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꼬무 찐리뷰] 대원 17명과 침몰된 '해경 72정', 45년 만에 찾았다…6개월 수중 탐사로 얻은 기적

작성 2025.11.21 12:11 수정 2025.11.21 12:11

꼬꼬무 찐리뷰

[SBS연예뉴스 | 강선애 기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20일 방송된 '꼬꼬무'의 200회 특집, '72정은 응답하라'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감독 장항준, 방송인 전현무, 배우 이연희가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수면 아래 뭔가 있다

오늘은 '꼬꼬무' 200회에 맞춰 특별한 이야기를 준비했어.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일 거야. 아주 오랜 세월 동안 비밀스러운 장막 속에 감춰진 이야기야. 지금부터 시작할게.

때는 2019년 3월 강원도 고성군 거진항 앞바다에 커다란 배가 떠있어. 한국해양과학기술원 소속의 이어도호야. 이어도호는 해양 생태 조사부터 심해 지형 탐사까지, 다양한 연구에 투입되는 해양조사선이야. 바다 위에서 움직이는 연구소 같은 거야. 이어도호 갑판 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어. 그중에는 한국해양과학기술원 해양방위 안전센터 센터장, 정섬규 박사도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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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원들이 어떤 장비를 들어 해수면 아래로 내리기 시작해. 얼핏 보면 미사일처럼 생겼어. 이건, '사이드 스캔 소나'라는 거야. 해저 바닥에 비스듬하게 음파를 쏘아 보내고, 되돌아오는 반사파를 받아서 영상으로 바꿔주는 장비야. 깊고 어두운 바다 밑바닥을 눈으로 보여주는 첨단 수중 탐사 장비야.

정 박사는 모니터에 비추는 해저면의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어. 이곳 동해 거진항 앞바다의 수심은 80미터에서 최대 120미터까지 이른다고 해. 끝없이 펼쳐진 망망대해에서 정 박사가 찾는 건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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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에 해경하고 같이 조사를, 탐색을 하자고 했거든요. 저희가 좋은 장비를 가지고 있고 많은 경험이 있기 때문에, 해경 쪽에서 저희한테 요청이 있어서 저희가 참가를 하게 되었습니다. '해결 72정'을 찾는데 도움을 주자…"
-정섬규, 한국해양과학기술원 책임연구원

해경 72정. 이어도호는 해경 측의 요청으로 깊은 바닷속으로 사라진 72정을 찾고 있는 거야. 72정은 해양경찰 소속 60톤급 경비정이었어. 길이 24미터에서 폭 5미터 정도 크기야. 동해를 지키며 경비 임무를 수행하고 어민들을 보호하는 해경의 소형 경비정이야. 어쩌다 72정은 깊은 바닷속에 가라앉을 걸까. 사건이 일어난 그날로 돌아가볼게.

▲ 해경 72정 침몰

1980년 1월 21일. 아주 추운 날 겨울날. 속초 부둣가에서 72정이 출항 준비가 한창이야. 72정의 정장은 해양경찰 소속 김정곤 경위야. 김 경위가 어떤 분인지 아내 손경숙 씨의 이야기를 들어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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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야 세상에 좋지요. 너무너무 현명한 사람인데. 가정적으로 완벽해요. 딸들 말도 못 하게 예뻐했습니다. 대문에 출근 나갈 때 손잡고 나갔지요. 우리 딸내미 둘이랑. '우리 공주들 둘이 따라간다'고 하면서. '춥다 집에 들어가라. 엄마 말 잘 들어라' 하면서 애들한테 손 흔들고 갔다고. 딸들이 나한테 와서 얘기하더라고요. 경비 가니까 그런가 보다 생각했죠."
-손경숙, 김정곤 경위 아내

남편은 어린 두 딸의 손을 잡고 대문을 나섰어. 부둣가까지 따라온 두 딸을 돌려보내고, 72정에 올랐다고 해. 며칠 후 새벽, 남편이 2박 3일간의 경비 근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날이야. 손 씨는 일찍 일어나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어. 그런데 누군가 이른 아침부터 집에 찾아왔어. 해경의 부식을 배달하는 아주머니가 대문 앞에 서 있었어.

"사모님, 소식 못 들으셨어요? 72정이 지금 무전이 안된대요. 지금 부두가 난리가 났어요!"

불길한 예감이 엄습해 오는 그때, 비상사태를 알리는 사이렌 소리가 온 마을에 울리기 시작해. 손 씨는 바로 해양경찰 지구대로 달려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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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있으니까 막 사이렌 불고 부두에서 막 난리가 났더라고요. 그래서 경찰청에 들어가니까 한다는 말이, '자식들 보고 살아야 안 되겠습니까'…"
-손경숙, 김정곤 경위 아내

72정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이 의문에 답해줄 분을 찾아봤어. 1980년 1월 23일 사건이 일어난 그날 새벽, 속초 해경 지휘소에서 상황근무를 보고있던 분을 어렵게 만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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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추운 날씨였어요. 겨울철에. 난 야간 근무를 하고 있는 와중에 연락을 받았죠. '72정이 침몰하고 있다'고. 갑작스럽게 침몰하고 있다고. 어떻게 침몰했는지 모르죠 나는. 너무 다급하니까 그런 얘기는 없이. '경비정이 침몰하고 있으니 인명구조를 요청하라'고 연락받았죠. 상상도 못 할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하고. '이게 꿈인가, 이게 뭐지?' 이랬죠."
-민윤진, 당시 속초 해양경찰대 근무

인근 해군기지로 달려간 그는 다급하게 "72정이 침몰하고 있다"고 알렸어. 비상 사이렌이 울리고 해군 고속정과 해경 경비정들이 일제히 출동했어. 조명탄이 발사되자 칠흑같이 어두운 바다가 환하게 밝아져. 72정 생존자를 찾기 위한 필사의 구조가 시작됐어.

