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상상을 넘어선 무대, '라이프 오브 파이'는 현장에서 완성된다

작성 2025.12.16 12:43 수정 2025.12.16 12:43

라이프 오브 파이

[SBS연예뉴스 | 강경윤 기자] 소설과 영화의 감동이 과연 무대 위에서 재현될 수 있을까 의심했다. 소설과 영화가 상상과 창조의 영역이라면, 무대는 현장감과 현실감의 예술이라고 믿어왔기 때문이다.

뮤지컬 '라이프 오브 파이(Life of Pi)'는 그 고정관념을 기분 좋게 배반한다. 무대는 소년 '파이'의 기억처럼 유연하게 움직인다. 어느 순간 관객은 태평양 한가운데 구명보트 위에 놓이고, 또 어느 순간 인도의 동물원에서 염소를 쓰다듬던 동심으로 되돌아간다. 시간과 공간, 현실과 상상은 분절되지 않고 파이의 내면을 따라 흐른다.

문득 중학교 수학 시간에 배웠던 '파이(π)'가 떠오른다. 끝없이 이어지는 무한대의 수. '라이프 오브 파이'가 말하는 파이 역시 계산으로는 닿을 수 없는 영역에 있다. 인간의 삶처럼, 끝을 알 수 없고 쉽게 증명할 수 없는 세계다.

'라이프 오브 파이'는 두 가지 이야기 축으로 진행된다. 하나는 벵골 호랑이 '리처드 파커'와 함께한 거의 신화에 가까운 생존기, 다른 하나는 재난 속에서 충분히 벌어졌을 법한 인간 군상의 처절한 이야기다. 함께 존재할 수 없을 것 같은 두 진실은 무대 위에서 나란히 놓이고,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무엇을 믿을 것인가. 그리고 우리는 왜 어떤 이야기를 믿고 싶어 하는가.

라이프 오브 파이

227일 만에 구조된 유일한 생존자 파이를 찾아온 보험 조사관에게, 그는 조용히 되묻는다. "어떤 이야기를 들려드릴까요."

이 작품의 백미는 단연 퍼펫이다. 그중에서도 최고의 장면을 꼽자면 파이가 바다거북을 사냥해 정신없이 먹어치우는 장면이다. 거북을 해체하고 피가 솟구치는 모습이 하나의 예술작품처럼 유연하게 이뤄진다. 인간의 처절한 몸부림과 자연의 신비가 넘실거리는 무대에서 파이가 처한 처절한 현실은 아름다운 장면처럼 착시가 생겼다.

벵골 호랑이를 비롯해 오랑우탄, 하이에나, 얼룩말, 기린, 바다거북까지. 퍼펫티어들에 의해 생명을 얻은 동물들은 무대에서 뛰어다닌다. 퍼펫 안에서 또는 밖에서 거대한 걸음걸이부터 작은 눈동자와 귀의 움직임까지 묘사하는 퍼펫티어의 치밀하게 계산된 동선과 퍼포먼스가 '라이프 오브 파이' 무대를 대체불가의 개성으로 작동한다. 또 광활한 태평양과 별빛이 반짝이는 밤하늘 등 자연의 변화가 매끄럽게 전환되어 얀 마텔의 원작 소설 '파이 이야기'를 시각화했다.

라이프 오브 파이

'라이프 오브 파이'는 두려움과 상실, 관계 속에서 얻는 믿음과 회복력, 신념과 희망에 대한 거대한 스토리텔링이다.

소설에서 영화로, 또 무대로 옮겨진 이 작품은 2021년 웨스트엔드, 2023년 브로드웨이 초연 이후 올리비에상 5관왕, 토니상 3관왕이라는 성과를 기록하며 관객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상상조차 어려운 고난 앞에서 인간이 끝내 붙잡는 용기와 인내, 그리고 우리가 믿고 싶어 하는 이야기의 힘은 라이브 예술일 때 가장 강렬해진다. 이것은 계산할 수 없는 이야기다. 그래서 반드시, 현장에서 봐야 한다.

'라이프 오브 파이'는 내년 3월 2일까지 GS아트센터에서 공연된다.

kykang@sbs.co.kr

강경윤 기자 kykang@sb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