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혜의 논픽션] '거목' 이윤택에게 '반성의 의미'를 묻다

작성 2018.02.20 13:06 수정 2018.02.20 16:10
이윤택

[SBS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최근 그분이 종교를 통해 회개하고 구원을 받았다고 간증하고 다닌다고 들었는데 회개는 피해자들에게 직접 해야 한다는 말을 전해드리고 싶어요"

검찰 간부로부터 공개적인 장소에서 성추행을 당한 서지현 검사는 얼굴과 신분을 드러내고 끔찍한 사실을 폭로하기까지 8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그 사이 피해자인 서지현 검사는 인사상의 불이익까지 당해야 했다. 오랜 시간 오욕의 세월을 참고 견딘 서 검사에게 용기를 불어넣은 것은 가해자의 뻔뻔함이었다.

가해자로 지목된 안태근 전 검사는 뒤늦게 종교에 입문했다. 그리고 본인과 가족들이 고통을 겪었다는 사건 이후 종교를 통해 회개했다고 고백했다.

기독교계에서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고지론(그리스도인이 사회 각 영역에서 주도권을 행사하는 높은 자리에 올라가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주장)의 최정점에 선 사람으로서 예배시간 간증의 무대에도 섰다. 하지만 이 짧은 간증의 시간은 피해자에게 '사실을 말할 용기'를 줬다. 

서지현 검사의 용기 있는 고백은 사회 각 분야의 미투(성폭력 고발운동)캠페인으로 확산되는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권력의 추악한 민낯은 문화계에도 만연해있었다. '거장', '대부'라는 수식어로 불리는 예술가들의 위선적인 행동들이 '폭로'되기 시작했다.

이윤택

'연극계의 거목' 이윤택 감독이 수차례 여성 단원들을 성추행해온 사실이 밝혀졌다. 자신의 피로 회복을 이유로 단원들을 방으로 불러들여 성기 안마를 시켰고, 단원들의 발연 연습 명목으로 여성의 신체를 주물렀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곪을 대로 곪은 환부는 터져버리고 말았다. 성추행은 물론이고 성폭행에 따른 낙태까지 했다고 주장하는 피해자도 등장했다. 물론 잇따른 폭로의 사실관계는 법적으로 따져봐야 하고, 사실 여부에 따른 처벌 역시 엄중하게 이뤄져야 할 것이다. 

폭로와 파장이 확산되자 이윤택 감독은 돌연 연극계 은퇴를 선언했다. 그러나 은퇴나 퇴출로 해결될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윤택 감독은 지난 19일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그는 “법적 처벌을 포함해서 그 어떤 죄도 달게 받겠다.”면서 “피해자분들에게 진심으로 사죄를 드린다.”고 고개 숙였다.

반쪽짜리 사과였다. “미안하다”고 하면서 자신의 억울함을 피력했다. 행위는 인정하지만, 행위의 근거와 이유를 갖다 붙이는 식이었다.

이윤택은 “(성추행은) 극단 내에서 18년 가까이 진행된, 관행 관습적으로 생겨난 나쁜 행태라고 생각한다. 나쁜 죄인지 모르고 저질렀을 때도 있고 어떤 때는 죄의식에 있으면서도 더러운 욕망을 억제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윤택

'관행'이라는 말은 연극이라는 예술, 나아가 문화계에 대한 모독이다. 성을 매개로 한 착취를 '관행'이라고 여겨온 그의 사고방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것은 엄연한 인권 유린이다.   

최근 공연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퍼지고 있는 성폭행설에 대해서는 “사실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피해를 주장하는 여성이 “황토방과 여관방에서 두 차례 성폭력을 당했다.”고 주장한 것에 대해서 이윤택은 “성폭행은 아니었다.”고 반박했다.

