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브수다] "OO신은 워너가 반대"…봉준호 감독, '미키 17' 물음표에 답하다

작성 2025.02.28 15:26 수정 2025.02.28 15:26
봉준호

[SBS 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오늘 에스프레소를 7잔이나 마셨더니, X카스 10병 먹은 중학생같이 흥분된 상태입니다"

봉준호 감독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가벼운 위트로 어색한 인터뷰장의 분위기를 깼다. '기생충' 이후 6년, 국내 기자들 앞에 서는 그의 마음도, 그를 맞는 기자들의 감회도 남달랐다.

이번엔 할리우드 영화다. 미국 대형 스튜디오 워너브라더스의 자본과 미국 최고의 배우 그리고 봉준호가 만났다. '설국열차', '옥자'에 이은 또 한 번의 도전이다.

에드워드 애슈턴의 훌륭한 원작('미키 7')이 있지만, '미키 17'은 봉준호의 터치가 가미된 봉준호의 또 다른 세계다. 그는 영화가 공개되기 전부터 '발냄새 SF'라는 흥미로운 표현을 써가며 '미키 7'과는 다른 '미키 17'만의 개성을 언급한 바 있다.

'미키 17' 속 흥미로웠던 설정과 장면에 대한 그의 부연 설명을 들어봤다.

미키

◆ 봉준호의 첫 멜로 영화?…"소설에서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장면이라"

'미키 17'의 흥미로운 점 하나는 봉준호 감독이 연출한 멜로 장면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영화에는 미키(로버트 패틴슨)와 나샤(나오미 애키)의 로맨스가 꽤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그 과정에서 봉준호 영화 중 드물게 키스신과 베드신이 등장한다. 봉 감독은 "이 영화를 멜로 영화라고 하는 건 좀 뻔뻔하지만 미키와 나샤의 러브 스토리는 '미키 17'에서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다"라고 강조했다.

"원작이 있는 영화를 만들 때는 그걸 바꾸는 과정이 필요하다. 일파의 경우 소설엔 아예 없는 캐릭터였고, 스티븐 연도 원작엔 좀 더 인기 스타처럼 묘사되는데 영화에선 좀 찌질하게 바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작에서 그대로 가져오고 싶었던 건 미키와 나샤의 사랑이야기였다. 소설에서 그들의 사랑이 그려진 챕터1을 읽었을 때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나샤가 미키를 지켜주는 내용이었는데 그걸 영화에서도 잘 표현하고 싶었다. 우리 영화에선 미키만큼이나 나샤도 굉장히 중요한 캐릭터다. 미키가 파괴되지 않도록 지켜주는 인물이다. 또한 냐샤는 마샬에게 욕하면서 대들 정도로 파워풀한 면도 있다"

미키

봉준호 감독의 말대로 '미키 17'을 멜로 영화라고 하는 건 무리가 있다. 그러나 봉준호 장면의 멜로 장연 연출도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얼음 행성의 차가운 우주선 안에서 두 인물이 사랑을 나누는 장면은 몽글몽글한 감성이 피어오른다. 로버트 패틴슨과 나오미 애키의 앙상블, 그리고 봉준호식 연출이 더해진 결과다.

◆ "크리퍼 디자인, 크루아상에서 영감"

크리퍼는 '미키 17'에서 겉과 속이 다른 캐릭터였다. 흉물스러운 외모 때문에 첫 등장부터 주인공을 위협하는 빌런일 것으로 예상됐다. 그러나 크리퍼는 주인공을 해치는 존재가 아니라 행성을 지키려 안간힘을 쓰는 원주민일 뿐이었다. 영화 후반부 크리퍼의 반격도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이 괴생물체의 디자인은 어딘가 친숙하다. 온몸에 주름이 있고, 웅크렸다 펴질 수 있는 특성으로 인해 어린 시절 익히 보았던 공(콩)벌레가 연상되기도 한다. 그러나 봉준호 감독이 영감을 받은 것 벌레나 동물이 아니었다. 빵이었다.

미키

"크리퍼 디자인의 출발은 크루아상이었다. '괴물', '옥자'를 작업한 장희철 크리처 디자이너와 이번에도 함께했는데 그에게 준 디자인이 크루아상 빵이었다. 개인적으로도 좋아하는 빵인데 그걸 보고 있으면 왠지 움직일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겹과 레이어 때문에 아코디언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 묘한 볼륨감도 좋다. 우리 영화에 등장하는 크리퍼는 마마 크리퍼, 주니어 크리퍼, 베이비 크리퍼 크게 세 가지다. 마마 크리퍼 정도의 크기가 되면 좀 더 크루아상스럽다. 베이비 크리퍼는 동작도 강아지 동작이다. 주니어 크리퍼는 액션을 담당한다. 아마딜로 같은 이미지다. 마마 크리퍼는 베테랑 4선 의원의 풍모를 내려고 했다"

