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브수다] '세계의 주인' 윤가은 감독 "기승전결을 해체 했다…삶에 더 가깝게"

작성 2025.11.07 18:00 수정 2025.11.07 18:00

윤가은

[SBS 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윤가은은 감독은 세 번째 장편 영화 시나리오를 쓰면서 처음으로 기승전결을 의식하지 않고 글을 써 내려갔다고 했다. 구조를 짜는 게 아니라 장면을 짜는데서부터 이야기를 발전시켜 나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의도와 달리 '세계의 주인'은 윤가은 감독의 작품들 중 구조적으로 가장 정교한 작품처럼 보인다. 주인공의 내, 외면에서 일어나는 미묘한 변화와 균열이 보는 이들에게 나노 단위로 와닿는 듯한 느낌을 준다.

'세계의 주인'은 주인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영화지만, 영화를 다 본 관객은 나를 들여다보는 시간이었다고 느끼게 된다. 개인에게 벌어진 어떤 사건은 그 자체의 고통보다 사회적 시선이 유발하는 고통이 더 클 때가 있다. 고정관념과 편견 등 생존자를 향한 2차 가해 때문이다.

동일한 소재를 다룬 영화들은 대체로 사건과 생존자들의 고통을 직시하고 재현하고자 한다. 그러나 윤가은 감독은 '세계의 주인'에서 다른 방향과 결을 보여준다. 극 중 주인의 주장처럼 '피해자의 영혼을 파괴하는', '씻을 수 없는 상처' 등의 말로 생존자의 삶을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삶에는 희가 있고, 비가 있다. 누구도 기쁨만으로 가득 찬 삶을 살 수 없고, 누구도 슬픔으로만 가득한 삶을 살지 않는다. 희비는 교차한다.

주인이라는 인물은 '그리고 삶은 지속된다'는 듯 씩씩하고 밝게 자신의 삶을 채워나간다. 윤가은 감독은 이런 주인의 세계를 세밀하게 담으며 영화라는 매체로 관객에게 대화의 장을 열어 놓았다.

세계

Q. 영화 '우리집'(2019) 이후 차기작이 나오기까지 6년이 걸렸다.

A. 6년을 논 건 아니다. 영화를 준비하다 엎어지는 과정을 여러 번 겪었다. 오랫동안 10대 아이들이 처음 겪는 성, 사랑, 연애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 이야기는 내가 오랫동안 품어온 이야기니 방향을 잘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의식적으로 피해 가려고 했던 것들이 있었다. 이런 이야기를 쓰다 보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어떤 폭력의 경험들이 있다. 지금까지는 그런 부분을 밀어내면서 쓰려고 했는데 어느 순간 그걸 정면으로 들여다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걸 빼고서는 이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개인적으로 하이틴물을 영화를 좋아한다. 한국판 하이틴인데 판타지가 제거된 것을 그리고 싶었다. 여기에 지금의 주제와 소재가 들어오면서, 조금 묵직한 이야기로 바뀌었다.

Q. 영화의 첫 장면부터 다소 파격적이다. 이 신을 오프닝에 배치한 의도가 궁금하다.

A. 너무 들이밀었죠.(웃음) 시나리오 쓸 때부터 첫 장면으로 생각했다. 편집 과정에서는 첫 장면이 아닌 두 번째 장면이었는데 최종적으로 첫 장면으로 했다. 인물을 어떻게 소개하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주인이 현재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가 전면에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한창 연애에 열을 올리고 있는 친구고, 남자친구와 성적인 경험을 해나가고 싶지만 처음이라 익숙지 않아서 삐걱거린다. 이 아이의 과거 기억과 맞닿아서 그럴 수도 있는데, 이런 것을 부딪히고 나가는 아이로 소개하고 싶었다. 주체적이고 리드하는 아이로. 동시에 아주 일상적인 것들이 흘러가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매력적으로 흘러갈까를 고민했다.

