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연예뉴스 | 김효정 에디터] 시대를 앞서간 모던걸 나혜석은 그저 사람이 되고 싶었다.
30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는 '세기의 이혼 스캔들 - 인형이 되기를 거부한 모던걸'이라는 부제로 시대를 앞서간 모던걸 나혜석을 조명했다.
1920년 4월 경성에서는 한 신랑 신부가 신문에 공개 청첩장을 냈다. 신랑은 초 엘리트 변호사에 신부는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특히 신부가 신랑에게 내 건 결혼 조건이 화제를 모았다.
신부가 내건 결혼 조건은 첫 번째 축첩을 반대하며 자신만을 사랑할 것, 두 번째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말 것, 세 번째 시어머니와 따로 살 것, 마지막으로 신혼여행은 본인이 원하는 장소로 떠나는 것이었다.
신랑은 신부가 내 건 조건을 모두 승낙했고 신부의 손에 이끌려 신혼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신랑은 신혼여행지를 보고 크게 놀랐다. 신혼여행지는 바로 잡초가 무성하게 자란 무덤 앞이었던 것.
이에 신부는 "이곳은 제 첫사랑의 무덤이다"라며 "이곳에 과거는 모두 묻고 당신과 새 출발 하고 싶다"라고 했다. 그러자 신랑은 초라한 무덤에 비석까지 세워주기로 약속해 눈길을 끌었다.
당시 여자의 과거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나 신부는 자신의 과거를 스스로 밝혔고, 신랑은 그것을 쿨하게 받아들였던 것.
이런 파격 행보를 보인 신부는 바로 당대 최고의 엄친딸이자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 일거수일투족이 신문에 실리는 스타 중 스타, 셀럽 중 셀럽이었다.
결혼 후 임신하게 된 나혜석은 남편에게 일본에게 떠나겠다고 밝혔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 그림에 매진해보고 싶다는 것. 이에 남편도 흔쾌히 허락했고 나혜석은 일본으로 건너가 작품 활동에 매진했다. 그리고 여성 서양화가로서 국내 최초의 전시회를 열었고, 이 전시회는 초대박을 터뜨렸다.
그의 그림 한 점은 조선인 순사의 연봉 값 보다 높았고, 나혜석은 순식간에 재능 있는 화가로 급부상했다.
출산일이 다가오자 나혜석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작명이었다. 고등학교 때 개명을 하기 전까지 이름이 없었던 나혜석은 아이를 위해 가장 먼저 이름을 지었던 것이다. 당시 집에서 혜석을 부르는 이름은 아기, 그의 동생은 간난이었다. 언년이라는 이름과 함께 여성들에게 흔히 붙여진 이름. 특히 언년이는 어긋난 여자, 아들인 줄 알았는데 딸이 나와서 기대에 어긋났다는 의미에서 언년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썰이 있던 것으로 알려져 충격을 안겼다.
혜석이 지은 첫째 아기의 이름은 남편의 성과 자신의 성에 기쁨 열을 붙여 김나열이라 불렀다. 현재에도 쉽지 않은 부모 성 함께 쓰기를 100년 전에 이미 혜석이 했었던 것.
그 후 혜석은 출산을 했고, 육아 전쟁이 시작됐다. 육아는 모두 엄마의 몫이었던 당시, 혜석은 자신의 심정을 글로 써서 잡지에 실었다. "자식이란 모체의 살점을 떼어가는 악마" 등의 파격적인 감상은 세간에 논란이 되었고 이는 혜석을 향한 비난으로 이어졌다.
이에 한 남성은 그의 글에 "임신은 여성의 여성의 거룩한 천직이며 여성의 존귀가 여기 있고 여성이 인류를 향하여 이행하는 최대 의무의 한 가지인 것을 자각하여야 할 것이다"라는 반박문을 썼다. 그러자 혜석은 재반박문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일련의 사건들을 거치며 혜석에게 붙은 별명이 있었다. 이는 바로 트러블 메이커.
얼마 후 나혜석은 일본 고위 관리직이었던 남편을 따라 만주로 떠났고, 경성에서는 그에 대한 관심이 줄었고, 소식도 뜸해졌다. 하지만 만주에서도 파격 행보는 계속되었다.
그는 남편의 신분을 이용해 독립 운동가들의 독립운동을 도왔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이 셋을 낳고 작품 활동도 열심히 하다가 1929년 다시 경성으로 돌아왔다.
경성으로 돌아온 혜석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잡지사와의 인터뷰였다. 그리고 그는 인터뷰를 통해 유럽에서 보았다며 혼전 동거를 주장해 또 한 번 경성이 발칵 뒤집히게 만들었다.
