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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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찐리뷰]"22톤 다이너마이트 옆, 촛불 켜고 잔 남자"…'이리역 폭발 참사'의 황당한 전모

강선애 기자 작성 2024.03.22 12:20 조회 5,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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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SBS연예뉴스 | 강선애 기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21일 방송된 '1977 사라진 도시와 맨발의 남자'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가수 신성, 오마이걸 유아, 김다영 아나운서가 출연했습니다. (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이리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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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1977년, 전라북도 '이리'야. '이리'가 어딘지 알아? 지금의 '익산'이야. 익산역이 예전엔 이리역이였어. 이리는 당시 호남선과 전라선, 군산선이 연결되는 철도교통의 중심지여서 거쳐 가는 사람과 화물이 엄청 많았어. 이용객이 서울역 다음이라고 할 정도야. 그만큼 역 주변의 상권도 발달했겠지.

이날은 1977년 11월 11일, 금요일 밤 9시. 금요일 밤인데 이리 시내가 아주 조용해. 거리에 사람이 하나도 없었어. 왜? 사람들이 이 마을의 유일한 공연장인 '삼남극장'에 모여 있었거든. 공연장 안엔 600여 명의 사람들이 설레는 마음으로 '한 사람'을 기다렸어. 바로 이 사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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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스물세 살, 당대 최고의 여가수, '리사이틀의 여왕' 하춘화였어. 여섯 살에 최연소 가수로 데뷔해 무려 2,500여 곡을 발표한, 트로트의 여왕이야. 1년에 정규 앨범을 12장 내기도 했대. 특히 77년엔 남진을 제치고 연예인 통틀어 최고 소득자로 선정되기도 했어. 그러니 얼마나 바빴겠어. 직접, 그때 얘기를 들어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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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가족과 함께 추석과 설을 지내본 적이 없어요. 항상 공연 때문에 70년대 초반부터 80년대 초반까지 1년이면 180일 공연을 했어요. 제가 공연 횟수 기록을 가지고 있거든요. 요즘은 하루에 두 번 공연이 최고인데, 그 당시는 관객이 많으면 다섯 번까지 공연을 했어요 하루에. 2천석 자리밖에 안 되는데 그때는 입석도 막 섰어요. 의자 위로도 올라가고 뭐 사람이 물결을 쳐요, 너무 많을 때는. 공연이 끝나면 보통 한 30개 정도 의자가 부서져 있어요."
-하춘화, 가수

1년 중 절반은 전국 순회공연을 다니는 하춘화에게 삼남극장은 아주 익숙해. 한 해도 거르지 않고 1년에 두 번씩 공연을 했거든. 그만큼 이리가 팬들이 많은 큰 도시였다는 거지.

그날, 이미 두 번의 낮 공연을 성황리에 끝내고, 이제 마지막 공연만을 남겨두고 있었어. 극장 안은 어디가 좌석이고 어디가 복도인지 구분이 안 돼. 관객들이 꽉 들어찼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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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밤 9시 정각. 오늘의 주인공 하춘화가 무대에 등장해. 박수와 환호로 극장 안이 떠나갈 것 같아. 오프닝은 히트곡 메들리야. 하춘화 특유의 음색과 가창으로 순식간에 관객들을 사로잡아. 뜨거운 열기 속에 하춘화가 멋지게 첫 무대를 마치고 내려가는 그때, 한 남자가 성큼성큼 무대로 올라와. 그러더니 마이크에 대고 대뜸 이렇게 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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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생겨서 죄송합니다… 콩나물 팍팍 무쳤냐?"

하춘화 리사이틀의 전속MC, 실과 바늘처럼 가수 하춘화가 가는 곳에 반드시 가는 사람. 바로, 이주일이었어. 훗날 '한국의 찰리 채플린'으로 불렸던 그. 개그계뿐 아니라 영화계 정치계까지 넘나든 레전드 희극인 이주일. 이때 이주일은 무명MC였는데, 마이크만 잡았다 하면 객석이 아주 난리가 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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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등장을 해서 저의 히트곡을 메들리로 쭉 해요. 그리고 저는 이제 들어가면 이주일 씨가 나와서 '안녕하십니까 못생겨서 죄송합니다' 이게 첫인사예요. 유행어가 이미 그때 만들어졌어요. 무명 시절에. 10년 동안 저의 전속MC로, 진행자로 있으면서 1년이면 6개월을 같이 공연하다 보니까, 가족보다도 더하죠."
-하춘화, 가수

그날 삼남극장에서는 하춘화가 노래하고, 이주일이 웃겨주는, 정말 환상의 공연이 펼쳐지고 있었어.

같은 시각, 이리역에 있는 한 사무실. 한 무리의 남자들이 숨죽인 채 TV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어. 축구 경기였어. 그것도 월드컵 최종예선전. 우리나라는 1954년 단 한 번의 월드컵 본선 진출 이후 번번이 예선에서 탈락했어. 그런데 오늘 경기에서 이란을 이기면 본선 진출 가능성이 있어. 그러니 만사 제쳐두고 볼만 하지. 하춘화 리사이틀에 월드컵 예선 경기까지. 이런 날이라, 그날 이리 거리에 사람이 없었던 거야.

열차 구석구석 검수를 마친 이리역 검수원들이, 하나둘 사무실로 모였어. 그 중엔, 서른일곱 살 임사견 씨도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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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반듯하고, 믿음직스러운 느낌이 있지? 버스비를 아끼려고, 10km를 매일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헌신적인 가장이야. 그런 사견 씨도 TV에서 눈을 떼지 못해. 당시 최고의 플레이어인 차범근, 이영무 선수가 공을 잡을 때마다 함성이 절로 나와. 경기 시작 5분 만에 이영무 선수의 첫 슈팅이 나왔어. 그 후론, 대한민국이 경기의 흐름을 장악해. 그러다 전반 14분, 이란의 골대를 맞히며 전 국민의 심장을 쥐락펴락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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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 시각, 여기는 앞서 두 곳과 분위기가 전혀 다른 곳이야. 한 여자가 손에 묵직한 무쇠 고데기를 연탄불에 달궈서 머리를 말고 있어. 여긴, 삼남극장 근처 건물 2층 미용실이야. 고데기를 든 최윤경 원장은, 이리 시내에서 알아주는 실력자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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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미인대회가 참 많았어요. 봄엔 벚꽃 아가씨, 여름엔 변산 아가씨, 가을엔 단풍 아가씨… 김동건 아나운서님이 직접 미인대회 할 때마다 내려오셔서 다 인터뷰 했죠. '누구한테 감사드립니까' 하면 '우리를 이렇게 해주신 최윤경 원장님한테 감사드립니다', 아마 전라북도에서는 잘나갔을 거예요. 제일 잘 나갔을 거예요. 지금은 전기로 다 하지만, 무쇠 고데기를 가지고 손님을 하고 있는 쯤이었어요…"
-최윤경, 당시 미용실 원장

