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꼬무 찐리뷰]53년 전에도 '비상계엄' 있었다…박정희 유신시대와 긴급조치의 진실

작성 2025.03.14 12:32 수정 2025.03.14 12:32
꼬꼬무 찐리뷰

[SBS연예뉴스 | 강선애 기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13일 방송된 '유신헌법과 긴급조치'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방송인 홍석천, 배우 박효주, 아나운서 이인권이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서울 한복판에 나타난 탱크

때는 53년 전 서울, 평범한 가을날 저녁이야. 직장인들은 퇴근을 서두르고, 동네 곳곳에선 저녁을 준비하는 음식냄새가 솔솔 풍기고 있어. 그런데 그때 갑자기, 탱크를 몰고 중무장한 군인들이 서울 도심 한복판에 나타났어.

꼬꼬무 찐리뷰

당시 태평로에 있던 국회의사당, 그리고 광화문 근처 중앙청에 서 있는 탱크의 모습이야. 시간은 저녁 7시, TV와 라디오를 통해 깜짝 놀랄만한 소식이 전해져.

꼬꼬무 찐리뷰

"박정희 대통령 각하는 10월 17일 오후 7시를 기해 비상계엄령을 선포했습니다."
"1972년 10월 17일 19시를 기하여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 및 정치활동의 중지 등 현행 헌법의 일부 조항 효력을 정지시킨다."
"이와 같은 비상조치를 국민 앞에 선포한 박 대통령 각하는 우리 모두 일치단결하여 민주제도의 건전한 발전과 조국 통일의 기원이 성취되는 그날까지 힘차게 전진해 나갈 것을 촉구했습니다."
-당시 뉴스 보도 中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이 선포된 거야. 비상계엄은 대통령이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에 있을 때 선포할 수 있어.

꼬꼬무 찐리뷰

"보통 이제 한국에서 비상계엄은 어떤 굉장히 큰 사회 혼란기나 아니면 6.25 전쟁과 같은 정말 전시에 주로 선포가 됐어요. 그런데 이 1972년 10월 17일에 선포된 비상계엄은 사실은 굉장히 평온한 때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때에 선포가 됐고.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어떤 혼란이라든지 어떤 위기라든지 뭐 전시라든지 이런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던 시기인데 느닷없이, 그야말로 느닷없이 비상계엄이 선포가 되었던 거죠."
-오제연,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이렇게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앞으로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 이제부터 그 이야기를 해줄게.

▲비상계엄과 특별선언

박정희 대통령은 비상계엄과 함께 '10.17 특별 선언'을 발표했어. 그 내용은 이래.

"1972년 10월 17일 19시를 기하여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 및 정치활동의 중지 등 현행헌법의 일부 조항 효력을 정지시킨다."
"일부효력이 정지된 헌법조항의 기능은 현행헌법의 국무회의가 수행한다."
"비상국무회의는 1972년 10월 27일까지 조국의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헌법개정안을 공고하며 이를 공고한 날로부터 1개월 이내에 국민투표에 부쳐 확정시킨다."
"헌법개정안이 확정되면 개정된 헌법절차에 따라 늦어도 금년 연말 이전에 헌정질서를 정상화시킨다."

헌법도 바꾸고, 국회를 해산하겠다는 거야. 아까 사진 봤지? 국회의사당 정문을 딱 가로막고 있는 탱크. '국회 해산'이란 게 가능한 걸까? 당시에도 대통령에게 국회해산권은 없었대.

꼬꼬무 찐리뷰

"그때도 사실은 헌법에 의하면 할 수가 없는 거였고, 지금도 역시 뭐 헌법에 의하면 국회 해산권을 갖고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할 수가 없는 거죠."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국회해산권이 없는 대통령이 국회를 그냥 임의로 해산시켜버린 거죠. 군인들이 쫙 깔린 상태에서 뭐 그런 상태에서는 사실 기존 헌법에 어떤 조항이나 범위나 이런 것들에 구애받지 않고, 대통령이 임의로 자신의 권력을 행사할 수가 있었던 거죠."
-오제연,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그때도 국회는 계엄 해제를 요구할 수 있었어. 그런데 비상계엄을 선포하면서 초법적 조치로 국회를 해산시켜버린 거야. 그래서 해제할 수 없었어. 설사 국회가 해산되지 않았어도, 당시 국회엔 박정희 대통령이 소속되어 있는 여당 의원이 더 많았어. 그러니 야당만으로는 계엄 해제 요구가 어려운 상황이지.

아무리 그래도, 반발이 있지 않았을까? 그런데 주요 정치인들이 가택 연금을 당해. 대문 앞을 군인들이 지키고 있는 거야. 게다가, 느닷없이 끌려온 사람들이 옷이 벗겨진 채 사정없이 구타를 당해. 몽둥이질에 잠도 재우지 않고 물고문까지 이어져. 이렇게 고문을 당한 사람들은, 국회의원들이야. 이런 국회의원들에겐 공통점이 하나 있었어. 바로 '블랙리스트'.

비상계엄 한 달 전, 야당 의원들의 이름이 있는 블랙리스트 명단이 만들어졌다고 해.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블랙리스트에 적힌 사람 가운데 13명의 야당 의원들을 보안사에서 끌고 갔다는 거야.

이런 일들은 비상계엄 선포 후, 바로바로 진행됐어. 이렇게 국회도 해산하고, 헌법도 바꾸겠다고 해. 여기서 끝이 아니야. 얼마 뒤에 대통령 선거도 해. 불과 1년 전, 7대 대통령 선거가 있었거든. 근데 임기 1년 만에 또 대통령 선거를 하는 거야. 왜 그랬을까?

▲ 1년 만에 다시 한 대통령 선거

3년 전인 1969년, 박정희 정권은 헌법을 개정했어. '3선 개헌'이라고 들어봤어? 헌법 제 69조 3항 '대통령의 계속 재임은 3기에 한한다'. 대통령을 3번까지 할 수 있다는 거야. 원래는 두 번까지만 할 수 있었거든. 이렇게 5대 6대 대통령을 역임한 박정희 대통령은 이 헌법 개정으로 3선에 도전하게 돼.

