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브스夜] '과몰입인생사2' 프레디 머큐리, "쇼는 계속 된다"…진정한 '딴따라'가 무엇인지 보여준 '천재 뮤지션'
[SBS연예뉴스 | 김효정 에디터] 쇼는 계속 된다, 영원한 별이 된 프레디 머큐리.
15일 방송된 SBS '과몰입 인생사 시즌2'(이하 '과몰입 인생사2')에서는 퀸의 프론트맨이자 리드보컬 프레디 머큐리의 인생에 과몰입했다.
이날 인생 텔러 배철수는 자신이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다면 이날 이곳으로 꼭 가보고 싶다고 했다. 그가 가고 싶다고 밝힌 순간은 1985년 7월 13일 영국의 웸블리 스타디움, 영국 최대의 공연 라이브 에이드 현장.
이 공연에서 퀸은 지금도 계속 회자되는 레전드 무대를 남겼고 공연 다음 날 신문 1면은 프레디 머큐리의 얼굴로 도배가 되었다.
그러나 퀸의 무대를 호평하는 기사들 사이 그룹 퀸이 곧 해산할 것이라는 이야기들도 나와 의아함을 자아냈다.
대체 그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퀸의 전신이었던 밴드 스마일. 스마일의 팬이었던 프레디 머큐리는 스마일의 리드 보컬이 팀을 탈퇴한 자리를 채우며 밴드 이름까지 퀸이라고 바꾸었다.
독특한 행동들 때문에 프레디 머큐리를 올드퀸이라는 별명으로 부르며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멤버들. 그러던 어느 날 한 멤버가 프레디 머큐리의 무대를 우연히 보게 되었고 떡잎부터 남달랐던 그의 무대 장악력에 매료되어 그를 밴드의 프론트맨으로 합류시켰다.
하지만 프레디 머큐리는 이국적이면서도 독특한 외모 때문에 별종 취급을 받았다. 또한 인도에 사는 페르시아계로 아프리카의 잔지바르에서 출생한 프레디 머큐리는 18세에 영국으로 이민했고 문화적 배경이 다양한 그에게 쏟아지는 시선은 따갑기만 했다.
긴 무명의 시간을 지나 첫 TV 출연을 하게 된 퀸. 그러나 이들은 립싱크를 부탁하는 방송국 측의 제안에 난감한 기색을 드러냈다. 하지만 프레디 머큐리는 진한 메이크업과 액세서리 등으로 자신과 멤버들을 스타일링을 해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로 했다.
독특한 비주얼을 단점이 아닌 무기로 삼아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프레디 머큐리. 퀸은 퍼포먼스만큼 뛰어난 음악성을 인정받아 영국 차트 2위까지 올랐고 그렇게 비주류에서 주류가 되었다.
그러나 불합리한 소속사의 처우에 반기를 든 프레디 머큐리. 음악적 성공을 했음에도 회사는 이들에게 제대로 된 정산을 해주지 않았다. 특히 회사 대표는 멤버들에게 쓰는 돈을 한 푼이라도 아끼려고 하면서 자신은 호의호식했고, 이를 목격한 프레디 머큐리는 계약 파기를 선언했다.
막대한 위약금을 지불하고 계약을 파기한 프레디와 멤버들. 이들은 대박 앨범을 만들기 위해 시골로 향했고, 이곳에서 전설적인 곡이 탄생했다. 그 곡은 바로 보헤미안 랩소디.
1975년에 발매된 이 곡은 우리나라에서는 1990년대까지 국내에서는 금지곡이라 들을 수 없었던 곡인데 오페라부터 하드록까지 다양한 장르들의 매시업 되어 발매 당시 평론가들의 혹독한 혹평을 들었다.
그러나 라디오 방송에서 곡이 공개된 이후 이 곡은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고 영국 전역을 뒤집으며 영국 싱글 차트 9주 연속 1위, 20세기 발표곡 중 가장 많이 스트리밍 된 곡이라는 대단한 기록을 남겼다.
영국 여왕만큼 유명해진 퀸의 전성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관객과의 소통을 중시했던 퀸은 공연장을 떼창으로 가득하게 만들었고 관객들이 춤까지 추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후 발매된 앨범의 누드 컨셉으로 여론은 나빠졌고, 이는 음악성 논란으로까지 번졌다. 거기에 프레디 머큐리의 성 정체성 논란까지 불거지며 여론은 악화되었다.
