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꼬무 찐리뷰]발굴된 유해만 1441구, 사람 뼈가 산처럼 쌓인 골령골…그들은 아직 잠들지 못했다
[SBS연예뉴스 | 강선애 기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7일 방송된 '죽음의 골짜기'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배우 조우진, 조달환, 가수 헤이즈가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뼈 골짜기의 비밀
때는 1993년. 대전시 동남쪽에 있는 한적한 산골짜기야. 산의 형세가 마치 용처럼 생겼다고 해서, 이 골짜기는 '곤룡재'라고 불렸어. 그런데 이 골짜기에 한 남자가 서성이고 있어. 이 남자의 이름은 심규상, 직업은 기자야. 근데 이 사람이 발 밑을 살피면서 왔다 갔다 하는게, 뭔가를 찾는 눈치야. 땅바닥을 살피며 걷던 심 기자의 눈에 뭔가가 들어왔어.
"거의 뭐 쓰레기 같은 것들이 쌓여 있었고요. 전부 다 농사를 짓고 있었어요. 농사를 짓는 밭고랑에 옥수수 같은 게 널려 있는 거예요. 옥수수 씨앗 같은 게. 가만히 보니까 사람의 치아예요. 근데 그것이 밭이랑 밭고랑에 이렇게 땅에 박혀 있어요. 그리고 이제 도랑 같이 움푹 파인 데에 나뭇가지 같은 게 있어서 쑥 뽑았더니, 사람 뼈인 거예요. 나중에 보니까 정강이뼈더라고요. 뼈 조각으로 보이는 것들이 부서진 게 사방에 널려 있는 거예요. 너무 놀란 게, 사람 뼈가 이렇게 쓰레기처럼 흩어져 있다고? 그런데 왜 이것들을 아무도 수습하지 않고 계속 농사를 짓고 거기에 쓰레기를 쌓아놨지? 그걸 보고 또 한 번 놀라게 된 거죠."
-심규상 기자, 오마이뉴스 대전충남 본부장
골짜기를 나온 심 기자는 마을회관을 찾아갔어. 마을에 오래 사신 어르신들한테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려는 거지. 거기서 심 기자가 골짜기에 대해 궁금한 게 있다고 말을 꺼내자, 마을 어르신들이 갑자기 바짝 경계해.
"'그 현장도 갔다 왔는데 이거에 대해서 궁금한 게 있어서 왔다' 그랬더니, 갑자기 흩어져 있던 어르신들이 제 주위로 오셔서 '누구냐? 왜 왔냐? 왜 묻냐?' 질문이 막 쏟아지는 거예요. '먼저 궁금한 것을 말씀해 주시면 다 말씀드리겠다' 그랬더니, '자네같이 이렇게 와서 사건에 있어서 꼬치꼬치 캐물으면, 경찰이 바로 신고하라고 했다' 그러면서 더 이상 대꾸를 안하시는 거예요, 모른다고. 묻지 말라고."
-심규상 기자, 오마이뉴스 대전충남 본부장
심 기자는 방법을 바꾸기로 했어. 시간을 들여 한집 한집 찾아 뵙고, 막걸리도 사가고, 담배도 사드리고 하면서, 자주 얼굴을 비추고 인사를 드렸어. 그러자 마을 어르신들이 경계심이 풀렸는지, 입을 여시기 시작했어.
"그전부터 저 골짜기에 사람 뼈가 많이 나왔대."
"예전엔 여우가 사람 뼈를 물고 다니고 그랬구먼."
"비가 오면 이 도랑에 핏물이 흐르고 그랬다니까."
이 골짜기에서는 오래 전부터 사람 뼈가 많이 나왔다고 해. 산짐승이나 가축들이 사람 뼈를 물고 다닐 정도였대.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뼈 골'에 '산봉우리 령'을 써서, '골령골'이야. 뼈가 산처럼 쌓여있는 골짜기라는 뜻이야. 그럼, 여기 묻힌 사람들은 누굴까. 이제부터 골령골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에 대해 알려줄게.
▲ 대전형무소로 끌려온 사람들
1949년 4월, 충남 서천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어. 부모는 아이에게 '남식'이라는 이름을 붙여줬어. 남식이네 집은 식구가 많았어.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 아버지, 위로는 형이 다섯이나 있었어. 옆집에 사는 작은아버지네 식구들, 사촌들까지 합하면, 모두 20명이 넘는 대식구였어. 다 모이면 북적북적, 밥 먹을 때마다 명절이야.
그런데 남식이의 첫 돌이 지나고 두 달 후, 한반도를 뒤흔든 큰 사건이 일어나. 1950년 6월 25일, 새벽 미명을 틈타서 북에서 기습 남침을 한 거야. 그래 맞아, 6.25가 터졌어. 전선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지만, 충남 서천에서는 전과 다름없는 일상을 보내고 있었대. 이틀 후, 여느 때처럼 남식이네 식구들이 모여 저녁식사를 하고 있을 때였어. 누군가 남식이네 집에 찾아와 문을 두드렸어. 그 뒤에 일어난 일을, 이젠 할아버지가 된 남식 씨에게 직접 들어볼게.
"1950년 6월 27일 온 가족이 저녁 식사 중에, 경찰관 2명한테 아버지가 연행당했죠. '잠깐 서에 가십시다' 그러니까 편하게 가시더래요. 아버지는 특별한 내용이 없으니까. 그 이튿날 어머니가 '작은아버지, 형님 속옷 좀 갖다 드리고 오세요' 그러니까 작은아버지가 그 이튿날 간 거예요, 속옷 가지고. 그러니까 경찰관이 '이 자식아 거기다 놓고 가!', 29일에 또 갔어. 그러니까 '야 거기다 놓고 가!', 또 세번째 날, 30일에 가니까 또 '놓고 가'라 그러니까. 그때 작은아버지가 의심을 한 거예요. '형님 여기 안 계시구나' 하고. '형님의 행방을 내가 찾아야겠다' 그래서 바로 집에서 형님 행방을 찾기 위해서 찾아본다고 나가셔서, 그 양반도 행방불명. 작은아버지도…"
-백남식, 75세
그렇게 경찰과 함께 집을 나선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대. 아버지를 찾아오겠다며 나간 작은아버지도 행방불명되고 말았어. 남식 씨네 식구들의 운명을 결정한 건, 한 통의 무선전문이었어. 북한의 공격이 시작된 6월 25일 오후, 내무부 치안국에서 전국 경찰국으로 무선전문이 하달됐어.
