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꼬무 찐리뷰] 스티브 잡스보다 앞서 스마트폰 시대 예언한 '한국인'…故이건희 회장이 "꼭 살려라" 지시했던 사연은?
[SBS연예뉴스 | 강선애 기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1일 방송된 'K-컬처의 시초, 백남준'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가수 겸 배우 전효성, 배우 김국희, 안세호가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시대를 앞서간 괴짜
스마트폰으로 모든 걸 다 하고, 개인 방송이 가능한 1인 미디어 시대. 이런 현재의 모습을 1970년대에 정확하게 예측한 사람이 있어. 이건 미국의 스티브 잡스, 빌 게이츠보다 훨씬 앞선 시기야. 이 사람의 인생은 놀랍고 파격적이야. 시대를 앞선 괴짜, 혹은 천재로 불려. 오늘 '꼬꼬무'는 그 사람의 삶의 궤도를 따라가 볼 거야.
때는 1964년 5월. 일본 도쿄의 한 공연장이야. 27세의 미술학도 시게코는 어두운 객석에 앉아 무대가 시작되길 기다렸어. 오랫동안 손꼽아 기다려온 공연이었거든. 잠시 후, 170cm 정도 되는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의 남자가 무대에 올랐어. 남자는 무대 중앙에 놓인 두 대의 피아노 정 가운데에 앉더니, 양손을 각각의 피아노 위에 올려.
드디어 연주가 시작됐는데, 사람들의 반응이 좀 이상해. '이게 뭔가' 하는 표정에, 몇몇은 귀를 틀어막기까지 해. 갈고리로 건반을 마구 눌러대는 기괴한 연주였거든. 그렇게 연주하던 남자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무대 뒤로 사라져. 그리고 잠시 후 뭔가를 손에 들고 나왔어. 도끼였어. 그는 피아노를 사정없이 도끼로 내려치기 시작해. 나무가 부서지고 건반들이 막 튀어. 심지어 피아노를 있는 힘껏 밀쳐 넘어뜨렸어.
이게 끝이 아니야. 남자는 무대 위로 대야 하나를 가져왔는데, 안에는 먹물이 가득했어. 그는 자신의 머리를 먹물로 흠뻑 적셔. 그리고 그 머리카락을 붓 삼아서 뭔가를 막 그려. 어느덧 공연 막바지. 이 남자가 이번엔 신고 있던 가죽구두를 벗더니, 구두 안을 물로 가득 채우고는 그걸 그대로 마셔. 그리고 나선 인사도 없이 무대를 나가 버려. 이게 공연의 끝이야.
이런 파격적인 공연을 본 시게코는 '저런 광기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라고 생각했어. 나아가 '저 남자를 꼭 만나보고 싶다', '저 남자랑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어. 남자의 공연을 본 시게코는 알 수 없는 떨림과 전율이 차올랐대. 사실 시게코는 1년 전부터 이 남자를 흠모하고 있었어. 1년 전 한 신문에서 이 남자에 대한 기사를 비중 있게 실었어. 기사의 제목은 '파괴의 아름다움'. 유럽 예술계를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은 한 동양 남자에 대한 이야기였어.
이 남자의 이름은, 백남준.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로 유명한 예술가로 알고 있지? 오늘의 이야기는, 그동안 몰랐던 백남준에 대한 이야기야. 지금은 BTS, '오징어 게임', '케이팝 데몬 헌터스' 등 K-컬처의 세계적 위상이 높잖아? 백남준은 그보다 50년 정도 앞선, 1970년대에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린 예술가야. 그런데 그는 사실, 처음엔 비디오 아티스트가 아닌 전위 예술가였어.
먹물에 자신의 머리카락을 담가 붓 삼아 그리고, 바이올린을 불태우고, 피아노를 부수고. 지금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파괴적인 예술 행위를 그 당시에 했어. 시대를 너무나도 앞서 간 백남준의 전위 예술이야.
"그 피아노가 굉장히 비싼 거거든요. 선생님이 그걸로 연주도 하시고 그러면서 부쉈는데, 관객들이 다 입 벌리는 거죠. '와 이런 예술도 있구나' 이러는 거죠."
-이은주, 사진작가
"눈으로 보니까 정말 새로운 경험이었고,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구나. 예술적 집념에 의해서 이런 행위가 가능하구나."
-김홍희, 백남준 문화재단 이사장
▲ 동양에서 온 문화 테러리스트
1932년 서울 종로에서 태어난 백남준은 조선시대 때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부잣집 막내아들이었어. 종로와 동대문 일대에서 포목상을 크게 했던 집안이야. 당시 상류층 자제만 다닐 수 있었다던 서울 수송국민학교와 지금의 경기고등학교인 경기공립중학교에 다녔어. 17살이 되던 1949년엔 홍콩으로 유학을 떠나기도 했어. 백남준의 여권 발급 번호는 '7번'이야. 우리나라에서 7번째로 여권을 발급받았다는 거야.
유학길에 오른 지 1년 뒤인 1950년, 조카 돌잔치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에 돌아온 백남준은 오자마자 쫓기듯 다시 떠날 수밖에 없는 큰 사건을 맞게 돼. 그날 이후 백남준은 오랫동안 한국에 돌아오지 못했어. 6.25 전쟁이 터져 두 형들과 함께 피란길에 오른 거야. 이들이 도착한 곳은 일본. 백남준은 명석한 머리로 일본 최고의 대학 도쿄대에 입학했어. 대학에서 미학과 음악학을 전공한 백남준은 현대 음악에 큰 흥미를 느꼈어. 그래서 현대 음악의 본고장 독일로 가야겠다고 결심했어. 그렇게 1956년 백남준은 24세의 나이로 독일땅을 밟게 돼. 그리고 여기서 그의 인생을 뒤바꿀 한 남자를 만나게 돼.