세계

Q. 영화의 결말을 보고 나면 모든 인물의 행동과 대사를 곱씹게 된다. 서사구조는 어떤 식으로 구성했나?

A. 이야기를 썼다 무너뜨리기를 반복했다. 그때마다 주인공의 특징과 인물 간의 관계도 달라져 지금의 형태가 됐다. 그전까지는 사건이 터지고 그걸 해결해 나가는 구조 안에서 사건을 계속 넣어가는 기승전결의 구조였다. 영화의 주제는 잡혔는데 이걸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를 모르겠더라.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쓴 게 지금의 영화로 나온 거다. '기승전결을 해체하자. 삶에 더 가깝게' 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다소 지루하고 뻔해 보여도 주인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구조를 짜는 게 아니라 장면을 짰다. 이후에 시나리오를 구조화해 나갔다. 주인의 일상 모습이 먼저 나왔던 건 인물에 대한 호기심이 들게 하려는 것보다는 다르게 보게 만드는 게 목표였다. 겉모습에서부터 시작해 점점 인물에게 들어가는 느낌이 들게 하고 싶었다. 또한 어떻게 하면 뻔하지 않게, 지루하지 않게 주인의 일상을 보여줄까 하는 고민도 컸다. 그래서 텐션과 미스터리도 이 안에 넣고 싶었다. 근데 그게 극적이어서는 안 되는, 지극히 일상적인 미스터리여야 한다는 고민을 했다. 그러다가 주인이 충동적으로 반에서 어떤 발언을 해버리고 그로 인해 쪽지가 날아온다는 식의 서사 구조가 만들어졌다.

Q. 주인에게 쪽지가 배달되면서 주인의 삶과 내면에 균열이 보이기 시작한다. 쪽지가 가지는 기능이 다층적이라 흥미로웠다. 어떤 측면에서 주인을 바라보는 관객의 눈처럼 보이기도 했다. 쪽지의 발신인을 끝까지 공개하지 않았고, 엔딩에서 반 아이들이 목소리로 발화하게 한 선택의 의미는?

A. 쪽지의 글을 쓰는 게 가장 어려웠다. 의도적으로 주인을 탓하는 문장을 쪽지에 넣었다. 주인이 같은 인물을 보는 우리의 고정관념일 수도 있고, 동시에 주인의 자문자답일 수도 있다. 마지막에 이르러서 그 (쪽지) 공격이 정말 어떤 빌런, 내부에서 외부로 온 게 아니라, 이런 일에 있어서 안팎의 구분이 가능한가 싶었다. 주인이와 비슷한 일을 겪은 누군가, 같은 반 안에 또 비슷한 이야기를 겪은 이가 있을 수도 있다. 제가 전문가는 아니지만 성폭력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공부를 하면 할수록 너무나 흔하고, 일상적인데 이야기되지 않는 폭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이 이런 험난한 과정을 겪고, 자신의 어떤 행동이 나중에 어떤 일로 기억될까롤 생각했을 때 주인이가 그 쪽지를 품고 살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세계

Q. 시나리오를 쓰기 전에 많은 공부와 자문 등이 필요했을 것 같다.

A. 주제 결정한 다음에는 다큐멘터리, 언론보도, 책, 사례집, 논문 등 관련된 것들을 닥치는 대로 읽고 공부했다. 나중에는 트라우마 연구에 대한 의학적 서적까지 읽고 있더라. 공부하면 할수록 너무 광범위하고, 스펙트럼도 다양했다. 각자 자라온 환경. 물적, 정신적 토대에 따라서 너무나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서 규정 내릴 수 없었다. 생존자들을 만나기도 했다. 그러나 영화가 뭐라고, 생존자를 대표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이런 생각 자체를 버리자고 다짐했다. 우리가 계속 재생산하는 생존자의 전형적인 얼굴이 있으나 그것만이 진실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또 하나의 사례로, 또 하나의 얼굴을 그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Q. 주인의 동생 해인이 마술을 연마하고, 누나에게 온 편지를 숨기는 행동을 한다. 누나의 상처를 없애주기 위한 의지의 표현으로 봐도 될까?