1월 한겨울이야. 바다는 얼음장처럼 차가워. 만약 바다에 빠졌다면, 오래 버티기 어려워. 골든타임이 지나기 전에 찾아야 해. 조명탄 불빛 아래 드러난 수면 위에는, 안타깝게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 수색은 계속되고, 어느새 먼바다 위로 동이 트기 시작해. 하지만 환하게 밝아오는 바다 위 보이는 건 구조에 나선 배들 뿐이었어. 1980년 1월 23일 새벽, 그렇게 72정은 사라졌어.

"인명 구조도 제로로 되고 상황 종료가 돼서 배가 들어올 거 아니에요. 초상집이죠 완전히. 말 그대로 머리가 엉켜서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민윤진, 당시 속초 해양경찰대 근무

72정에는 해양경찰 9명, 군 입대 후 해경에 배치된 전투경찰 8명, 총 17명이 타고 있었어. 72정에 타고 있던 승조원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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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이 20대야. 하지만 지금 17명 모두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황이야. 사고 소식은 곧 가족들에게 전해져.

▲ '불의의 사고로 실종됐습니다'

강릉에 살던 9남매 중 막내인 조병주 씨. 당시 중학생이던 그는 집 마당에 굴러다니던 종이 한 장을 발견했대. 종이에 적힌 내용을 보고 깜짝 놀라. 이런 내용이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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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정 순경 조병섭. 불의의 사고로 실종." 셋째 형이 실종됐다는 소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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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체부를 통해서 그냥 전보가 온 겁니다. 저희한테 가족한테 전해준 것도 아니고 그냥 마당 한복판에다 던져 놓으니까. 겨울에 바람에 날려서, 저녁때나 돼서 마당 구석에 종이가 하나 있는 걸 봐서. 들어가 봐야 한다고 해서 어머니하고 막, 그때는 사망했다고 해도 긴가민가 아무도 믿지 않았는데. 들어가 보니 현실이었습니다."
-조병주, 조병섭 순경 동생

막내 병주 씨는 직장에서 일하던 큰 형한테 곧바로 소식을 알렸어. 큰형은 막내 동생의 다급한 연락을 듣자, 문뜩 지난밤에 꾼 꿈이 떠올랐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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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꿈을 잘 안 믿는데요. 그때부터 꿈을 믿게 돼서. 저녁에 직원들하고 같이 집에서 놀고 있었어요. 술도 한잔 했고 잠이 오더라고. 잠깐 눈을 감았는데, 대통령이 국장이 됐다고 국군 묘지로 가는 꿈을 꿨어요. 그래서 '이상하다, 내가 왜 이런 꿈을 꿨지?' 했죠. 그래서 출근해서 일을 하는데 막내한테 전화가 오더라고. '형님 놀라지 마세요. 섭이 형이 사고 난 거 같다' 그러더라고. 막내한테 연락이 오니까, 아차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섭이 동생이 조그마할 때 '너 이다음에 커서 뭐 될래?' 하면 10번 다 '대통령'이라 했어요. 그래서 내가 이런 꿈을 꿨구나…"

-조병묵, 조병섭 순경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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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형은 바로 집으로 달려갔어. 그리고 산에 나무하러 갔던 아버지도 소식을 듣고 달려오셨어. 이렇게 모든 식구들이 속초로 향해. 이런 일은 전국 각지에서 벌어지고 있었어. 다른 가족들의 이야기를 들어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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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11시 정도 돼서 어머니가 장에 가서 전보를 받았는지, 전보를 가지고 왔더라고요. '72정 경사 하연수 불의의 사고로 실종됐음' 간단했습니다. 그때부터 어머니는 우시고. 실종이라는 단어, 불의라는 단어를 주위에 물어보고. 거의 사망이라고 생각했죠 그때부터."

-하치영, 하연수 경사 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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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초 해양경찰서 자대배치받아서 얼마 안 돼서 사고를 당하신 겁니다. 그때 아버님은 담배만 피우고 한숨만 쉬고 계시고, 어머니는 혼절하다시피 하시면서, 형님 이름을 우시면서 계속 부르셨습니다. 그 기억이 생생합니다."
-이의상, 이진상 이경 동생

단 한 줄로 전해진 비보. 소식을 들은 가족들은 서둘러 속초로 향했어. 강릉에서, 태백에서, 부산에서, 멀리 남해에서. 제발 사실이 아니길, 내 남편이, 내 아들이 무사히 돌아오길 바라면서. 속초에 도착한 가족들은 해양경찰을 찾아갔어.