이름은 존 케이지. 백남준이 "내 인생은 존 케이지를 만나기 전과 후로 나뉜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예술적 동지이자 스승으로 그를 존경했어. 존 케이지는 '4분 33초'라는 연주로 유명한 작곡가야. 근데 이 '4분 33초'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연주곡이야. 4분 33초 동안 주변 소음을 듣게 하려는 의도야. '소음도 음악이 될 수 있다'고 얘기하는 거야.
기존의 틀을 깨고 전위적인 예술을 하는 무리를 '플럭서스(Fluxus)'라고 해. 거기서도 존 케이지랑 백남준은 핵심 멤버였대. 1960년 10월 6일, 동양의 작은 나라 한국에서 온 이방인이 독일 예술계에서 일약 스타덤에 오른 사건이 있었어. 이날은 독일의 한 공연장에서 당대 예술가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연주회가 있었어. 무대에 선 건 백남준. 그는 역시나 기괴한 연주를 이어갔지. 그리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더니 청중 속으로 거침없이 달려가더니, 자신의 예술적 스승 존 케이지 앞에 멈춰 섰어. 손에 가위를 든 채.
그는 존 케이지가 목에 매고 있던 넥타이를 싹둑 잘라버렸어. 유럽에서 넥타이는 질서와 권위, 아버지를 상징한대. 그러니까 백남준은 넥타이를 자름으로써, 예술적 독립을 선언한 거야. 항간에선 "백남준이 아버지를 살해했다"라고 표현할 정도로, 그 충격은 어마어마했어. 그 현장에서 관객들은 비명을 지르거나, 분노를 참지 못하고 퇴장까지 했대. 이 사건 이후 백남준한테 붙은 별명이 있어. '동양에서 온 문화 테러리스트'라고. 그만큼 전위 예술가들에게도 백남준의 퍼포먼스는 충격과 공포였던 거야.
그로부터 3년 뒤인 1963년, 이번엔 독일의 한 화랑 앞이야. 관객들이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비명을 지르기 시작해. 일부는 너무 놀라서 거품을 물고 쓰러지기까지 했어.
"전시장으로 쓰인 집 입구에다가 살아있는 소, 도살된 소의 머리를 걸어 놨습니다. 그래서 피가 뚝뚝 떨어졌죠. 그랬을 때 많은 사람들의 생각은 '저기에서 무엇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 굉장히 흥미롭고 너무 충격적인 장면이었죠. 그래서 경찰들이 옵니다. 경찰이 '당장 저걸 철거하고 1m 넘는 깊이를 파서 묻으시오' 라고 조치를 하고 내려갑니다. 그런데 이 장면이 플럭서스 친구들, 자기 크루들하고는 즐거운 장면인 거죠. 예술가들이 사회에 던질 수 있는 '사회적 금기란 무엇인가?' '금기는 왜 존재하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했다고. 그리고 백남준이 전위 그룹으로서 전위성을 행하는 방식 자체에서 금기를 깨는 것에 대한 굉장한 희열이 있었고, 금기를 깨야 새로운 예술로 나아간다는, 그게 바로 전위성이라 생각한 거 같아요."
-박남희, 백남준 아트센터 관장
입장할 때부터 소 머리에 충격을 받고 전시관에 들어가잖아? 그럼 더 가관이야. 마네킹이 살해된 모습으로 누워있고, 방 안에는 피아노가 해부된 채로 널브러져 있기도 했어. 사람들이 가장 충격을 받은 건 또 다로 있어.
이 작품의 이름은 '자석TV'. 자석의 움직임에 따라 TV 화면이 바뀌어. 백남준은 자신의 첫 개인전에서 세계 최초로 TV를 예술적 도구로 활용한 거야. 이건 예술계에도 혁명에 가까운 행보였어. 당시만 해도 회화, 조각, 음악 같은 순수 예술들만 예술로 인정받았는데, TV를 가지고 하는 예술은 전위 예술 그 자체였어. 이때 새롭게 선보인 작품이 하나 더 있어.
"텔레비전이라는 건 지금까지 일방통행이었잖아요. 정부가 말하는 것을 국민이 듣는다는 식으로. 그런데 국민들은 그에 반응할 도구, 방법이 없었어요. 그래서 이 텔레비전을 반격하는 텔레비전으로 만들었어요. 그럼 어떻게 반격할 것인가? 이렇게 텔레비전을 치면, 반격이 돌아온다는 식이에요."
-백남준
이 작품의 이름은 '참여TV'. TV를 일방적으로 시청하는 기계가 아닌, 관객들의 소리를 통해 TV 화면을 직접 연주하고 그리게끔 만든 거야. 당시 관객들은 이 새로운 경험에 열광했어.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게 무슨 예술이냐. 장난하는 거 아니냐'라며 백남준을 비판하는 여론도 만만치 않았어. 예술의 정의 자체를 뒤흔드는 셈이었으니까.
▲ '비디오 아트'의 탄생
그렇게 독일 예술계에서 명성을 얻은 백남준은 뉴욕으로 이주를 결심해. 당시 뉴욕은 현대 예술의 본고장이자 전위 예술을 하는 많은 예술가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거든. 게다가 뉴욕은 백남준의 관심사였던 TV 방송의 메카였으니까, 어떻게 보면 당연한 행보였어.
1965년 10월 4일. 당시 교황이었던 바오로 6세가 뉴욕에 방문한 날이었어. 이때 백남준은, 초조하게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어. 소포를 기다린 거야. 배달된 소포 상자를 황급히 뜯어보고는, 상자 안 물건을 품에 안은 채 곧장 택시를 타. 그리고 그는 교황이 있는 곳을 찾아갔어. 뉴욕 시내 한 복판, 교황의 카 퍼레이드가 한창이었어. 그 모습을 본 백남준은 좀 전에 소포로 받은 물건을 꺼내 들었어.