하춘화와 이주일이 무대 위에서 바통터치한 그 시간. 사견 씨가 TV를 보며 축구 응원에 한창이던 그 시간. 파마를 말던 최 원장은 연탄불에서 무쇠 고데기를 꺼내 들었어. 바로 그때야.

"쾅! 우르르 쾅쾅쾅!!!!!!"

귀가 찢어질 듯한 어마어마한 소리와 함께 온 시내가 흔들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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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팡 소리가 나더라고. 그래서 헉 놀라서… 그냥 귀만 멍멍하고. 누가 와서 막 총 쏜 줄 알았어. 빨갱이도 없는데 요새 무슨 군인이 와서 총을 쏘나. 목조 건물이 그냥 탁 떨어져 버리는 거야. 그래서 그냥 나무 계단이 탁 떨어지면서 나까지 이렇게 주저앉고. 뭐 난로니 이런 거 의자나 다 주저앉았지."

-최윤경, 당시 미용실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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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닝 끝나고 들어와서 다음 준비를 하려고 하고 있을 때, 제가 그 당시에 느끼는 건, 흙 속에 파묻히는 느낌이었어요. 그냥 폭풍이 불어오면서 흙 속에 파묻히는데 숨을 쉴 수가 없었어요. 계속 땅이 뒤집어지면서 제가 그 밑으로 들어가는. 그리고 하늘을 보니까 극장 지붕이 날아갔으니까 별만 보이는 거예요. 그리고 이리시가 전체가 불이 나가버렸고요. 유리란 유리는 다 깨졌어요. 저는 전쟁 난 걸로 그렇게 생각했어요. 전 전쟁을 못 겪었기 때문에, 이게 전쟁이구나. 이북에서 내려왔구나…"
-하춘화, 가수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세상이 무너지는 그 아수라장 속에서도, 이리 사람들은 영문을 몰라. 그저 뭔가 큰일이 났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야.

▲ 생존을 위한 전쟁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곳도 마찬가지야. 한 건물의 2층에는 기자실이 있었어. 나훈 기자는 47년 전 그날 그 순간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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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생활뿐만 아니라 일생에서 그런 큰일이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지. 그렇게 굉음이 컸어. 굉음이 팡! 하니 그렇게. 가정적인 기자 선배는 시내에 가족들이 있으니까, 얼마나 놀랐겠어. 다 죽는 줄 알았지. 땅바닥에 주저앉아서 울고 그랬어. 그 정도로 폭발음이 컸다 그 말이야. 우리는 경험을 안 했지만 원자폭탄이 떨어진 줄 알았다고."
-나훈, 당시 신문사 기자

모두가 몸을 숨기기 바쁜 그때. 나훈 기자는 본능적으로 카메라를 집어 들고 건물 밖으로 나갔어. 밖은 정말 난리였어.

"무섭기는 해도 기자라고 하는 그 직업이 도망갈 수는 없는 것 아니야. 사건이 클수록 더 붙어 있어야 하니까. 무서운 생각은 없고, 특종 놓칠까 무서워서 폭발음 난 데로 뛰어갔지. 유리 파편이 양쪽에서 다 쏟아져갖고 길바닥을 이루었고, 캄캄하니 전기 하나도 없이 싹 나가 버려가지고. 시내가 먹방이 됐다고 캄캄하니…"
-나훈, 당시 신문사 기자

나훈 기자는 달빛에 의존해 주변을 살피며 굉음이 들린 곳을 찾아갔어. 나 기자는 그게 이리역 앞쪽이라고 짐작했어. 서둘러 시내로 가던 나훈 기자의 눈에 뭔가가 들어와. 그런데 '이게 왜 여기 있지?' 싶은 물체가 떨어져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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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기차 바퀴였어. 300kg이 훌쩍 넘는 쇳덩어리가 무려 1km 밖으로 날아온 거야. 이건, 분명 기차역에 무슨 일이 생겼다는 걸 의미해. 나훈 기자는 이리역 쪽으로 향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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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에 가까워질수록 폐허야. 폭탄이 떨어진 거 같이 집들이며 건물들이 다 무너져있어. 그런데, 이리역에 도착해보니 경찰에 보안대, 헌병대까지 나와서 통제를 하고 있어. 이리역 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게 맞다는 거지. 그때, "2차 폭발이 일어날 수 있으니 집으로 돌아가세요!"라는 외침이 들려. 뭐가 폭발했다는 걸까? 나훈 기자는 그 진실을 밝히기 위해, 밤새 역 근처를 맴돌았어.