▲ 72정이 사라졌다

그 곳에서 72정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듣게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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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초 해경에 가니까 사고가 났다고 하면서, 해도를 놓고 설명을 하더라고요. 처음에는 뭐 저쪽으로 가지 않았냐. 또 뭐 어떤 다른 사고로 표류하고 있지 않냐. 여러 가지 추측들이 난무했지만, 결국 해경 측의 설명은 거진 해군에서 레이더로 보는 게 있대요. 보니까 '조그만 물체 두 개가 만나더니 하나는 없어지고 하나는 살더라. 그래서 사고로 확실히 인정한다' 이렇게 이야기하더라고요."
-조병묵, 조병섭 순경 형

72정이 충돌사고로 사라졌다는 거야. 충돌한 배 역시, 해경 함정이었대. 72정은 60톤급 경비정이야. 하지만 200톤급 경비함이 72정을 들이받았대. 3배나 무거운 함정이 옆에서 충돌하며, 그대로 타고 넘어갔다고 해. 그래서 72정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대. 72정 승조원의 가족들은 이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어. 그들 사이에선 사라진 72정을 두고 여러 가지 소문이 나돌았다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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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수밖에 없죠. 흔적이 없으니까. 뭐라도 뜨고, 증거물이 있어야 되는데. 아무것도 없이 가라앉아 버렸으니까. 별 소문이 다 있었습니다. '거진 쪽에서 총소리가 났다', '북한으로 납북됐다', 충돌을 한다고 해도 사람이라도 떠야 할 거 아닙니까. 흔적이 없으니까, 그렇게밖에 의심이 안 되는 겁니다."
-이의상, 이진상 이경 동생

한국전쟁 이후 조업 중이던 어부들이 북한 경비정을 만나 피랍된 일이 벌어지곤 했어. 통일부 통계에 따르면, 휴전 이후 북한경비정에 납치된 어선이 500척에 달하고, 피랍된 어민은 3,729명이래. 더구나 강원도 최북단 거진항은 북한에서 약 20km 거리 밖에 안 되는 곳이야. 그러다 보니 72정도 북한에 끌려간게 아니냐는 소문이 떠돌았던 거야.

하지만 이런 소문들은 얼마 안 가 자취를 감추게 돼. 사고 지점을 수색하던 중에 수면 위에 떠있는 뭔가를 발견했거든. '구명벌'이라고, 선박이 침몰하게 되면 자동으로 펼쳐지는 비상 구명보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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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 한가운데서 72정의 것으로 보이는 구명벌을 발견한 거야. 이 구명벌을 찾았다는 건, 72정이 납북된 게 아니라 거진 앞바다에 침몰했다는 의미겠지. 그럼 혹시, 구명벌 안에 생존자가 있었을까? 구명벌 안에는, 아무도 없었어.

그래도 수색은 계속 됐어. 해경 경비정, 해군 함정, 수산청 어업지도선, 일반 어선 등 총 200여 척이 동원돼서, 충돌해역 주변 80km를 샅샅이 수색해. 조병섭 순경의 큰형도 수색선을 타고 바다로 나갔어. 망망대해에서 뭔가 보이는게 없나 찾고 있었는데, 저기 수면 위에 뭔가 떠있는게 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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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되던 날 답사했는데 바다에, 다시 그 지점에 가니까 부유물이 뜨는 거예요. 건져보니까, 업무일지 쓴 글씨가, '조병섭' 해서 딱 보이더라고. 제가 섭이 글씨체는 알잖아요. 그때 당시엔 심장이 멈추는 거 같았죠. 부모님 보면 속상할까봐 부모님 보여주지 않았죠. 그걸 보고 '얘가 사고 난 건 확실하구나' 그렇게 생각했죠."
-조병묵, 조병섭 순경 형

하지만 그것뿐이었어. 며칠이 지나도, 승조원 17명 중 단 한 명도 발견하지 못했어. 하지만 해경은 곧 사고지점을 특정할 수 있었어. 거진항에서 동쪽으로 약 4.2km 지점. 거기서 72정의 흔적을 발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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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족하고 같이 사고 현장으로 갔어요 배를 타고. 가니까 육안으로 봐도 나와. 침몰한 배에는 유류가 가득 실려 있거든. 연료가 조금씩 떠오른단 말이야. 연료가 올라와서 물 위에서 퍼지면 햇빛을 받으면 오색 빛이 나. 육안으로 보면 연료가 뽀글뽀글 올라오는 게 보여요. 그래서 '여기다' 하고."
-민윤진, 당시 속초 해양경찰대 근무

거진항이 육안으로 보이는 멀지 않은 지점에서 72정에서 흘러나오는 것으로 보이는 기름이 수면 위로 올라오고 있었어. 그럼 거기가 사고 지점이 맞는 걸까? 유가족은 사고지점이라 생각하고, 그 위로 국화꽃을 던졌어. 눈이 펑펑 내리고 칼날 같은 바람이 몰아치는 그 동해. 내 남편, 내 아들, 내 형제가 차디찬 그 바닷속에 가라앉아 있다고 생각하니 슬픔을 누를 수가 없어. 가족을 잃은 이들의 한 맺힌 울음소리만 바다 위에 울려 퍼졌어.

"말도 못 했죠. 이 밑에 자식이 있고 남편이 있고 가족이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 거기서 오열하고. 그걸 내가 생생히 기억해요."
-민윤진, 당시 속초 해양경찰대 근무

▲ 바닷속으로 아스러진 청춘들

지금 유가족들의 바람이 있다면, 차가운 바닷속 가족의 시신을 건져 편히 쉴 수 있도록 해주는 거야. 그러려면 배를 인양해야지.