이건 1965년에 출시된, 세계 최초의 휴대용 비디오카메라야. 백남준은 이걸 가지고 교황의 모습을 찍기 시작했어. 촬영을 마치고 그날 저녁, 뉴욕의 한 카페에 친구들을 불러 모았어. 일종의 시사회를 연 거야. 그리고 이게 바로, 백남준의 전설적인 '비디오 아트'의 시작이야.
그전까지 영상 촬영이란 건, 방송국이나 영화감독의 전유물이었거든. 이렇게 개인이 촬영하고 편집하고 전시까지 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지. 어떻게 보면, 1인 미디어의 시초가 백남준이었던 셈이야. 게다가 당시에는 TV 방송이나 영화 같은 영상 매체들을 예술이 아닌 오락으로 여겼어. 그런데 백남준은 이걸 '비디오 아트'라고 명명했어. 1965년 10월 4일. 이날이 바로 비디오 아트의 시작인 거지.
"예술의 기원설에 보면 사람들이 동굴에 벽화를 그려서 회화가 만들어지고, 그리고 우연하게 만들어낸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뭔가를 염원하면서 만들어진 그런 조각상들을 보고서 우리가 '최초의 조각이다'라고 얘기를 하고. 그 당시에는 예술가라는 이름이 없었기 때문에, 발견된 어떤 역사적인 근거를 가지고 '회화의 시작이다', '조각의 시작이다' 말하는 거지만, 백남준은 명확하게 텔레비전을 가지고 새로운 형태의 시공간, 그 시간이 지나가는 어떤 형태를 붙잡는 '비디오 아트'라고 하는 걸 만들어 내셨죠."
-박남희, 백남준 아트센터 관장
기존의 예술이 작가가 느낀 순간의 장면만 전달했다면, 백남준은 비디오를 통해 시공간을 기록하는 새로운 형태의 예술을 선보였어. 그 뒤 백남준은 미국과 독일에서 비디오 아트와 전위 예술 활동을 이어갔어. 하지만 예술가는 늘 배고프다고 하지? 백남준은 항상 궁핍한 생활에서 벗어날 수 없었대. 집안이 부자라고 했잖아? 그는 돈을 거침없이 썼는데, 예술가의 길을 반대한 집안에서 금전적 지원을 중단했어. 그런데 비디오 아트인만큼 여러 대의 TV가 필요하잖아? 1960년대 미국 내 TV 1대 가격은 약 300달러. 지금 물가로 환산하면 약 3,000달러 정도야. 한화로 약 400만 원 정도 되는 큰돈이야. 전시를 한 번 하려면 전재산을 탈탈 털어서 TV를 사야 했어. 심지어 한꺼번에 300대의 TV를 산 적도 있대.
하지만, 새로운 장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냉담했어. 새롭고 신기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딱 거기까지. 여전히 예술 작품으로 인정해주진 않았어. 비디오 아티스트로서 힘겨운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상황이야. 이때, 그에게 운명처럼 한 여인이 나타나.
▲ 운명의 여인
이름은 구보타 시게코. 맞아. 일본에서 백남준의 공연을 보고 첫눈에 반했던 미술 학도야. 그녀가 백남준의 곁에 있어. 둘은 어떻게 만났을까?
다시 시간을 되돌려 1964년, 일본. 시게코가 백남준의 공연을 봤던 그날. 공연이 끝난 직후 시게코는 친구들과 함께 대기실을 찾아가. 그리고 무대를 마치고 온 백남준에게 용기를 내서 "저희와 같이 차 한잔 하러 가시겠어요?"라고 물었어. 백남준은 시게코를 무심하게 쳐다보더니 "무대 뒷정리를 마저 하고 가겠습니다"라고 답했어. 잠시 후, 찻집에 나타난 백남준의 모습은 기괴했어. 먹물에 담갔던 머리카락은 막 감고 왔는지 물이 뚝뚝 떨어졌고, 후줄근한 양복 차림에, 구두가 아닌 슬리퍼를 신고 있어. 구두에 물을 따라 마셨으니, 신을 신발이 없었던 거야. 그 모습이 시게코의 눈에는 멋져 보였대. 하지만 짧은 만남을 뒤로한 채, 백남준은 뉴욕으로 떠났어. 시게코는 포기하지 않았어. 백남준을 따라 뉴욕으로 향한 거야. 뉴욕에 도착한 후 플럭서스 본부로 찾아가. 그리고 시게코는 플럭서스 멤버로 활동하며 백남준과 연인 사이로 발전해.
하지만 그뿐이었어. 백남준은 시게코에게 "난 결혼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야"라고 선을 그었어. 예술 활동을 하는 것만으로 시간이 부족하대. 그래도 시게코는 무려 13년 동안 백남준의 곁을 지켰어. 그러던 어느 날, 시게코에게 심경의 변화가 생겨. 사실 시게코는 백남준의 아이를 낳고 싶었어. 그런데 자궁에 악성 종양이 발견됐고, 아이는커녕 자궁 적출을 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어. 하지만 가난한 예술가 커플에게 미국에서의 병원비는 만만치 않았어. 시게코는 백남준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아서, 일본행을 결심했어.