나훈 기자가 이리역 폭발의 진실에 접근에 가던 그때, 역에서 불과 200미터 떨어진 삼남극장은 그야말로 전쟁터야. 아까 하춘화가 굉음과 함께 흙 속에 파묻힌 거 같은 느낌이 들었고, 지붕이 날아가 하늘의 별이 보인다고 했지? 당시 지붕은 날아간 게 아니라 그대로 무너진 거였어. 당시 모습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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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지붕이 관객과 무대를 덮쳤어. 공연장을 가득 메운 600여 명의 사람들. 사람들은 칠흑 같은 어둠과 공포 속에서 이곳을 벗어나려 몸부림쳤어. 한꺼번에 입구 쪽으로 몰리다 보니 넘어지고 깔리는 사람들도 생겨. 누군가는 가까스로 생존하고, 누군가는 안타깝게 쓰러져 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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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무서웠던 게요. 여기저기서 신음소리가 들려요. '아이고 사람 살려'. 깜깜하니까 아무것도 안 보이니까, 그 소리가 저한테는 또 공포였어요. 그 깜깜한 속에서 '하춘화 씨 하춘화 씨' 부르는 소리가 들려요. 안보이니까 서로 소리로 이렇게 거리를 느끼면서, 이주일 씨가 저한테 온 거예요. 왔는데 이주일 씨 하는 말이, '우리가 여기를 빨리 빠져나가야 되는데 일단 담을 넘어야 합니다' 극장 지붕이 무너지면서 담벼락에 나무가 하나 걸쳐 있었어요. 이주일 씨가 위에서 당기고 해서 담을 올라갔어요. 그대로 뛰어내려야 돼요 밖으로. 그런데 이주일 씨는 다친 상황에서도 뛰어내리더라고. 저는 도저히 못 하겠는데. '저 못 내려가요' 그랬더니 이주일 씨가 그러면 자기가 담에 붙어 설 테니, 자기 머리를 딛고 내려오라는 거예요. 그런데 이주일 씨가 머리를 다쳤거든요. 그렇게 해서, 이주일 씨 머리를 딛고 내려와서, 이주일 씨가 저를 또 업고 나오고. 생명의 은인이죠… 제가 주인공인데 그때 이주일 씨는 무명 시절이니까. 제가 만약에 죽으면 자기 밥줄이 끊어진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람이 살아야 내가 먹고 살 수 있다, 그런 마음으로 왔다고 그래요. 농담 반 진담 반 그렇겠죠."

-하춘화, 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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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에서 빠져나온 두 사람은, 다음날 서울에 있는 병원으로 옮겨졌어. 하춘화는 한 달 정도 입원 치료를 받았고, 이주일은 두개골 함몰로 큰 수술을 받아야 했어. 천만다행으로 뇌를 다치진 않아서, 몇 달 후엔 무대로 돌아갈 수 있었어. 하지만 그날 삼남극장에선, 100여 명이 부상을 당하고, 7명이 목숨을 잃었어.

그럼 미용실 최 원장님은 어떤 상황일까. 최 원장님은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무너져서 미용실에 주저앉아 있었는데, 다행히 근처에 사는 남동생이 달려와 구조를 해줬어. 그런데 그 순간 최 원장은 잊고 있던 한 사람이 떠올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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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여동생이 자기 동창하고 어디 여행 좀 갔다 온다고 해서 보냈지. 지금같이 핸드폰이 있을 때가 아니니까. 연락이 두절됐죠. 남동생이 막 이리저리 찾으러 다녔는데, 뉴스에서 들었지. 죽은 사람 명단. 근데 '최윤정'이라는 이름은 안 나오더라고. 그것뿐이었어. 아무것도 생각 안 나고, 그냥 살기만 해라, 살기만 해라…집 부서지고 뭣하고 이런 건 상관없고, 살아만 있으면 다행이다…"
-최윤경, 당시 미용실 원장

기차 타고 친구와 여행을 갔던 둘째 여동생이 연락두절이야. 마침 이리역에 도착할 시간인데, 오질 않는 거야. 미용실 전화도 끊겨버렸어. 최 원장은 일단 역 주변으로 갔어. 길거리는 아주 난리야.

"말을 못 하죠. 걷어차이잖아요 시체가. 숫자를 헤아릴 수가 없으니까. 몇 명이라고 해도, 헤아릴 수가 없으니까."
-최윤경, 당시 미용실 원장

부상 입은 사람들, 바닥에 쓰러진 사람들.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어. 그렇지만 그냥 지나칠 수도 없어. 내 동생이 아닌가, 확인하고 또 확인해.

"서러워서 너무나 서러워서 눈물도 뭣도 안 나와 그냥 그때는. 살았는가 죽었는가 시체라도 찾게 해달라. 시체를 찾으면 묻기라도 해주잖아."
-최윤경, 당시 미용실 원장

최 원장은 "윤정아! 최윤정!" 하며 있는 힘껏 동생 이름을 부르며 찾았어. 그러다, 최 원장을 단골 식당 사장님이 불러 세웠어. 사장님네 가게로 동생 윤정이의 전화가 걸려 왔대. 대전에 갔던 동생이 놀다가 이리로 오는 기차를 놓쳤다는 거야. 그래서 아직 대전역이라 자기는 괜찮다고, 언니 오빠 괜찮냐고 묻더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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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기쁠 수가 없지. 동생 하나 죽었으면 어쩔 뻔했어. 아유 그래가지고, 보고 막… 그때는 서로 껴안고 안 우는 사람 없어…"
-최윤경, 당시 미용실 원장

그런데 그날, 최 원장의 여동생이 놓친 기차. 누군가는 그 기차를 타고 이리로 오고 있었어. 잠시 후 이리역에서 벌어질 일은 꿈에도 모른 채.

▲ 최악의 열차 사고

승객 600여 명을 태운 열차 한 대가 이리를 향해 달려가고 있어. 서울발 남원행, 101 특급열차야. 승객 중엔 마흔한 살 김영시 씨도 있었어. 영시 씨는 올해 12년 차 열차 기관사야. 원래는 이리역에서 근무하고 있을 시간인데, 오늘은 적성검사라 근무에서 빠졌던 거야. 승객으로 편히 앉아 가던 영시 씨는, 기차 안에서 파는 빵과 음료수를 사서 기차 맨 앞 칸으로 갔어. 기관실에 가서 고생하는 다른 기관사를 위해 바통터치를 해주려는 거야. 당시 정식기관사끼리는 운전을 대신하는 게 가능했거든. 그렇게 영시 씨가 이리로 열차를 몰았어.