이에 프레디 머큐리는 이전과 달리 마초남 스타일로 완벽 변신했고, 로큰롤, 디스크 등 다양한 음악 장르를 섭렵하며 위기를 기회로 만들며 다시 정상에 올랐다.
대중적 인기를 완전히 회복한 퀸. 그러나 프레디 머큐리는 무대가 끝나면 외로움에 괴로워했다.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멤버들이 유일했지만 그들은 모두 가정을 꾸렸고, 이에 그는 더욱 외로워했던 것.
특히 성 정체성으로 혼란을 겪으며 오랜 시간 사귀었던 여자 친구와도 안정적인 관계를 이어가지 못하니 그는 점점 더 외로움에 고립되어 갔다. 그러면서 번아웃이 온 프레디 머큐리는 1년간 밴드 활동의 휴식기를 갖기로 했다.
그러나 1년의 휴식기 이후 찾는 곳이 없어진 퀸은 그렇게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사라져 갔다.
하지만 라이브 에이드 공연 한 달 전 퀸에게 섭외 전화가 걸려왔다. 당시 프로듀서는 퀸의 섭외에 대해 "원래는 리스트에 없었다. 기획자가 좋아하지 않았다 퀸을. 기획자는 그들이 이미 정점을 찍고 내려온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난 퀸의 필요성을 알았고 퀸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라고 당시를 떠올렸다.
프로듀서는 프레디 머큐리가 지친 군중들을 끌어올려줄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는 그의 예상대로 그렇게 했다. 그렇게 레전드 무대가 탄생한 것.
160여 개국에 동시 생중계된 라이브 에이드.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20분이었다. 사운드 체크도 리허설도 앙코르도 모두 금지된 라이브 공연에서 퀸은 속으로 칼을 갈며 맹연습을 했고 "라이브 에이드는 난장판이 될 것. 그렇게 만들 거야"라는 프레디의 이야기대로 그렇게 라이브 에이드의 관중들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퀸의 노래에 맞춰 7만 명이 함께 움직이는 모습은 마치 파도 같았고 이 공연 이후 퀸의 위상은 더욱 치솟았다. 퀸 하면 라이브 에이드 라이브 에이드하면 퀸이 되는 그런 레전드 무대를 남겼던 것.
하지만 여전히 해체설이 돌았고 무대에서 직접 해체설에 대해 밝힌 프레디 머큐리. 그는 "우리는 죽을 때까지 함께할 것"이라며 대규모 유럽투어까지 마쳤다. 26회 40만 명 관중 동원하며 제2의 전성기를 맞은 퀸.
그러나 얼마 후 그는 멤버들을 불러 모아 더 이상 함께하지 못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전했다. 에이즈에 감염되었던 것.
에이즈가 걸리면 하늘이 내린 천벌이다라는 생각이 일반적이던 당시 에이즈에 걸리면 문란한 사람이라는 낙인이 찍히고 부도덕한 죄인 취급을 하기도 했던 것. 이에 그는 멤버들에게도 병세를 숨겼지만 멤버들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그의 병을 감춰주었다.
프레디 머큐리는 죽는 날까지 음악을 하고 싶다는 자신의 소망을 밝혔고 이에 멤버들은 그를 위해 마지막 앨범이 될 수도 있는 앨범 작업에 매진했다.
라이브 에이드 무대 이후 불과 5년 만에 일어난 비극. 그는 최악의 몸 상태에도 불구하고 정신을 차리기 위해 보드카를 털어 넣고 노래를 녹음했다.
쇼는 계속된다는 노래를 하며 진정한 딴따라가 뭔지 보여준 프레디 머큐리. 그러나 그의 쇼는 계속되지 못했다.
앨범 작업 후 건강이 악화된 프레디는 전 세계 팬들과 친구들에게 진실을 밝혔다. 자신이 에이즈에 감염되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는 "부디 이 끔찍한 질병에 맞서 싸우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힘을 주시길"이라며 처음으로 무대가 아닌 무대 밖에서 직접 자신이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전했다.
성명 발표 후 다음 날, 프레디 머큐리는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퀸의 기타리스트이자 천문학자인 브라이언 메이는 그를 잊지 않기 위해 소행성에 프레디 머큐리의 이름을 붙였다.
그렇게 프레디 머큐리는 지금도 하늘에 떠 있는 별, 영원한 스타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