A. 10살 정도의 나이라 그런 것을 의식하고 한 행동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그 아이는 10년의 인생동안 누나가 때때로 발작하면서 무너지는 모습을 봤고, 그 옆에서 엄마도 애쓰는 모습을 보며 자랐다. 아빠는 집을 나갔고, 집안에는 말해서는 안 되는 일들도 존재했다. 해인이는 늘 참아야 하는 삶을 배워왔다. 그러면서 무의식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뭘까'라는 생각을 해오지 않았을까. 아마도 무의식적으로 누나를 지켜야 한다는 마음으로 한 행동이지 않을까 싶다.

세계

Q. 주인이 수호 여동생 누리에게 하는 행동에 '왜?'라는 물음표가 붙는다. 그리고 그 행동의 이유를 명확히 설명하지 않은 채 미스터리로 남겼다.

A. 다방면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일단은 주인이가 아이를 좋아할까부터 시작했다. 누리의 나이는 주인이 힘든 일을 겪기 시작한 나이일 수도 있다. 생존자들의 사례집을 읽으면서 든 생각인데 주인이 그 아이를 보는 순간 자신이 겪은 일들이 떠오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어떤 이유를 가지고 하는 행동은 아니고 본능적으로 툭툭 거리고 그랬을 때 아이가 '나 안 아픈데'라고 반응하는 모습을 보면서 주인이는 어떤 생각을 할까. 누리에게 뭔가를 가르쳐준다기 보다는 짜증이 나서 '네가 뭘 알아?', '얘 봐라?'와 같은 마음이 들었을 것 같다. 또 잘난 척하는 아이를 보면서 기 죽이고 싶은 심리도 있었을 것이고. 너무나 복잡한 마음이 들었을 것 같았다. 또는 어떤 트리거가 됐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Q. 주인의 친구 유라가 19금 웹툰을 그리는 설정을 넣은 의도도 궁금하다.

A. 청소년들의 솔직한 성과 사랑을 다뤄야 한다는 생각을 했을 때 떠올렸던 설정이었다. 성에 대한 호기심은 다양한 방향으로 존재하고 우리 모두 그런 문화를 알고 있다. 그런데 양지에서 정확히 이야기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성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관심을 두고 그것을 놀이의 한 형태로 접근하는 청소년들이 존재하는 걸 드러내고 싶었다. 성에는 놀이로서의 성도 있고, 체험으로서의 성도 있고, 여러 형태와 층위가 존재한다. 그래서 주인이와는 반대되는 위치에서 성을 탐구하고 싶은 대상, 흥미로운 경험으로 바라보는 존재가 옆에 있다면, 그 대비 속에서 확장되는 무언가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세계

Q. 이대연 배우가 연기한 태권도 관장의 캐릭터가 '좋은 어른'의 표본처럼 보였다. 솔직히 이 캐릭터가 극 후반 어떤 반전을 주지 않을까 하는 클리셰적인 상상을 하기도 했다. 이런 뻔한 예측은 가볍게 빗나갔지만.

A. 주인이와 비슷한 일을 겪은 생존자들은 만나보면 항상 옆에 좋은 어른이 있더라. 우리 사회는 어두운 면만 비추려는 속성이 있는데 나는 좋은 어른의 존재가 판타지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그런 사람이 있다. 인생의 어떤 순간에 그 어른을 만나지 않았으면 큰일 났겠구나 싶을 정도로 좋은 사람 말이다. 또 그런 사람을 조명하는 게 내 역할이기도 하다.

Q. 가장 흔한 과일인 사과를 먹지 않는 주인의 모습이, 그 사물에 얽힌 어떤 트라우마를 암시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그것의 실체를 무엇인지 끝내 공개하지는 않는다.