그러던 밤 9시 15분경, 어느새 이리역 바로 전 역이야. 역 이름은 황등역. 원래 특급열차는 황등역을 무정차 통과해. 그런데 그날 황등역 신호가 좀 이상했어. 빨간색의 정지신호였거든. 영시 씨는 속도를 줄이고 황등역에 무전을 했어. 황등역 직원은, 이리역이랑 연락이 안 된다며, 무슨 일이 있는 거 같아 정지신호를 띄웠다고 했어. 이런 경우, 다음 역 신호가 나올 때까지 저속 운행을 해야 돼. 영시 씨는 규정대로 시속 25km 이하로 서서히 이리역을 향해 나아갔어. 그러다 이리역을 한 1km쯤 앞두고, 끼이익! 열차를 세웠어. 너무 캄캄한 거야. 아무런 신호도, 불빛도 없어.

영시 씨는 담당 기관사에게 운전대를 넘기고, 기차에서 내렸어. 그리곤 이리역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어. 살면서 처음 보는 광경이 눈앞에 광경이 펼쳐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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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다 보니까 정거장이 엉망진창이네. 사방에서 불이 타는 데도 있고 연기가 자욱하고, 이상해. 전쟁이 났나 뭔 일인가. 몇 사람들 만나서 물어보니까, 아니 몰라. 무슨 큰 굉음이 들렸는데 그때 누가 죽었는지도 모르고 어떻게 된 지도 몰라. 그때 아찔한 것은, 한 5분 빨리 도착했으면 나도 죽었어."
-김영시, 당시 철도기관사

영시 씨와 600여 명의 승객들은 불과 5분 차이로 큰 참사를 면했던 거야.

그날 밤 극장, 미용실, 역 앞 주택가는 살려고, 찾으려고 아우성인데. 정작 폭발이 일어났다는 이리역 안은, 무슨 일이 생긴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일단 시민들의 접근을 막고만 있던 거야.

그렇게 날이 밝았어. 이리역에서 10km쯤 떨어진 '옥구'라는 동네야. 올해 서른세 살 수남 씨는 평소처럼 부엌에서 아침밥을 짓고 있었어. 그런데 등에 업힌 6개월 된 아이가 오늘따라 자꾸 칭얼대. 수남 씨네 넷째 아들이야. 수남 씨는 결혼 7년 차에 아들만 넷이야. 그런데 그때, 집안으로 이웃 사람이 황급히 뛰어 들어와. 이리역에서 폭발 사고가 나서 난리라는데, 애들 아빠 집에 돌아왔냐고 물어. 수남 씨는 바로, 10km나 자전거로 출근하는, 이리역 검수원 사견 씨의 아내야.

이 소식을 듣자마자 수남 씨는 불현듯 어젯밤 일이 생각났어. 갑자기 멀리서 쿵! 하는 소리가 나면서 전깃불도 잠깐 깜빡거리긴 했거든. 하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잠이 들었어. 그게, 남편이 일하는 곳에서 일어난 폭발이었다니. 수남 씨는,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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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역이 폭파 사고가 났대요. 그 말을 들으니까 막 가슴이 철렁해. 시어머니 모시고 갔더니, 막 아수라장이에요. 폭파가 터진 데가 얼마나 웅덩이가 깊이 막 파이고 둘레도 크던지. 엿가락같이 철로는 늘어나고요. 막 어안이 벙벙하죠. 그때는 이북에서 폭격해서 와서 그렇게 폭탄이 떨어진 줄 알았죠."
-공수남, 검수원 임사견의 아내

사고 규모가 어마어마해서, 현장이 한눈에 들어오지 않아. 헬기에서 찍은, 당시 현장 사진을 보여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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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는 구겨진 종잇장처럼 너덜너덜하고, 선로들이 가지런히 놓여있던 자리엔 직경 30m, 깊이 10m의 웅덩이가 파였어. 이게 바로, 국내 최악의 열차 사고로 불리는 '이리역 폭발 사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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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폭발 사고로 부상을 당한 사람은 무려 1,400여 명. 공식 사망자도 59명이나 돼. 대부분의 피해자가 이리역 인근 200m 내에서 발생했어. 그 폭발 위력이 어느 정도였냐 하면, 반경 500m 내 집들 대부분은 무너졌고, 반경 4km 내 집들은 문이 날아가거나 일부가 파손됐어. 그리고 반경 8km 내 건물 대부분의 유리창이 부서졌어. 철로에서 가장 가까운 동네였던 창인동은 전체 가구의 43%가 집을 잃었어. 한순간에 이리는 폐허가 됐어.

그럼 대체, 왜 역에서 폭발이 일어난 걸까? 정말 북한에서 공작이라도 한 걸까?

▲ 폭발의 진실

이 폭발의 진실을 가장 먼저 알게 된 사람은, 나훈 기자야. 이리 시민들이 이유도 모른 채 사망자를 수습하고 실종자를 찾고 있을 때, 나훈 기자는 그 이유를 찾기 위해 역 근처를 헤맸어. 그러다 새벽녘, 역 대합실에서 어떤 장면을 목격하게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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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서 어떻게 됐는지 나도 상황을 파악 못 하고 나오는데, 대합실에 누가 앉아있어. 기자라는 게 사건에 미치면 촉각이 있어. 딱 보니까 이상해요. 행동이. 그래서 수상해서 딱 짚어서 물어봤더니, 화약 호송원 신 모 씨라고…"
-나훈, 당시 신문사 기자

기자의 촉으로 발견한 의문의 남자, 화약을 운반하는 열차의 호송원, 신 씨였어. 당시 신 씨는 맨발에 새 신발을 신고 있었고, 살짝 넋이 나간 듯 보였대. 나훈 기자는 그가 이 폭발과 관련이 있다는 확신이 들었어. 행여 경찰 눈에 띌까, 그를 은밀히 근처의 한 다방으로 데리고 갔어. 당시엔 특종에 목숨 걸던 때였거든.

"단독 취재한다는 그 욕심, 특종 욕심이 있어서 내가 잡았는데, 특종을 경찰한테 넘겨주는 멍청한 기자가 어디 있겠어. 다른 사람들한테 싹 숨기고 작업복으로 얼굴 씌워서 다방 2층으로 내가 데리고 갔어."
-나훈, 당시 신문사 기자

나 기자는 얼이 빠져 있는 신 씨를 달랬어. 한참을 침묵하던 신 씨가 입을 열기 시작했어.