'전국 요시찰인 전원을 구금할 것'
'요시찰인'은 사상이나 보안 문제로 감시대상이 된 사람을 뜻해. 주로 일제강점기 때 쓰였던 말이야. 일제강점기 때 요시찰인은, 독립운동가들이었어. 하지만 광복 이후에는 그 의미가 달라져.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에 반발하는 좌익들을 의미해. 그러면, 남식 씨의 아버지는 좌익이었을까?
남식 씨의 아버지는 경성고등보통학교(경기고등학교 전신)를 졸업한 수재였대. 서천에 내려와서는 동아일보 서천지국장을 맡았어. 가족들의 말에 따르면, 좌익 활동은 한 적이 없대. 하지만 1947년도에 어떤 집회를 취재한 적은 있었다고 해. 이때는 미군정의 통치를 받을 때였는데, 미군정에 반발하는 집회를 취재한 거야.
"아버님이 그 장소에 가서 취재를 해서 그걸 취재했다 그래서 체포가 됐어요."
-백남식, 75세
그렇게 남식 씨 아버지는 처벌을 받게 됐어. 그리고 얼마 후에 한가지 제안을 받았다고 해. 정부에서 만든 단체가 있는데, 거기 서천 지부장을 맡아달라는 거였어. 그러면, 처벌 받은 걸 사면해 주겠다고.
"법을 어겼으니까 전과 기록이 남잖아요. 집행유예 2년에 대한 전과를 서천 지부장을 맡아주면 전과를 사면해 주겠다…"
-백남식, 75세
그 단체의 이름은 '국민보도연맹'이야. 여기서 '보도'라는 말은, 보호하고 인도해주겠다는 말이야.
"한마디로, 네가 예전에 좌익 활동을 했거나, 했다는 것을 자수해라. 그러면 과거를 묻지 않고 광명을 주겠다, 죄를 묻지 않겠다. 어려우면 취업도 알선해 주고. 대한민국 구성원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지원해 주겠다…"
-심규상 기자, 오마이뉴스 대전충남 본부장
각 지역별로 인원수를 할당해서 경쟁적으로 보도연맹에 가입시켰어. 그리고 가입한 사람들에겐 보리쌀, 비료, 고무신 같은 걸 나눠줬어. 그러다보니까, 그땐 다 먹고살기 힘들 때니까, 좌익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까지 너도나도 가입했어. 그렇게 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은 약 30만명. 하지만 그 선택이 이후 운명을 가르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지.
한국전쟁이 터지자 경찰은 보도연맹원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들여. 남식 씨의 아버지도 이때 끌려갔어. 보도연맹 지부장이었기 때문에 피할 수 없었던 거야. 근데 이상하지 않아? 보도연맹은 국가가 보도하고 인도해준다고 약속한 건데, 왜 전쟁이 터지자마자 잡아들인 걸까? '인민군이 내려오면, 저들은 언제든 인민군 편에 설지도 모른다'는 거야. 그러니까 보도연맹원들을 싹 다 잡아들이라는 거야. 이런걸 '예비검속'이라고 해. 아직 잘못을 저지른 건 아니지만, 저지를 가능성이 있다는 거야. 예측만으로 미리 잡아들인 거지.
경찰관과 함께 집을 나선 남식 씨의 아버지는 대전형무소로 끌려갔어. 당시 대전형무소는 정말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고 해. 수용인원이 1,200명인 곳인데, 무려 4,000명이 있었대. 충남 전역의 보도연맹원들이 다 끌려온 거야. 게다가 멀리 타지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다고 해. 여수, 순천에서 온 사람, 바다 건너 제주에서 온 사람까지 있었대. 이들은 누구길래, 왜 대전형무소까지 끌려왔을까?
당시 제주도에서는 끔찍한 비극이 벌어지고 있었어. 미군정 시기였던 1947년 3월 1일. 제주도에서는 3.1절 집회가 열렸어. 그때 기마경찰이 어린이를 치는 사고가 일어났어. 그런데 경찰은 아무런 조치도 없이 그냥 가버려. 화가 난 도민들은 경찰서로 몰려가 항의했어. 이걸 폭동으로 오인한 경찰들이 도민들을 향해 발포하게 돼. 그 결과 6명이 사망하고 8명이 부상을 당했어. 이 사건으로 도민들이 크게 반발하자 정부는 이들을 좌익극렬분자로 간주해 버려. 그리고 대대적인 무력 진압을 시작했어. 참다못한 도민들은 이듬해 4월 3일, 무장봉기를 일으켰지. 이 사건이 바로, '제주 4.3사건'이야.
한편, 여수와 순천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국방경비대 14연대는 제주도민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게 됐어. 하지만 같은 민족에게 총을 겨눌 수 없다며, 일부 군인들이 들고 일어나. 1948년 10월 19일에 일어난, '여순사건'이야.
이 두 사건으로 수많은 민간인들이 희생됐어. 한국 근대사에서 다시 없을 비극이지. 대전형무소에는 제주 4.3사건, 여순사건 관련자들도 끌려와 있었어. 하지만 이들은, 자신들에게 닥칠 비극은 꿈에도 몰랐을 거야.
▲ 골령골에서 생긴 일
미국 제25사단 CIC전투일지 활동보고서의 기록이 있어.