피해를 주장한 여성은 성폭행 피해를 입은 이후에도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 대해 "저는 이미 연극과 학교까지 자퇴를 한 상태였으며, 연극을 할 수 있는 곳이 그곳 뿐 일거라는 어리석은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때의 저는 성폭행을 당하면 속옷 등의 증거만으로도 처벌을 받을 수 있는지조차도 모를 정도로 무지했습니다. 또한 당시 성폭행을 당했다고 신고를 하게 되면 피해자에게 비난이 쏟아지는 사회적 분위기를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라고 회상했다.

이후 피해자는 2차 성폭행을 당했다. 피해자는 "앞선 폭로 글에서 많은 분들이 왜 도망치지 않았냐고 심하게는 니가 원해서 가는 게 아니냐고 남긴 댓글을 보았습니다. 피해를 당해보지 않은 분들이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이런 일은 어...어... 하는 사이에 일어납니다.특히 나이가 어리고 사회 경험이 없을수록 대처하기가 힘든 게 사실입니다." 라고 당시의 심리적 고통을 토로했다.

이윤택은 여성 단원과의 성관계에 대해 인정하면서도 “강압이나 폭력에 의해 이뤄진 성관계가 아니었다. 성관계가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성폭행은 아니었다."고 해명했다. 

이윤택

그가 내세우고 싶었던 육체관계의 동기는 '남녀 간의 애정'을 말하는 것일까. 그 주장이 힘을 얻으려면 사실관계를 입증할만한 구체적인 설명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단순히 여성이 말과 행동으로 적극적 거부 의사를 밝히지 않았다고 해서 성폭력 상황을 '즐겼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길 바란다. 피해자에 따르면 단원들의 안마 거부는 '난리'나 '소동'으로 치부되는 문화 속에서 약속된 공연 스케줄이 축소되는 불이익도 당했다. 권력을 이용한 응징이 자행됐다는 의미다. 

이윤택 감독의 애매모호한 해명과 달리 피해자들은 구체적으로 성폭력이 권력 관계에 의한 강압적 행동이었음을 설명했다.

게다가 우연의 일치일지는 모르겠으나 성폭행 피해자들은 대부분 피해를 당한 후 극단을 옮기거나 연극계를 떠났다. 이 일관된 인과 관계에 대해서 이윤택 감독은 설명해야 한다.          

'연희단거리패'의 김소희 대표 역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김 대표는 "그것이 성폭력이라는 인식을 하지 못했다"면서 "이번 일이 용납이 안된다고 생각해 단원들과 논의 끝에 연희단거리패의 해체를 결정했다"고 밝혔다. 

우선 극단을 이끈 대표가 관련 상황을 알고서도 성폭력이라는 인식을 하지 못했다는 것은 '방조'에 가깝다. 게다가 같은 여성으로서 여성에게 가해지는 성폭력의 고통과 상처를 헤아리지 못했다는 것은 무책임하거나 어리석었다고밖에 볼 수 없다. 

 

이윤택

집단이 없어진다고 해서 피해자의 상처가 아무는 것이 아니다. 연희단거리패의 해체가 수년간 고통 속에 산 피해자들의 상처를 치유하는데 무슨 도움이 된다는 말인가. 

한 피해자는 "저는 그가 직접 진정성 있는 사과를 하며 자신이 가졌던 그 생각과 내뱉은 말을 철회하길 기다리고 있습니다."라는 말로 장문의 고백 글을 마무리했다.

이윤택의 기자회견은 이 글이 게재된 이후 열렸다. 그러나 피해자가 원했던 사과도 없었고, 철회하길 기다린다는 사고관의 변화도 없었다. 이윤택 감독이 생각하는 사과와 반성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그것의 정의와는 다른 것임에 틀림없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 '제2, 제3의 이윤택'에 대한 제보와 폭로가 이어지기 시작했다. 비단 연극계뿐만 아니라 영화계 등 문화계 전반으로 확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명성과 인기라는 견고한 성 아래 잠행하고 있던 권력의 추악한 민낯이 이제라도 드러났다는 것은 어쩌면 다행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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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혜 기자 ebada@sb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