신 씨는 당시 국내 유일의 화약 회사 직원이야. 이 화약 회사는 77년 당시 무려 15개의 계열사와 200억대 자산을 보유한 엄청난 기업이었어. 국내 최초로 화약을 개발해 관련 산업을 독점하고 있었지. 신 씨의 임무는 인천에서 광주까지 화약을 배달하는 거였어. 한 번에 배달하는 모든 화약을, 신 씨 혼자 책임지고 있었던 거야. 당시 화약 열차에 가장 많이 실린 건, 바로 이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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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너마이트. 도로나 건물, 철도 등을 건설할 때 사용되지. 10년 전 노량진 수산시장의 5층 냉동창고를 허물 때, 다이너마이트 40kg 정도가 사용됐어. 그 정도 양으로 순식간에 건물이 무너졌어. 그런데 신 씨가 호송한 화약 열차엔 무려 22톤, 914개의 다이너마이트가 실려 있었어. 40kg의 550배 물량이야.

그뿐만이 아니야. 초산암모니아 5톤, 폭약 상자 2톤, 뇌관 1톤까지. 폭발을 일으킬 수 있는 온갖 원료들이 함께 운송된 거야. 총 1,250상자, 30톤 분량이야. 이 화약 열차가 인천에서 출발해 광주로 가던 중, 이리역에서 갑자기 폭발해 공중분해 된 거야. 대체 왜? 신 씨는 최초 인터뷰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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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 대기하던 중, 저녁을 먹으려고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사고가 났습니다. 화차(화물열차) 안에는 인화 물질이 전혀 없는데. 어떻게 불이 났는지 나도 모르겠습니다."
"이리역 앞 식당에서 술과 저녁을 먹고 화차로 접근하는데, 연기가 나서 달려가 보니 폭약 화차 문이 열린 채 천장 부근에서 불길이 치솟고 있었습니다."
-신 씨 최초 인터뷰 中

이 말대로라면, 누가 일부러 열차에 불을 지른 걸까? 이후 상황은, 경찰에서 더 면밀한 조사를 받아야지. 나훈 기자는 설득 끝에 신 씨를 경찰에 넘겼어. 수사팀은 백방으로 조사를 했어. 사상 초유의 피해가 발생한 역대급 열차 사고야. 박정희 대통령까지 현장을 찾아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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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흔적 하나라도 놓칠세라, 난장판이 된 현장을 뒤지고 또 뒤져. 그리고, 관련된 모든 사람들을 불러서 조사해. 그렇게 수사팀은, 결정적인 두 가지 증거를 찾아냈어. 그중 한 가지는,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 이리역 생존자의 증언이야.

"폭발 직전에 철로에 아무것도 없고 고요했는데… 갑자기 화물열차에서 어떤 사람이 맨발로 뛰어나오며 '불이야'라고 외쳤어요."

갑자기 사람이 열차에서 맨발로 뛰어나왔다? 이런 증언을, 한 사람도 아니고 두 명의 역무원이 공통적으로 말했어. 아까 신 씨는, 밥 먹고 들어가 보니 불이 나 있었고 어떻게든 불을 끄려다가 다시 나왔다고 했지. 목격자들은 열차 안에서 맨발로 누군가가 뛰어나왔다고 했고. 목격자들의 증언과, 신 씨의 진술이 달라.

수사팀은 신 씨가 처음 입고 있던 옷을 찾아내 살폈어. 그리고 그 옷에서, 두 번째 결정적인 증거를 발견해. 소매 끝에, '촛농'이 묻어있던 거야. 수사팀은 신 씨를 집중적으로 추궁하기 시작해. 그제야 체념한 듯 이렇게 말해.

"저녁을 먹으며 술을 한잔 하고 돌아와서 촛불을 켜놓고 잠이 들었는데… 뜨거워서 깨보니 불이 나 있었어요."

어이가 없지? 처음에 잘 모르겠다고 한 건, 거짓말이었던 거야. 최악의 열차 사고, 그 전모는 이랬어.

▲ 사건의 황당한 전모

11월 11일 저녁. 신 씨는 열차 대기 중에 역 앞 술집에 가서 저녁 겸 술을 마셔. 적당히 취한 채로 역으로 돌아와선, 자연스럽게 화약 열차 문을 열고 들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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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당시 신 씨의 진술에 따라 그린 신문 삽화야. 신 씨는 화물칸 가운데 침낭을 깔고 누웠어. 그 옆엔, 다이너마이트 수백 상자와, 각종 화약 원료 수십 상자가 쌓여 있었어. 캄캄하기도 하고 쌀쌀하기도 해서. 신 씨는 머리맡 화약 포대 위에 촛불을 꽂아 두고 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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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타는 냄새와 뜨거운 열기에 잠을 깨보니, 이미 불이 화약 상자에 번져 있었던 거지. 침낭으로 불을 꺼보려고 했지만, 불길만 더 번져. 그때 "불이야!" 소리를 치며 맨발로 도망친 거야.

조사 결과 밝혀진 건, 더 충격적이야. 신 씨가 호송원으로 일한 게 7년째인데, 화약 열차 안에서 촛불을 켜고 지낸 게 처음이 아니라는 거야. 심지어 취사도구를 갖춰 놓고 밥도 해 먹고, 라면도 끓여 먹었대. 다이너마이트 상자 옆에서.

"그만큼 상식도 없었어 화약에 대해서. 지금 같이 교육 시스템이 안 돼 있어서 일종의 무지의 소치라고 봐야지."
-나훈, 당시 신문사 기자

너무 비상식적인 신 씨의 행동. 게다가 화약류 취급 면허가 있어야만 화약 호송을 할 수 있는데, 신 씨는 그것조차 없었어. 무면허였던 거야. 그럼 무면허인 사람에게 호송 업무를 맡긴 화약 회사에도 책임을 물어야지. 그런데 당시 이 화약 회사의 화약물 호송을 맡은 직원들 중, 화약류 취급면허증 소지자는 단 1명도 없었어.