"신뢰할 만한 정보통의 1950년 7월 1일 보고에 따르면, 한국 정부의 지시에 의해 대전과 그 인근에서 공산주의 단체 가입 및 활동으로 체포됐던 민간이 1,400명이 경찰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들의 시신은 대전에서 약 4km 떨어진 산에 매장되었다."
이 기록은 6월 28일경부터 6월 30일경까지 대전형무소에 있던 재소자들이 골령골에서 살해됐다는 이야기야. 골령골에서의 1차 학살이야.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무려 1,400명이 죽음을 맞이했던 거야.
이들은 나무 기둥에 묶인 채 총살 당했어. 그리고 시신이 50~60구씩 모이면, 장작더미에 던져 화장했다고 해. 아무리 전쟁 중이지만, 법적 절차 없이 사람들을 이렇게 막 처형해도 되는 걸까. 이렇게 골령골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피가 흘렀어.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야. 비극은 이제부터 시작이야.
7월 1일 새벽, 전세가 기울어지자 대전에서 피신 중이던 이승만 대통령은 비밀리에 다시 남쪽으로 떠나. 장,차관들도 앞다퉈 대전을 떠나려던 그때, 대전형무소에는 한 통의 전문이 도착해.
"오늘 새벽 미명을 기해 적의 대규모 공습이 예상된다. 좌익 극렬분자를 처단하라."
인민군이 대전을 점령하기 전에, 남은 재소자들의 처형을 지시한 거야. 명령은 간단했지만, 그 결과는 참혹했어. 목격자들이 증언한 2차 처형 당시 상황은 이래. 재소자들을 인도받은 헌병대가 그들을 트럭에 싣고 골령골로 향해. 그 곳에는 30~50m 정도 되는 기다란 구덩이들이 여러 개 준비돼 있었대. 인근 주민들과 청년방위대를 동원해서 미리 구덩이를 파놓은 거지. 트럭이 멈추자 재소자들을 구덩이 앞까지 끌고 가. 구덩이 쪽으로 엎드리게 한 다음, 총을 든 헌병들이 등을 밟고 서. 그리고 재소자들의 뒤통수에 총구를 들이 대. 사격 명령과 함께, 일제히 총구가 불을 뿜어. 헌병대 중위는 축 늘어진 재소자들을 살펴보며, 다시 확인사살을 해. 시신들을 구덩이로 밀어 넣으면, 그 다음 재소자들을 또 데려와. 이런 일이 무려 3일간 반복됐다고 해.
당시 상황을 뒷받침해주는 증거가 있어. 1999년 미국에서 공개된 비밀문서에 이 사실이 기록돼 있었어. 한참 후에나 밝혀진 거지.
"북한의 라디오에서는 최근 남한에서의 잔혹성과 집단 학살에 대한 의문 제기가 있었다. 비록 라디오에서 상당 부분 과장됐다 하더라도, 전쟁 발발 후 남한 경찰은 집단적인 학살을 자행해 온 것이 사실이다. 서울이 함락되고 난 후, 형무소의 재소자들이 북한군에 의해 석방될 가능성을 방지하고자, 수천 명의 정치범들을 몇 주 동안 처형한 것으로 우리는 믿고 있다. 학살이 전방 지역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닌 점을 볼 때, 이러한 처형 명령은 의심의 여지 없이 최고위층에서 내려온 것이다. 대전에서 1,800명의 정치범 집단 학살은 3일간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1950년 7월 첫째 주에 자행되었다."
-미국에서 공개된 비밀문서 내용 中
이런 일이 대전에서만 있었던 게 아니야. 공주, 전주, 목포, 진주, 대구 등 전국 각지에서 민간인 학살이 일어났어. 이건 누군가 명령을 내린 게 분명해. 보고서에도 '최고위층에서 내려왔다'고 하잖아. 비밀 보고서에는 당시 상황을 담은 사진들도 있어.
학살의 현장이 시간 순서대로 담겨있는 사진들. 트럭에서 내려 구덩이 앞에서 처형하고, 등을 밟고, 권총을 든 장교가 확인사살 하는 모습도 담겼어. 길게 파인 구덩이에는 시신들이 겹겹이 쌓여있어. 엎드려 죽기 직전, 돌아보는 소년의 얼굴도 보여. 이 소년은 마지막 순간, 어떤 말을 하고 싶었을까.
이 보고서는, 주한 미국 대사관의 무관 에드워드 중령이 작성한 거야. 이 보고서 등급이 'A-1'. 미국에서는 보고서 가치를 평가할 때, A-1부터 F-6까지 36개의 등급으로 나눈다고 해. 앞의 영문은 정보의 신뢰도, 뒤에 숫자는 정보의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 나타낸대. A-1은,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가장 가치있는 정보라는 거지.
그리고 이 보고서를 통해 또 한가지 사실을 알 수 있어. 한국에서 벌어진 이 끔찍한 대량 학살을 미국도 알고 있었다는 거. 하지만 묵인했던 걸로 보여. 이렇게 7월초 골령골에서 있었던 2차 처형에는 3일간 1,800여명이 학살당했어.
대전형무소의 빈자리는, 또다시 새로운 재소자들로 채워졌어. 서울 경인지역 형무소에서 풀려났다가 다시 검거된 사람들, 청주형무소에서 이감된 재소자들, 인근 지역에서 예비검속된 보도연맹원들. 이들도 인민군이 대전을 점령하기 직전, 골령골에서 처형돼. 국군이 후퇴하기 전, 3번째 학살이 있었던 거야. 3차 학살의 피해자는, 약 1,700명. 골령골에 묻힌 수많은 유골의 정체는, 그해 여름 세 차례에 걸쳐 이루어진 학살의 피해자들이야. 그들 중에는 그저 보리쌀 한되를 얻으려고, 국가가 보호해준다는 약속만 믿고 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들도 많았어. 하지만 그 보도연맹원의 명단은, 살생부가 되고 말았어.