꼬꼬무 찐리뷰

그리고 3선 개헌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하며 등장한 대선 라이벌이 있어. 바로 47살의 젊은 정치인, 김대중 후보. 두 후보의 경쟁은 엄청났어.

"여러분 이번에 정권교체를 하지 못하면 이 나라는 박정희 씨의 영구 집권의 총통 시대가 오는 것입니다. 박정희 씨는 '3선 개헌은 절대로 안 한다', '나보고 3선 개헌한다는 것은 야당 놈들의 모략이다' 이렇게 말했어요. 그러더니 2년이 못 가서 재작년에 절대로 안 한단 3선 개헌을 정반대로 절대로 해 버렸어요. 그렇기 때문에 이번에 헌법을 고칠 때는 앞으로 이 나라에서 누구든 자기 한 사람의 영구집권을 위해서 헌법을 이리 고치고 저리 고치고 하는 일은 영원히 못 하도록 분명히 하는 것을 여러분에게 내가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김대중 후보의 유세 연설 中

"유권자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서 여러분들에게 분명히 말씀드리거니와, '나를 대통령으로 한번 더 뽑아 주십시오' 하는 이런 정치 연설은 오늘 이 기회가 마지막 연설이 될 것이라는 것을 확실히 말씀드립니다. 지난 5대, 6대 대통령 선거에 있어서 유권자 여러분들은 이 사람을 대통령으로 두 번 뽑아 주셨습니다. 이번만 여러분들이 한번 더 이 사람을 지지를 해주시면, 일할 수 있는 그런 뒷받침을 해 주시면, 앞으로 4년 동안 여러분들을 위해서 있는 정력을 다 해서, 한번 멋있는 수도 서울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박정희 후보의 유세 연설 中

꼬꼬무 찐리뷰

그럼, 선거 결과 어땠을까? 결과는, 박정희의 승리였어. 53.2% 대 45.3%의 차이야. 서울에서는 김대중 후보가 앞서기도 했어. 그리고 한달 후, 박정희 대통령의 여당인 민주공화당이 113석, 야당인 신민당이 89석을 차지하면서, 그전에 비해 야당의 의석수가 늘어났어. 김종필 증언록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해.

"그 다음엔 김대중이 될지도 몰라. 그러니 내가 좀 특수한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

그 '특수한 것'이 뭘까? 박정희 대통령 취임 1년 뒤인 1972년 5월. '풍년사업'이란 이름의 은밀한 작업이 진행돼. 이름만 보면 농업 관련 사업 같지 않아? 근데, 그 작업이 진행된 장소는 바로 여기야.

꼬꼬무 찐리뷰

일명 '궁정동 안가'라 불리는 곳이야. '안가'는 안전가옥, 이곳은 대통령의 안전가옥이야. 아주 비밀스러운 곳이지. 여기서 뭘 했냐. 대만 총통제, 스페인 총통제, 프랑스 드골 헌법 등 해외사례를 연구하고 있어. 왜 이런 사례들을 연구할까? 대만의 총통이었던 장제스, 스페인 총통 프랑코, 두 사람 모두 본인들이 죽으면서 그 임기가 끝나. 종신 집권을 했다는 거야. 그렇게 은밀하게 진행된 풍년사업의 결과는, 다섯 달 뒤인 1972년 10월 세상에 공개됐어. '유신헌법'이라는 이름으로.

▲ 유신헌법

10월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헌법을 개정하고. 이게 바로 '10월 유신'이야. 유신, 사전적 의미는, 낡은 제도를 고쳐 새롭게 한다는 거야. 유신헌법에는 대통령이 사용할 수 있는 강력한 카드들이 있었어.

꼬꼬무 찐리뷰

먼저 '집권' 카드. 대통령 집권에 대한 강력한 변화가 생겨.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뽑지 않는다는 얘기야. 그럼, 누가 뽑냐? 통일주체국민회의, 일명 '통대'라고 하는 기관에서 대통령을 선출하겠다는 거야. 그런데, 이 '통대'의 의장이 누굴까? 대통령 본인이야. 대통령이 의장인 기관에서 대통령을 뽑겠다는 거지. 대통령 임기도 4년에서 6년으로 늘어나. 그리고 대통령 중임 제한 폐지. 사실상 영구집권이 가능해진 거야.

두번째는 '밸런스' 카드. 권력의 밸런스를 파괴하는 카드야. 대통령에게 '국회 해산권'이 생겼어. 10.17 비상계엄 때는 국회 해산권이 없었다고 했잖아? 그걸 만든 거야. 이제 대통령이 입법권을 가진 국회를 해산할 수 있어. 그리고 국회의원 3분의 1을 대통령이 추천하고 이를 '통대'에서 선출하겠대. 게다가 대통령이 사실상 사법부의 모든 법관을 임명할 수 있게 됐어.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이 입법부에 사법부까지 손아귀에 쥐는 거야. 3권분립의 파괴야.

마지막 카드는 아주 강력한 힘이야. 바로 '긴급조치'야. 유신헌법 제53조 1항을 보면, '국정 전반에 걸쳐 필요한 긴급조치를 할 수 있다'는 거야. 필요한 조치라는 게, 어디까지 가능한 걸까?

꼬꼬무 찐리뷰

"무서운 거는 헌법에 규정돼 있는 국민의 기본권의 효력을 정지시킬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부여했죠. 조치에 대해서는 사법 심사를 할 수가 없도록 해놨어요. 그것이 헌법에 위반되었는지 이런 것 자체를 심사할 수 없도록, 헌법에 아예 명시해 놨어요. 긴급조치 위반했다고 그래서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이 긴급 조치는 위헌이다', '불법이다', 아무리 주장해 봤자 먹혀들 수가 없었어요. 왜냐하면 법원이 심사 자체를 못 했기 때문에…"
-정태호,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대통령의 판단에 따라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정지하고 처벌할 수 있다는 거야.

비상계엄이 선포된 지 열흘 만에 공표된 이 유신헌법 개정안은 한달 뒤 국민투표에 부쳐져. 당시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투표 결과, 찬성률은 91.5%가 나와.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먼저, 유신이 내세운 명분 중 하나는 '평화통일'이었어. 유신 3개월 전,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돼. 분단 이후 남북이 처음으로 평화통일 원칙에 합의한 거야. 국민들의 통일에 대한 열망도 아주 높아졌어. 한마디로 '평화통일을 하려면 법과 체제를 바꿔야 한다', '10월 유신으로 한국적 민주주의를 이룩하자' 이런 명분으로 유신을 홍보한 거야.