대책본부에선 72정을 인양할 방법을 찾고 있었어. 근데 아주 큰 문제가 있어. 거진 앞바다 수심은 80미터에서 최대 120미터야. 72정은 수심 100미터 정도 되는 깊은 바닷속에 있는 거야. 당시 기술로 여기 있는 배를 인양할 수 있었을까? 인양하려면 일단 잠수부가 들어가야 해.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깊이는 일반적으로 30-40미터 정도밖에 안돼. 수심이 깊어질수록 엄청난 압력이 가해지거든. 지금도 그 깊이를 내려가는 건 어려운데, 1980년 당시엔 수심 100미터 아래 72정을 끌어올 기술이 더더욱 없었어. 유가족들의 유일한 바람은, 당시로선 이룰 수 없는 꿈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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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후 1주일 정도 지나 72정 승조원 합동 위령제가 거행돼. 단 한 명의 시신도 건지지 못했지만, 그저 넋이라도 달래주려 한 거겠지. 천막 안 쪽으로 17명의 사진이 나란히 놓여있고, 그 밑에는 각자의 이름이 놓인 위패. 그리고 흰쌀밥 한 그릇씩 차려져 있어. 이들은 경계근무 중 사망한 게 인정돼서 1계급 진급 및 순직처리가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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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자 17인의 명단이야. 대부분이 20대로 아직 젊은 나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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든든한 남편이자 딸바보 아버지였던 김정곤 경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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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죽었다고 생각도 안 했습니다. 사고 났다 해도 분명 살아있다고 생각했다고요."
-손경숙, 故 김정곤 경감 아내

손경숙 씨는 남편의 영정 앞에서도 차마 죽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어. 두 딸의 손을 잡고 대문을 나서던 그 뒷모습이 남편의 마지막 모습이 될 줄을 상상도 못 했으니까.

집안의 기둥 역할을 하던 장남, 하연수 경위. 막내 하치영 씨한테는 아버지 같은 큰형이었어. 큰형은 집에 올 때마다 커다란 선물을 안고 찾아왔대. 덕분에 마을에서 두 번째로 TV를 가질 수가 있었고, 첫 번째로 전축을 가진 집이었다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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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집에서는 기둥이지요. 장남이다 보니 형님이 일찍 사회생활을 해서. 저희가 학교, 대학까지 그렇게 남자 두 형제가 그렇게 다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부모님은 전축 틀어놓고 음악도 들으시고. 자부심을 많이 가졌죠. 아들 덕분이라고."
-하치영, 故 하연수 경위 동생

착하고 공부 잘하던 모범생이던 이진상 이경. 이의상 씨는 자상했던 형의 모습만 기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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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 말씀 잘 듣고 학교에서 모범생이었고. 돈이 생기면 절 구멍가게 데려가서 사탕도 사주시고. 손 붙잡고 갔던 그런 기억이 많이 납니다."
-이의상, 故 이진상 이경 동생

대학에 가기 전에 국방의 의무를 다하겠다면 전경으로 입대했던 형이, 얼마 후 사고를 당한 거야. 입영 열차를 타고 떠나던 형의 마지막 모습을 잊을 수가 없대.

"그때 서로 손 흔들고 기차 출발하고. 그게 끝이었습니다."

-이의상, 故 이진상 이경 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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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집안 형편을 돕고자 해경이 됐던 조병섭 경장. 매달 월급을 받으면 부모님께 봉투채로 건네주는 기특한 셋째 아들이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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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가정형편이 그렇고 어머니 아버지가 고생하는 그런 모습을 봐서 그런가 꼭 봉급 때는 봉투를 갖고 온 기억이 납니다."
-조병주, 故 조병섭 경장 동생

다가오는 설날 명절에 결혼할 여자를 데려오겠다던 조 경장은 설날을 불과 20여 일 앞두고 사고를 당했어. 조병섭 경장의 어머니는 아들의 위패 앞에서 왈칵 울음을 터트렸어. 함께 위령제에 참석했던 큰아들은 나중에야 그 눈물의 이유를 알게 됐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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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저 걱정하지 마세요' 항상 동생이 평소에 그랬어요. 그래서 어머니가 더 슬픈 게, 저희가 형제들이 많고 9남매다 보니까. 부모님은 걱정할 거 아니에요. 제일 걱정이 자식들 짝지어주는 거죠.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숟가락 하나면 됩니다' 그랬다고 해요. 어머니가 위령제 지내는 날 위패 앞에 숟가락 하나 딱 꽂힌 거 보고 '그놈이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 어머니가 나한테 얘기하시더라고요. 저는 몰랐죠. 그 이야기 듣는 순간, 더 마음이 아프죠."
-조병묵, 故 조병섭 경장 형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 자상하고 든든한 남편이자 언제나 자랑스러운 형, 동생이었던 그들. 실종된 17명의 승조원은 모두 대부분 집안의 기둥 역할을 해오던 이들이었어.

▲ 72정 사고의 원인

위령제를 마친 후에도 수색은 계속 됐지만 성과는 없었어. 그리고 얼마 후 사건 조사가 마무리 돼. 꼬꼬무가 이번에 오랫동안 비공개로 묶여 있던 자료를 입수했어. 당시 72정과 충돌했던 207함정에 대해 조사한 내부문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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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3분경 작동 중이던 레이다를 주시한 바, 갑자기 레이다에 백파 현상 및 잡음이 발생하여 72정으로 보이던 물체가 소실되어 버렸으며 다시 레이다를 3마일 스케일로 작동하였으나 역시 동일한 현상으로 레이다에 의존 항해할 수 없는 조건. 당시 기상은 황천 4급이 설정 중이었고 무월광에 시정이 약 100미터로써 안전 항해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

'무월광에 시정이 약 100미터' 달빛 하나 없는 밤에 가시거리가 100미터 밖에 되지 않았다는 거야. '황천 4급'은 파도의 높이를 가리키는 기상 용어인데, 파고가 3~4미터 높이였다는 거야. 악천후에 레이더 고장까지, 이 두 가지가 겹치며 두 함정이 충돌했다고 기록됐어.