세 차례의 학살이 끝난 직후, 탱크를 앞세운 인민군이 대전을 점령했어. 그리고 골령골 학살 현장이 인민군에게 발견됐어. 그때 인민군과 동행 취재했던 영국인 기자가 있었어. 이름은 앨런 위닝턴. 그는 학살 현장을 직접 목격하고 기사를 썼어.
"나는 한국에서 진실을 보았다"
"계곡의 가장자리에서는 조심해야 합니다. 계곡은 7,000명이 넘는 남녀의 시신을 덮고 있는 얇은 흙으로 덮여 있기 때문입니다. 저와 함께 했던 일행 중 한 명이 썩어가는 인간의 살 속으로 거의 엉덩이까지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몇 피트마다 표토에 균열이 나서 점차 가라앉는 살과 뼈 덩어리를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냄새는 목구멍 속으로 스며드는 듯 실체를 지닌 것 같습니다. 그 냄새는 며칠 동안 내 입에 남아 있었습니다. 거대한 죽음의 구덩이를 따라가면, 왁스처럼 보이는 죽은 자들의 손과 발, 무릎, 팔꿈치, 총알에 머리가 터진 뒤틀린 얼굴들이 흙을 뚫고 나와있었습니다."
얼마 뒤, 바람 앞 등불처럼 위태로웠던 전황은, 유엔군의 극비작전으로 뒤집혀. 인천상륙작전이야. 인민군은 다시 북으로 후퇴하고, 국군은 빼앗겼던 도시를 되찾게 돼. 하지만 폐허가 된 대전으로 돌아온 사람들은 끔찍한 광경을 목격하고 말아.
대전형무소 안과 밖이 처참한 시신들로 가득했어. 그 시신 더미에서 내 가족을 찾으려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울음 소리가 이어졌어.
1950년 7월 21일. 골령골에서 학살의 흔적을 목격한 인민군들은, 가해자들을 찾아 나섰다고 해. 경찰, 공무원, 청년방위대 등 우익 인사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들여. 이들을 대전형무소에 수감하고, 인민교화소라고 불렀대. 죄목은, 양민을 탄압하고 학살한 죄. 민간인을 탄압하고 학살에 가담했다는, 자술서를 강제적으로 쓰게 했어. 만약 가담하지 않았다고 하면, 무자비한 구타가 가해져. 이런 상황에서 끝까지 아니라고 할 수 있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정하는 자술서를 썼다고 해. 그 후의 결과는 처참했어.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됐잖아. 인민군에게 불리해지자, 인민군은 다시 위로 후퇴하기로 결정해. 그러면서 각 지방 당에 이런 명령을 내려.
"유엔군 상륙시 버팀목이 될 모든 요소를 제거하라."
적의 편이 될 사람들을 제거하라는 뜻이야. 9월 25일 새벽부터 27일까지 3일간 인민군들은 후퇴하기 전, 대전형무소에 있던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어. 자술서를 쓴 사람들은 전부 죽음을 맞이했어. 그렇게 대전형무소는, 끔찍한 학살 현장이 됐어. 형무소 우물 안에도 시신들로 가득 채워졌어. 그렇게 무려, 1,557명이 죽임을 당했다고 해.
한 번은 남한에 의해, 또 한 번은 북한에 의해. 잔혹한 민간인 학살이 벌어진 거야. 전쟁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보는 사람들은 가장 약한 사람들, 바로 민간인들이야. 하지만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어. 불행히도, 피는 또 다시 피를 불러오게 돼. 인민군이 저지른 학살을 목격한 국군과 경찰은 분노했어. 이번에는 또 인민군을 도운 사람들, 부역자 처단에 나선 거야.
많은 사람들이 부역자로 몰렸어. 인민군의 강요로 식량을 내줘서, 그저 길을 안내해 줘서, 심지어 피난을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부역자가 되기도 했대. 증거? 필요 없어. 누가 밀고만 하면 바로 잡혀가는 거야. 그때 가장 무서운 게 '손가락 총'이었다고 해. 손가락으로 누군가를 가리키면, 그 사람은 부역자가 되는 거야. 그렇게 또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맞이하게 됐어. 이런 일이 전국 각지에서 똑같이 일어났어. 국군과 경찰이 좌익을, 인민군이 우익을,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를 죽이는 비극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난 거야. 그 와중에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건, 결국 민간인들이었어.
▲ 세상에 드러난 죽음의 골짜기
민간인 학살은 남과 북 양쪽 모두에 의해 일어났어. 하지만 한국 군경에 의한 학살에 대한 이야기는 오랜 시간동안 묻혀 있던 게 사실이야. 이승만 정부와 그 뒤를 이은 군사정권은, 반공을 내세우며 인민군의 학살만을 알리고자 했거든. 인민군에게 학살 당한 사람들을 위해 조사위원회가 꾸려지고 위령비도 세워졌어. 하지만 우리 군경에 의해 학살당한 피해자 유족들은, 숨죽인 채 살아왔다고 해. 그들의 죽음은 오랜시간동안 묻힌 비밀이었던 거야.
죽음을 죽음으로 덮은 골짜기. 골령골의 비극이 세상에 알려진 건 1992년이야. 한 잡지에 이런 기사가 실렸어.
"최초 공개. 대전형무소 4천 3백명 학살사건"
"우리 현대사를 통틀어 단일지역 최대의 양민학살사건으로 기록돼야 할 대전형무소 사건이 반공국시의 분단현실과 함께 역사에 묻혀온 지 40년이 지났다. 필자가 취재한 바에 의하면 좌익계 3천여명, 우익계 1천3백여명, 도합 4천 3백여 명이 대전형무소라는 공간에서 서로 이념을 달리하는 우, 좌익의 총구에 학살당했다. 대전형무소 학살 사건은 대전 부근의 골령 골짜기에서 자행됐다. 산 아래에서 깊은 골짜기로 들어가면 1천여 평은 됨직한 분지가 나타난다. 바로 이곳에서 6.25 전후 최대 양민학살사건이 자행됐다. 슬픈 역사이지만 바르게 기록돼야…"
이 기사가 골령골의 숨겨진 이야기를 국내 최초로 공개한 거야. 심규상 기자는 그 기사를 읽고 깜짝 놀랐다고 해. 왜냐하면 심 기자가 대전에서 대학교를 다녔는데, 그런 이야기를 생전 들어본 적이 없었대.
