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브스夜] '꼬꼬무' 북파공작원에서 남파공작원이 되어 '총살형' 당한 심문규…기구한 그의 인생 조명
[SBS연예뉴스 | 김효정 에디터] 사선을 넘다 죽음을 맞이한 한 남성의 이야기가 공개됐다.
4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에서는 '언노운 : 사선을 넘어'라는 부제로 사선을 넘나 들다 사망에 이른 한 남성의 그날을 조명했다.
2006년 어느 날, 한 가족에게 51년 동안 생사조차 알 수 없던 아버지 심문규의 사형 집행 결과 보고서가 도착했다. 민간인으로서 총살을 당했다는 사형 집행 결과 보고서. 그런데 이 문서를 보내온 곳은 대한민국 육군본부라 충격을 더했다. 그는 대체 왜 그런 죽음을 맞이한 것일까?
1942년, 철원에서 꽤 알아주는 집안의 아들이었던 문규 씨. 조선인을 전쟁에 동원하려는 일본에 의해 일본군 소집 영장을 받아 들었고 이에 가족들은 절망했다. 하지만 반드시 가족들에게 돌아오겠다는 생각 하나로 일본 관동군에 배치된 문규 씨.
731부대라는 이름의 관동군은 인체 실험 부대로 악명 높았던 곳. 그곳에 소속되어 전투에 나선 문규 씨는 전쟁의 힘듦 뿐만 아니라 조선인이기에 겪어야 하는 배고픔과 구타도 견뎌야 했다. 그러나 가족들에게 돌아가기 위해 버텨낸 문규 씨. 그런데 일본이 패망하고 패잔병이 된 문규 씨의 고난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중국 팔로군의 포로가 되어 재교육을 받으며 정신 교육까지 한 문규 씨. 그는 3개월 후 탈출에 성공해 고향으로 향했다. 그런데 해방 직후 생긴 38선으로 고향을 코앞에 두고도 쉽게 가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목숨을 걸고 그 선을 넘었고 고향에 도착했다.
그런 그를 기다리는 것은 어머니의 부고 소식. 그리고 그의 아버지와 누이들은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이라 충격을 안겼다.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혼자가 된 문규 씨. 그런 문규 씨 곁에는 고향 친구 승환이 있었고 그는 문규 씨에게 보안대에서 일할 것을 제안했다. 치안을 담당하는 경찰 같은 보안대에 문규 씨도 이를 수락했다. 그리고 한 달 만에 분대장으로 승진한 문규 씨는 사랑하는 아내를 만나 가족도 꾸리게 되었다.
그런데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최대 격전지 중 하나였던 철원에 있던 그는 국군에 붙잡히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대한민국 수색대원으로 전쟁에 투입된 문규 씨. 그의 운명은 그야말로 기구했다. 이후 그의 뛰어난 재능 때문에 그는 대한민국 HID요원이 되어 첩보 활동까지 펼쳤다.
성공적인 첩보 활동에 그의 사수는 자신과 함께 가자고 제안했지만 그는 피난민 수용소에서 자신만 기다리고 있을 가족을 만나기 위해 제안을 거절했다.
1955년, 가족들과 평범한 일상을 보내던 문규 씨는 소속 부대의 최고위급 간부와 2년 만에 만났다. 그는 문규 씨에게 가족의 생계와 일자리를 보장하겠다고 제안하고 당시 생활고에 시달리던 문규 씨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모든 것이 기밀인 HID. 이에 문규 씨는 가족에게 사실을 알리지 못하고 떠났다. 그런데 이 같은 사연을 알 길이 없는 문규 씨의 가족들은 이후 불행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문규 씨가 떠난 후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그의 아냐. 문규 씨의 가족은 김 대령이 약속했던 쌀과 돈을 받을 수 없었고 이에 문규 씨의 자녀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가족의 참극은 알지 못하고 강원도 최북단 안전 가옥에서 훈련을 펼치던 문규 씨는 1955년 9월 20일, 동료들과 함께 작전에 투입되었다. 그러나 작전은 계획대로 되지 않았고 이들은 북한에서 대기 또 대기를 해야만 했다.
침투 56일째, 힘들어하는 문규 씨에게 본부는 "아들을 생각해서 투항하지 마라"라는 의미의 메시지를 보냈고 그렇게 문규 씨는 극한의 배고픔과 추위 속에 3개월을 버텼다. 그리고 1956년 3월 4일, 본부에 마지막 무전을 보내고 연락이 끊어졌다.
그 후 1957년, 기적처럼 아들과 재회한 문규 씨. 그는 그날 새벽 아들의 얼굴만 보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사실 앞서 1956년 3월, 탈진한 채 북한군에 체포된 문규 씨는 이중간첩 회유를 수차례 받았다. 그러다가 북에서 HID 첩보 대원들을 만나고 그들에게 아들 한운이 부대를 통해 공작 훈련을 받고 있다는 이야기에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시키는 대로 하면 아버지를 만나게 해 주겠다는 이야기에 아무것도 모른 채 7살 때부터 북파 공작원 훈련을 받은 아들 한운 씨.
이에 문규 씨는 결국 이중간첩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북파 공작원에서 남파 공작원이 된 문규 씨. 이어 그는 남으로 오자마자 아들을 만나고 HID 본부에 자수했다. 그 후 세상에 없던 사람처럼 사라진 문규 씨의 사형 집행 보고서가 49년 만에 날아왔던 것이다.
1961년 5월 25일, 대구 형무소에서 간첩죄로 총살형을 당한 문규 씨. 이에 그의 아들 한운 씨는 아버지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재심 신청을 했고, 재심을 통해 그의 무죄가 확정됐다.
그렇게 간첩이라는 주홍글씨를 지운 문규 씨. 하지만 과거사 위원회는 여전히 찾지 못하고 있는 그의 유해를 언급하며 아쉬움을 전했다.
이에 제작진은 한운 씨와 함께 단서를 찾아 나섰다. 그 결과 당시 간첩이라는 누명 아래 희생된 이들이 많았다는 점과 무연고자 묘지에 묻혔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에 주목하며 당시 대구 형무소 무연고자 묘지를 추적했다.
그리고 이 방송이 공개된 후 더 많은 단서들이 모아지며 여전히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문규 씨를 비롯해 많은 이들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빌었다.
과거 북파공작원으로 양성된 인원이 공식적으로만 1만 3천여 명, 그중 7천여 명이 가족 곁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모든 것이 기밀이었기에 영문도 모른 채 가족과 이별해야 했던 북파공작원과 그의 가족들.
이에 북파공작원들은 "이 조국을 위해서 싸웠다는 것을 기억만 해줘도 감사하다"라며 국가를 위해 헌신하고 끝내 돌아오지 못한 자신들의 흔적이 잊히지 않기를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