짐을 싸던 시게코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백남준이, 갑자기 이런 말을 해. "시게코, 우리 당장 결혼하자"라고. 사실 백남준은 과거에 가입했던 보험이 있었거든. 법적 부부가 되면 시게코의 병원비 부담을 덜 수 있는 거야. 시게코는 거절했어. "난 이제 아이도 못 낳는다"면서. 이런 시게코에게 백남준은 "난 아이를 가질 생각이 없어. 나 닮은 아이가 태어나면 골치만 아프지"라면서 "시게코 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이야. 내가 당신이 없으면 안 될 것 같다고"라고 고백했어. 그렇게 백남준과 시게코는 결혼하게 됐어. 백남준은 시게코가 불임이라는 사실을, 마지막까지 누구에게도 얘기하지 않았대.
그런 시게코조차 백남준이 이해 안 될 때가 많았대. 하루는 백남준이 사 온 '셀프 생일 선물' 때문에 크게 싸웠다고 해. 그는 이걸로 작품을 만들 거라 했어. 그리고 2년 뒤 백남준은 진짜 이걸로 작품을 만들었어.
1972년 백남준이 자신의 생일 선물로 사온 건 '불상'이었어. 그리고 2년 뒤 이걸로 'TV부처'라는 작품을 만들어 공개했어. 부처가 가부좌를 틀고 TV 속의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야. 동양의 정신과 서양의 기술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는 호평을 받으면서 백남준은 이 작품으로 뉴욕에서 유명세를 얻게 돼. 지금도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백남준 작품이야.
"우리는 사실 우리의 얼굴을 평소에 잘 못 봅니다. 부처가 평생 인간을 구도하기 위해서 기도를 해도 본인의 기도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을 겁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데 이 'TV부처'는 이걸 보여주고자 하는 거죠. 부처가 수도하는 모습을 스스로 보는 이 성찰적인 순환과정을 우리에게 보여주면서 동양적인 사유와 종교심이라고 하는 부분의 일부와, 과학적 기술이라고 하는 일부가 결합돼서 하나로 융합돼서 보여주죠."
-박남희, 백남준 아트센터 관장
백남준의 예술은 새로운 기술을 접목시키거나, 작품에 직접 참여하게끔 유도하고, 동양과 서양을 융화하는 것이 특징이야. 그런데 그의 이런 철학 이면엔 숨겨진 아픔이 있어. 백남준은 한 나라가 분단되는 아픔을 두 번이나 겪은 사람이야. 1950년 한국에서 6.25 전쟁을 겪었고, 독일에서 지낼 땐 베를린을 동서로 나눈 베를린 장벽을 경험했어. 많은 전문가들은 이 두 사건이 백남준의 화합과 교류를 중요시하는 예술 철학에 많은 영향을 끼쳤을 거라 보고 있어. 그리고 백남준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예술관을 전 세계적으로 확장해 나가.
▲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예술
1984년 6월 22일, 김포 국제공항. 입국장은 수많은 취재 인파로 북적였어. 게이트가 열리고 모습을 드러낸 건, 백남준. 한국 전쟁 이후 약 35년 만에 한국 땅을 밟은 거야.
지금 BTS, 손흥민, 봉준호가 있다면, 1984년엔 백남준이 있었어. 백남준을 반기는 환영 인파가 몰렸어. 쏟아지는 기자들의 질문들. 사실 백남준은 얼마 전까지도 한국에선 유명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대대적인 관심을 받게 된 걸까? 그 이유는, 그가 또 한 번 전 세계적으로 기상천외한 일을 벌였거든.
6개월 전 프랑스 파리. 1984년 1월 1일 새해가 밝았어. 프랑스 파리의 국립현대미술관 격인 퐁피두센터에서 백남준과 예술가들이 분주하게 무대를 준비 중이야. 파리에 있는 진행자의 새해맞이 건배사를 시작으로 공연의 막이 올랐어. 첫 번째 순서는 백남준의 스승 존 케이지. 근데 장소가 뜻밖이야. 존 케이지는 뉴욕에, 백남준은 파리에 있어. 백남준은 세계 최초로, 대규모 위성 생중계 방송을 준비하고 있는 거야. 당시 인공위성 기술은 국가나 대기업 등에서 국방 안보나 상업적인 목적으로만 사용되고 있었어. 안테나 설치만 천문학적 비용이 들었다고 해. 근데 그걸, 미국과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대한민국까지 동시 라이브로 송출한 거야.
이 방송, 난장판이었대. 연결이 끊기고, 편집이 튀고, 무대에서는 실수 연발이었어. 하지만 백남준은 어쩐지 만족스러운 표정이야. 그는 "실패한 건 중요하지 않아요. 실패해서 더 흥미롭죠. 우리는 단 몇 백 명만 볼 수 있는 브로드웨이 공연보다 훨씬 더 적은 비용으로 전 세계의 수백만 명과 연결됐어요"라고 말했어. 시청자들의 반응도 폭발적이었어. 미국 350만 명, 프랑스 150만 명, 대한민국 680만 명이 동시에 이 쇼를 시청했어. 그것도 생방송으로. 전에 없던 위성 예술에 세계인들을 열광했어.
"위성 중계로 행해지는 우주 오페라가 이런 거구나라고 실감을 하게 됐죠. 위성 중계 작업은 생방송으로 된다는 게 중요한 거 같아요. 어떤 짜여진 각본에 의한 예술이 아니라, 우연의 예술, 사고의 예술, 우리 인생과 같은 그런 면을 보여준 점에서 새로운 경지라고 말할 수 있죠."
-김홍희, 백남준 문화재단 이사장
거기다 이 작품이 의미 있는 이유는 더 있어. '동물농장', '1984'로 유명한 영국 소설가 조지 오웰. '1984'의 가장 유명한 문구 'Big brother is watching you(빅브라더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 독재 권력에 의해 사람들이 감시와 통제를 당하는 암울한 미래가 소설 '1984'의 주 내용인데, 여기서 사람들을 통제하는 도구로 '텔레스크린'이라는 TV와 비슷한 기술이 나와.
