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토)

방송 프로그램 리뷰

[스브스夜] '꼬꼬무' 1987, 종철이와 비둘기들…수많은 용기와 기적이 만들어낸 '민주주의'

김효정 에디터 작성 2022.03.25 03:23 수정 2022.03.25 11:30 조회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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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SBS연예뉴스 | 김효정 에디터] 우리가 당연히 여기고 있는 것들은 수많은 기적과 용기들이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

24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에서는 '1987, 종철이와 비둘기들'에서는 세상 밖으로 진실을 알린 비둘기들의 이야기가 공개됐다.

오늘의 이야기는 역대급 계주에 관련된 이야기. 바통을 전달하기 위해 6개월간 수십 명이 달린 이 이야기의 시작은 1987년 1월 15일로 거슬러 올라갔다.

긴 계주의 첫 주자는 신성호 기자. 이날 대검찰청의 간부 방을 찾은 신 기자는 이 과장에게서 경찰이 큰일 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다. 이에 신 기자는 기지를 발휘했고 서울대생과 경찰이 관련된 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또한 그는 이 과장으로부터 "경찰이 어떻게 했길래 사람이 다 죽어"라는 말을 듣고 이 사건이 예삿일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한다. 애써 태연한 척하던 신 기자는 이 과장에게서 더 이상 나올 이야기가 없다는 것을 알고 다른 검사를 찾아 파고들었다. 이에 그는 박 씨 성의 이름에 종 자가 들어가는 서울대생이 경찰 조사를 받던 중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고 사망한 학생이 누군지 수소문을 해 알게 된다.

그리고 다음 날 신 기자는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 박종철 군이 경찰의 조사 도중 사망했다는 소식을 보도한다. 이 특종 보도에 다른 언론사들을 발칵 뒤집힌다. 그리고 동아일보 윤상감 기자는 이 사건을 더 자세히 알기 위해 취재를 시작하고 그러던 중 종철군의 사망을 목격한 목격자 오연상 의사를 찾아낸다.

윤 기자는 경찰들의 취재 방해에도 재치를 발휘하며 오연상 의사를 만났고 그에게 매달리며 솔직하게 말해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고민에 빠진 오연상 의사. 그는 사실 하루 전 경찰의 전화를 받고 국제 해양연구소로 달려갔다. 하지만 이 건물의 정체는 남영동 대공분실.

공포 영화에 나오는 분위기의 건물에 들어선 오연상 의사는 한 방에서 침대 위 팬티만 입고 누워있는 박종철 군을 발견했다. 경찰은 반드시 살려야 한다고 했으나 당시 이미 종철 군에게서는 사망 징후가 뚜렷하게 드러났다. 하지만 오연상 의사는 심폐소생술을 시도하며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손 쓰기에는 너무 늦은 상황.

이에 경찰들은 크게 당황했다. 그리고 오연상 의사는 방 한쪽에 놓인 작은 욕조를 발견했고, 그 방에서 물과 관련된 사건이 있었음을 추측했다. 그런데 이때 경찰은 오연상 의사에게 종철 군을 급히 응급실로 옮기라고 했다.

하지만 오연상 의사는 선뜻 그러지 못했다. 응급실로 옮기는 즉시 종철 군의 사망 장소는 중앙대 용산병원 응급실이 되고 사인도 불명확해지며 그 전의 일이 모두 사라지는 것. 이대로라면 사건의 진상이 덮일 수 있다는 생각에 오연상 의사는 기지를 발휘했다. 급히 병원에 연락을 해 이미 사망한 종철 군의 응급실 입성을 막아야 한다고 부탁했다.

이에 응급실의 의사들은 시신을 응급실로 못 들어가게 온 몸으로 막았고, 그렇게 영안실로 옮겨진 시신에 대해 오연상 의사는 사체 검안서를 작성했다. 모든 항목에 미상이라 기입한 오연상 의사. 이는 그가 남긴 암호였다.

사인이 미상이 되면 변사가 되어 부검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에 일부러 이렇게 했던 것. 이에 경찰은 마음이 더 급해졌다. 시신을 화장해 증거를 은폐하려는 경찰은 급히 종철 군의 가족들을 만나 화장 동의를 얻는다.

특히 경찰은 종철군의 아버지와 형을 불러 그가 죽는 이유에 대해 "탁자를 쾅 내리쳤더니 고꾸라졌다. 그게 다였다"라며 심장마비가 사인이라 주장했다. 이를 믿을 수 없는 종철군의 아버지는 아들을 내놓으라고 했고, 경찰은 각서에 도장을 찍으면 아들을 보여주겠다며 강제로 각서에 지장을 찍게 했다.

억지로 아버지가 지장을 찍은 각서의 내용은 이러했다. "아들 사망과 관련하여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지 않겠으며 민형사상 소송 제기치 않겠음". 또한 희망 위로금을 쓰게 한 공란도 있었다.

아들을 만나기 위해 이를 허락한 가족들이 경찰 병원에 도착하자 가족도 없이 이미 빈소가 마련되어 장례가 진행 중이었다. 일사천리로 화장까지 진행하려는 경찰. 그런데 이번에는 검찰이 브레이크를 걸었다. 사인 미상으로 인해 국과수에 부검을 지시한 것.

이에 황적준 국과수 부검의는 부검을 통해 종철 군이 심장마비가 아닌 다른 이유로 사망했다고 밝혔다. 겉은 멀쩡해 보이는 종철 군의 사체의 속은 온통 멍 자국이었고, 그의 폐에서는 플랑크톤이 검출되어 익사 가능성까지 있었던 것. 하지만 진짜 사인은 익사가 아닌 경부 압박에 의한 질식사. 욕조 턱에 목이 눌려 사망한 것으로 추정됐다.