"내가 살고 있던 그곳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고? 그 사실 자체가 충격적이었고요. 또 하나는 '어, 이런 일이 있는데 왜 몰랐지?' 그때까지 몰랐다는 것 자체가…"
-심규상 기자, 오마이뉴스 대전충남 본부장
그래서 직접 확인하고자, 골령골을 찾아간 거야. 그리고 여기저기 사람뼈가 흩어져 있는 광경을 직접 목격한 거지. 심 기자는 이 일이 이대로 묻히면 안된다고 생각했어. 기자로서가 아니라,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일어났던 일을 모른 척 지나가는 거, 그것 역시 역사를 왜곡하는 일이라 생각한 거야.
심 기자는 이 골령골에서 일어난 비극을 밝히기 위해 애썼어. 그는 진상조사반을 꾸려서 골령골 사건을 세상에 알리고, 유족들을 찾아 유족회를 결성했어. 진실규명을 위한 특별법을 만들기 위해서도 노력했어. 그런데, 그 무엇보다 시급한 것이 있었어. 바로, 유해발굴. 도로가 생기고 밭을 개간하며 유해가 훼손되는 일이 많았던 거야. 더이상의 훼손을 막으려면, 유해를 빨리 발굴해야 해. 근데 이건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국가가 나서야 해. 다행히도 2005년도에 진실화해위원회가 출범해. 과거사 진상규명의 길이 열린 거야. 그리고 2007년 대전 골령골이 첫 유해 발굴지로 선정돼. 전국 168개 대상 지역 중에서 13곳을 발굴하는데, 그 중 한곳으로 선정된 거야.
하지만 유해발굴을 하려면 땅 주인의 동의를 받아야 해. 미리 점 찍어둔 대규모 유해매장지가 있는데, 땅 주인이 허락을 안해줘. 이유는, 땅값이 떨어진다는 거.
"토지 소유주를 제가 찾아가서 하소연을 합니다. 여기 이제 동의를 해달라. 그런데 이제, 동의를 못해주겠다. 집값 떨어지고, 묻혀있는 거 알려지면 재산상 불이익 받고 하니까 못 해주겠다는 거예요."
-심규상 기자, 오마이뉴스 대전충남 본부장
그런데 위원회에서도 더는 기다릴 수 없다는 거야. 골령골 말고 다른 지역을 발굴하겠다는 거지. 이번 기회를 놓치면 언제 유해를 발굴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어. 심 기자는 위원회 담당자에게 "한 달만 시간을 달라. 그럼 골령골의 다른 매장지를 꼭 찾아내겠다"고 말했어. 심 기자는 삽을 들고, 골령골로 향했어. 과거 자료와 증언을 바탕으로, 새로운 유해 매장지를 찾아나선 거야.
당시 상황을 알고 있는 마을 주민에게 매장지를 알려달라 부탁했어. 하지만 주민들이 선뜻 나서기를 꺼려 했어. 심 기자는 포기하지 않았어. 그리고 결국, 마을 할아버지 한 분을 힘들게 설득해서 골짜기까지 모시고 왔어. 그런데 할아버지가, 차에서 내리질 않아. 다른 주민들이 볼 까봐 못 내리겠다는 거야. 설득이 돼서 말은 해줄 수 있지만, 자기에게 피해가 올 까봐 직접 나서진 못하겠대. 결국 심 기자 혼자 골짜기로 들어갔어. 멀리서 심 기자가 이 위치가 맞는지 물으면, 할아버지께서 차에서 수신호로 대답했어. 그만큼 주변의 시선을 의식했던 거야.
그렇게 새로운 유해 매장지를 찾느라 골짜기를 누비던 그 때. 심 기자는 생각지도 못한 도움을 받게 됐어.
"이렇게 특정을 해야 되는데 그게 참 어려운 일이거든요. 거의 이 골짜기 전체가 학살터지만 매장되어 있는 위치를 정확히 찾아내는 게 힘들어요. 그렇다고 다 파보라고 할 수도 없잖아요. 어느날 삽을 들고 가는데, 어제까지 왔을 때는 없던 데에, 갑자기 풀 위에 두개골 하나가 이렇게 덩그러니 있는 거예요. 머리뼈가 통째로. 그럼 이거는 하루아침에 생긴 건데, 하늘에서 떨어졌거나 솟을 리도 없고. 그래서 봤더니, 그 위에 경사면에 한 5~6m 경사 위에, 이만하게 구멍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손을 넣어서 더듬더듬했더니 다른 뼈가 또 나와요. 봤더니, 너구리가 왔다 갔다 하는데 이 두개골이 자기 통행로를 방해하니까 막 밀어서 아래로 밀어낸 거예요. 그래서 이제 아! 이 너구리가 유해 매장지를 알려주려고, 너구리까지 돕는 구나…"
-심규상 기자, 오마이뉴스 대전충남 본부장
그렇게 극적인 도움을 받아 대전 골령골에서 유해 발굴이 시작됐어.
가운데 길게 이어진 골짜기가 골령골이야. 유해가 매장돼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점은 1지점부터 8지점까지. 그 중 가장 많은 유해가 묻혀 있는 걸로 추정되는 곳은, 1지점과 2지점. 하지만 토지 소유주의 동의를 받지 못해서 1, 2지점은 발굴대상에서 제외됐어. 그래서 정한 후보지가, 3, 4, 5, 7지점이야. 그럼 이 네 지점에서 유해가 나왔을까?
이 네 곳 중 두 곳에서 유해가 나왔어. 3지점에서 29구, 5지점에서 5구. 총 34구의 유해가 57년만에 세상에 드러난 거야. 당시 발굴 현장 사진을 보여줄게.