▲ 우리가 72정 침몰에 대해 모르는 이유

그런데 17명의 해군이 순직한 큰 사건인데, 72정 침몰에 대해 들어본 적 있어? 모를 수밖에 없어. 그 당시에 이 사건을 보도한 기사는 단 한 건도 없었어. 짧은 기사 한 줄도 찾을 수 없었어. '꼬꼬무' 역사상 이렇게 자료가 없는 사건은 처음이야. 속초, 거진 인근 주민들도 이 사건을 모르는 사람이 많아. 당시 시대 상황을 보면 의문이 풀려.

1980년 1월 23일. 72정 사건이 일어나기 전, 대한민국엔 엄청난 일들이 있었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10.26사건. 이 일로 비상계엄령이 내려지고. 그리고 약 2달 뒤, 전두환과 하나회의 군사 반란, 12. 12가 일어나. '서울의 봄'은 사라지고, 신군부의 세상이 열렸지. 72정이 침몰한 건, 그로부터 40일 후였어. 그 당시 상황을 직접 경험한 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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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언론사에 처음 들어간 게 1980년 4월입니다. 전두환 신군부가 완전히 권력을 장악하는 그런 시기였죠. 곧바로 박정희 정권 때의 언론 통제에 못지않은 언론 학살이 이뤄졌죠."
-김주언, 당시 기자

1980년대 초, 대학을 갓 졸업하고 신문사에 입사한 김 기자는 견습 기자 생활을 시작했어. 경찰서를 출입하며 취재 훈련을 받는 거야. 하지만 그에게 따로 맡겨진 임무가 있었대. 그에게 건네진 건 신문대장. 신문이 정식으로 인쇄되기 전에 미리 한 부를 뽑아둔 거야. 김 기자는 그걸 들고 시청으로 가.

"보도 검열단이란 것이 당시 서울시청에 마련돼 있어요. 거기에 군인들로 이뤄진 보도 검열단이 상주해서. 신문대장을 들고 가면 보도 검열단이 다 읽어 보며 사전에 검열하는 거죠. 제목, 단어 하나까지 다."
-김주언, 당시 기자

시청에 도착한 김 기자는 보도검열단 사무실에 들어서. 안에는 마감을 앞두고 검열받으러 온 기자로 북새통이야. 장교 계급장을 단 군인이 김 기자를 불러. 그리고 신문대장을 읽기 시작해. 검열관은 빨간펜으로 신문대장 위에 돼지꼬리를 잔뜩 그려 넣어. 표시한 부분은 빼라는 거야. 신군부는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언론부터 통제하기 시작했어. 당시 검열의 흔적이 담긴 신문대장을 보여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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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다 간섭하고 검토를 끝낸 검열관이 '검열필, 계엄사령부'라는 도장을 찍어야만, 신문을 인쇄할 수 있었어. 이런 일들이 계속되자 일선 기자들이 검열 거부에 나섰어. 그러자 신군부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자들을 구속하고 고문까지 가했다고 해. 무력으로 정권을 장악한 후 강제로 국민들의 눈과 귀를 막은 거야. 이런 상황에, 해경 17명이 사망했다는 기사를 실을 수 있었을까. 김 기자도 당시 72정 사건을 들어보지 못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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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신문이나 방송에 전혀 보도되지 않았던 사건입니다. 군인 하나가 탈영을 했다든지 아니면 총기사고를 냈다든지. 아니면 경찰 내부에서 무슨 사건이 일어났다든지 하면, 그게 바로 '사회 안녕질서를 해치는 사안이다' 라는 식으로, 보도하지 못하게 보도금지 조치가 내려옵니다. '사회 안정을 해치는 사안' 그러니까 '사회 불안을 야기하는 경우'다. 추상적이죠."

-김주언, 당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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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당시에 무서운 시절 아닙니까. 삼청교육대 생기고 군인 정권이 전두환 정권이 생겨서 우리나라 세상을 좌우하던 그런 시절 아닙니까. 말 잘못했다가 끌려가고 그런 시절인데. 그때 사고가 났으니까 저희가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던 거 같습니다."
-조병주, 故 조병섭 경장 동생

이런 분위기 속에서 모두가 침묵한 건 아니었어. 사고가 있고 한 달 후, 조병섭 경장의 큰형은 홀로 서울로 향해. 동생의 유해를 수습해 달라고, 청와대로 가서 대통령에게 직접 호소하려는 거야. 주위 사람들이 모두 말렸지만, 그를 막을 수 없었어. 동생을 두고 나온 지난 한 달간, 분하고 억울한 마음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는 거야.

"동생 죽음 앞에 어떤 두려움도 없더라고요 사실. 나 자신이 존재한다는 그 자체가 너무나 힘이 들었죠."
-조병묵, 故 조병섭 경장 형

서울역에 도착한 그는, 누군가를 기다려. 부산에서 올라온 또 다른 유가족이야. 그 역시 72정 사고로 아들을 잃은 아버지였어. 두 사람은 함께 택시를 잡아타고 청와대로 향해. 탄원서를 손에 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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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정문까지는 들어갔는데, 정문에서부터 들여보내 주지 않더라고요. '만날 수 있게 해 달라, 우리가 탄원서를 가져왔다' 그러니까 접수하고 가면 해준다고 하더라고요. 힘이 없으니까. 접수하고 왔는데 연락이 안 왔어요."
-조병묵, 故 조병섭 경장 형

현실은 냉혹했어. 그 후에도 몇 차례 탄원서를 써서 청와대로 보냈지만, 아무런 답도 오지 않았어. 결국 멈출 수밖에 없었어. 넉넉지 못한 형편에 당장 먹고사는 문제를 외면할 수 없었거든. 결국 72정 사건은 세상에 알려지지 못한 채, 깊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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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침묵 아래 비극, 그리고 다시 품은 희망

72정 침몰 후 37년이 지난 2017년. 이젠 유가족들도 서로 연락이 뜸해졌어. 1년에 한 번 현충일에 모여 고인들을 추모하는 게 전부야. 하지만 해가 갈수록 참석하는 유가족의 수가 줄어가. 연세가 많은 부모님들이 하나 둘 돌아가셨거든. 생전에 자식들의 유해라도 찾길 바라셨지만, 끝내 이루지 못한 채 눈을 감으셨어.

