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1973년 작 '비열한 거리'(Mean Streets)는 찰리(하비 케이틀)의 기도 장면으로 시작한다.
동네 건달인 찰리는 낮에는 범죄를 저지르고, 밤에는 속죄의 기도를 올린다. 매일 죄를 짓고 살면서, 하루도 빼놓지 않고 구원을 갈구하는 삶은 모순적이다. 어쩌면 성악설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연약함을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스콜세지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종교적 색채를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이탈리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스콜세지는 엄격한 카톨릭 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신앙에 심취했다. 그는 '택시 드라이버'와 '좋은 친구들'과 같은 빼어난 범죄물을 만들기도 했지만,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과 '쿤둔'과 같은 종교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일본 작가 엔도 슈샤쿠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사일런스'는 스콜세지 감독이 작정하고 만든 영화다. 시나리오 각색에만 15년, 제작까지 30년이 걸렸다.
굳이 종교영화의 범주에 한정시킬 필요는 없다. 이 작품은 '믿음과 구원'이라는, 세계 수많은 거장이 공통적으로 파고든 심오한 주제에 닿아있는 영화다. 또한 특정 종교과 연관 짓지 않더라도 인간의 내적 갈등에 대해 한번쯤 진중하게 사색할 수 있는 시간을 선사한다.
한편으론 명백한 종교영화다. 이 영화처럼 신의 존재와 신념의 방식에 대해 집요하게 질문하고 고통스럽게 전달한 적은 없다. '사일런스'는 신을 믿는 이에는 자신을 돌이켜 보게 하는 영화이며, 믿지 않는 이에게는 또 다른 의미의 질문을 던지는 영화다.
17세기 포르투칼, 가톨릭 예수회 소속의 로드리게스(앤드류 가필드)와 가루페(아담 드라이버)는 선교를 위해 일본으로 떠난 스승 페레이라(리암 니슨)의 실종 소식을 듣는다. 그의 행방이 묘연해지자 배교를 해 일본인 아내까지 얻었다는 소문도 돌기 시작한다.
두 신부는 사라진 스승을 찾고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일본으로 향한다.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한창인 그곳에서 어렵게 신념을 지켜가고 있는 사람들과 마주하게 된다.
그곳의 지도자는 천주교도를 '기리스탄'이라 부르며 잔인하고 가혹하게 박해한다. 로드리게스와 가루페는 굳건한 신념을 가지고 선교에 매진하려 하지만 배교를 하지 않아 참혹한 댓가를 치르는 사람들을 보며 자신의 역할에 대한 깊은 고뇌와 갈등에 빠진다.
'사일런스'는 순교가 아닌 배교의 과정을 통해 신과 신념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신은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왜 고통 속에 있는 인간을 구원해주지 않는가?', '신념이라는 것은 마음과 형식이 동반되어야만 완전하다고 볼 수 있는가?'와 같은 명쾌히 답 내릴 수 없는 질문으로 꽉 차 있다.
영화에서 인상적인 악역은 키치지로(구보즈카 요스케)다. 상황에 따라 신을 따르고, 안위에 따라 배교한다. 기회주의적이고 이기적인 모습은 위선적인데 낯설지는 않다.
로드리게스와 키치지로의 관계는 예수와 유다의 은유처럼 보이지만, 두 인물은 인간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양 극단의 모습처럼 여겨진다. 많은 관객은 키치지로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마틴 스콜세지는 "표면적으로 믿음과 의심은 반대되는 개념이지만 나는 믿음과 의심은 동반되는 것이라고 믿는다. 믿음은 의심을 낳고, 의심은 믿음을 풍성하게 한다. 의심이 진실한 불변의 믿음과 공존한다면 우리는 의심을 통해 가장 기쁜 영적 교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종교적 딜레마에 관한 논쟁도 가능하다. 나가사키의 수령이자 재판관인 이노우에(이세이 오가카)는 마을 주민들의 목숨을 볼모로 잡고 로드리게스에게 "배교하라. 네 영광의 대가는 저들의 고통"라고 말한다.
이노우에의 배교책은 집요하고 잔혹하다. 로드리게스와 가루페를 벌하는게 아니라 두 신부의 배교하는 모습으로 교인의 믿음을 흔들고자 한다. 두 사람이 뜻을 따르지 않자 신도들을 처참하게 죽인다. 그들은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도, 신부 앞에서 목숨을 잃는다. 로드리게스와 가루페의 고뇌는 계속되고 기도로 신의 응답을 구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침묵이다.
자연을 숭배하고 불교를 믿는 일본의 전통신앙주의자들에게 로드리게스와 가루페는 영적 침략자이고 사탄의 대리인일 것이다. 이노우에는 "너희가 진리라고 믿는 신념을 위해 다수를 희생시키는 것이 하느님이 뜻이냐"고 몰아세운다.
내적 갈등이 극에 치달은 로드리게스는 응답없는 신을 부르다 분노의 목소리를 낸다. 이때 스콜세지는 신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나는 한 순간도 침묵하지 않았다. 옆에서 너의 고통을 늘 함께 해왔다"
마틴 스콜세지는 2시간 40여분이 이르는 긴 상영 시간동안 로드리게스의 여정을 집요하고 처절하게 표현해낸다. 영화는 일본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실제 촬영은 대만에서 진행됐다. 에도 막부 시대를 생생하게 재현하는데 집중하기 위해 기술 요소에서 인위성을 최대한 배제했다. 음악 또한 바람과 파도 등 자연의 소리와 인간이 만들어낸 고통의 소리 등을 이야기의 주요 음악으로 사용한다.
이 영화의 드라마는 인간의 영적 전쟁에서 오는 희로애락, 그 중 고통과 비애의 처절한 시·청각화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보는 내내 아프게 다가온다. 영화가 끝나도 마음 속 전쟁은 멈추지 않은 느낌이 든다.
앤드류 가필드는 앙상한 육체와 섬세한 내면 연기로 고뇌하는 로드리게스를 표현해냈다. '핵소 고지'로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지만, '사일런스'에서의 연기가 더 뛰어나게 느껴진다. 쿠보즈카 요스케, 츠카모토 신야, 아사노 타다노부, 카세 료, 고마츠 나나 등 일본 배우들의 연기도 훌륭하다.
감독의 3인칭 시점으로 진행되는 듯 하던 이야기는 후반부 제3의 화자를 등장시키는데, 이 인물이 관찰하고 증언하는 로드리게스의 말년은 신념의 유형과 방식에 대한 고찰을 하게끔 한다. 특히 엔딩 시퀀스가 선사하는 감동과 여운은 영화가 끝나고도 쉽게 자리를 뜰 수 없을만큼 묵직하다. 그리고 다시금 원점으로 돌아와 하나의 질문을 되새기게 한다.
'로드리게스는 배교했는가?'
카메라의 거룩한 시선과 침묵으로 끝을 맺는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마음 속에 고린도전서 10장 13절이 스쳐 지나간다. 가혹한 위로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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