3지점 발굴 현장이야. 폭 1.7m, 길이 4m. 두 평 남짓한 공간에서 29명의 유해가 나온 거야. A4 종이 한 장 정도 되는 면적에, 한 사람의 머리, 팔, 다리뼈가 포개진 채 발견됐어. 이게 뭘 의미하는 걸까? 무릎 꿇고 엎드린 상태로 사망한 거야. 죽어서도 몸을 펴지 못한 그 상태로 묻힌 거지.
총탄 자국이야. 마치 처형을 하듯이 뒤에서 머리를 쏜 거야.
그리고 탄피 사진. 유해가 탄피와 같은 곳에서 발견 됐다는 건, 근접 사격. 또는 확인 사살이었다는 걸 의미해. 이런 처형을 하더라도 멀리서 쏘는 경우가 있는데, 이렇게 시신 바로 옆에서 탄피가 발견된다는 건, 바로 앞에서 확인사살을 했다는 거야. 민간인 학살의 명백한 증거가 나온 거야.
▲ 유족들의 한
57년 만에 세상 밖으로 나온 유해를 마주한 유족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가슴 벅찼지요. 기뻐서 벅찬 게 아니라, 정부에 말할 수 있잖아요. 이게 증거 아니에요? 이 사건이 그냥 묻히느냐, 세상 밖으로 나오느냐. 세상 밖으로 나왔잖아요. 3지점에서 유해가 나옴으로 해서, 정부에서도 인정이 되고. 유골이라도 이렇게 찾을 수 있는 희망이 있잖아요… 우리 아버지 뿐만 아니라 여기서 돌아가신 억울한 그분들이 나는 다 아버지라고 그래요. 너희 아버지, 내 아버지 할 것 없이, 다 아버지라고 해요."
-전미경(78세), 골령골 유족
"누구 뼈인지는 모르고, 그저 나오면 '아이고 우리 아버지 뼈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생각하지."
-강음모(92세), 골령골 유족
처음 골령골을 다녀온 미경 씨는 사흘간 앓아 누웠다고 해. 미경 씨가 두 돌이 되던 해, 후퇴하던 인민군이 학살을 저지르자 분노한 경찰이 좌익을 잡아들이고 있었어. 미경 씨 아버지는 좌익활동을 했던 동생의 도피를 도와줬다가 경찰에 쫓기는 몸이 됐다고 해. 산에 숨어살던 아버지는, 경찰 몰래 밥을 갖다주던 어머니에게 항상 이렇게 물었대. "미경이 아직도 못 일어나?" 24개월이 지나도록 일어서지 못하는 딸을 걱정하셨던 거야. 얼마 후에 미경 씨가 장롱을 붙잡고 처음 두 발로 선 그날 밤에, 아버지는 그 소식을 듣고 산에서 내려오셨대. 경찰에 붙잡힐까 두려운 마음보다, 어린 딸을 보고 싶은 마음이 더 간절하셨던 거야. 아버지는 미경 씨가 두 발로 서는 걸 보고, 그렇게 기뻐하셨다고 해.
하지만, 그 순간. 경찰이 집으로 들이닥쳤어. 피투성이가 되도록 아버지를 때리고는, 대전형무소로 끌고 갔다고 해. 그리고 아버지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
"와봤더니 교도소가 텅텅 비었더라는 거예요. 면회신청을 하니까 없다, 그런 사람 없다는 이야기만 해서. 할아버지가 당황해서 막 쩔쩔매시니까, 간수 한 사람이 할아버지 곁을 지나가며 이렇게 툭 찌르더래요. '며칠 전에 골령골로 갔는데 거기는 가면 다시 못 오는 데니까, 집에 가셔서 3월 2일로 제사나 지내세요' 그러더래요."
-전미경(78세), 골령골 유족
그 당시에는 '골령골에 갔다'는 말은, 이미 죽었다는 말과 다름 없었대. 할아버지는 어린 미경 씨에게 그 말을 전하지 않았어. '나는 왜 아빠가 없냐'며 우는 미경 씨에게 항상 '네 아버지, 100밤만 자고 나면 올 거야'라고 하셨대. 그래서 미경 씨는 언제 아버지가 문을 열고 들어오실까, 수십년 세월을 기다리며 살아왔다고 해. 어머니는, 할아버지께서 내보내셨어. 다 잊고 새 출발 하라고. 그렇게 미경 씨는 할아버지 할머니 손에서 자라게 됐어.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게 된 미경 씨. 설상가상으로 할아버지는 아들을 잃은 충격에 얼마 뒤에 정신을 놓아버리셨대. 그리고 할머니도 치매에 걸리셨어. 그렇게 미경 씨는 11살 나이에, 할아버지 할머니의 병수발을 들게 됐어. 하지만 그마저 얼마 못 가고, 결국 두 분 다 돌아가시고 말았어. 안 해 본 일이 없으시대. 미경 씨의 삶이 담긴 시집이 있어.
"아름다운 산하 골짜기마다/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백만인/붉은 피로 물들이며/ 이름 모를 골짜기마다 썩어갈 때/ 어린 몸 갈 곳 없어/ 오늘은 삼촌 집으로 내일은 고모 집 문전으로…"
그렇게 세상에 홀로 남겨진 미경 씨는 이렇게 말했대. "부모가 없는 삶은 척추뼈가 없는 삶"이라고.
"누구의 이만큼 보살핌도 없이 이 세상을 살아오려니까 너무 힘들었어요. 피맺힌 사연이 많아요. 그걸 어떻게 일일이 다 말하겠어요."
-전미경(78세), 골령골 유족
남식 씨도 마찬가지야. 한국전쟁 때 자식 넷을 모두 잃은 할아버지 할머니는, 휴전이 되고 얼마되지 않아 돌아가셨어. 결국 남식 씨 어머니 혼자서 여섯 형제를 키우셨다고 해. 남식 씨 가족은 먹을 것이 없어서, 논바닥에 난 잡초를 뜯어 먹으며 지냈대.
