금도 신하도 없는 세상, 백성이 인간답게 사는 세상을 희망한다"는 영화 속 대사가 그가 가졌던 생각을 압축한다. 당대의 시대상을 생각하면 놀랍도록 급진적이다.

정약전은 당대의 부조리한 사회구조에 분노하고 백성들의 삶으로 눈을 돌린다. 유배지 흑산도에서 정형화된 학문적 수양보다 명징한 사물 공부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것이다. 동생인 정약용이 목민관(수령)을 위한 지침서인 '목민심서'를 썼다면 백성의 삶에 실질적인 도움이 될 어류학서인 '자산어보'를 집필한 데서 두 사람이 가진 관심의 방향이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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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 눈여겨봐야 할 또 한 명의 인물은 '창대'이다. '자산어보'는 정약전과 창대의 관계를 수직적으로 그려나가다가 어느 순간 사제 지간 혹은 조력자처럼 그린다. 그 가운데 두 사람의 가치관 대립을 부각하며 정약전의 생각과 창대의 생각을 모두 비중 있게 다룬다. 옳고 그름이 아닌 다름의 문제로 바라보는 배려 깊은 시선도 빛난다.

이준익 감독은 자타공인 '사극 거장'이다. '자산어보'는 정점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완성도가 높다. 이야기와 메시지와 같은 작품의 내적인 면뿐만 아니라 기술적 만듦새가 최근 어떤 한국 영화보다 우수하다.

촬영적 측면에서도 한 단계 진화한 모습을 보여준다. 목포 일대의 섬과 바다에서 촬영 모든 장면은 한 폭의 수묵화나 풍경 사진처럼 맑고 선명하다. 색을 포기한 대신 명도, 채도를 더하고 빼는 식으로 흑산도의 은은한 톤을 만들어냈다. 반짝이는 바닷물은 흑백의 화면임에도 컬러로 느껴지는 착각이 들기도 한다. 무채색의 컬러감이라는 모순적 미학이 자연스레 발생한다.

실제로 '자산어보'에는 컬러로 전환되는 장면이 세 차례 등장한다. 밤하늘의 별을 볼 때, 밤송이 새(파랑새) 이야기를 할 때, 마지막은 흑산도로 회귀하는 장면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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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익 감독에 따르면 별을 보는 장면은 우물 밖 개구리라는 사실을 알게 된 창대의 심경을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정약전과의 대화 속에서 채 이해하지 못했던 그의 뜻을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그는 어렴풋이 느낀다.

파랑새 장면은 자산어보에 창대가 말하길 '밤송이새가 바로 그것입니다'라는 구절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준익 감독은 "당대의 지식인이자 양반이 자신의 책에 굳이 어린 어부 창대에게 들었다는 부분을 표기한 것이다. 그야말로 수평적 가치관이다. 그렇기에 파랑새는 창대를 의미하기도 한다."고 전했다.

흑산도의 바다 색깔이 컬러로 변한 마지막 장면은 정약전이 본 흑산을 창대의 눈으로 비교하는 의미가 있는 장면이라 볼 수 있다.

'자산어보'는 궁극적으로는 창대의 성장담이다. "자산어보의 길이 아닌 목민심서의 길을 가겠다"며 육지로 떠난 그는 결국 섬으로 회귀한다. 그러나 실패의 결과로써 돌아오는 것만은 아니다. 그는 스승인 정약전의 말을 이어받아 "흑산(黑山)이 아닌 자산(玆山)"으로 돌아왔음을 알린다. 그에게 그곳은 더 이상 어둡고 음침한 공간이 아닌 그윽하고 평화로운 삶의 터전이다.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그의 여생은 어땠을까. 영화의 여운은 짙은 호기심으로 이어진다.

정약전과 창대는 다름의 끝에서 결국 하나의 가치로 만난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한 가치로의 귀결이다. 두 사람의 대비는 불화의 과정이 아니다. 오늘날 더욱 귀하게 여겨지는 생산적 논쟁이다.

ebada@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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