꼬꼬무 찐리뷰

"유신헌법의 가장 큰 하나의 명분이 되는 것은 당시에 남북 관계가 획기적으로 변했다는 거죠. 그 이전에 남북의 어떤 대결, 특히 68년을 전후로 해서는 한반도의 안보 위기라고 부를 정도의 정말 곧 전쟁이 터질 수도 있는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이었거든요. 그런데 이런 것들이 한순간에 갑자기 변해서 지금 남북이 대화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러한 대화 국면에서 어쨌든 우리가 북한과 제대로 대화를 하려면 체제를 바꿔야 된다, 이게 이제 가장 큰 명분이 되는 것이고. 그때 체제를 바꿀 때는 우리가 평화 통일을 지향하는 그런 헌법을 가져야 된다라고 하는 것이 이제 또 하나의 명분이 되는 거죠."
-오제연,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실제로 박정희 대통령이 한 얘기가 있어.

"만일 국민 여러분이 헌법 개정에 찬성치 않는다면 나는 이것을 남북 대화를 원치 않는다는 국민의 의사 표시로 받아들이고 조국 통일에 대한 새로운 방안을 모색할 것임을 아울러 밝혀두는 바입니다."
-박정희, 10.17 대통령 특별선언 中

이런 선언과 함께, 유신 찬성을 위한 본격적인 홍보도 시작했어.

꼬꼬무 찐리뷰

"10월 유신, 100억 불 수출, 1,000불 소득"

쭉 뻗은 도로, 기계화된 농촌, TV, 자동차까지... 잘 살려면 유신이 필요하다고 홍보하는 거야. 이것도 한 번 봐봐.

꼬꼬무 찐리뷰

반대하면 파멸, 찬성하면 번영이래. 유신을 찬성해야 잘 살 수 있다는 거야. 그리고 효과적인 홍보 수단, 미디어도 활용했어. 이 시기에 모든 신문과 방송은 검열을 거쳐야만 했대. 혹여나 유신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가 나가면 안되니까.

꼬꼬무 찐리뷰

"문공부에서 주는 보도 자료를 한 자도 틀리지 않고 그대로 써야 되니까. '가장 적절한 시기에 가장 적절한 법률이다', 그런 식으로 다 신문이 받아 썼었죠. '유신만이 살 길이다' 그런 구호를 신문에 꼭 넣고. 그 다음에 칼럼을 쓸 필자들 풀로 넘겨줘요, 우리 신문사에. 그래서 '이 중에 골라서 해라'. 그런 사람 외에는 쓰지 못하게 했어요. 완전히 언론 탄압을 무지막지하게 했죠 그 당시에는. 유명한 얘기가 있는데 광고 이론에 나오는데 '반복은 진실을 만든다'는 말이 있어요. 계속 반복하면 그렇게 세뇌되는 거예요. 그렇게 될 수밖에 없어요."
-김동현, 당시 동아일보 기자

비상계엄이 선포된 1972년 10월 17일부터 유신 찬반 국민 투표일인 11월 21일까지, 유신 관련 좌담 방송이 398회, 유신지지 단독 해설이 218회, 유신 비전 제시 특별 프로그램이 58회 방송됐어. 이 정도면, 국민 투표에서 찬성률이 그렇게 높았던 이유가 좀 이해가 가지?

계엄 포고령에 따라 모든 집회, 시위는 금지됐어. 대학가는 계엄군이 지키고 있어. 유신을 반대하는 목소리는 들리기가 어려운 상황이야. 그렇게 비상계엄 체제 하에 유신헌법 국민 투표는 '찬성'이란 결과를 낳았어.

꼬꼬무 찐리뷰

"투표한 사람 중에서 90% 이상이 지지를 보냈으니까 '야 이건 정말 국민들이 모두 원했던 것이 아니냐' 얘기할 수도 있겠죠. 근데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역시 고려할 필요가 있겠어요. 일단 계엄령 아래에서 국민투표가 이루어졌다는 거예요. 한마디로 군대를 깔아놓고, 즉 바로 옆에 탱크, 장갑차, 무장한 군인들이 즐비한 상황에서 투표가 이루어졌다는 거죠. 두 번째가 여러 가지로 유신을 지지하고 찬양하는 목소리만이 허용됐던 그런 시절에, 정말 사람들은 그 얘기를 들을 수밖에 없고, 그 얘기 외에는 어떠한 판단의 근거도 마련돼 있지 않은 그런 상황에서는, 정부가 유도하는 대로 선거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숫자를 지나치게 과대평가하는 것은 문제가 됩니다."
-오제연,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그제서야 비상계엄도 해제됐어. 그렇게 유신 시대가 시작된 거야.

▲ 유신 시대의 시작과 반발

꼬꼬무 찐리뷰

그리고 대통령 선거를 치른지 1년 만에, 8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져. 들어봤을 거야, '체육관 선거'.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대통령 선거가 이루어졌어. 당연히 유신헌법에 따라 국민은 투표를 할 수가 없어. 통일주체국민회의, 일명 '통대'의 대의원들이 대통령을 뽑아. 후보는 단 한 명, 박정희. 결과는? 찬성 2,357표, 반대표는 없어. 무효표만 2개야. 그래서 찬성률이 99.9%야.

앞에 나온 7대 대선 때 박정희 후보의 선거유세 기억나? "'나를 한번 더 뽑아 주십시오' 하는 정치 연설은 오늘 이 기회가 마지막이라는 것을 확실히 말씀드립니다"라고 했던 거. 결과적으로 이 약속은 지켜졌어. 국민 앞에서 더 이상 지지를 호소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이때부터 1987년까지 무려 16년간 우리나라에서는 대통령 직접선거가 이뤄지지 않았어.

"그 문제점을 누구라도 조금만 들여다보면 알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오래갈 수가 없었던 거죠. 유신헌법에 대한 반대 투쟁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거였죠."
-정태호,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여기저기서 반발이 튀어나오기 시작해. 박정희의 라이벌, 김대중. 그가 일본에서 한 연설이 있거든. 한 번 들어봐.