"자식들… 여섯 명입니다. 어머니가 어떻게 사셨겠어요."
-백남식(75세), 골령골 유족
지금도 그 시절을 생각하면 차마 말이 안나온다고 하셔. 하지만 유족들이 죽고싶을 만큼 괴로운 건 따로 있었대. 바로 '연좌제'. 범죄자와 친족관계가 있는 사람에게 연대 책임을 지게 하고 처벌하는 제도. 한사람이 잘못하면, 그 가족과 친척들까지 함께 처벌하는 거. 아버지를 잃고 난 후, 유족들에게는 지울 수 없는 낙인이 찍혔어.
"옛날에 사찰계라고 그랬어요. 한 달에 두서너 번씩 사찰계 와서 '저 빨갱이 새끼들'. 이사하는 데까지 쫓아와서 사찰했어요. 이사 간 데에서도 못 살게 하는 거예요. 주위에 시선이, 우리하고 친하게 지내려고 하겠어요? 다 등 돌리죠."
-백남식(75세), 골령골 유족
"연좌제에 얼마나 시달렸는지요. 지금도 그 연좌제 생각하면 치 떨려요. 제 위에 삼촌이 있었거든요. 저보다 5살 더 먹은. 그 삼촌도 연좌제에 시달리다 자살해 버렸어요. 빨갱이 자식, 쟤 아버지는 빨갱이, 어른들 눈초리도 빨갱이... 그 시선을 의식하며 산다는 게, 죽음보다 못한 삶을 살았어요."
-전미경(78세), 골령골 유족
이런 말이 있대. '빨갱이라서 죽은 게 아니라, 죽고 나니 빨갱이가 되어 있었다'라고. 아버지를 잃고 난 유족들은, 아무 죄도 없이 어느새 빨갱이의 자식이 되어버린 거야.
▲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
시간이 지나고 유족들에게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어. 2010년도에 진실화해위원회가 진실규명 조사 보고서를 발표했어.
"본 사건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하는 국가가 형무소에 수감된 재소자와 보도연맹원들을 집단살해한 것으로서 이는 명백한 범죄행위이다. 비록 전시였다고는 하나, 국가가 좌익사범이라는 이유로 수감된 재소자들을 적법한 절차 없이 집단 처형한 행위는 정치적 살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이 사건의 최종적 책임, 국가에 있음이 명백히 밝혀졌어. 정부에게, 피해자와 유족들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그들을 위로해줄 것을 권고했어. 수십 년간 응어리진 유족들의 한, 조금은 달래졌을까? 위령제를 지내는 유족들. 제사상 위에 진실규명의 결과가 적힌 문서를 올렸어.
평생 가슴을 옥죄고 살아온 유족들이야. 이제 모든 게 해결될거라고 희망에 부풀었지. 하지만, 여기까지였어.
"이게 연속성을 가지고 가겠구나 라고 했는데, 딱 중지가 되어버렸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 이전으로 회귀 되는데요. 눈에 띄는 변화는 이런 거였어요. 갑자기 현장에 다시 쓰레기가 쌓이기 시작했어요. 매년 위령제를 지내던 데에 고철 더미, 폐가전제품이 산처럼 쌓이고, 거기 민간인 학살지라는 안내판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리고 지방자치단체에서 관심이 뚝 끊어진 거예요. 예산도 뚝 끊기고. 유해발굴도 과거로 다시 돌아간 거야, 아무 일도 없었던. 그러니까 이제 암담해지더라고요."
-심규상 기자, 오마이뉴스 대전충남 본부장
진실규명 결과를 발표한 후, 진실화해위원회는 해산돼. 원래부터 기한이 정해진 한시적 조직이었거든. 하지만 위원회가 사라지면서, 정말 무섭게도 모든 게 예전으로 돌아갔어. 아직도 발굴하지 못한 유해들이 많았는데, 정부의 유해발굴 작업도 중단됐어.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할까.
유족회는 2기 진실화해위원회를 위한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고, 민간차원의 유해발굴을 시작했어. 국가가 하지 않겠다면, 우리가 직접 하겠다는 거야. 2015년 골령골에 민간 유해발굴단이 다시 땅을 파기 시작해. 처음 유해를 발굴하고 다시 삽을 뜨기까지, 8년이란 세월이 걸린 거야. 그렇게 20구의 유해를 더 찾았어.
유족회는 다시 한번, 유해 발굴을 재개해 달라고 사정했어. 그리고 이듬해, 지금의 상황을 반전시킬 기회가 왔어. 2016년 정부에서,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피해자를 추모하는 평화공원을 세우기로 한 거야. 평화공원 후보지를 공모한다는 말을 들은 심 기자는 바로 준비에 들어갔어.
"골령골 문제의 해결은 평화공원밖에 없다. '진실화해위원회도 못한 것들을 해결할 수 있겠구나' 생각을 한 거예요. 그래서 바로 쫓아와서 TF팀을 구성합니다. 평화공원 유치 TF팀을."
-심규상 기자, 오마이뉴스 대전충남 본부장
평화공원을 만들려면 땅을 정비해야 하는데, 그때 유해발굴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거야. 이런 노력 끝에, 한국 전쟁에서 학살 당한 피해자를 추모하는 평화공원을 대전 골령골에 세우기로 결정됐어.
골령골 사건은 민간인 학살 가운데 단일 사건으로는 최대 규모야. 굉장히 상징적인 곳이지. 그러니 선정될 수 밖에. 진실화해위원회에서는 최소 1,800명 이상이 희생된 걸로 발표했어. 애드워드 중령의 보고서에 적힌 인원만 산정한 거야. 하지만 유족들은 최소 3,000명에서 최대 7,000명 이상이 희생된 걸로 보고 있어. 평화공원 건립이 결정되면서 골령골의 이름은 바뀌게 돼. 예전에는 '뼈 골'에 '산봉우리 령'을 썼다면, 이제는 '뼈 골'에 '영혼 령'으로. 이곳에서 돌아가신 분들의 영혼이 깃든 골짜기라는 뜻, 희생자를 추모하는 의미를 담은 거야.