그리고 장거리 운행에 호송원이 단 한 명이었던 것도 문제였어. 관리를 한 명이 하면, 위험물이 방치되는 상황이 발생할 수밖에 없잖아. 그런데도 한 명만 태운 거야. 모든 건 돈 때문이었어. 극도로 위험한 업무를, 터무니없이 허술하게 관리해 온 거야.

직접적인 책임은 호송책임자에게 있지만, 회사의 이윤을 위해 안전관리를 등한시했던 화약회사에도 당연히 책임을 물어야겠지. 이 사람들, 바로 구속됐어. 그리고 수사팀은 이리역 배차 담당자에 대해서도 구속 신청을 했어. 왜? 이날 지켜지지 않은 원칙은 또 있었거든.

당시 화물열차의 시스템은, 화약을 실은 화물칸이 한 번에 쭉 목적지까지 이동하는 게 아니야. 수원까지는 A열차가 끌고 가다가, 바꿔서 대전까진 B열차가 끌어. 그런 식으로 화물칸을 끌어주는 열차가 바뀌면서, 목적지까지 가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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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이틀 전, 신 씨가 호송하는 화약 열차는 11월 9일 밤 인천에서 출발해 두 시간 후 영등포에 도착했어. 그런데 여기서 10시간 가까이 대기한 후, 다른 화물열차에 연결돼. 그렇게 수원, 천안을 거쳐 대전까지 갔어. 거기서 다시 2시간여 대기하고, 또 다른 열차에 연결돼 이리역으로 온 거야. 그런데 그 후, 무려 22시간 가까이 이리역에 머무른 거지.

왜? 그 사이 광주로 가는 화물열차가 없어서? 아니. 화약 열차가 이리역에서 머무는 동안, 다른 화물열차가 5대나 지나갔어. 심지어 화약 열차보다 늦게 도착한 비료 열차가 먼저 떠나기도 했어. 이러면 절대 안 돼. 철도 운송 규정상, 화약류는 되도록 빨리 목적지까지 운송시켜야 해. 위험하니까. 그런데도 화약 열차를 꼬박 하루 동안 가만히 방치한 셈이야.

그래서 신 씨는 배차 담당자에게 왜 배차를 안 해주냐 항의했어. 이유는, '급행료'를 내지 않아서였어. 급행료는 말 그대로 빨리 가기 위해서 내는 '뒷돈'이야. 비공식적인 관행이야. 당시 이 급행료라는 건, 거의 모든 분야에 존재했어. 관공서, 병원, 군대, 택시, 심지어 영구차도 급행료 순이었대. 이리역의 일부 배차 담당자들도 급행료를 내는 화물 위주로 먼저 보내주곤 했던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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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송원, 화약회사, 그리고 일부 부조리한 직원들. 원칙을 무시한 모두의 무책임이 그날의 참사를 부른 거야.

▲ 안타까운 희생과 남겨진 사람들

이미 일어난 사고를 돌이킨 순 없어. 하지만 유가족들은, 신 씨가 열차를 빠져나오던 그 마지막 순간에 "불이야!"가 아니라, "폭발한다! 도망쳐!"라고 외쳤다면, 안타까운 희생을 줄일 수도 있었을 거라고 말해. 신 씨가 선로를 따라 500m를 전력 질주해 도망가는 동안, 반대로 임사견 씨를 비롯한 검수원들은 축구를 보다 말고 부리나케 열차를 항해 달렸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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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발이 터질 줄 알았으면 불 끄러 안 가는데, (불이야 하니) 뭐가 탄 줄 알았지. 근데 그 시간에 폭발이 터져서 그 아까운 생명들이. 너무 아깝죠 진짜. 고생하고 이제 좀 살아보려고 했는데. 너무 젊은 나이에…"
-공수남/ 검수원 故임사견의 아내

"누군가가 '불이야'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검수원들은 일제히 문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이중 희생된 7명의 검수원들이 맨 먼저 뛰기 시작했다. 나머지 검수원들은 신발 끈을 매느라고 뒤로 처져 화를 면했다. 맨 먼저 현장에 간 2명이 '큰일났다' 외치며 철로 옆의 모래를 손으로 집어 화차 안으로 뿌렸다. 순간 '쾅'하는 굉음이 천지를 진동시켰다. 30여m 거리를 두고 뒤쫓아 가던 황 모 검수원은 잃었던 정신을 되찾아 동료들을 불러보았지만 그림자도 찾을 수 없었다."
-당시 신문 보도 中

직업적인 책임감으로 희생된 7명의 검수원. "불이야"가 아니라 "폭발하니 도망쳐" 했으면, 그쪽으로 안 달려갔겠지. 수남 씨의 남편 임사견 씨를 비롯해, 더 먼저 달려간 사람들이 더 참혹하게 희생됐어. 시신조차 찾지 못할 정도로.

그날, 오랜 시간 동고동락한 동료를 잃은 영시 씨는, 지금도 그때 그 마지막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해. 희생자 중엔 적성검사 받으러 간 영시 씨 대신 열차를 몰았던 절친했던 선배도 있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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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잊힐 수가 없지 기억이. 그냥 눈에 지금 그것이 보여. 형용할 수가 없어. 표현할 수도 없는 그런 형상이더라고. 가슴이 확 메이더라고… 재수 없이 내가 타던 열차 탄 것이 그런 일이 있을 줄은 예상도 못 하고. 그 양반들이 나 대신 승무해 가지고 이리 도착해서 폭발 사고를 당해서 돌아가셨다 이거야. 내가 적성검사가 아니었으면 내가 죽었지. 참 가슴 아픈 일이지…"
-김영시, 당시 철도기관사

이 사고로 집에 돌아가지 못한 이리역 직원은 총 16명. 연락이 닿지 않는 남편, 아들을 찾으러 온 가족이 수십 명이야. 수남 씨도 남편의 유해를 찾기 위해 막둥이를 업고 매일 같이 사고 현장을 다녔어. 시신 모아둔 곳에도 가보고 병원도 찾아가 봤는데, 도무지 남편의 흔적이 보이질 않아. 그렇게 다음 날에도, 또 다음 날에도. 그 끔찍한 현장을 갔던 거야.