"특히나 겨울 되면 더 많이 우시고, 비 오는 날, 날씨 안 좋은 날, 추운 날, 매일 '아이고 이 새끼야. 차가운 물속에서 어떻게 하노…'"
-하치영, 故 하연수 경위 동생

조병섭 경장의 어머니는 아들을 두고 온 다음부터 생선 반찬을 올리지 않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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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살아계실 때 보면 명절 때도 바닷고기를 안 올려놨어요. 바다 생선을 어머니가 옛날에 저희 어렸을 때 굉장히 좋아하셨는데 형이 돌아가시고 나서 바다 생선을 잘 구경을 못한 것 같습니다. 어머니 심정은 자식이 바다에 있으니까. 거기에 대한 영향이 좀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조병주, 故 조병섭 경장 동생

이렇게 모두들 가슴에 커다란 구멍을 안고 살던 어느 날. 조병주 씨에게 희망을 안겨주는 뉴스가 전해졌어. 2014년 4월, 대한민국을 슬픔에 잠기게 했던 세월호 침몰 사고. 그 후 3년 만에 세월호가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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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를 딱 보면서 저런 배도 인양을 하고, 그때는 72정을 인양할 기술이 없어서 못 해도 이제 인양할 수 있는 기술이 있지 않냐고. 아는 사람들에게 물으니까 그 정도 수심이면 충분히 인양된다고 하더라고요."
-조병주, 故 조병섭 경장 동생

유가족들은 대부분 72정 내부에 고인의 유해가 남아있을 거라 믿고 있어. 72정은 경비정으로 설계됐잖아. 내부는 튼튼한 강선이고, 외부는 격실 밀폐 구조였어. 게다가 사고가 난 시각은 새벽 5시 20분. 조타실 근무자를 제외하면 대부분 선실 안에 있었을 거라 추정돼. 선실 문이 열려 있지만 않다면, 유해는 안에 남아있을 거라는 거야.

조병주 씨는 현충일에 모인 유가족들에게 '72정 인양 다시 시작해 보자' 말을 꺼내. 유가족들은 국민청원도 넣고, 지역 국회의원을 찾아가 요청해. 기자들을 만나 호소하기도 했어. 성과는 있었어. 2018년 국정감사 때 72정 인양에 관한 안건이 처음 제기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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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년 전에 전두환 정권 시절에 경비정이 해상 교통사고로 침몰했습니다. 거기에 승조원 17명이 계셨는데 같이 침몰해서 전원 사망을 했습니다. 최근에 세월호 인양하는 그런 소식을 접하고 이제 기술도 발전했고 우리나라가 그만한 경제력도 되고 하니, 72정을 인양해 달라. 유해를 유족의 품으로 돌려달라는 부탁이 있었습니다."

-이양수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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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국가의 책무라고 생각하고 38년이 지난 것으로 보고를 받았습니다마는 시가이 지난다고 해서 가족의 아픔이 줄어들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임종석,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

그리고 1주일 후, 청와대는 인양을 검토해 보겠다고 답변했어. 이 소식은 즉시 전국에 보도됐어. 보도 통제로 38년 동안 침묵을 강요 받았던 그 사건이, 드디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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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월. 무려 39년 만에 72정을 찾기 위한 조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돼. 처음에 언급한 이어도호가 바로 그 거야. 이어도호는 해경 기록에 남아있던 침몰 지점을 정밀 수색했어. 그리고 사이드 스캔 소나를 통해 72정으로 추정되는 물체를 포착하는데 성공해. 그 사진을 보여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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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물체는 수심 105미터 평평한 모래바닥에 반듯하게 누워있어. 비교를 위해 72정의 도면을 보여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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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나 그다음에 폭, 선체의 구조들이 사이드스캔 영상에서 다 보입니다. 도면하고 비교를 하죠. 도면을 보면 배가 있으면 중간에 엔진룸 같은 데 덮개가 있습니다. 사이드스캔을 하면 그 모양이 이렇게 네모 모양이 뚜렷하게 보여요. 특정한 그런 부분들은 사이드스캔 영상이 또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정섬규, 한국해양과학기술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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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체 중앙에 엔진 덮고 있는 사각형 부분, 그 뒤 원형의 구조물도 72정 도면과 일치해. 게다가 조사해 보니, 이 부근에 침몰한 다른 배는 없었다고 해. 마침내 결론을 내려. 이 선체는, '침몰한 72정이 맞다'고. 39년 만에 72정이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야.