꼬꼬무 찐리뷰

"요새 하고 있는 10월 유신이라는 거는 세상에 말도 안돼. 유신이 뭐야, 유신이. 일본 사람들이 100년 전에 써먹은 소리 아니요? 여러분, 다 기억하실 거예요. 재작년 선거 때 만일 이번에 박정희 정권의 종식을 짓지 못하면 이제 우리에게는 선거조차 없는 영구 집권의 총통제 시대가 온다고. 내가 몇 천 번 말했어요. 상당수 사람들이 '그래도 설마?' 그랬어. 그 설마가 사람 잡아요. 그렇게 됐어. 10월 18일 날 저는 박정희 씨의 조치를 정면으로 부인하고,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성명의 서두에 '박정희 씨의 이번 조치는 통일을 빙자해서 자기 자신의 영구집권을 획책하는 것이다' 이렇게 성명을 했습니다."
-김대중 일본 하코네 연설 中

유신 발표 직후부터 김대중은 일본과 미국을 오가며 유신 반대 목소리를 냈어. 그러던 1973년 8월 8일 일본 도쿄의 한 호텔. 김대중은 호텔 스위트룸에서 약속을 마치고 막 방을 나서는 중이었어. 그 순간 웬 남자들이 나타나 김대중의 목을 낚아채고 손수건으로 코와 입을 틀어막고는 끌고 가. 중앙정보부가 김대중을 납치한 거야. 이 김대중 납치 사건은 국내외적으로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게 돼. 반유신 운동에 불을 붙인 거야.

꼬꼬무 찐리뷰

반유신 운동에 가장 적극적으로 움직인 사람들은, 대학생들이었어. 여러 학교에서 시국선언문을 발표하며 대학생들이 유신체제와의 투쟁을 선언했어.

▲ 긴급 조치의 시대

이 상황을 유신정권은 어떻게 했을까? 유신헌법에 아주 강력한 제재가 있었잖아. 바로 '긴급조치'. 1974년 1월 8일, 박정희 대통령은 긴급조치 1, 2호를 선포해.

"1월 8일 박정희 대통령은 헌법 제53조에 의한 대통령 긴급 조치를 선포하여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방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하고, 유언비어를 날조, 유포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고 밝혔습니다. 이 조치에 위반하거나 비방한 자는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 구속, 압수, 수색하며 비상군법회의에서 심판, 처단하기로 했습니다."
-당시 뉴스 보도 中

유신헌법에 대해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어. 반대는 물론, 비방도 하면 안돼. 또 유언비어도 금지야. 위반하면 영장 없이 체포할 수 있고, 징역이 무려 15년까지 가능해. 그리고 긴급 조치 2호는, 비상군법회의 설치에 대한 내용이야. 실제로 긴급조치 위반으로 학생들은 비상보통군법회의에 세워졌어.

꼬꼬무 찐리뷰

"긴급조치의 주된 내용들은 유신 체제를 보호하기 위한 그런 거였죠. '유신헌법에 대해서 한마디도 하지 마라' '좋다 나쁘다 평가도 하지 마라' '유신헌법이 나쁘니까 개헌을 하자' 뭐 이런 얘기도 하지 마라. 그러니까 이게 민주주의의 근본 원리, 특히 국민주권 원리를 정면으로 부정한 거거든요."
-정태호,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곧이어 발표된 긴급조치 3호에는 국민생활안정을 위한 조치들이 나열돼 있어. 불안해진 민심을 달래기 위한 것이었을까? 그럼에도 여론은 심상치 않았어. 결국 박정희 대통령은 직접 나서 이야기해.

꼬꼬무 찐리뷰

"이런 판국에 전 국민이 혼연일체가 돼서 한 덩어리가 돼도 지금 이러한 난관을 뚫고 나아가기가 힘이 들고 힘이 부족한 판인데. 작년 연말부터 국내 일각에서는 일부 인사들 중에 현 체제에 대해서 정면으로 도전을 해오는가 하면 민심을 자꾸 선동을 하고 사회 혼란만을 조장하기 때문에, 그동안 수차 설득도 해보고 경고도 해 보았습니다만 설득이나 경고만 가지고는 이 사람들의 행동이 중지할 그런 뜻이 전혀 없다는 것을 판단을 해서 만부득이 대통령의 긴급조치를 발동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번에 긴급 조치가 선포된 그 배경, 이유라고 그럴까. 목적, 취지 이런 것을 여러분들이 잘 이해를 해 주시고, 적극적으로 협조를 해주십사 하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이 적극적으로 협조를 해 주시면 이 조치는 곧 필요 없게 될 것입니다."
-박정희, 1974년 1월 연두 기자회견 중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박정희 대통령은 긴급조치에 대한 영화도 만들었어. 영화 속 어머니 역할이 아주 온화한 말투로 정부의 긴급조치에 대한 입장을 줄줄 설명하곤 했어.

하지만, 유신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는 점점 커져가. 긴급조치로 억압 받은 학생들은 더 많은 학생들과 연대를 해. 4월 3일, 대학가에서 시위를 준비한 거야. 그런데, 이를 사전에 파악한 유신정권은 대대적인 검거에 나서. 그리고 4월 3일 밤, 긴급조치 4호가 선포돼. 그 내용은 이래.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과 이에 관련되는 단체를 조직 또는 가입하거나, 활동에 동조하거나 직간접적으로 관여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이를 위반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5년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긴급조치로 최대 사형까지 선고할 수 있어. 어떻게 학생들의 시위에 사형까지 언급됐을까? 여기에서 언급된 단체,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줄여서 '민청학련'이라 불러. 긴급조치 4호가 선포된 이유는, 바로 이거였어.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의 수사 상황을 발표했습니다. 과거 공산 불법단체인 인민혁명당과 제1 조총련, 국내 좌파 혁신계 기독교 학생단체, 그리고 일본 공산당원까지 포함된 약 20명의 배후 조종자가 스며들어 자금을 대는 등 학생들을 뒤에서 조종한 것이 드러났습니다. 4월 3일을 기해 폭동을 일으켜서 정부 주요기관을 점거하고 정권을 인수하려 했으며, 인혁당은 대한민국을 폭력으로 전복하고 공산정권을 수립할 목적으로 북한 괴뢰 지령에 따라 조직되고 활동한 반국가단체라고 밝혔습니다."
-당시 뉴스 보도 中

학생들이 북한의 조종을 받고 있고, 공산계 불법단체가 배후에 있다는 거야. 나라를 전복할 목적이래. 그런데, 이건 조작으로 밝혀졌어. 유신체제에 저항하는 학생들의 시위를 배후세력까지 조작해서 국가전복 시도라는 시나리오를 쓴 거야.