혼전순결을 목숨처럼 여기던 시절, 나혜석은 더 이상 트러블 메이커가 아닌 이단아가 되었다. 그런데 나혜석은 왜 이런 인터뷰를 한 것일까?
경성으로 돌아오기 전 우리나라 여성 최초 세계 일주를 했던 혜석은 남편과 함께 무려 1년 9개월의 대장정을 떠났다. 그런데 여행 직후 그의 남편이 나혜석의 외도를 이유로 이혼을 선언했다.
나혜석은 세계 일주 중 남편이 법 공부를 위해 독일로 잠시 떠난 사이 파리에 남아 그림 공부에 매진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으로 활동하다가 훗날 친일로 변절한 최린과 우연히 만나 외도를 했던 것.
이 사실은 유학생들 사이에 소문이 났고,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남편 귀에도 들어간 것이었다. 남편의 이혼 요구에 혜석은 반대했다. 그러나 남편은 끝까지 반대하면 간통죄로 고소하겠다며 요지부동. 사실 이 무렵에는 남편에게도 여자가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당시 간통죄는 여성에게만 적용되었던 시대에 살고 있던 혜석은 결혼 11년 만에 위자료 한 푼 받지 못하고 쫓겨났고, 양육권마저 빼앗겼다.
이후 살길이 막막해진 혜석은 미술 학사를 열었다. 화가로서 명성은 여전했기에 많은 학생들이 그를 찾아왔다. 그러나 며칠 안되어 학생들이 줄줄이 수업을 취소했다. 세간에서는 혜석을 화냥년, 즉 정조를 빼앗긴 여자로 여기며 손가락질을 했던 것.
이후 미술 학사의 문도 닫은 나혜석은 자신과 외도를 했던 최린에게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했다. 정조를 빼앗긴 혜석은 온갖 수모를 겪으며 손가락질당했지만 그의 정조를 빼앗은 최린에 대해서는 처벌은 고사하고 그는 장관급으로 승진까지 하며 아무런 타격이 없었던 것이었다. 이에 혜석은 그에게 정조 유린 죄로 고소했다.
그러나 최린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혜석은 유일하게 자신을 아껴주던 친오빠의 외면까지 받는 상황을 맞이했다. 당시 나혜석은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닌 오직 취미, 각자가 선택하는 것이라는 주장을 했다. 그러나 당시 시대는 여성의 정조는 생명이라 여겼기에 나혜석을 향한 비난은 멈출 줄을 몰랐다.
욕먹을 것을 당연히 알았음에도 목소리를 높였던 나혜석은 자신이 욕을 먹더라도 후대의 여성들을 위해 변화가 일어나길 바랐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는 철저하게 외톨이가 되었다.
이후 모든 것을 잃고 그림만 남은 나혜석, 하지만 불의의 화재 사고로 10여 점의 그림만이 남고 대부분의 그림은 모두 재로 변했다. 그 후에도 나혜석의 악재는 계속됐다.
파킨슨병에 걸려 화가로서의 생명은 끝이 났고, 한 번이라도 보길 바랐던 큰아들의 사망 소식은 그를 더욱 힘들게 했다. 병환이 점점 깊어지며 거동조차 불편해진 나혜석, 그는 1944년 10월 21일 61살 심영 덕이라는 이름으로 양로원에 입원했다. 이름을 그토록 중요하게 여겼던 그는 소중한 이름마저 잃어버렸던 것.
이후 그는 이름을 나고 근으로 고쳤고, 1949년 1월 31일 행방불명됐다는 기록만이 남았을 뿐 그 이후 그를 본 사람은 더 이상 없었다.
마지막으로 방송에서는 그가 썼던 '노라'라는 시를 공개했다. 인형이 아닌 사람이 되고 싶었던, 아버지의 남편의 그리고 자식의 무언가가 아닌 온전한 한 사람이길 바랐던 나혜석의 노래는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했다.
정성호는 "당시 혜석을 바라보는 시선은 곱지 않았을 거다. 먹고살기 힘드니까 신경 쓸 사람이 몇이나 있었을까"라며 "난 이 사람이 훌륭하다, 멋지다가 아니라 그는 했잖아, (행동을) 했잖아"라고 몸소 무언가 행한 나혜석을 다시 한번 새겼다.
또한 이현이는 "그의 행동으로 인해서 여성들이 한 번쯤 더 생각하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그런 작고 작은 인식 개선이 있었기에 그것이 후에 큰 변화의 씨앗이 되었을 것이다"라고 생각을 전했다. 그리고 전미도는 나혜석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며 진정한 신여성이라 추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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