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6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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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픽처] '모리타니안', 실화에 놀라고 에필로그에 울었다

김지혜 기자 작성 2021.03.29 17:54 수정 2021.03.31 09:41 조회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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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타니안

* 이 글은 일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SBS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이 이야기는 실화입니다"

영화를 볼 때 등장하는 이 한 줄의 글은 오프닝이든, 엔딩이든 그 자체로 감상에 큰 영향을 끼친다. 내가 보고 있는 영화가 작가의 상상력으로 완성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집중력은 높아지고, 영화적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실화'가 전하는 충격파는 커진다.

크레딧 한 줄보다 더 강력한 것은 실존 인물의 현재를 보여주는 영상 삽입이다. 영화는 한정된 시간 안의 인물을 다루고 그 이후는 관객 상상의 몫으로 남겨두기 마련이다. 실존 인물을 다룬 영화의 경우 그의 현재를 보여주는 것만큼 효과적인 연출은 없을 것이다.

지난 17일 개봉한 영화 '모리타니안'은 실화 기반 영화의 정석에 가까운 구성을 보여준다. 서아프리카 모리타니 공화국 출신의 슬라히(타하르 라힘)는 가족의 잔치가 있던 날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체포된다. 독일 유학 중이던 슬라히는 빈 라덴의 휴대폰으로 걸려온 사촌의 전화를 받았다는 이유로 9.11 테러의 핵심 용의자로 지목된다.

모리타니안

억울한 누명은 곧 풀리리라 생각했지만 그는 재판조차 받지 못한 채 무려 6년 간 쿠바 관타나모 수용소에 갇힌다.

살인자, 강간범은 물론 테러범에게도 변론권이 있다고 믿는 인권 변호사 '낸시'(조디 포스터)는 슬라히의 변호를 맡게 되고, 그를 기소하기 위해 선임된 군 검찰관 카우치(베네딕트 컴버배치)와 대립한다. 서로의 신념이 충돌하는 가운데 은폐된 진실이 하나둘씩 밝혀지며 예상치 못한 충격에 휩싸인다.

'모리타니안'은 2002년부터 2016년까지 14년간 관타나모 수용소에 수감됐던 실존 인물 모하메두 울드 슬라히가 쓴 책 '관타나모 다이어리'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영화의 연출은 영화 '라스트킹'과 '말리', '휘트니' 등을 만든 캐빈 맥도널드 감독이 맡았다. 실존 인물의 이야기를 극화한 영화와 다큐멘터리에서 발군의 연출력을 발휘해온 감독답게 캐빈 맥도널드는 관타나모 수용소의 인권 유린 사태를 한 인물을 통해 깊숙이 들여다본다.

모리타니안

관타나모 수용소에 관한 영화는 예전에도 있었다. 영국 출신 마이클 윈터바텀 감독이 만든 다큐멘터리 '관타나모로 가는 길'(2006)이 대표적이다. 다큐멘터리라는 장르답게 감정을 최대한 배제한 사실적인 연출로 호평받은 수작이다.

'모리나티안'은 슬라히의 테러 가담 여부라는 진실 게임에 집중하기보다는 범인 만들기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미국의 인권 침해 문제에 집중한다. 전자의 미스터리를 서스펜스의 재료로 활용해 장르적 재미를 끌어올릴 수도 있었지만 감독은 뉴스가 다루지 못한 이면의 참상을 그리는데 집중한다.

감독은 슬라히가 수용소에서 겪은 고문을 시각적으로 묘사하기보다는 조명과 사운드를 활용해 당시의 공포감을 재현한다. 거짓으로 자백할 수밖에 없었던 극한의 고통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중반까지 다소 설명적으로 느껴졌던 사건의 참상은 이 시퀀스들을 통해 명확하게 정리되는 느낌마저 든다.

모리타니안

또한 슬라히가 겪었던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보여주는 것만큼이나 낸시와 카우치의 이념 대립과 신념의 변화를 섬세하게 그린다. 테러에 대한 분노와 상실감을 가슴에 품고 사는 카우치와 설령 범죄자라 할지라도 인권은 지켜져야 한다는 낸시를 옳고 그름의 시선으로 다루지 않는다. 이를 통해 9.11 테러 이후에 대한 미국인의 두 시각을 모두 사려 깊게 다루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감독은 실존 인물의 현재를 담은 5분가량의 영상을 에필로그로 활용한다. 슬라히가 재판에서 승소한 후에도 무려 7년이나 더 수용소에 수감되어야 했다는 자막에 가슴이 턱 하고 막히고, 육두문자가 터져 나올 만 하지만 뒤이어 나온 영상은 보는 이들을 되레 숙연하게 만든다.

고향에 돌아온 슬라히는 빼앗긴 14년을 악몽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아랍어로 '자유'와 '용서'는 같은 말이라며 해맑게 웃는다. 자유를 빼앗은 자를 용서할 수 있는 관용은 신의 영역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폭압의 시간 속에서 슬라히는 미치지 않고 살아남아 용서를 말한다. 이 조차도 영화적이다. 현실이 때로 영화를 능가한다.

ebada@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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