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문라이트', 소년은 울지 않는다

작성 2017.02.10 09:58 수정 2017.02.10 09:58
문라이트

[SBS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후안(마허샬라 알리)은 리틀(알렉스 히버트)을 바닷물에 눕힌 채 말한다.

"달빛 속에선 흑인 아이들도 파랗게 보이지"

선문답 같은 말, 바다 위에 떠 있는 흑인 소년, 푸르른 햇빛…. 이 고요와 평화의 순간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문라이트'(감독 배리 젠킨스)는 한 소년의 이야기로 시작해 한 어른의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약 15년에 가까운 세월을 관통하는 영화는 한 소년이 자신의 내·외적 정체성을 확립하고 '나'로 성장해 나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영화는 '리틀', '샤이론', '블랙' 세 개의 장으로 구성돼 있다. 챕터에 따라 각기 다른 인물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예상하겠지만, 이들은 한 인물이다. 각 장은 인물의 내,외적 변화에 따라 제목을 달았다. 리틀은 곧 샤이론이고, 샤이론은 블랙이 된다.

리틀은 키도 작고 왜소한 데다 수줍음이 많아 학교에서 왕따를 당한다. 엄마는 마약에 찌들어 있어 아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다. 아이의 삶은 외롭고 고단하다.

어느 날 동네에서 마약상 후안을 만난다. 후안은 리틀을 아빠처럼 보듬는다. 리틀은 후안 부부에게서 엄마에게 느끼지 못한 따스한 온기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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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뼘 더 자란 샤이론의 삶은 더 고통스럽다. 학교 폭력에 시달리며 힘겨운 나날을 보낸다. 그때 케빈이 손길을 내민다. 그러나 뜻밖의 사건으로 두 사람은 멀어진다.

몇 년의 시간이 흐르고 샤이론은 블랙이란 이름으로 불린다. 더는 맞고 다니거나 불쌍하게 살아가지 않는다. 어느 날 케빈에게서 한 통의 전화를 받고 두 사람은 수년 만에 재회한다.

알렉스 히버트, 애쉬튼 샌더스, 트래반트 로즈가 한 인물의 각기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한 사람의 얼굴인 것처럼 보이는 포스터도 영화를 보고 나면 세 인물의 얼굴을 합쳐 완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한 배역을 세 배우가 연기해야 했던 건 성장의 시기에 따라 변화한 인물의 내,외면을 효과적으로 보여주기 위함이다.

소년은 남자가 되었고, 뼈밖에 없던 몸엔 근육도 붙었다. 시간의 경과와 함께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고, 본 적 없는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근육으로 뒤덮인 육체 안엔 그 때의 소년이 남아 있다.

영화는 인물의 외형 변화와 내면의 순정을 보여주며 보는 이에게 뭉클한 감동을 선사한다. 사건을 극적으로 연출하거나 감정을 격하게 토해내지 않는다. 인물들은 일상을 덤덤하게 살아가고, 삶의 순간 순간 찾아오는 파장에 충실히 반응할 뿐이다.

'문라이트'는 할리우드 주류 영화가 정면으로 다루지 않았던 흑인, 소수자의 이야기를 사려 깊은 시선으로 다룬다. 리틀, 샤이론, 블랙은 흑인, 성소수자, 가난, 마약, 폭력 등 많은 혼란과 가치 판단을 야기하는 상황에 놓인다. 인물이 지고 가는 삶의 무게는 보는 이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지며 감정의 파동을 일으킨다. 그렇다고 해서 영화의 시선이 이들의 삶에 깊숙이 침투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인물을 따라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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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선과 악, 최선과 차선 등의 이분법적으로 경계 짓거나 인물을 도덕적 관점으로 응시하지 않는다. 범법자인 후안이 리틀에겐 키다리 아저씨 같은 존재가 되고, 가장 외로운 순간에 경이로운 쾌락을 선사한 존재는 여성이 아닌 남성이다.

그 순간 순간을 영화는 꼼꼼하고 차분하게 그리며 인물의 감정 상태를 공유하게끔 한다. 누구나 자신의 삶에선 주인공이 될 자격이 있고, 나의 선택으로 행위와 감정을 취할 수 있음을 영화는 매우 자연스럽게 묘사한다.

미국 마이애미는 흑인 비율이 높은 곳이다. 영화의 배경인 리버티 시티는 마이애미의 대표적인 흑인 주거지다. 촬영 감독인 제임스 랙스톤은 "마이애미는 수천 개의 세상이 충돌하는 곳 같다. 카리브 해와 쿠바 문화가 남미의 전통과 하나로 어우러져 있고, 부유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이 한 공간을 나누어 쓰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곳에서 흑인은 다수를 이루지만 미국 사회 전체에선 소수다. 여전히 비주류의 차별과 편견 속에 살아가고 있다. 영화는 흑인 그리고 LGBT(성소수자)인 한 남자의 성장기를 통해 더블 마이너리티(Double minority) 즉, 소수자의 소수자에 관한 의미 있는 이야기를 전한다.

문라이트

영화의 연출은 신예 배리 젠킨스가 맡았다. 인물에 대한 애정과 만드는 사람의 온기가 고스란히 전해지는 섬세한 연출력을 보여줬다.

이 영화를 두고 한 편의 시 같다고 하는 것은 인물을 유유히 따라가는 카메라와 분위기를 잔잔히 고조시키는 음악, 감정의 희비를 담은 조명 등 영화의 각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결합해 눈에 보이지 않은 감정을 시·청각화하기 때문이다. 감정의 세포를 알알이 깨운다는 느낌을 공유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직접 겪고 느낀 작가와 감독만이 알 수 있는 세계에 대한 사려 깊은 묘사와 묵직한 진심이 영화를 아름답게 했다.

2008년 '멜랑콜리의 묘약'(국내 미개봉작)으로 데뷔한 배리 젠킨스는 두 번째 영화 '문라이트'로 제89회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 감독상 등 8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 '화이트 오스카'로 불리는 백인 중심 시상식에서 실력으로 차별의 벽을 넘었고, 주요 부문 수상을 노린다.

영화 말미 블랙은 가슴 벅차오르는 고백을 한다. 오랫동안 가슴에 품어온 그 말 한마디가 곧 '문라이트'다.

'문라이트'는 문자 그대로의 월광(月光)보다는 암중방광(暗中放光)의 의미로 보는 것이 적합할 것이다. 어둠 속의 한 줄기 빛, 배리 젠킨스가 보여주고자 한 그 빛은 결국 사랑이었다. 상영시간 111분, 15세 이상 관람가, 개봉 2월 22일.

ebada@sbs.co.kr

김지혜 기자 ebada@sb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