꼬꼬무 찐리뷰

그렇게 민청학련 사건으로 조사받은 사람만, 천 명이 넘어. 대부분 대학생들이었어. 그중 7명에게 사형이 구형됐고, 무기징역 7명, 징역 20년형이 12명이나 됐어. 이 사건의 변론을 맡았던 강신옥 변호사는 법정에서 이렇게 얘기를 했어.

"법은 정치와 권력의 시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나랏일을 걱정하는 애국 학생들을 빨갱이로 몰아 사형이니, 무기니 하는 형을 구형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법을 악용하는 '사법 살인'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강 변호사가 이렇게 변론을 이어가는 도중, 갑자기 휴정이 선포되고 강 변호사는 연행됐어. 그날 밤, 남산 중정으로 연행된 강 변호사는 잔혹한 구타를 당했대. 그리고 결국 구속됐어. 그의 죄목은, '긴급조치 위반'이었어.

▲ 언론 통제와 저항

이런 사태들이 벌어지고 있지만 언론에선 제대로 보도하지 못했어. 학생들의 시위, 개헌운동 등은 기사가 빠지거나 최소화돼. 고문, 수사, 재판에 대한 문제점에도 침묵했어. 당시 언론사에는 기자도 아닌데 매일 출근 도장을 찍는 사람이 있다고 해. 기관원이라고, 중앙정보부에서 나온 사람이야. 기사를 빼고, 용어를 바꾸고. 중앙정보부에서 각 언론사별로 담당직원을 배치해 통제를 하는 거야.

꼬꼬무 찐리뷰

"유신 시기에 들어서서는 신문에 무슨 기사를 내지 말라, 내지 말라는 게 딱 아주 한정돼 있는데. '학생들 데모 기사는 절대로 내지 마라'. '저항하는 움직임에 대해서 아주 손끝 하나도 보도하지 말라' 이렇게 되는 거죠."
-김학천, 당시 동아방송 PD

"그 당시는 그 모든 걸 전부 통제하고, 누가 자살했다든지 뭐 어제 굶는다든지 어렵다든지 이런 건 기사 못 나가게 돼 있어요. 전부 다 밝은 기사만 쓰라 그러고."
-김동현, 당시 동아일보 기자

보도할 때 쓰는 단어에도 제재가 있었어. 예를 들어 '물가 인상'은 '물가 현실화'. '세금 인상'은 '세제 개혁'. 묘하게 뉘앙스를 바꾼 거야. 이런 상황에 언론인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꼬꼬무 찐리뷰

"그 당시에 데모하는 현장에 가면, 서울대학교에 가면 그쪽에서 써 놨어요. '개와 기자는 출입금지' 써놨어요. '기사 나가지도 않는데 왜 오는데, 올 필요 없다'고 해가지고. 그렇게 모욕을 받았어요. 그러니까 얼마나 괴로웠겠어요. 그때 보면서 '부끄럽다'는 걸 느꼈어요. 기자가 참 부끄럽다. 그걸 제대로 해서 국민에게 알려줄 의무가 있는데. '그런 걸 못하면서 말이야. 기자라고 언론이라고' 이거는 너무 창피했어요. 그때 우리들이 울었어요, 사실은…"
-김동현, 당시 동아일보 기자

이런 상황이 되자 언론도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어. 이 사진을 한번 볼래.

꼬꼬무 찐리뷰
꼬꼬무 찐리뷰
꼬꼬무 찐리뷰

사진 속 족자에 적힌 글자는 '자유언론 실천선언'. 마지막 사진에 서 있는 분은 인터뷰를 해 주신 김학천 PD야. 그렇게 1974년 10월 24일,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은 투쟁에 나섰어. "신문방송잡지에 대한 어떠한 외부 간섭도 배제한다", "기관원의 출입을 거부한다", "언론인의 불법 연행을 거부한다"라고 외쳤어. 그 후 매일매일이 치열한 싸움이야.

회사 건물 현관에 '기관원 출입 금지'라고 써 붙이고, 학생 시위에 대한 기사를 늘렸어. 그리고 라디오 방송에서는 비판적이고 풍자적인 멘트도 넣었어. "권력이란 무엇입니까. 한 번 잡으면 그렇게 놓기 싫은 겁니까?"라며 비판했어. 그리고 얼마 뒤, 아주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해.

"저희는 동아일보에서 광고를 그만해야 할 것 같은데요."
"이번 달 광고 예산이 아직 안 나와서. 광고를 더 못할 것 같은데..."

무려 90% 정도의 광고가 해약돼. 그리고 12월 26일 동아일보 신문은 이렇게 발행돼.

꼬꼬무 찐리뷰

아예 백지광고로 나간 거야. 무더기로 광고가 빠진 자리를, 그대로 보여준 거지. 그런데, 그 후로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나. 이건 다른 날 발행된 동아일보야.

꼬꼬무 찐리뷰

빼곡히 채워진 광고의 정체. 격려 광고가 들어오기 시작한 거야. 대학생, 주부, 어린이, 해외 동포까지. 자발적으로 정성을 모아준 거야.