"그 책을 썼을 때, 조지 오웰의 불안은 이 미디어들이 기술 권력이 우리를 감시하게 될 거다, 감시해서 디스토피아로 세계가 바뀔 것이다… 백남준이 보기에는 기술이라고 하는 게 그렇게 디스토피아적인 것만 아닐 거다, 멀리에 있는 인간들을 서로 만나게 한다든지, 서로 소통시켜 주면, 결국 전쟁을 줄일 수 있다고 생각한 거죠. 그런 미디어의 긍정의 가능성을 꺼내 보여준 거죠."
-박남희, 백남준 아트센터 관장
백남준은 조지 오웰의 미래에 대한 비관적인 시각을 다르게 본 거야. '조지 오웰, 당신은 반만 맞았다' 라고 이야기 한 거지. 이 방송의 제목은,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야. 백남준은 이 방송을 계기로 세계적인 유명세를 얻고 35년 만에 고국으로 금의환향한 거야.
귀국 이틀째 가족들과 함께 부모님의 묘소를 찾았어. 어릴 적 살던 집도 가보고, 학창 시절 친구들도 만나면서, 오랜만에 고향을 제대로 즐겼어. 사실 백남준은 뉴욕에서 지낼 때, 한국인만 만나면 그렇게 한국을 그리워하는 말들을 많이 했다고 해. 그래서일까, 백남준은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포함해서 위성 생방송 3부작을 만들었는데, 매번 우리나라의 굵직한 행사에 맞춰 공개했어. '바이 바이 키플링'이라는 작품은 86년 아시안게임, '세계와 손잡고'는 88년 서울올림픽을 기념해 만들었어. 그리고 그 무렵, 백남준은 또 한 번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사람을 만나게 돼.
▲ 영혼의 단짝
86년 서울아시안게임이 한창일 때, 코엑스에선 서울국제무역박람회가 열렸어. 거기서 이 사람을 만나게 돼.
이름은 이정성. 당시 나이 42세. 정성 씨는 중학교 졸업 후 TV 기술학원을 다녔어. 그 뒤로 오랫동안 TV기술자로 재직했어. 백남준을 만난 그날은, 서울국제무역박람회에서 삼성의 홍보용 모니터 탑을 쌓고 있었대. 백남준은 정성 씨를 만나자마자 대뜸 이렇게 물어.
"내 작품은 이것보다 TV를 더 많이 쌓아야 하는데, 할 수 있겠나?"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할 수 있는데, 정성 씨의 답이 더 가관이야.
"이런 와이셔츠에다가 만든 주머니 큰 거 달고, 거기다 물병 꽂고 그리고 오셔서 '탑을 만들려고 그러는데 할 수 있느냐?' 그래서 '할 수 있습니다' '그럼 해줘' 진짜 간단했어요. 앉은자리에서 그냥 몇 마디 얘기하고서, 그리고 미국으로 간다고."
-이정성, TV기술자
이게 그날 두 사람이 처음 만나서 나눈 대화의 전부였어. 심지어 정성 씨는 그때까지 백남준이 어떤 사람인지도 잘 몰랐대.
"그런데 후일에 선생님이 말씀하시는데, '저놈이 큰소리 빵 쳤는데, 잘하면 3분의 2 정도는 나오겠지'. 그러니까 한 600~700대 정도 나오면 잘 나오는 거다, '뭐 쟤가 다 하겠어?' 그러면서 마음을 먹고 미국을 가셨대요 선생님이."
-이정성, TV기술자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 두 사람의 일생일대 역작이 됐어. 바로 백남준의 역작 '다다익선'.
수많은 TV로 구성된 초대형 작품이야. 현재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로비 중앙에 위치해 있어. 높이 18.5m, 지름 7.5m로 사용된 TV가 무려 1,003대야. 88서울올림픽 폐막 다음날이자, 개천절인 10월 3일에 맞춰 TV 1,003대를 탑처럼 쌓아 올린 거야.
이날 이후 두 사람은 바늘과 실처럼 붙어 다니기 시작했어.
"백 선생님은 저하고 한 20년 같이 일하면서 정식 도면이 없어요. 작품을 만드는데 여기에 뭘 할지 도면을 저한테 줘야 하잖아요. 어떤 때는 스케치 정도 하면서 '이런 데는 이렇게 하고' 유치원 애들 그리듯이 그려놓고 나서는 '그거 있잖아? 그거 만들어', '파리에서 너하고 한 얘기 있잖아? 그거 만들어' 그럼 그거 만들라는 거예요."
-이정성, 비디오아트 테크니션
그야말로 백남준의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주는 손이 되어준 거지. 정성 씨를 포함해서 백남준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들이 그에 대해 말할 때 입을 모아 하는 말이 있어.
"언제나 미국에서 뉴욕타임스를 보지만, 항상 한국 신문을 보세요. 제가 가면 항상 물어요. '한국의 정치는 어떠냐? 문화 예술은 어떠냐?'"
-이은주, 사진작가
"문화 인류학에 굉장히 관심이 많으시고 뉴욕타임스를 보면 전문 섹션이 한 20페이지씩 나옵니다. 그 분야의 최고되는 물리학자, 과학자, 문화인류학자들이 글 쓴 게 계속 나옵니다. 자기는 그거를 한 2년 봤더니 그 분야에서는 거의 다 꿰뚫을 수 있다…"
-임영균, 사진작가
"정보의 중요성을 상당히 강조하셨어요. 아침에 일어나면 전 세계 신문을 탐독한다든가, 월가의 주가 지수에 관심을 갖고 또 프랑스 치즈가 어떤 종류가 있는지? 그리고 한국의 정세에 대해서도 빠삭했어요. 지식으로 알고 있고 흥미로만 알고 있는 게 아니라, 그것을 예술적 비전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부분들이 백남준의 천재성이다 하는 그런 느낌을 갖게 됐어요."