이렇게 정부 차원의 유해발굴이 재개돼. 유해발굴단과 각지에서 모인 자원봉사자들도 힘을 보탰어. 유해가 대규모로 매장돼 있을 걸로 추정되는 1, 2지점도 마침내 발굴할 수 있게 됐어. 땅 주인의 동의를 얻었거든. 그리고 그곳에서 발굴이 시작되자 모두들 깜짝 놀라고 말았어.
땅을 파기 시작하자 셀 수 없는 많은 유해들이 쏟아져 나왔어. 2m 아래 땅 속에 묻혀있던 피해자들이 70년만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야.
평생 아버지가 행방불명인 줄 알고 살았던 남식 씨도 유해 발굴 현장을 찾았어.
"정말 처참합니다… 저 눈물 많이 흘리고 왔어요. 사람이 같이 살다가 죽기만 해도 아이고 아이고 그러면서 돌아가신 양반 좋은 데로 가라고 빌어주고 할 텐데, 찬 바람이 휭 부는 저 골짜기에 근 70년 동안을 돌보는 이 하나 없이 그거 어떻게 다 말로 할 수 있겠습니까. 거기 그 미 정보국에서 제공했다는 사진들 쳐다보니까, 피가 거꾸로 솟더라고."
-백남식(75세), 골령골 유족
발굴된 유해 중에는 여성으로 확인된 유해, 미성년자들의 유해들도 꽤 있었다고 해. 그렇게 2020년부터 3년동안 발굴한 유해가, 1,387구야. 그 이전에 발굴한 유해까지 합하면, 골령골에서 총 1,441구가 발굴된 거야. 1지점부터 8지점까지, 골짜기를 따라 1km나 되는 긴 매장지. 그래서 골령골은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이라고 불려.
▲ 남아있는 과제
골령골에서 발굴된 1,441구의 유해. 지금은 편히 안장됐을까? 아니, 유해는 아직 누울 곳을 찾지 못했어. 이 평화공원이 완공이 되면, 거기에 안장시킬 계획이었어. 그런데 2020년까지 건립하기로 했던 이 평화공원이 아직도 세워지지 않았어. 정부는 평화공원 준공을 2024년까지로 연기했어. 하지만, 올해가 얼마 남지 않은 지금까지도, 한 삽도 뜨지 못했다고 해.
그럼 유해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골령골에서 발굴된 유해들은 분류 작업을 거쳐 플라스틱 통에 담겼어. 어렵게 세상에 나왔지만, 그들의 시신은 아직도 이 땅에 제대로 묻히지 못했어. 지금까지 전국에서 발굴된 학살 피해자들의 유해는 모두 세종시 추모의 집에 임시 안치돼 있어.
"그 무슨, 통 속에다 넣어놨거든요 전부. 그거 쳐다보면 올라오더라고. 그걸 계속 볼 수가 없더라고요. 눈물 나서 못 보겠더라고요."
-백남식(75세), 골령골 유족
"내가 죽기 전에 이 공사가 마무리돼서, 우리 아버지 성함 석자, 명패에 올려놓고 눈 감는 게 소원이에요. 20일 전에도 우리 유족 한 분이 또 돌아가셨어요. 그걸 못 보고 돌아가실 것 같다고 다 그래요. 이게 누구의 잘잘못을 떠나서 국가의 비극 아니에요? 대한민국 역사에 대한 비극인데. 아버님 위패를 모셔놓고 모든 걸 내려놓으시고 편안히 영면하시라고 하고 싶어요. 나도… 그 공원을 완공하고 내가 죽는다면 이 세상에 다른 소원이 없어요."
-전미경(78세), 골령골 유족
"우리 생전에는 못 할 거 같아. 그거 공원 만드는 거 보고 죽어야 하는데, 못 보고 죽을 것 같아."
-강음모(92세), 골령골 유족
골령골에 묻힌 사람들을 찾는데 걸린 시간 57년이었어. 그리고 국가의 잘못이라고 밝혀지는 데 60년이 걸렸어. 올해로 74년이 지났지만, 유해들은 여전히 누울 곳을 찾지 못하고 있어. 유족들의 슬픔과 원한이 골을 이룬 그 곳에 평화공원이 세워지는 날. 더 이상 죽음의 골짜기가 아닌, 평화와 화해의 골짜기가 되지 않을까.
'꼬꼬무'가 이 사건을 취재하며, 이런 이야기를 들었어. '골령골은 빨갱이들을 처형한 곳'이라고. 그러니까 '거기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도 말라'고. 2024년 지금도 여전히 이념 전쟁은 계속되고 있는 지도 몰라. 서로 생각이 다르다고 편을 가르고 적대하는 것. 하지만 골령골 사건은 이념 문제가 아니라, 전쟁 범죄야. 그리고 이 사건으로 사과를 하거나 처벌을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어.
'골로 간다'는 말 들어봤지? 이 말이, 한국전쟁 때 생긴 말이라는 얘기가 있어. 수많은 민간인들이 골짜기로 끌려간 후 돌아오지 않았잖아. 그래서 '골로 간다'는 말은 죽는다는 의미로 쓰였다고. 이건 골령골에서만 벌어진 일은 아니야. 한국전쟁 당시, 전국 각지의 골짜기에서 이런 비극이 벌어졌어. 충북 청원 분터골, 충남 연기 비성골, 공주의 살구쟁이 골짜기, 경남 마산의 도둑골 등, 우리 민족이 겪은 슬프고 참혹한 역사야. 하지만 우리가 외면하고 모른 척 한다면, 그 진실 위에 다시 한번 흙을 덮는 것과 마찬가지 아닐까.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강선애 기자 sakang@sb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