꼬꼬무 찐리뷰

'취학하는 석아, 그른 것은 절대 배우지 마라' –아빠, 엄마
'양심에 호소하여 우리보다 참하게 살았으면 싶다'-어느 여자 직장인
'운전자와 손님이 합심하여 동아일보의 발전을 빌며'-택시 운전사와 손님
'데이트 자금으로 작은 지면을 삽니다'-순과 선
'이 나라에서 법을 공부하는 안타까운 이 마음과…' –서울대 동창 남매

"마침 그것도 이제 시민들이 성금 내듯이 그런 식으로 했으니까. 고무적이었죠. 우리를 후원하는 이런 사람들이 있구나, 우리 우군이 있구나, 우리가 외롭지 않다. 그런 걸 느꼈어요."
-김동현, 당시 동아일보 기자

시민들의 격려 광고로 힘을 얻으며 저항을 이어오던 어느날, 김학천 PD는 아주 특별한 방송을 준비해. 주제는 바로, '감옥으로 보내는 편지'였어. 당시 긴급조치 위반으로 수감 중인 사람들의 가족들이 직접 쓴 편지를 방송하기로 한 거야. 방송이 시작되고, 수감 중인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를 어린 아들이 직접 읽어.

"아버지! 난 아버지가 죄가 있어서 거기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어요. 그래서..."

편지는 이제 시작인데, 그 후는 꺽~꺽~ 우는 소리만 이어져. 그 다음은 자식을 감옥에 보낸 어머니의 편지였어.

"아들아, 엄마가 엊그제 면회를 갔는데 면회를 시켜주지 않더구나. 내복 여러 벌 가지고 갔는데 전해주지 못했구나. 다른 재소자들이라도 입으라고 전부 두고 왔단다. 엄마는..."

어머니도 더 이상 편지를 읽지 못하셔. 사무치는 울음소리만 전파를 타고 퍼져나가.

꼬꼬무 찐리뷰

"상당히 파국까지 왔다라는 생각이고, 꺾일 때 어떻게 꺾일 것인가. 어쨌든 난 아침 시간 15분, 내가 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그때 뭐 감옥에 많이 들어가 있었지. 그 감옥에 아이들 또는 부모를 둔 사람들이 5분 동안 원고지 한 6~7장을 써서 읽으라고 했는데. 첫 번째 문장만 그냥 읽다가 그 다음에 다 우는 걸로 끝을 냈어요. '김학천 씨, 이거 여기서 끊을까요? 그냥 훌쩍훌쩍 울기만 하는데' 묻길래, '그냥 둬라. 그것도 메시지 아니냐'.. 한 1~2분 얘기하고 2~3분 우는 프로그램이 나갔어요."
-김학천, 당시 동아방송 PD

▲ 분노한 대학생들

1972년에 유신이 시작되고 유신에 대한 저항과 이를 막으려는 조치들이 반복됐어. 긴급조치 5호와 6호는 앞서 선포된 조치들을 해제하려는 조치야. 긴급조치 해제를 위해 또 다른 긴급조치를 선포한 거야. 그리고 7호는, 고려대학교 한 학교를 휴교시키기 위해 선포됐어. 시위를 막으려고.

그리고 1975년 4월 8일. 또 한번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져. 긴급조치 4호 기억나지? 대학생들이 북한 세력의 조종을 받아 국가를 전복할 목적이라며 사형을 구형했던 거. 이날은 민청학련 사건의 배후 세력으로 지목됐던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들의 최종 판결이 내려지는 날이야. 그리고 8명의 관련자들에게 최종적으로 사형이 선고됐어.

다음날, 사형 선고를 받은 이들의 가족들이 아침 일찍 구치소로 향했어. 구속 이후 1년 가까이 만나지 못해서, 형이 확정됐으니 면회라도 가능하겠지 싶어 만나러 간거야. 그날 찍힌 사진이 있어.

꼬꼬무 찐리뷰

통곡하는 가족들. 이미 사형이 집행된 거야. 대법원 판결 18시간 만에 사형이 집행 됐어. 이날은 사법 사상 암흑의 날로 기록돼. 훗날, 이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아.

사람들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어. 이틀 뒤 서울대 백양나무 옆 잔디밭에 3백 명 가량의 학생들이 모였어. 그리고, 한 청년이 이들 앞으로 걸어 나와.

꼬꼬무 찐리뷰

청년의 이름은 김상진이야. 서울대학교에 재학중이었던 상진이는 친구들과 함께 유신 반대 단식 집회를 준비하고 있었어. 김상진 학생에 대해 들어볼게.

꼬꼬무 찐리뷰

"우리 상진이가 착하고 진짜 속 썩이는 거 없었어요. 아버지 어머니 말을 잘 들었지.
-김상운, 김상진 형

"조용했습니다. 얌전하다고 할까요. 차분한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저하고 서울대학교 같은 과를 입학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유신헌법의 그 문제점들이 사회적으로 자꾸 농축돼 갔던 거죠. 75년도부터가 거의 폭발의 단계에 왔습니다. 그 폭발의 불쏘시개를 한 게 제2차 인혁당 사건입니다. 그 사건이 발생해서 8명이 사형 집행이 된 적이 있죠. 상진이가 매우매우 분노했습니다."
-이호선, 김상진 친구

상진이는 학생들 앞에 서서 준비해 온 글을 읽기 시작해. 글의 제목은 '양심선언문'이야. 당시 상진이의 목소리를 녹음한 기록이 있어.

"우리를 대변한 동지들은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서 신음하고 있고, 무고한 백성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가고 있다. 합법을 가장한 유신헌법의 모든 부조리와 악을 고발한다. 우리는 유신헌법의 자기중심적 이기성을 고발한다. 학우여 아는가! 민주주의는 지식의 산물이 아니라 투쟁의 결과라는 것을. 이것이 민족과 역사를 위하는 길이고, 이것이 우리 사랑스러운 조국의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길이며, 이것이 영원한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길이라면. 이 보잘 것 없는 생명 바치기에 아까움이 없노라. 나의 앞으로의 행동에 대해서 여러분은 조금도 동요하지 말고 완전한 이성을 되찾아서, 우리가 해야 할 바를 갖다가 명실상부하게 이끌어 나가길 바란다..."
-김상진의 양심선언문, 1975년 4월 11일

녹음분을 들어보면, 상진이의 이 말을 끝으로 갑자기 현장이 소란스러워져.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꼬꼬무 찐리뷰

"이건 방송에는 처음 하는 얘기들입니다. 이걸 꼭 기록을 해주셔야 됩니다. 그 계단에서 이런 얘기를 저한테 했군요. '호선아 나는 이제 나의 신념을, 각오를 행동으로 표현할게. 유신이 없어지는 날, 나를 기억해 달라'는 그런 식의 얘기였습니다. 상진이가 서서 낭독하는 그 자리에서 10여 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제가 앉아 있었어요. 상진이가 양심선언문을 읽자마자 가방에서 과도를 꺼냈습니다... 5초만 빨라도 됐습니다. 5초만 빨라도 됐어.. 칼로 찌르고 앞으로 넘어지기 직전에 제가 뒤에서 붙잡았습니다."
-이호선, 김상진 친구

호선이는 상진이와 함께 병원으로 이동했어. 그 택시 안에서 상진이가 이런 이야기를 했대.