-김홍희, 백남준 문화재단 이사장
그는 엄청난 독서광이었다고 해. 그래서 예술뿐만 아니라 인류학, 철학, 물리, 기계공학까지 빠삭했대. 그리고 그것들을 자신의 예술에 녹여냈어. 이걸 가장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어.
▲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한 미래학자
1982년 뉴욕의 휘트니 미술관. 당시 공연을 앞둔 백남준은 사람들을 불러다 놓고 "세계 최초의 공연을 여러분들에게 보여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공연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겁니다"라고 말했어. 이 공연의 이름 '21세기 최초의 참사'야. 휘트니 미술관 앞 도로에서 공연이 펼쳐졌는데, 정말 참사가 벌어졌어. 교통사고가 난 거야.
직접 제작한 로봇이 횡단보도를 건너고, 그때 로봇이 교통사고를 당하는 공연이야. 로봇의 이름은 'K-456'. 백남준은 이 로봇을 1964년도에 만들었어. 키는 183cm 정도에, 걷거나 손을 흔들거나 말까지 할 수 있었대. 게다가 배설 기능까지 있었다고 해. 백남준은 18년 동안 이 로봇을 데리고 다니며 함께 공연을 했어. 그리고 1982년 로봇이 18살 되던 해에, 퍼포먼스의 형태로 로봇을 사망시켰어. 미래의 기계 문명 속에서 인간이 기계를 어떻게 대할 건지, 질문을 던진 게 아니었을까? 백남준은 이처럼, 미래학자로서의 면모도 보여줬어.
1974년 백남준이 록펠러 재단에 제출한 보고서야. 제목은 '후기 산업 사회를 위한 미디어 계획', '21세기는 26년 밖에 남지 않았다'. 이걸 보면 소름 돋는 내용들이 나와.
"화상 통화, 인터넷 쇼핑, 도서관 자료 찾기, 여론 조사, 의료 상담, 사무실 간 업무 전송, 그리고 그 외에 많은 것들이 TV를 확장한 혼합 미디어 전화 시스템으로 전환되며, 일상생활의 편리함 뿐만 아니라 삶의 풍요로움을 위해 수천 가지 새로운 애플리케이션을 제공할 것입니다. 이것은 MINI TV라고 불리며, 개인 대 개인 간의 정보 교류 형태입니다."
1974년에 백남준이 쓴 보고서는 '스마트폰'을 정확히 예견하고 있어. 이게 끝이 아니야.
"지금 우리가 보는 대중 오락 중심의 TV는 사라지거나, 다양한 형태를 가진 분화된 비디오 문화로 나누어질 것입니다."
이건, 유튜브 같은 1인 미디어를 설명하고 있어. 1970년대에 이미 스마트폰과 1인 미디어를 예측한 한국인, 바로 백남준이야.
▲ K-컬처의 시초 백남준
'다다익선'의 성공 이후 정성 씨는 백남준과 세계를 누비며 전시회를 준비했어. 독일, 미국, 프랑스, 스위스 등 1년의 반 이상을 해외에서 지내며 백남준의 둘도 없는 영혼의 파트너가 됐지. 그렇게 같이 다니길 6년째 되던 1992년. 이들에게 일생일대의 사건이 발생했어.
"1992년에 로마 전시를 하는데 로마 전시 끝나고 저녁때 선생님이 '오늘 베니스를 가자. 우리 스태프들 다 데리고!' 그래서 '거길 왜 가요?' 그랬더니, '1993년에 베니스 비엔날레에 참석한다고 안 그랬니?' 그래서 베니스를 가봐야 한다고. '아니 그때 하면 되지 왜 가요?' 했더니 '글쎄 미리 봐두는 게 도움이 되는 거야. 너희들도 봐 둬야 해. 그래야 준비할 때 어디에 설치할지 개념이 서고, 그래야 더 열심히 할 거 아냐'. 갑자기 우리 일행을 다 끌고 베니스를 가서 깜깜한 자르디니 공원 거길 가서 독일관 앞에 가서 잤다고요."
-이정성, 비디오아트 테크니션
베니스 비엔날레.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권위 있는 미술전이야. 미술계의 올림픽이라는 별칭이 있을 정도로, 전 세계에 내로라하는 예술가들이 모여 자신의 작품을 선보여. 1993 베니스 비엔날레를 위해, 정성 씨와 백남준은 밤낮으로 열심히 준비했어. 당시 얼마나 열심히 준비했냐면, 행사장인 자르디니 공원 벤치나 뜰에서 아무렇게나 드러누워 자고 있는 백남준이 자주 목격됐대. 그만큼 심혈을 기울였던 거지.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백남준은 한국인 최초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어. 미술가로서 최고의 영광이야. 그런데 백남준은 어쩐지 떨떠름한 표정이야. 베니스 비엔날레는 당시 한국관이 따로 없어서, 대한민국의 작가가 아닌 독일관의 작가로 참여한 게 못내 아쉬웠던 거야.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백남준의 간절함이 통했는지, 베니스에서의 아쉬움을 털어버릴 기회가 생겼어. 바로 이 사람을 만나게 된 거야.
김영삼 전 대통령.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아 대한민국의 위상을 드높인 공로로, 청와대에서 주는 신한국인 상을 수상한 거야. 그런데 청와대에 나타난 백남준의 모습이 어쩐지 이상하더래.
