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Y] 무덤 속 브론테도 놀랄 영화?…"폭풍의 언덕", 재해석의 호불호
[SBS 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에밀리 브론테가 무덤에서 일어날 영화"
영화 "폭풍의 언덕"을 본 관객의 한줄평이다. 죽은 지 178년이나 지난 작가가 관 뚜껑을 열고 일어날 수준의 원작 모독이라는 불호의 의미가 담긴 말이다. 원작이 위대할수록 그 작품을 다룬 콘텐츠에 대한 평가는 엄격한 법이다. 이미 전설의 반열에 오른 작품을 재가공하고 재해석한다는 건 그만큼 어렵다.
영국 작가 에밀리 브론테가 쓴 소설 '폭풍의 언덕'(1847)은 1920년작을 시작으로 8번이나 영화화됐다. 드라마까지 합친다면 횟수는 더 늘어난다. 사골로 치자면 이미 골수가 빠질 대로 빠져 새로운 무언가가 나오긴 쉽지 않다.
황량한 요크셔의 외딴 저택 '폭풍의 언덕'에 고아 소년 히스클리프가 들어온다. 주인의 딸 캐시와 히스클리프는 마치 하나의 영혼을 나눈 것처럼 서로에게 빠져들지만 시간이 갈수록 신분과 현실의 두터운 벽은 두 사람 사이를 잔인하게 갈라놓는다. 결국, 캐시가 대부호 에드거의 청혼을 받아들이자 버림받은 히스클리프는 깊은 상처를 안고 자취를 감춰버린다.
5년 후, '폭풍의 언덕'의 새 주인이 되어 나타난 히스클리프. 이미 에드거의 아내가 된 캐시 앞에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으로 그녀의 삶을 거침없이 뒤흔들기 시작한다.
"폭풍의 언덕"은 축약과 생략 그리고 색다른 초점으로 2026년 버전만의 개성을 구축했다. 히스클리프의 2대에 걸친 처절하고 집요한 복수극이 핵심인 원작과 달리 캐시와 히스클리프의 지독한 사랑을 그리는데 힘을 실었다. 그러다보니 히스클리프가 위더링 하이츠를 떠나게 되는데 큰 영향을 끼친 캐시의 오빠 힌들리도 등장하지 않는다. 또한 캐시, 히스클리프, 힌들리의 2세들도 마찬가지다.
영화를 연출한 에밀리아 펜넬 감독은 '여성의 욕망'에 포커싱을 맞췄다. 이 점에서 관객의 호불호가 나뉘었고, 원작 팬들의 성난 반응이 비롯됐다. 캐시가 성년이 되면서 사랑과 성(性)에 눈뜨는 모습을 비중 있게 다루며, 히스클리프가 떠났다 돌아오자 육체적 사랑에 탐닉한다. 원작 팬들은 문학성 높은 명작을 욕망과 관능으로 점철된 성애 영화로 만들었다고 성토했다.
반면 호의 반응을 보인 관객들은 선택과 집중을 통한 과감한 각색 방향이 새로웠다고 평가하는 분위기다. 특히 캐시와 히스클리프의 심리 묘사의 비중을 높여 몰입감이 높았다는 반응도 적잖았다. 이는 마고 로비와 제이콥 엘로디의 매력의 힘도 컸다. 히스클리프의 아역으로 등장해 강렬한 존재감을 발휘한 아역 오언 쿠퍼(넷플릭스 '소년의 시간'으로 주목받은 배우)의 초반 열연도 인상적이었다.
에밀리아 펜넬은 '프라미싱 영 우먼'(2020)을 연출해 아카데미 각본상을 받은 감독이다. '프라미싱 영 우먼'은 집단 성폭행으로 자살한 친구의 복수를 감행하는 한 여성의 거침없는 여정을 범죄 스릴러 장르로 풀어낸 파워풀한 영화였다. 돈과 권력이 있다면 법적 처벌도 요원한 사회에 맞써 범죄자를 직접 응징하는 주인공의 전투를 통해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는 사회적 시선에 대해 날선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여성주의 영화에서 두각을 나타낸 펜넬 감독은 19세기 고전을 영화화하면서 '여성의 주체적 선택'에 방점을 찍었다. 사랑과 욕망에 투신하는 캐시와 질투에 눈이 멀어 파국의 원인을 제공하는 넬리, 히스클리프의 의도와 목적을 알고도 그와의 결혼을 선택하는 이사벨라 등 여성 캐릭터들을 원작과 다르게 묘사하며 과감한 각색을 시도했다.
다만 감독의 의도가 다수의 관객에게 잘 전달된 것 같지는 않다. 캐시는 보기에 따라 육욕에 눈이 멀어 남편도 뱃속 아이도 나 몰라라 하는 무책임하고 대책 없는 여자로 보이기도 한다. 원작에서 캐릭터 그 자체로 빛났던 캐서린과 비교하면 마고 로비의 뛰어난 감정 연기에도 불구하고 몰입이 쉽지 않은 부분도 분명 존재한다. 히스클리프 중심의 서사에서 캐시 중심의 서사로 무게 중심을 옮기고 여러 여성 캐릭터들의 선택과 오판의 결과를 보여주면서 다양한 감정을 선사하고자 하지만 캐시를 제외하면 대부분 평면적으로 설계돼있다.
각색의 방향성에 따른 호불호와 별개로 영화의 미장센은 훌륭하다. 자유로움과 막막함을 동시에 내뿜는 광활한 언덕과 성난 듯 불어닥치는 바람, 비밀을 머금은 득한 안개 등 카메라는 배경이 하나의 서사가 되는 자연을 충실히 담아냈으며, 쓸쓸하며 공포스러운 느낌을 주는 웨더링 하이츠와 원색과 파스텔톤으로 무장해 동화의 집 분위기를 낸 린튼가의 대비를 준 미술도 돋보인다. OST도 젊고 감각적이다. 찰리 XCX의 트렌디한 음악을 함께 사용해 현대적인 OST를 완성했다.
위대한 문학의 힘은 시대를 초월하고, 고전은 고전 그 자체로 매력이 있다. 그러나 "폭풍의 언덕"은 현대적 해석과 말초적 감각을 가미해 도파민 지수를 한껏 끌어올렸다. 그 결과 고전의 뼈대만 남긴 채 다른 영화가 됐다는 인상을 남긴 것도 사실이다. 다르다와 틀렸다라는 평가가 동시에 나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