"아픈 사람들도 어디로 가고 뭐 어디 병원 가고 어디 갔대요. 근데 우리 애들 아빠는 뭐 흔적이 없는 거야. 명단도 없고. 나는 아기를 업어야 되니까 정신을 차리고. 우리 시어머니는 막 쓰러졌어요. 그 이북에서 아들을 데리고 와서 고생시켜서 출근시켰는데 이러니까 얼마나 기가 막히겠어요. 신발을 어떤 때는 벗고도 왔어요. 신발이 무거워서 발이 안 떨어져요. 너무 기운도 없고. 이리 시내가 유리창이 막막 이렇게 한가득이거든요. 그래도 발이 하나 유리창에 찔리지도 않더라고요. 신발이 무거워서 신발을 어떨 때는 안 신고 그냥 벗고 와도."
-공수남/ 검수원 故임사견의 아내

신발이 무거워 벗어 던질지언정, 등에 갓난아이는 업어야 했고. 밥은 걸러도 남편 찾는 건 거를 수가 없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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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에 굴착기로 다 이렇게 파서, 그 시체 발 한 짝씩 나온 거예요. 발 여기 한 짝. 이만큼 밑에 발 한 짝. 그때 이제 여덟 사람이 오른발, 왼발, 이만큼만 있었어요. 그리고 남편 발을 씻겨줬으면 발을 찾으라 하는데, 부인들 보고 찾으라는데 한 번도 안 씻겨줬거든요. 이제 또 그 발 하나가 (남편 발이라는) 믿음이 약간 가기는 했었죠. 아주 확신은 아니지만. 시체 있는 사람은 포장을 이렇게 두껍게 놓고 있는데, 우리는 발 한 짝만 놓으니까 포장을 덮어도 판판하잖아요. 시체를 놓고 우는 사람들이 부럽더라고요."
-공수남/ 검수원 故임사견의 아내

그렇게 여덟 명의 아내는, 남편의 한쪽 발만 놓고 장례를 치렀어. 그나마도 찾지 못한 사람들도 있어서, 수남 씨는 그저 감사하다고 생각했대. 혼자 네 아이를 키우느라 팍팍한 삶 속에서도 수남 씨는 문득문득 남편 생각이 났는데, 그럴 때마다 늘 같은 마음이 들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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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나죠. 아침에 출근 잘해서 그다음 날 와야 되는데, 이렇게 못 보고 그러니… 난 모르고 그냥 그 사고로 다 남편은 갔는데, 나는 편하게 잠잤다고... 잠 잔 생각이 미안하고 그러죠. 생각하면 자꾸 눈물이 나오고 기억이 자꾸 나고… 노부부가 같이 다니는 사람도 좀 부러웠고, 정년퇴임하고 같이 있으면 등산도 다니고. 맛있는 것도 먹고 해야 되는데 그런 게 없잖아요."
-공수남/ 검수원 故임사견의 아내

마지막 출근하던 날 잘 다녀오라고 인사 한마디를 못 해준 게… 남편이 사고를 당하던 그 순간, 그걸 모르고 편히 잤다는 게… 늘 미안했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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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남 씨와 남편과 함께 찍은 유일한 사진이야. 54년이 된 결혼식 사진. 얼마나 이 사진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봤을까. 수남 씨뿐만이 아니야. 함께 한 시간이 길지 않아서일까. 한순간 남편을 잃은 아내들은 오히려 남편과의 기억이 선명하다고 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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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갔다 오고 나면 '나 밥 얻어먹으러 왔다'고 그래요 우리 신랑이. '밥 한술 주세요, 밥 좀 주세요. 밥 얻어먹으러 왔어' 하고… 오면 청소도 다 해주고 다 했어요. '불이야' 하니까 막 먼저 뛰어갔어요. 부지런하니까. 엄청 부지런해요. 먼저 가서 그러니까, 날아가 버렸어. 신체가 싹 다. 그래서 신체도 못 찾았어요."

-강정임(당시 40세)/故이경세 조역의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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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막 그 문풍지를 막 유리창이 많으니까 막 다 해주고 갔어요. 아기 낳을 달 되니까, 이제 그렇게 문풍지랑 다 해주고. 이제 그렇게 가려고 그랬던가 봐요… 얼굴이 하나도 없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런데 명찰 때문에 우리가 시체를 찾은 거죠. 저는 이제 임신하고 그래서 현장을 못 갔어요. 아기 업고 이제 임신 9개월이니까 못 오게 하더라고요… 가족 3명 낳기로 했거든요. 근데 둘이라도 주고 가서 너무 감사해요 지금 생각하면."
-김순영(당시 27세)/故엄상호 기관사의 아내

사실, 이리 참사의 공식적인 사망자는 59명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리 사람들은 그보다 몇 배는 더 많았다고 기억해. 사고 규모에 비해 사망자 수가 적어 보이긴 하지. 그럼 왜 59명으로 기록됐을까? 신분을 확인할 수 없는 희생자들은 공식 사망자에서 제외된 거야. 교통거점이었던 이리역 주변은 워낙 많은 타지 사람들이 머물다 가는 곳이었고, 역 근처엔 이름 모를 여인들 수백 명이 일하던 홍등가도 있었어. 오래전에 집을 떠나 이곳에 정착한 여성들, 연고가 없는 유해들은 그렇게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거야.

▲ 참사 뒤 바뀐 것들

이 참사를 일으킨 장본인들은 어떻게 됐을까? 사건이 중대한 만큼 담당 검사는 신 씨에게 무기징역을 구형했지만, 법원은 미필적 고의에 의한 폭발물 파열치사상죄를 적용, 징역 10년을 선고했고, 형이 확정됐어. 신 씨가 일부러 불을 내려고 촛불을 켠 것은 아니지만, 자칫 폭발이 일어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 부분을 무시했다는 거지.

위법한 인력 운용과 화약 관리를 해온 화약 회사의 사장은 1심에서 징역 8월을 선고받았지만, 항소심에서 벌금 20만 원으로 감형돼. 그런데 민심을 의식해서인지, 화약 회사 회장은 대국민 사과와 함께 파격적인 선언을 해. 이리 시민들에게 피해보상조로 90억 원을 내겠다는 거야. 회장이 소유하고 있는 재산의 최대치래.

