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브스夜] '꼬꼬무' 간도 15만 원 사건…"절대 잊어서는 안 될 역사적으로 엄청난 대사건"

작성 2025.02.28 08:03 수정 2025.02.28 08:03
꼬꼬무

[SBS연예뉴스 | 김효정 에디터] 간도 15만 원 사건과 최계립을 조명했다.

27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에서는 1920년에 일어난 역사상 가장 치열하고 긴박한 독립운동의 그날을 추적했다.

1994년 7월, 러시아 연해주 독립운동 사적지를 탐방하던 학자들. 1990년 한국과 러시아 국교 수교로 독립운동의 성지 블라디보스토크는 1992년에 민간에 개방되었고 이에 학자들은 그곳으로 향했던 것.

그리고 이들은 우연히 한 버스 기사를 만났고 그에게서 뜻밖의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 인물은 만주와 러시아 지역에서 독립 운동한 대표적 인물인 최계립.

최계립은 홍범도, 김좌진 장군급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독립운동에 있어서 대단한 지위의 오른 인물이었다. 건국 훈장 중 세 번째로 높은 독립장을 받은 인물이기도 했던 그가 바로 자신의 아버지라는 것.

이에 학자들은 증거를 요구했고 다음날 버스 기사는 "간도 15만 원 사건에 대한 40주년을 맞으면서"라는 제목의 최계립이 직접 쓴 41장짜리 수기를 가지고 왔다.

일제강점기 일본에 엄청난 충격을 안긴 독립군의 비밀 작전이자 해외 독립운동 역사상 가장 긴박했던 사건 중 하나인 간도 15만 원 사건의 수기가 있다는 것은 처음 접한 이야기로 교수는 떨리는 마음으로 수기를 확인했고 역사의 빈칸으로 남아있던 내용들이 하나하나 채워지는 것을 보고 감탄했다. 이는 실제 최계립의 수기가 맞았던 것.

1919년 3월 1일, 만세 운동의 열기는 국내를 넘어 해외까지 번졌다. 그리고 총칼로 우리 민족을 제압한 일본에 대해 더 이상 맨손으로 저항해서는 안 된다는 마음이 번졌다.

그렇게 조직된 철혈 광복단. 독립 비밀 결사단체였던 이곳은 민족학교 군사 훈련받은 출신들이 만든 것으로 추정되며 3.1 운동 전후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무장 후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돈이 필요했던 요원들. 이들은 일제에 수탈된 돈을 찾기로 마음먹었다.

1919년 9월, 최봉설과 윤준희는 일제로부터 돈을 되찾을 방법을 모색했고 조선은행 용정지점 직원 전홍섭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철도 부설금이 곧 은행으로 올 것이라는 계획을 들은 단원들.

이들은 임국정 한상호 박웅세 김준까지 가세한 6인의 최정예 요원을 선발했고 목숨을 걸고 호송대를 덮치기로 했다.

은밀하게 전달된 서신으로 거사의 날이 정해지고 1920년 1월 4일, 현금 수송을 준비하는 호송대를 급습했다.

동량어구에 진입한 호송대를 급습해 돈을 빼앗은 단원들. 궤짝을 가득 채운 돈은 무려 총 15만 원으로 이 돈의 현재의 가치 150억 가량으로 추정되었다. 이는 총과 탄환 4천 세트 살 수 있는 돈이었다.

무기를 사러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한 철혈 광복단은 일본인들의 눈을 피해 독립운동의 성지 신한촌으로 입성했다. 그리고 같은 시각 전홍섭은 내부자로 의심받으며 고문을 당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이야기하지 않았고 이에 철혈 광복단은 무사히 블라디보스토크로 들어가게 된 것.

무기 구입 전 환전이 반드시 필요한 상황에서 이들은 안중근의 의형제이자 3.1 운동 지도자로까지 지명될 정도의 애국자로서 알려진 엄인섭과 접촉해 도움을 받았다. 그는 안중근과 단지동맹 맺은 의형제이자 안중근과 함께 일본과 싸운 인물이었다.

엄인섭을 만나러 간 임국정은 수일이 지난 후 엄인섭과 함께 돌아왔고 자신들의 계획이 무사히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알렸다. 그리고 다음날 무기 구매를 기다리며 떨리는 마음으로 잠든 단원들.

하지만 계획 수행 직전 계획이 들통나 체포되고 말았다. 그 과정에서 최봉설은 총상을 입었음에도 탈출했고 나머지 단원들은 모두 체포되었다. 그리고 이들이 체포된 이유는 바로 모두가 신뢰했던 인물 엄인섭 때문이었다.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던 엄인섭은 사실 오랜 시간 활동한 밀정이었던 것. 그는 여러 이유로 변절해 밀정이 되어 독립운동가들의 체포에 긴밀하게 관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잔혹한 고문에 시달린 단원들은 1년간 이어진 최종 재판에서 사형이 확정되었고, 이들은 도운 전홍섭도 징역 15년형이 확정됐다.

1921년 8월, 사형 집행으로 끝이 난 간도 15만 원 사건. 만약 이들의 계획이 성공했다면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후 최봉설은 항일 무장 투쟁 단체에 들어가 끝까지 싸웠다. 하지만 1937년 스탈린의 한인 강제 이주 정책으로 우즈베키스탄으로 떠나고 가족과 여생을 보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함께 싸운 동료들을 기억하며 생을 마감했다.

방송에서는 최봉설의 후손이 직접 카메라 앞에 등장했다. 최봉설은 바로 최계립이라고 부르기도 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사형당한 최봉설은 죽고 다시 일어나 싸운다는 의미로 최계립으로 개명한 최봉설.

그는 수기를 통해 언젠가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 다짐했고 결국 승리하였다. 이에 학자들은 간도 15만 원 사건이 "민주적이고 미래지향적인 대한민국의 건설을 앞당기려고 하는 끊임없는 노력의 한 점"이라며 역사적으로 엄청난 대사건이자 절대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사건이라 강조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 1966년 현충원에 안치된 단원들. 그리고 최봉설은 가족들과 마지막까지 함께한 카자흐스탄에 잠들어 있다.

마지막으로 방송은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음지에서 목숨 바쳐 싸운 영웅들이 있다는 것, 그들의 희생 덕에 지금의 우리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해 눈길을 끌었다.

김효정 에디터 star@sb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