경찰은 부검을 마친 황 박사를 치안본부로 데려가 심장마비로 사인을 바꾸라 종용했다. 안 된다고 버티는 황 박사에 경찰은 모든 것이 "경찰 조직과 국가를 위한 일이다"라고 부추겼고, 황 박사는 괴로워했다. 하지만 그는 집으로 돌아가 잠든 아이들을 보고 누군가의 아들이었던 종철 군을 위해 사실을 밝히기로 결정했다.

부검 결과가 밝혀지고 경찰은 곧바로 범인인 경관 2명을 체포했다. 강경사와 조반장은 "박 군이 진술을 거부해 실수로 벌어진 일이다"라며 자신들의 범행을 시인했다. 하지만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사실 체포된 범인들은 진짜 범인이 아니었다. 이들은 꼬리 자르기의 희생양이었던 것. 희생의 조건으로 받은 것은 1억 원. 하지만 이들은 당시 사회 분위기에 평생 감옥살이를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로 했다.

기자 출신의 재야 운동가 이부영은 이들로부터 진실을 들었고, 이 진실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비둘기를 이용하기로 했다. 이부영은 당시 교도관이었던 한재동 교도관에게 대화하는 척하며 옷소매에 편지를 밀어 넣었다. 그리고 이를 한재동 교도관은 목숨을 걸고 재야의 비밀병기인 우촌 김정남에게 전달할 계획을 세웠다.

이에 한재동 교도관은 우촌과 선이 닿을 수 있는 교도관 출신의 전병용을 만났고, 그에게 비둘기를 전달했다. 전 씨는 우촌의 연락을 기다렸고, 보름간의 기다림 끝에 우촌과 연락이 닿아 가까스로 비둘기를 전달했다.

우촌은 비둘기를 열어보고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그는 7,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성지였던 명동 성당을 통해 비둘기를 세상 밖으로 전달하기로 했다. 앞서 김수환 추기경은 "내 아들 내 제자 내 젊은이 내 국민의 한 사람인 박종철은 어디 있는가"라며 박종철군의 추도 미사를 올리며 그의 죽음에 침묵하지 말자고 목소리를 냈던 것.

이에 우촌은 명동 성당의 신부님에게 비둘기를 전달했다. 그런데 그때쯤 충격적인 뉴스가 전해졌다. 당시 대통령 전두환은 직선제를 외치는 국민들의 의견에 반하는 4.13 호헌 조치를 내렸다. 이에 국민들은 분노하며 거리로 나왔고, 우촌은 다시 한번 신부님에게 비둘기를 전달하며 "이 나라의 운명이 신부님들의 어깨에 달려있다"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87년 5월 18일, 명동 성당에서는 광주 민주항쟁 추도 미사가 열렸다. 그리고 미사 말미 김승훈 신부는 문서 하나를 낭독했다. 박종철 열사 치사 사건은 조작되었다는 것. 각본은 경찰의 의하여 짜여지고 검찰은 위와 같은 사건 조작의 내용을 알고 있으면서도 묵인하였으며 이 사건 및 범인의 조작 책임은 현 정권 전체에 있다라며 "거짓으로 점철된 이 땅, 박종철의 죽음마저 거짓으로 묻히게 할 수 없기 때문에 고문 범인들은 처벌되어야 하며 고문 진상은 밝혀져야 한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게 진실의 비둘기는 세상 밖으로 날아갔고, 민심은 폭발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충격적인 사건. 시위 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머리를 맞고 사망한 이한열 열사. 이에 국민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어지고 남녀노소 모두가 한 마음으로 "종철이를 살려내라, 한열이를 살려내라"라고 외쳤다. 87년 6월 항쟁에는 매일매일 100만 명이 넘는 국민들이 밖으로 나와 독재에 맞서 싸웠다.

그리고 6월 29일 당시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는 직선제를 하겠다고 밝혔다. 국민의 손으로 드디어 민주주의를 이뤄낸 것. 이는 박종철 군이 숨지고 6개월 후의 일이었다.

6.29 선언 다음날은 박종철군의 아버지 정년 퇴직일이었다. 부산 수도국의 말단 공무원이었던 그는 일평생 나라를 위해 나라를 믿으며 일했다. 하지만 그는 아들의 사망 후 더 이상 나라를 믿을 수 없었다.

대학 진학 후 학업과 담을 쌓은 박종철 군은 전태일 평전을 끼고 살았다. 근로 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쳤던 전태일은 근로 기준법을 읽고 싶어서 단 한 명의 대학생 친구라도 있었으면 하고 바랐다. 그리고 이 일을 마음 아파했던 종철 군은 학생 운동에 뛰어들었다. 전태일의 대학생 친구가 되고 싶었던 그의 마음을 아들이 떠나고 나서 알게 된 아버지.

그날부터 그는 아들을 가슴에 품고 억울한 이들 앞에 섰다. 전태일의 바통을 이어받은 박종철 군, 그리고 그의 바통을 그의 아버지가 이어받은 것.

2018년 7월 막내아들 곁으로 간 아버지는 아들 곁으로 가기 전까지도 아들의 뜻을 이어갔다. 이제는 나란히 함께하고 있는 부자의 묘지 앞에는 전태일 열사의 묘지가 자리하고 있어 눈길을 끌었다.

아들의 바통을 이어받았던 아버지, 아버지가 떠난 지금은 박종철군의 형이 이어받았고 그날의 이어달리기는 오늘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다.

수많은 용기가 만들어낸 민주화, 그리고 그 많은 용기들이 모인 것은 기적 그 자체였다. 이제는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투표의 권리는 우리 선배들이 만들어낸 것. 이에 이 권리를 더욱더 소중하게 여기고 제대로 행사하는 것이 의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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