유가족들은 희망에 부풀었어. 이제 72정을 찾았으니, 곧 인양이 될 거라고. 조병주 씨는 국회에 가서 간절히 호소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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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비함정 72정 선체 인양 촉구. 1980년 1월 23일 05시 20분경 강원도 고성군 거진 앞바다 깊은 바다에 가라앉은 경비함정 72정이 있습니다. 침몰 사고로 72정 함정 승조원 17명 중, 경찰관 9명, 의무 전투경찰 8명 전원이 실종되어 유가족들은 시신조차 품에 안아보지 못한 장례를 치러야 했고 긴 세월 동안 고통에 시달려야만 했습니다. 차디찬 깊은 바닷물 속에 순직자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어 72정 인양 후 유해를 수습해 주도록 촉구하기 위해 기자회견을 하게 되었습니다."
-조병주, 故 조병섭 경장 동생. 2019년 10월 22일 국회에서

해경은 인양을 위한 연구 용역까지 마쳤어. 인양 비용은 방법에 따라 최대 160억 원이 필요할 것으로 보여. 이 결과를 바탕으로 2020년 국회 상임위가 72정 인양 예산을 의결해. 이게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되면 본격적으로 인양 작업을 추진할 수 있는 거야. 하지만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와 본회의 의결 결과, 전액 삭감됐어. 2020년 전 세계를 휩쓴 코로나19 대응 비용이 늘어나면서, 72정을 포함한 기타 예산을 축소한 거야.

"금방 저희들 입장에서는 인양이 될 줄 알았습니다. 예산이 통과되는가 하고 밤새도록 지켜보고 이랬거든요. 근데 예산을 통과 못 시키더라고."
조병주, 故 조병섭 경장 동생

이듬해에도 예산을 요청했지만 또다시 예산안 심의는 통과되지 못했어. 그렇게 한 해 두 해 흘러, 어느덧 2025년이야. 72정은 여전히 차가운 바닷속에 있어.

▲ 72정을 찾아라

하지만 해양경찰은 아직 인양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해. 임무를 수행하다가 목숨을 잃은 선배님들을 무사히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 그건 해경이 반드시 지켜내고 싶은 약속이야. 올해 6월, 해경은 다시 인양을 위한 현장조사를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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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양의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선, 72정의 현재 모습을 담은 많은 자료가 필요해. 침몰된 72정을 발견한 지 6년이 지난 지금, 72정의 정확한 상태는 어떨까. 그래서 '꼬꼬무'가 200회를 맞아 특별한 프로젝트를 준비했어. 현재 72정의 모습을 직접 확인해 보기로 한 거야. 무려 6개월에 걸쳐 계획된 수중탐사 프로젝트야.

수심 105미터 아래 있는 선체를 확인할 방법은 뭐가 있을까? 지난 6월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가진 국내 수중 드론 전문 기업과 처음 미팅을 가졌고, 105미터 수중 탐사를 위해 장비를 대규모 업그레이드 했어. 높은 수압과 거센 조류를 견딜 수 있도록 모터와 케이블을 보강하고, 인양을 위한 영상을 잘 담을 수 있도록 수중 드론에 카메라도 추가했어. 어두운 바닷속에서 잘 볼 수 있도록 조명도 전면 교체했어. 그리고 실전을 대비한 테스트를 진행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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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 도전적입니다. 왜냐하면 물속의 압을 버티는 것도 엄청난 기술이기도 하지만, 거기서 움직인다는 게 생각보다 어려운 일입니다. 유속도 층층이 다 다르고. 그게 참 어려운 일입니다."
-황요섭, 수중 드론 전문 기업 대표

모든 것이 예측 불가야. 유속이 그때그때 다르기 때문에 기체가 얼마나 버틸지, 72정이 침몰해 있는 위치까지 도달해 촬영할 수 있을지 여부는, 그날 가봐야 알 수 있을 거 같대.

드디어 지난 8월, '꼬꼬무' 탐사단은 해경의 지원을 받아 72정 침몰 지점으로 향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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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사고가 났을 때 침몰되는 배 속에서 17분의 선배님들이 얼마나 힘드셨을까. 유가족분들의 슬픔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같은 해경 식구로서 과거의 선배님들이 다시 돌아오셔서 유가족들의 마음이 위로가 됐으면 하는 마음에 저희도 최선을 다해서 탐사와 기타 업무의 지원을 철저히 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돈우 경감, 해양경찰 509함 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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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침몰 지점에 도착하고, 케이블 선에 연결한 수중 드론을 물속에 넣어. 수중 드론이 깊은 바닷속을 향해 출발해. 아래로, 아래로 천천히 내려가고, 수심 107미터 지점. 드디어 바닥에 도착했어. 사막처럼 넓게 펼쳐진 모래바닥. 빠른 유속을 견디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

'꼬꼬무' 탐사단은 3박 4일간 사고지점 일대를 수색했어. 하지만, 안타깝게도 72정을 찾는 건 실패했어. 침몰 지점에 맞춰 수중 드론을 투입했지만, 깊은 바닷속은 층층이 다른 조류가 흐르는 데다가, 그때 유난히 유속이 더 거셌대. 게다가 강한 바람과 파도에 함정도 계속 움직이다 보니, 결국 72정을 찾지 못했어. 6개월 전부터 다들 엄청 고생해 왔는데 실패로 끝난 첫 번째 탐사. 여기서 프로젝트를 중단해야 하나, 제작진의 고민이 깊어지던 시점이었어. 그런데 여기서 반전이 일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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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탐사 후 제작진이 촬영된 영상을 자세히 살펴보던 중이었어. 촬영된 영상에 뭔가 이상한 게 찍혀 있어. 72정 의심 물체가 촬영돼 있었던 거야.

왼쪽의 저 물체가 72정이 맞을까? 정확히 확인하고자 제작진은 2차 탐사에 나섰어. 어떻게든 72정의 현상태를 확인하겠다는 의지야. '꼬꼬무' 탐사단의 2차 수중 탐사. 이번엔 성공했을까.