법원의 판결엔 아쉬움이 있었지만 피해가 컸던 이리 시민들에겐 빠른 보상과 지원이 시급했겠지? 결국 그렇게 모든 처벌은 마무리가 됐어. 철도청은 사고 후 잠시 중단시켰던 화약회사의 운송을 재개하며, 반드시 이런 조치를 취하라고 통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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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약을 적재할 때는 화약취급면허 소지자를 입회시킨다.
-화약을 실었을 때는 즉시 경찰에 신고하고 임검을 받는다.
-호송원은 2명을 태우되, 1명은 화약류 취급 면허 소지자, 1명은 청원경찰로 한다.
-호송인에게는 반드시 소화기를 휴대시킨다.

이게 당연한 건데, 너무 큰 희생을 치르고 나서야 원칙이 다시 세워졌어. 그 후로 화약 열차 사고는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어. 원칙을 어기면 더 많은 이득을 볼 수 있지만, 원칙이 어겨지기 시작하면 반드시 큰 대가를 치르게 돼. 지금까지 일어난 대형 참사들이 우리에게 알려준 교훈이야.

이리가 수습되는 데 얼마의 시간이 필요했을까? 놀랍게도 1년이 채 걸리지 않았어. 당시 정부의 움직임은 역대급으로 일사불란했거든. 박 대통령은 이리를 찾아 빠른 복구와 지원을 지시했고, 곧바로 '새이리 건설 계획'이 발표됐어. 이리역 앞 도로를 넓히고 아파트를 지었어. 5층짜리 23동, 1150가구의 아파트 단지. 당시로선 초대형 아파트 단지인데, 단 7개월 만에 다 지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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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복구작업에 동원된 인원은 26만여 명. 이리시 전체 인구의 2배가 넘는 숫자야. 그뿐만이 아니야. 쌀, 김치, 감자, 된장, 라면 등 각종 먹거리와 생필품에 학용품까지, 동날 틈 없이 구호품이 전해져.

"서울역에서는 급행열차로 시골에 가려던 사람이 일부러 완행으로 바꿔 그 거스름돈을 모금 통에 넣고 갔다. 일당 8백 원의 막벌이꾼이 5백 원을 내놓고 갔다. 그런가 하면 돈 가진 게 없다면서 웃옷들을 벗어놓고 간 사람도 있었다. '내 저금통을 턴 조그만 정성이다 하루속히 복구되어 전과 다름없이 공부할 수 있기를 두 손 모아 빌겠다' 서울의 어느 국민학교 4학년짜리 개구쟁이는 이런 편지와 함께 6백 원을 내놓고 달아났다."
-당시 보도 기사 中

전국에서 모인 총 성금은 무려 6억 6천만 원 정도였대. 그리고, 이리를 위해 나선 또 한 사람이 있어. 당대 최고의 가수, 바로 하춘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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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리사이틀을 보러 오신 분들 중에 희생을 당하신 분들도 계시고. 그게 너무 가슴이 아프더라고요. 그래서 퇴원해서 바로 이리 이재민 돕기 공연을 했어요. 서울에서 하고 또 이리에 가서도 했어요. 그 수익금을 다 이리 이재민들을 위해 기부했죠. 40주년 추모행사도 갔었어요. 같이 생사고락을 했으니까. 정말 같이 그런 어려움을 겪었잖아요. 돌아가신 분들도 있지만 계셨던 분들은 전부 와서 이제 제 손을 잡고, '아이고 이렇게 같이 정말 죽을지 살지 모르는 일을 겪었는데 이렇게 살아주셔서 고맙다'… 제가 잊을 수가 없는 장소죠."
-하춘화, 가수

그렇게 전 국민의 온정어린 손길에, 이리 시민들은 상처를 추스르고 차츰 일상을 회복했어. 95년 이리는 익산군과 합쳐지면서 익산시가 돼. 이때 역 이름도 익산역이 된 거야.

▲ 도움은 도움을 낳는다

이리 참사 4년 후인 1981년. 전 국민의 가슴을 철렁하게 만든 사고가 발생해. 이번에도 대형 열차 사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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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부선 경산역 북쪽 매호 1동 건널목에서 서울행 특급열차와 뒤에서 달려오던 보통 급행열차가 부딪힌 사고는 우리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당시 뉴스 보도 中

이 사고가 일어난 곳은 경북 경산. 부산에서 서울로 가던 열차가 건널목의 오토바이를 발견하고 급정거해. 곧바로 기관사가 현장을 확인하려 후진하는 순간, 뒤에서 오던 열차와 그대로 충돌한 거야. 양쪽 기관사 모두의 과실로 인한 사고였어. 사망자 55명, 중경상을 입은 사람이 254명. 둘 다 여객 열차였기 때문에, 인명피해가 컸어.

이때 가장 먼저 달려간 사람들이 있어. 바로 이리 시민들이었어. 앞장서서 사고 피해자 돕기에 나선 거야. 사고 직후 이리역 앞에선 헌혈캠페인이 펼쳐졌어. 그 피가 경산으로 보내졌다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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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되는 참사에도 우리가 무너지지 않는 건, 극복을 돕는 손길도 반복됐기 때문인 거 같아. 도움은 도움을 낳는다… 우리가 이리 참사를 기억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아닐까 싶어.

이 사고로 남편을 잃은 수남 씨가 가장 상처를 받는 순간이 있대. 당시 허름한 판자촌 움막집에 살다가, 피해자에게 제공된 새 아파트에 살게 되고, 또 그 집값이 10배 가까이 오르기도 하자, 일부 사람들은 이런 말을 했대. "오히려 전화위복 아니냐", "그 사고 덕분에 이리가 살기 좋아진 거 아니냐"라고. 지금도 그런 말을 들을 때가 있다는 거야. 그때 남편을 잃은 수남 씨는, 이 말이 아직도 너무 상처가 된대. 어떤 발전도, 누군가의 희생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마냥 좋아할 게 아니지 않냐고. 이번 '꼬꼬무' 방송을 통해서 그 말을 꼭 전하고 싶대.

꼬꼬무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강선애 기자 sakang@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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