미키

◆ "악몽 장면이 진짜 결말? 스튜디오 반대 딛고 찍은 장면"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영화의 엔딩이다. 원작 소설이 열린 결말에 가깝다면, 영화는 분명한 노선을 보여준다. 다만 영화가 결말에 이르기 전 애매모호한 시퀀스가 한 차례 등장한다. 미키의 악몽 장면이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에는 함의가 많다는 걸 고려하면 이 장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보고도 못 믿으셨군요. 악몽이 진짜 같고, 엔딩이 가짜 같았나요?(웃음)"

미키

봉 감독은 이런 의문 자체를 흥미로워했다. 그러면서 "그 장면을 되게 공들여 찍었다. 그 시퀀스 자체가 한 편의 어두운 단편 영화 분위기가 나지 않나. 토니 콜렛의 연기도 너무나 좋았다고 생각한다. 영화의 결말과 달리, 악몽을 극복하지 못하면 우리가 주저앉을 수 있다는 걸 남기고 싶었다. 그걸 극복하려면 악몽이 그만큼 강해야 했다. 사실 스튜디오에선 이 장면 자체를 반대했다. 관객에게 (스토리상의) 혼동을 줄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난 단호하게 "(포기하기) 싫습니다"라고 했다. 다행히 스튜디오 쪽의 별다른 압력은 없었다"라고 말했다.

미키17이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 트라우마를 직시하도록 한 감독의 의도가 엿보이는 장면이었던 셈이다.

봉준호

◆ "영어 영화에서 우화적 요소가 강해지는 이유는?"

봉준호 감독은 여덟 편의 영화 중 3편을 영어 영화로 만들었다. '설국열차', '옥자', '미키 17' 순이다. 영화의 규모도 순서대로 커져 '미키 17'은 1억 2천만 달러(한화 약 2,178억 원)의 순제작비가 투입됐다. 미국 메이저 스튜디오인 워너브라더스의 자본 100%다. '미키 17'은 봉준호 감독의 영화 중 가장 많은 제작비가 투입된 대작이지만 사이즈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봉준호의 색깔을 투영하고자 한 노력이 엿보인다. 그러나 영어 영화들을 되짚어보면 확실히 한국 영화에 비해 봉준호의 장점이 희석된 느낌이다. 그의 색깔을 여전하나 너무 많은 것을 이야기하려다 극이 전반적으로 산만하다는 인상을 준다.

SF 장르라는 비현실적 설정 때문인지 특유의 세밀한 리얼리티는 옅어지고, 캐릭터는 선악 구도가 분명해졌다. 풍자의 터치 역시 은유보다는 직유에 가깝다. 언어가 달라지는 데서 기인하는 차이일까. 실제로 많은 비영어권 감독이 이 점에서 어려움을 겪어왔다. 언어는 정서와 감정, 문화까지 담은 창이자 그릇이다. 한국어를 영어로 바꾸고, 이 각본을 다른 문화권의 배우에게 이해시키는 과정도 거쳐야 한다. 이 과정이 쉽지 않았을 것이라 예상된다. 봉준호 감독은 이 질문에도 솔직하게 답했다.

미키

"한국을 배경으로, 한국말을 하는, 한국인 캐릭터가 있다고 칩시다. 3호선 지하철을 나와 다세대 주택으로 둘러 싸인 거리를 거닐면 어떤 사람과 스쳐 지나가고 어떤 냄새가 나는지 훤하게 떠오른다. 그건 내가 한국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2024년 필라델피아 어느 거리를 걷는다고 치자. 그건 유튜브로 보거나, 구글 스트릿뷰로 봐야지만 그곳의 분위기를 알 수 있다. 이안 감독의 '아이스 스톰'(1998년作, 1970년대 미국 중산층 가정의 붕괴를 다룬 영화)이라는 영화가 있다. 미국 사회의 특수성과 한 가족에게 일어나는 감정의 변화, 공기 등을 대만 감독이 다루는 게 보통이 아닌데 그걸 해내셨다. 솔직히 나는 그걸 절대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에겐 뛰어난 미국인 파트너(제임스 샤머스)가 있는데 큰 도움이 됐을 것이다. 나의 경우, 다른 언어권의 영화를 할 때 SF가 좀 더 마음이 놓인다. 우화적이고, 좀 더 직설적인 이야기를 해도 상관이 없는 장르라서다. 그래서 영어권 영화를 할 때 SF에 좀 더 의지를 하게 되는 것 같다. 물론 나도 언젠가는 '아이스 스톰'같은 영화를 해볼 용기를 가지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영화가 잘됐다고 하더라고 그것도 상상력의 일부일 것이다. 내가 실제 그 골목을 지나가면서, 그 가족들을 본 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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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혜 기자 ebada@sb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