9월, 2차 탐사가 진행됐어. 72정 침몰 지점에 도착하고, 수중 드론을 다시 준비했어. 물속에 들어간 수중 드론은 밑으로 밑으로 향했고, 109미터 지점까지 내려갔어. 그리고 모래바닥 위에 길게 늘어진 밧줄을 발견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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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밧줄을 따라가 보니 그 끝에서 선박이 발견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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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침몰해 있는 72정을 찾아냈어. 방송사에서 직접 촬영한 72정 모습이 TV를 통해 공개되는 건 1980년 침몰 이후 45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야. 오랜 세월 동안 바다 밑에서 침묵한 72정의 모습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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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체의 형체는 여전했어. 수많은 폐그물로 뒤덮인 모습. 영상으로 확인된 72정의 현 상태는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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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앞쪽을 찍은 거로 판단을 하는데. 강선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부식이나 이런 건 있지만 그 상태를 그대로 가지고 있는 원형이 보존된 상태고요. 배가 정상 상태로 똑바로 있는 상황이 아니라 약간 기울어진 상태로 그대로 가라앉은, 그 모습을 그대로 갖고 있습니다."
-김현수 교수, 인하공업전문대학 조선기계공학과

72정이 발견된 곳은 수심 108미터. 알려진 곳보다 좀 더 깊은 곳에 있었어. 폐그물이 거미줄처럼 얽혀있어. 따개비 등 해양 생물이 가득해. 그 사이로 붉게 녹슨 선체가 보여. 72정은 옆으로 살짝 기울어진 채 해저면에 닿아있는 상태야. 마치 45년 동안 그 자리에서 구조의 손길을 기다려 온 것처럼.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72정은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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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는 인양 작업에 작은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수중탐사 영상 원본 전체를 해경에 제공했어.

▲ 45년 동안의 SOS

매일 아침 집을 나서는 가족을 웃는 얼굴로 배웅하는 건, 나가는 가족이 무사히 돌아올 거라 믿기 때문이잖아. 하지만 짧은 인사를 하고 돌아선 17명의 승조원은 45년이 지난 지금도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어. 유가족들은 여전히 사랑하는 이들의 귀환을 애타게 기다리는 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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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면 좋죠 진짜. 우리 소원이 그거죠. 진짜 좋죠. 72정을 올려서 가족들 품에 주면 참 좋지요. 진짜 그래 주면 너무너무 좋지요. 그 이상 내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그렇게 해주시면 내 할 일 다 하고 갑니다."

-손경숙, 故 김정곤 경감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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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족들이 항상 계속 슬픔을 가슴속에 안고 살았지 않습니까. 마지막까지도 국가를 위해 희생한 분들은 국가에서 마지막까지 책임을 지는 게 도리라고 생각하고…"

-조병주, 故 조병섭 경장 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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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 형님을 유가족 품으로, 어머니 계실 때 모시지 못해서 정말 미안하다고. 유해 한 조각이라도 제가 가슴에 품고, 많이 울고 싶은 그런 심정입니다."
-하치영, 故 하연수 경위 동생

2017년도에 유가족들이 인양을 촉구했을 때, '72정 인양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가 부족하다'는 말을 들었대. 72정에 대해 모르는 국민들이 많으니까. 그런데 유가족들은 세상에 알려질 권리조차 빼앗긴 사람들이야. '꼬꼬무'가 200회 특집을 맞아 72정 이야기를 한 이유야. 이 사건,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어. 국민과 국가의 역할에 대해 무거운 질문을 던지는, 역사적인 사건이야. 국민이 국가를 지키고, 국가를 위해 헌신할 때, 국가는 국민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 질문에 대한 올바른 해답이 내려지길 바랄 뿐이야.

국가유공자로 등록된 17명의 승조원. 하지만 이들은 현충원 묘역엔 안장되지 못하고 있대. 고인의 유해가 없으면 현충원 묘역에 안장될 수가 없대. 그러니까 꼭 인양을 해서 유해를 수습했으면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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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주 씨는 먼저 간 형님이 생각날 때마다 찾는 곳이 있어. 동해가 훤히 보이는 속초 장사동. 72정 순직 해경들의 넋을 기리는 충혼탑이 세워져 있어. 여기에 17분의 위패가 봉안돼 있다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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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부모님이 살아계신 분이 두 분입니다. 그리고 아내들이 살아계신 분들, 아내들도 이제 나이가 80이 돼 갑니다. 특히 아내들은 얼마나 남편을 그리워하겠습니까. 젊은 나이에 20대 30대에 남편을 잃어서. 매일 여기 충혼탑에 와서 우는 모습을 보면, 저 자신이… 유가족 대표로서 못나서 지금까지 그렇게 된 건가 생각해서. 이번만큼은 새 정부만큼은 꼭 인양을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조병주, 故 조병섭 경장 동생

눈물을 훔치는 조병주 씨. 그는 자신이 못 배워서, 능력이 없어서 인양을 못하고 있다고 자책하고 있어. 그래서 얼마 전, 유가족협의회 대표 자리에서도 자진해서 물러났어. 머지않아 인양이 이뤄지면 그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 죄책감도 내려놓을 수 있지 않을까.

그날이 오면, 17명의 대원 모두 45년 만에 귀환 신고를 할 수 있겠지. "신고합니다. 경감 김정곤 외 16인은 경비 근무를 마치고 귀환했음을 신고합니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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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강선애 기자 sakang@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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