"호선아, 애국가 불러줘"

호선이는 큰 목소리로 애국가를 불렀어. 그리고 상진이는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어.

▲ 긴급조치 9호

김상진 열사의 죽음 뒤로, 저항의 목소리를 더욱 거세졌어. 그로부터 한 달 뒤, 긴급조치 8호로 긴급조치 7호가 해제되고, 동시에 긴급조치 9호가 선포돼. 유언비어 안 되고, 유신헌법에 대해 말해서도 안 되고, 시위는 물론 학생의 정치 관여도 안돼.

꼬꼬무 찐리뷰

"긴급 조치 9호는 어떤 특정한 사건에 대응하기 위해서 발동한 것이 아니라 그냥 항시적으로 어떠한 경우에도 유신 체제에 대해서 저항은 물론이고 어떠한 비판도 할 수 없도록 결국에는 아주 광범위하고 포괄적으로 유신에 대한 반대를 불허하는 그러한 조치라고 할 수 있어요 그래서 이런 것들을 우리가 보통 '긴급조치의 종합판'이다…"
-오제현,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이렇게 선포된 긴급조치 9호는 오랫동안 국민의 숨통을 조여왔어. 무려 4년 7개월 동안. 긴급조치가 9호가 이렇게 오래 지속되는 동안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때는 1978년 11월. 전북에서 꽤 잘 나간다는 한 학원이야. 이 학원에서 영어강사로 일하는 차봉현 씨. 봉현 씨는 여기저기 스카우트가 될 정도로 인기 강사였대. 봉현 씨는 영어뿐 아니라 정치 경제 윤리 강의도 하며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어. 어느날, 봉현 씨는 여느 날처럼 학원으로 출근을 했어. 수업 내용을 살펴보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더니 남자 2명이 들어와. 학원으로 경찰들이 들이닥친 거야.

꼬꼬무 찐리뷰

"경찰이 물어보는 거예요. '당신이 유신 헌법 철폐하고 유신 헌법 없애자고 학생들 앞에 주장 안 했냐' 이제 이렇게 나온 거예요. '나는 절대 그런 말 안 했다' 내가 사회의 지도자가 아니고 내가 뭐 정당의 정당인도 아니고 내가 뭐 정치를 하는 사람도 아니고. 절대 부인한 거예요."
-차봉현, 당시 영어학원 강사

봉현 씨가 강의 중 유신헌법 철폐를 주장했다는 거야. 봉현 씨는 강의 때 이렇게 얘기를 했대.

"국회의 여당 의원 수가 많잖아요. 그건 헌법으로 설치된 통일주체국민회의가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뽑기 때문이에요."

이런 말이 문제 될 거라곤 생각도 못했어. 그 후, 봉현 씨는 여기저기 끌려 다니며 폭행을 당했어. 날이 갈수록 폭행의 강도는 점점 심해졌대.

꼬꼬무 찐리뷰

"둘이서 이제 때리기 시작한 거예요. 주먹으로 뺨도 때리고. 취조하는 실인데 거기 데리고 가서 옷을 벗겨요. 옷을 벗겨 가지고 빨가 벗겨서 몽둥이로 이제 때리는 거예요 둘이서. 또 무릎을 꿇고 앉으라고 해서 무릎 사이에 나무를 놔두고 거기서 밟아버려요. 그러면 무릎이 팍 깨져요. 그런 고문을 당했어요. 경찰서 정보과실에서. '나는 비판 정도를 했다' '헌법을 폐지해야 한다. 헌법을 개정해야 한다' 이런 말은 절대 한 것 없다. 근데 그게 안 통한다니까. 자기가 써갖고 와서 이렇게 '이대로 해달라' 그러니까 내가 이제 안 맞으려고 사인해 줬죠."
-차봉현, 긴급조치 피해자

자백을 받기 위해 봉현 씨를 고문한 거야. 봉현 씨는 1년 6개월의 형을 선고받았어. 근데 이런 일을 겪은 건 봉현 씨 뿐만이 아니야. 긴급조치 9호로 처벌받은 사례들을 보여줄게.

"박정희는 군인 출신이기 때문에 정치를 잘할 수 없어. 100억 불 수출이라 하면서도 수입에 대해서는 은폐하고 있잖아. 언론의 자유도 없는 거야."

이런 말을 했다고 징역 8년을 선고받았어. 또 어떤 남자는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박정희 정치는 뭣~도 아니다" 이렇게 외쳤어. 판결은 징역 1년. "자기야, 대통령이 내가 잘 아는 친구 언니와 애인 사이래"라는 가벼운 말. 이건 징역 1년을 선고받았어. 긴급조치 9호는 술 먹고 말 한마디 잘못해도 잡혀간다 해서 '막걸리 보안법'이라 불렸어.

심지어 노래도 마음대로 못 불렀어. 국가의 안전 수호와 사회 질서를 문란케 하는 대중문화가 있다는 거야. 그렇게 취한 조치가 '금지곡'. 1975년 한 해 동안 금지된 노래가 국내 가요만 222곡이야. 지금도 들으면 알만한 곡들이 이때 무더기로 금지가 돼.

김추자의 '거짓말이야'. 이 노래는 1971년 발매돼 아주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어. 이 노래가 갑자기 금지된 이유는 '거짓말이야'라는 가사 때문에. '가사 내용 불신 조장', 그리고 창법도 저속하대.