"그때 당시에 김영삼 대통령 시절인데요. 제가 김영삼 대통령 비서관을 했고요. 그때 보러 오셔서 대기실에 있을 때 제가 대기실에서 안내를 했고, 그때 처음 대면하게 됐던 거죠. 어떻게 보면 기인이라고 할까? 처음에 딱 나타났는데 부스스하고 머리도 단정하지 않고 넥타이도 맸는데 삐뚤게 매셨고, 바지와 재킷을 걸친 것과 와이셔츠와 전혀 이게 조화가 이루어지지를 않았고, 뭔가 여기(안주머니)에는 좀 불룩한 게 이렇게 툭 튀어나와 있어요. 그러니까 경호원들이 이걸 제지를 하려고 해서 제가 '하지 마라' 예술인들은 그런 거 너무 싫어하니까 '하지 마라' 라고 했던 일화도 있습니다."
-정병국 위원장,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백남준은 김영삼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건립의 필요성을 역설했대. 그렇게 한참 동안 대통령과 이야기를 나누고 접견실에서 나온 백남준은, 안주머니에 손을 넣고 정체불명의 불룩한 걸 꺼냈는데, 바로 이거였어.
에너지 드링크. 그리고는 뚜껑을 따고 벌컥 마시며 "어우 시원타" 한마디 남기고는 홀연히 떠났다고 해.
"일반인으로는 상상이 안 되잖아요. 에너지 드링크를 넣고 들어온다는 것도 말이 안 되고, 대통령 만난다고 하면 당연히 청와대 들어오니까 소지품을 전부 검색하거든요. 근데 에너지 드링크를 들이마시고 '시원타'라고 하는 걸 보고 그 당시에는 참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제가 백남준의 세계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됐을 때 '아 이게 하나의 퍼포먼스였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죠."
-정병국, 당시 청와대 비서관
그로부터 2년 뒤인 1995년, 베니스 비엔날레의 자르디니 공원에 한국관이 세워졌어. 강력한 경쟁국이었던 중국을 제치고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국가관을 갖게 된 거야.
▲ 백남준을 살린 의외의 인물
한국의 현대 미술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백남준. 그에게는 일평생 딱 두 가지의 소원이 있었대. 첫 번째는 베니스 비엔날레 황금사자상 수상. 이건 이미 이뤘지? 두 번째는 미국 구겐하임 미술관에서의 개인전. 뉴욕 맨하탄에 있는 구겐하임 미술관은 현대 미술의 메카이자 세계 미술에선 그 위상이 절대적인 곳이야.
1996년 4월 9일. 정성 씨는 뉴욕의 한 호텔에 머물면서 백남준의 두 번째 소원인 구겐하임 미술관 전시를 준비하고 있었어. 그날 저녁 한국에 방문했다가 뉴욕에 돌아온 백남준이 정성 씨를 찾았어. 별일 없는지 체크한 백남준은 들어가서 쉬겠다며 먼저 숙소로 돌아갔어. 그렇게 밤이 지나고 그날 새벽, 자고 있는 정성 씨에게 다급한 전화 한 통이 걸려와. 아까 분명히 멀쩡히 숙소로 돌아가는 걸 봤는데, 갑자기 백남준이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거야. 백남준은 그날 저녁 식사를 하던 도중, 재채기가 멈추지 않았고 결국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고 해. 깜짝 놀란 정성 씨는 곧장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어.
"택시 타고 쫓아가니까 선생님이 있는데, 얼굴이 이미 산 사람의 얼굴이 아니에요. 쓰러졌으니까 말도 잘 안 되고…"
-이정성, 비디오아트 테크니션
정성 씨는 곧장 담당 의사를 찾았어. 그런데 의사의 말이 의미심장해.
"시티콜린이라는 약이 있어요. 그게 뇌출혈인 사람한테 쓰는 약인데 미국은 없대요. 그러니까 한국에 알아봐서 그 약을 구해줄 수 있으면 빨리 구해다 주면 좋겠다. 그래서 급하잖아요."
-이정성, 비디오아트 테크니션
뇌출혈로 쓰러진 백남준에게 필요한 약이 미국에는 없고 한국에는 있는 상황이야. 정성 씨는 고민 끝에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그리고 다음날 정성 씨는 손에 담당의사가 말한 약을 들고 병원에 도착했어. 어떻게 하루 만에 약을 공수해 온 걸까?
"H화랑 박명자 회장한테 전화를 했어요. 지금 홍라희 여사한테 연락해 가지고 그 약 좀 구해가지고 빨리 뉴욕으로 보내줄 수 있냐 했더니만, 그게 그다음 날 내 손에 온 거예요. 그걸 들고 난 택시 타고 병원에 가니까, 의사가 어떻게 어제 얘기했는데 약이 금방 오냐고. 어떻든 '이거 맞냐?' 그랬더니 맞대요. 그 약을 쓰기 시작했는데, 선생님이 그 후에 얼마 있다가 그러더라고요. '그 약 효과 많이 봤다고 의사가 그러더라', '수고했다'라고."
-이정성, 비디오아트 테크니션
정성 씨에게 약을 구해다 준 홍라희 여사. 바로 故 이건희 회장의 아내야. 백남준이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은 이건희 회장은 뉴욕 지사에 있는 직원들에게 "지금부터 모든 치료비는 나와 홍라희 여사가 책임질 테니까, 백남준을 반드시 살려내라!"라고 말했다고 해.
백남준과 두 사람의 인연은 9년 전, 1987년 서울 신라호텔의 한 식당에서 시작해. 백남준은 원래 친분이 있는 H화랑 박명자 회장의 소개로 홍라희 여사-이건희 회장과 만남을 갖게 돼.
그날도 백남준은 어김없이 헐렁한 와이셔츠에 멜빵바지 차림으로 나왔어. 그런데 오자마자 잠시 화장실에 갔다 온다고 하더니, 아주 화려한 넥타이를 매고 나타났어. 그리고 넉살 좋게 이렇게 얘기했대. "우리나라 경제 대통령을 만나는데 넥타이를 매지 않을 수 없죠." 그러자 이건희 회장은 이렇게 말했대. "그럼 다 같이 넥타이를 풀고 격식 없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합시다."