A. 원래 시나리오에는 사과와 관련된 전사가 있었다. 나중에는 그걸 삭제하는 방향으로 수정을 했다. 그런데 완전히 없애고 싶지는 않았다. 사과는 주인이라는 인물을 들여다보는 키(KEY)처럼 작용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앞으로의 인생을 살아갈 주인에게는 트라우마를 떠올리게 하는 트리거가 되는 상황들이 생길 것이다. 영화는 그것을 사과로 언뜻 제시하는데 그게 무엇이라고는 정확하게 알려주지는 않는다. 자신이 겪은 일과 관계있는 무언가가 트리거로 작용한다는 건 수많은 트라우마 연구에서도 나온다. 그게 1년 뒤, 혹은 10년 뒤라면 괜찮아질까. 그건 알 수 없다. 그런 차원에서 주인이가 겪은 일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지만 트리거가 사과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과는 너무 흔해서 피할 수 없는 과일이다. 그 흔한 것을 매일 어떤 식으로 마주해야 한다면 주인의 마음은 어떨지, 또 그것을 어떻게 대할지를 관객들이 상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또 한편으론 주인이는 그저 사과를 싫어하는 아이일 수도 있다. 이 두 가지가 복합적으로 작용할 수 있었으면 했다.

윤가은

Q. 틱톡이나 쇼츠 같은 유행 매체의 감각을 연출에 가미한 시도가 인상적이었다.

A. 실제로 변화하는 매체들에 대한 나의 감각이 증가한 부분이 있다. 유튜브, 쇼츠를 많이 본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내가 영화를 찍어온 방식에 대한 고민이 있었던 것 같다. 그동안은 기본만 잘하기도 벅찼다. 영화의 일관된 톤 앤 매너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 작품에선 균열을 좀 내고 싶었다. 관객을 좀 놀라게 하기도 하면서. 관객으로서 영화를 볼 때 연출에 낯선 게 침투해서 들어오는 것을 개인적으로 좋아한다. 내 영화도 단정한 영화 말고 전환이 된다던가 조금 다른 면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런 고민에 따라 나온 장면들이다. 있었다.

Q. 주제나 소재의 무거움만을 생각하고 영화를 본 관객들에게 장면이나 에피소드 등에서 예상치 못하게 터져 나오는 웃음들이 있어 흥미로웠다.

A. 감독한테는 보고 쓰는 것이 큰 경험이겠지만, 만들어 봐야 배울 수 있는 것들도 있다. 이 테마를 들여다볼 때 한 없이 무거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도 안 되게 웃긴 것들이 있다. '이런 걸로 웃어도 되나' 싶지만 이미 웃고 있는 우리가 있다. 그런 조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시도하면서도 불안할 때도 있었다. 이 영화 안에 있는 인물들에게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이 있었고, (그 기억은) 사라지지 않고, 어쩌면 계속 남아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과거의 일이고,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은 비극이 일어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Q. 윤가은 영화의 공통된 특징 같은데, 어떤 인물도 이야기 안에서 낭비되거나 소비된다는 인상을 주지 않는다. 시나리오를 쓸 때 이것에 관한 철학이나 원칙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결과가 아닐까 싶다.

A. 그렇게 봐주셨다면 감사하다. 늘 그렇게 생각하고 글을 쓰지만 뜻대로 안 된다(웃음). 이번 이야기는 주인이가 되게 중요한데, 주인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 친구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가 되게 중요하고 이 세계를 정직하게 바라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예전에는 글을 쓸 때 이 인물이 어떻게 보였으면 좋겠다는 내 의지가 중요해서 그 의지대로 인물이 움직이길 바랐다. 이번 이야기는 그걸 포기했다. 내 의지가 더 이상 먹히지 않는다는 걸 느꼈다. 이 이야기가 뭐를 원하는지 들여다보는 시간이 길었는데 이것을 어떻게 발견하고 잘 끌려가지? 잘 끌려가려고 애쓰는 과정이 길었다. 그런 과정 속에서 남은 인물이 현재의 인물들이다. 예전에 시나리오를 한창 공부할 때 이창동 감독님께서 '이야기는 만드는 게 아니라 만나는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 말의 의미를 세 번째 장편을 만들면서야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사실 아직도 영화를 잘 모르겠다. 산업이 이렇게 급변하는 걸 보면 더더욱. 늘 다음 작품을 할 수 있을지 불안하다. 직업을 갖고 싶다. 지금은 잠시 직업이 있는데 솔직히 다음 작품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래서 계속해서 공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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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혜 기자 ebada@sb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