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브스夜] '꼬꼬무' 대한민국 최초의 팬덤 탄생시킨 왕자님…'천재 예술가' 임춘앵의 시작과 마지막

[SBS연예뉴스 | 김효정 에디터] 어떤 한 왕자님의 그날 이야기가 공개됐다.
6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에서는 누구보다 예술을 사랑한 진정한 예인의 이야기를 추적했다.
1950년대 팬들의 혈서와 조공 세례를 받으며 팬클럽 고무신 부대를 탄생시킨 남자 주인공 임종례. 듬직한 풍채에 미소년 같은 외모의 주인공 정체는 여성국극의 남자 주인공 임춘앵이었다.
9살에 판소리와 가야금, 장구를 마스터한 신인 국악인 임종례는 여류 명창계의 전설적인 인물 박녹주를 만나 여성국악인들의 조직인 여성국악동지회 창립 멤버로 합류했다.
일제 강점기 시절 기생을 길러내던 양성소인 권번을 거쳐야만 했던 여성 국악인들. 이에 여성 국악인들은 기생 출신이라는 낙인 때문에 설 자리가 마땅찮았고 이에 박녹주는 여성 국악인들의 조직을 만들었던 것.
그리고 당시 임종례의 한 선배는 봄에 지저귀는 꾀꼬리 같은 목소리를 가졌다는 뜻에서 임종례에게 임춘앵이라는 예명을 만들어주었다.
박녹주 선생은 여성들만이 만드는 춘향전에서 춘앵에게 이몽룡을 추천하고, 이에 임춘앵은 완벽한 이몽룡이 되기 위해 몸도 키우고 일부러 목을 쉬게 만들어 중저음의 목소리까지 만들었다. 그리고 완벽한 남자를 연기하기 위해 모든 것을 남자처럼 하면서 성격과 태도까지 달라졌다.
하지만 이들이 만든 공연은 흥행 대참패. 특별할 거 없는 무대에 실망한 관객들은 금세 이들에 대한 관심을 끊어버린 것이다.
이후 춘앵은 마음을 다잡고 자신만의 국극단을 새로 만들었다. 그리고 공주 역으로 평소 눈여겨보던 조카 김진진을 캐스팅했다. 이어 여러 여성국악인들을 캐스팅하고 병풍형 무대를 업체형 무대로 바꾼 무대 장치가 원우 전까지 기용했다.
또한 미러볼을 무대에 처음 도입하고 멜로디 파트를 전면 수정하는 등 이전까지 볼 수 없었던 무대를 만들어냈다.
특히 여성을 존중하고 사랑에 헌신하는 로맨티시스트를 남자 주인공으로 선정하며 여심을 제대로 저격했다. 이에 춘앵이 이끄는 국극단은 초대박을 터뜨렸고 과몰입한 여성 관객들은 감동의 눈물까지 흘렸다.
여성국극의 전성기를 맞이하던 그때 한국 전쟁이 발발하고 춘앵은 극단원들을 데리고 광주로 피난을 떠났다. 그곳에는 그의 연인인 신대우가 있었고 광주 권번 출신의 예인들과 함께 공연을 준비했다.
전시 상황에서 지방 순회공연을 할 정도로 춘앵의 극단의 공연은 흥행했고, 여성이 주였던 팬층은 남성팬들까지 유입됐다.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번안한 청실홍실은 원작과 달리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었고, 이는 전쟁으로 같은 민족과 싸워야 하는 국민들을 위로하려는 임춘앵의 마음이 담겼던 것이 아닐까 추측하게 했다.
여성국극에 대한 관심을 더욱 높아졌고, 이에 종로구 일대가 다 임춘앵 소유라는 소문이 날 정도 임춘앵과 그의 극단은 큰돈을 벌었다. 하지만 임춘앵은 욕심 없이 베풀 줄 알았고, 자신보다 주변을 위해 그렇게 살았다.
하지만 행복했던 것도 잠시. 춘앵이 유일하게 의지했던 연인이 사망하고 이후 국산 영화 제작이 활발해지며 여성국극에 대한 관심은 서서히 사라졌다. 결국 여성국극단들은 지방 극장을 전전하는 신세가 되었고 임춘앵의 극단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던 중 어머니의 부고 소식까지 전해지며 임춘앵은 무너지고 말았다.
지방 공연을 준비하던 어느 날, 분장을 하던 춘앵은 후배에게 자신의 역할을 맡겼고 그 후로 무대를 떠났다. 이후 마약설에 사망설까지 돌며 임춘앵은 그렇게 무너져갔다.
그리고 3개월 후, 병원에서 치료 중이라는 춘앵의 소식이 전해졌다. 춘앵의 퇴원 후 합숙소로 돌아오자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다.
단원들은 다른 국극단으로 이적하거나 영화에 캐스팅되었고 더 이상 자신들에게 열광하는 팬들도 보이지 않았다. 너무 달라진 상황에 좌절한 춘앵은 어린 조카들을 보며 버텼고 다시 용기를 내서 새로운 단원을 물색하고 공연도 이어갔다.
하지만 이것이 오래가지는 못했다. 그는 1961년 공연 흑진주를 끝으로 사람들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1968년 겨울, 흰 눈이 소복하게 쌓인 밤. 초라한 행색의 춘앵이 제자 영숙을 찾아왔다. 술 두 병만 사달라고 부탁하며 술을 살 돈을 받아간 춘앵. 이는 영숙이 본 춘앵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리고 얼마 뒤 신문에 향년 52세로 자택에서 뇌출혈로 사망한 춘앵의 소식이 전해져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춘앵의 사망과 함께 여성국극도 그렇게 사라진 듯 보였다.
그런데 1987년, 서울국립극장의 무대 위로 중년의 여성들이 등장했다. 누군가의 엄마, 누군가의 아내로 살던 이들이 배우라는 이름으로 다시 무대에 선 것. 이는 무려 30년 만의 일이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 매년 공연을 올리고 여성국극을 이어가고 있는 배우들은 예전처럼 화려한 무대는 아니지만 무대에 대한 열정은 그대로였다. 또한 그 시절 고무신 부대도 여전히 함께했다. 이제 고무신 부대는 배우들의 스케줄 관리부터 밥도 같이 해 먹는 진정한 성덕의 삶을 살고 있다.
드라마 '정년이' 방송 후 제2의 전성기를 맞은 여성국극. 그 자리에 춘앵도 함께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임춘앵은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순간은 언제냐고 물은 인터뷰에 "여성 국극과 함께한 모든 순간들이 제게는 그 무엇과도 비견할 수 없는 행복이었다"라고 말했다.
2000년 한국여성유권자 연맹 선정한 20세기를 빛낸 대한민국 여성 10인에 임춘앵도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대단한 명성에 비해 관련 자료는 거의 남아있지 않아 아쉬움을 자아냈다.
세상에 다시없을 천재 예술가, 부와 명예를 전부 얻은 전무후무한 여류 국악인, 만인의 사랑을 쟁취한 최고의 남자 배우 등 화려한 수식어를 달고 다닌 임춘앵.
그런 그에게 방송은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이들의 애환을 노래했던 멋진 언니"라는 수식어를 붙여 눈길을 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