신중현의 '미인'. 너무 유명한 노래지. '신중현과 엽전들'의 '미인'은 1974년에 발매돼 약 40만 장 이상의 앨범 판매를 올린 대히트곡이야. 이 곡이 금지된 이유는, 저속한 가사, 퇴폐한 곡이래. 어디가 저속하다는 걸까?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네~' 이 가사를 학생들이 '한 번 하고 두 번 하고 자꾸만 하고 싶네~' 이렇게 개사해서 불렀대. 박정희 대통령이 대통령을 한 번 하고 두 번 한다고, 그렇게 비꼬고 풍자하니까 금지곡이 된 거 아니냐 라는 얘기가 있어.

그리고, 금지곡 하면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곡이 한 곡 더 있지. 바로 김민기의 '아침이슬'. 양희은이 부른 '아침이슬'이 많이 알려져 있지. 이 노래를 작사, 작곡한 사람이 바로 김민기야. 이 곡이 금지된 이유는, 없어. 기록에 금지 사유가 아예 적혀 있지 않아.

꼬꼬무 찐리뷰

"보통 이렇게 금지곡이 되려면 그 옆에 금지 사유가 있어야 돼요. 아무리 엉망으로 하더라도 사유가 있어야 되잖아요. 근데 '아침이슬'은 금지 사유가 없어요. 이걸 대학생들이 시위에 불렀다고 금지를 시키기에는 너무 논리가 옹색한 거죠. 금지 사유가 없어."
-강헌, 음악평론가

유신 반대 시위 현장에서 많은 학생들이 김민기의 노래를 불렀어. 그렇게 김민기의 노래는 모두 금지곡이 되었고 그는 보안사 등 여기저기를 끌려 다니며 조사를 받고 활동 또한 탄압을 받았어.

"금지라는 행위, 검열이라는 행위가 뭐가 나쁘냐면요. '상상력에 제한이 가해져서는 안 된다'라는 이유인 겁니다. 결국 검열은 상상력의 잠재력을 사실은 원천적으로 파괴시키는 행위예요. 알아서 기게 만드는 행위예요. 그걸 알아서 기는 예술가들이 어떤 작품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결국 그런 표현의 자유를 물리적인 공권력으로 억압한다는 얘기는 그냥 간단한 얘기예요. 그냥 단순히 '이 노래 부르지 마, 이 영화 보지 마, 이 책 읽지마'로 끝나는 것이 아니에요. 이것은 기본적으로 민주주의가 보장하고 있는, 헌법이 보장하는 모든 기본권이 '전부 구금될 수 있다'는 얘기이고 실제로 그렇게 됩니다."
-강헌, 음악평론가

▲ 유신의 종말

말 한 마디 조심하고, 노래도 마음대로 못 하는 시대는 몇 년 간 이어져. 그러던 중, 1979년 민중의 불만이 폭발하는 사건들이 일어나. 'YH 사건' 혹시 들어봤어? 8월 9일, 가발공장이었던 YH무역의 일방적인 폐업 공고로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이 당시 야당인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을 벌이게 돼.

꼬꼬무 찐리뷰

여공들의 호소를 받아 주고 당사로 받아준 사람이, 당시 신민당 총재 김영삼이야. 하지만, 곧 야당 당사에 경찰이 투입돼. 농성을 하던 노동자들을 경찰은 무차별 폭력과 강제 연행으로 진압했어. 이를 지켜 본 김영삼 총재는 박정희 정권과의 정면대결에 들어가. 그러다 김영삼 총재는 국회의원 제명을 당해. 제명된 후 이렇게 말했지.

꼬꼬무 찐리뷰

"아무리 닭의 목을 비틀지라도 새벽은 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10월 16일 부산. "유신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며, 김영삼의 정치적 본거지였던 부산 시민들이 들고 일어났어. 부산대에서 수백 명으로 시작된 시위는 수천 명으로 늘어났고, 결국 수 만명의 군중이 모였어. 그리고 부산에 비상계엄이 선포돼. 부산 시내에 탱크가 등장했어. 그러나 시민들은 물러서지 않았고 시위는 마산으로까지 번졌어. 바로 '부마항쟁'이야.

김재규의 법정 진술에 따르면, 부마항쟁을 보고 받은 박정희 대통령이 이런 말을 했다는 거야.

"이제부터 사태가 악화되면 내가 발포 명령을 하겠다."

그리고 부마항쟁 열흘 뒤인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안가에서 열린 연회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의 총에 맞아 사망해. 이렇게 유신 시대는 끝을 맞게 돼.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궁정동 안가. 유신헌법의 초안이 작성된 장소 어디라고 했지? 그래 궁정동 안가. 거기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며 길고 길었던 유신 시대는 끝이 났어.

7년간 이어진 유신체제. 그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지. 언론의 자유를 위해 싸운 분들은 마지막까지 철야 농성을 하며 저항했지만, 결국 회사에서 강제로 끌려 나왔어. 당시 100 명이 넘는 언론인이 해임을 당하게 돼.

긴급조치 9호로 재판을 받던 학원강사 봉현 씨는 박정희의 사망 후 최종 면소 판결을 받고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어. 하지만 다시 강사로 취업할 수는 없었다고 해.

긴급조치는 30년이 훨씬 지나 2000년대에 들어서야 위헌 판결이 내려졌어. 2010년 대법원은 긴급조치 1호가 유신헌법, 현행헌법에 위험이라고 판단했고, 그 이후 긴급조치 4호, 9호 역시 위헌이라 했어. 2013년 헌법재판소에서는 긴급조치 1호, 2호, 9호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렸어. 그리고 2018년 대법원에서는 1972년 비상 계엄 포고령에 대해 이렇게 판단했어.

꼬꼬무 찐리뷰

"당시의 국내 정치 상황 및 사회 상황이 계엄법에서 정한 '군사상 필요할 때'에 해당한다고 할 수 없다. 계엄 포고는 헌법과 법률에서 정한 발동 요건을 갖추지 못한 채 발령되었고, 구 헌법, 현행 헌법, 구 계엄령에 위배되어 위헌이고 위법하여 무효이다."

노벨문학상 수상한 한강 작가가 이런 말을 했어.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라고.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현재도 언젠간 과거가 될 거야. 현재가 어떻게 기록될지는, 지금 우리의 몫이지 않을까?

꼬꼬무 찐리뷰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강선애 기자 sakang@sbs.co.kr

강선애 기자 sakang@sb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