이날 식사 자리는 웃음이 끊이질 않을 정도로 분위기가 너무 좋았다고 해. 그리고 얼마 뒤, 백남준은 삼성과 공식적인 후원 계약을 맺게 됐어. 사실 그전까지 백남준은 주로 일본의 소니TV를 사용하고 있었거든. '다다익선'에 사용된 1,003대의 TV 역시, 삼성에서 지원해 줬다고 해.
이런 인연으로 이어진 한국에서의 도움과, 아내 시게코의 헌신적인 노력 끝에 백남준은 상태가 호전돼 한 달 뒤 재활병원으로 옮겨졌어. 하지만 백남준은 이 일로 좌반신이 마비돼 평생 휠체어를 타야만 했어.
▲ 백남준의 마지막 퍼포먼스
어느덧 세기가 바뀌고 새천년이 열린 2000년. 4년이란 세월이 흐르는 동안 백남준은 마이애미 등지에서 지내며 건강 회복에 매진했어. 4년 전 백남준이 꼭 이루고 싶어 했던,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의 개인전. 아쉽게 열지 못 했잖아? 4년 만에 다시 천금 같은 기회가 찾아왔어. 21세기 첫 기획 전시로 백남준의 개인전을 하고 싶다고 구겐하임 쪽에서 연락이 온 거야.
2000년 2월 11일. '백남준의 세계'라는 이름으로 드디어 구겐하임에서 개인전이 열렸어. 아시아 작가로서 이곳에서 개인전은 최초야. 그때 전시회 사진촬영을 담당했던 은주 씨는 아직도 그날의 광경을 잊을 수가 없대.
"9시부터 벌써 사람들이 줄 서 있는데, 그 백남준 선생님의 전시를 보겠다고. 그런데 그 줄 서 있는 분들이 전부 다 외국 분들이었어요. 그게 오픈하자마자 그 사람들이 다 들어와서 전시를 보는데, 저도 그 전시를 보면서 깜짝 놀랐어요. 구겐하임은 1층부터 7층까지 거든요. 전층에 전부 백남준 선생님 작품이 다 전시가 돼있었어요. 정말 제가 그때 그걸 보고, '백남준이 이렇게 유명했구나'…"
-이은주, 당시 구겐하임 특별전 촬영
여기서 또 한 가지 깜짝 놀랄 일이 있었어. 백남준이 이전까지 보여주지 않았던 새로운 장르를 선보인 거야. 바로 레이저 아트 '야곱의 사다리'.
빛을 조형 언어로 사용하여 공간을 변화시키려고 한 레이저 예술. 대형 레이저 아트를 새롭게 선보인 거야.
그리고 6년 뒤, 2006년 2월 3일 뉴욕이야. 평소엔 보기 힘든 전 세계 유명한 예술 거장들이 이례적으로 한 장소에 모여들기 시작해. 비틀즈 존 레논의 아내이자 플럭서스 동료였던 오노 요코가 연설을 하고, 유명 인사들이 넥타이를 자르는 퍼포먼스를 따라 해. 화기애애한 분위기야. 이날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모인 이유는 단 하나, 백남준을 보기 위해서였어.
슬픔에 사로잡힌 시게코 여사는 남편과 마지막 인사를 나눴어. 한 시대를 뒤흔들고 미술계 판도를 바꾼 현대 미술의 거장 백남준이 별이 된 거야. 장례식장은 백남준스럽게, 파격적이고 유쾌하게 진행됐어. 백남준의 조카는 앞으로 나와 이런 말을 했어.
"여러분 모두에게 가위를 나눠드리겠습니다. 옆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넥타이를 잘라 관 속에 넣어주세요. 비싼 넥타이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 비용은 고인이 보상해 줄 겁니다."
퍼포먼스로 모인 수십 개의 잘린 넥타이들. 참석한 사람들의 넥타이를 잠들어 있는 백남준 위에 놓아주면서, 뉴욕에서의 장례식은 유쾌하게 마무리됐어. 그리고 그로부터 49일 뒤인 2006년 3월 18일, 이번엔 서울 강남이야.
백남준의 49제 추모식에 유족, 친지들과 시민들까지 모여 그를 위한 헌정 퍼포먼스를 펼친 거야. 백남준의 바이올린을 깨부수는 퍼포먼스를 다 같이 따라 하며 그를 기렸어. 백남준의 유골은 '세계는 하나다'라는 그의 뜻을 따라, 미국, 독일, 한국에 나뉘어 안치됐어. 마지막까지 백남준은, 사람들에게 소통과 교류라는 메시지를 주면서 떠났어. 그의 전위적인 삶과 실험적인 작품들을 통해 끊임없는 도전 정신, 예술가로서의 사명감을 보여주고 싶었던 걸 아닐까.
지금 세계적으로 K-컬처가 위상을 떨치고 있잖아. 그 시작점에는 백남준이 있었어. 빅뱅의 태양, BTS의 RM 등 지금도 그를 좋아하고 존경하는 후배 예술가들이 많은 이유도 그 때문일 거야. 요즘 AI다, 메타버스다, 급격하게 발전하는 시대 속에 '인간성 상실'이라는 말이 많잖아. 하지만 백남준은 달랐어. 기술이 인류를 지배하는 조지 오웰의 디스토피아 대신에, 기술을 통해서 사람들을 더 사람답게 만드는 유토피아를 꿈꿨어.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인간다움은 잃지 말자"는 백남준의 메시지. 2026년을 살아갈 우리에게 꼭 필요한 지침서가 아닐까.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강선애 기자 sakang@sb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